메리 스튜어트

역대 스코틀랜드 국왕
스튜어트 왕조스튜어트 왕조스튜어트 왕조
제임스 5세메리 1세제임스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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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스코틀랜드여왕. 한 때 프랑스왕비이기도 했다. 보통 메리 스튜어트라고 불리지만 국왕으로서 그녀를 가리킬 땐 '메리 1세' 쪽이 공식이라고 한다. 물론 스코틀랜드 기준이다.

2 유년기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1512~1542)와 프랑수아 1세 치하에서 유력 귀족으로서 성장했던 로렌[2] 가문의 분가 기즈 가문[3] 출신인 마리 드 기즈(1515~1560)의 2남 1녀 중 막내이자 고명딸로 1542년 12월 8일에 린리스고 궁에서 태어났다.

사실 마리는 메리를 낳기 전에 이미 두 아들을 낳은 바 있으나 차남 로버트는 생후 이틀만에 숨졌고, 그로부터 불과 이틀 뒤에 막 돌이 지난 장남 제임스 왕세자 역시 요절했다. 이렇게 적법한 왕위계승권자가 갑자기 모두 없어지는 바람에 제임스 5세와 마리는 상심할 틈도 없이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슬러 후사를 갖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그 결실이 메리였다.

메리가 태어나던 당시에 제임스 5세는 친잉글랜드파(프로테스탄트)와 친프랑스파(가톨릭)로 나뉜 귀족들이 끊임없이 벌이고 있는 내전과 잉글랜드와의 잦은 전쟁으로 완전히 지쳐 병상에 있었다. 솔웨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가 개박살나고 이에 대한 충격으로 병상에 누워 죽음을 앞둔 그는 이 혼란스러운 시국에 아들이 아닌 딸이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실망하여 "우리 왕조는 어린 딸[4]과 함께 시작해서 어린 딸로 망하리라."라고 한탄했다.[5]

그해 12월 14일, 즉 생후 6일 만에 부왕인 제임스 5세[6]가 향년 30세를 일기로 병으로 사망하자 메리는 그의 유일한 적자녀로서 왕위에 올랐다.[7] 제임스 5세이 전투에서 사망하고 화약 조건으로 당시 잉글랜드 왕이었던 헨리 8세는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메리를 결혼시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통합시키려 했다. 실제로 혼인 협정이 성사됐는데 헨리 8세는 그걸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메리를 잉글랜드에서 양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섭정 대비 마리 드 기즈는 자신의 친정 프랑스에 당연히 기운 사람이므로 혼인 조약같은건 지킬 의사가 전혀 없었고 프랑스에 함대를 요청하여 메리를 프랑스 궁정으로 보낸다. 그러다 1547년에 마리는 스코틀랜드 내의 다른 가톨릭 세력과 논의한 끝에 프랑스 왕세자인 프랑수아와 메리의 혼인 협정을 맺고, 1548년에 6세인 메리를 자신의 고국인 프랑스로 보내 프랑스 왕실에서 양육하게 한 뒤 자신은 스코틀랜드에 남아 섭정을 했다.

3 프랑스의 왕비

메리는 프랑스 왕실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자신의 지적, 예술적 재능을 발휘했다. 우아한 매력을 지닌 그녀를 왕세자인 약혼자 프랑수아 2세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족 대부분과 궁정에 출입하는 예술가들 모두 사랑하여 찬미했다고. 16세 때 프랑수아와 결혼해 왕세자비가 됐고, 앙리 2세가 1559년에 사망하여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하자 마침내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시어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처음에는 똑똑하고 예쁜 맏며느리를 매우 총애해서 자신이 시집올 때 예물로 가져왔던 당대에 가장 비싼 진주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메리는 벼락출세한 메디치 가문 출신인 카트린을 시종일관 무시했으며, 급기야 여러 사람 앞에서 카트린을 "피렌체 출신의 장사꾼"이라고 지칭해 결국 시어머니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이 고부갈등 때문에 메리는 나중에 반란군에게 패해 망명해야만 했을 때 어머니의 고국이었던 프랑스로 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됐는데 이 역시 메리 스튜어트의 자제력이 부족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메리가 장신에 건강한 미인인 반면에 그녀의 남편인 프랑수아 2세는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는 왜소하고 매우 병약한 남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는 사실상 소꿉친구나 다름 없었던 프랑수아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이들 부부는 금실이 매우 좋았다. 그리고 이는 그녀의 외가였던 기즈 가문의 세력이 강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덕분에 일시적으로나마 기즈 가문의 세력이 카트린을 능가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 역시 카트린이 메리를 곱게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즉위 1년 6개월 만에 프랑수아 2세가 요절한데다 프랑수아 2세가 워낙 허약한 탓에 16세에 죽어 후사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8] 메리는 사별하면서 프랑스 왕실에 연고가 끊어지게 됐다. 프랑수아 2세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10세에 불과했던 시동생 샤를 9세가 즉위하게 되면서 카트린이 섭정을 하게 되자 메리는 자신을 곱게 보지 못하는 카트린에 의해 깡촌인 스코틀랜드로 쫓겨나듯이 돌아갔다. 기즈 가문의 친척들이 몇몇 새 남편 후보를 추천했지만 메리가 프랑스에 남을 것을 우려한 카트린이 나서서 전부 무산시켰다.

다만 무작정 쫒겨났다고는 볼 수 없다. 그녀는 그 전에 이미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는데 일국의 군주가 타국의 궁전에서 통치를 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딸을 대신해 섭정하던 마리 드 기즈도 1560년에 숨졌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모든 신료들은 메리의 귀환을 요청하고 있는 상태였다.

4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가 프랑스 궁정에서 투닥거리고 있을 동안 메리가 명목상 여왕인 본국 스코틀랜드는 내전에 휩싸이고 있었다.


이 당시 스코틀랜드는 종교개혁 덕분에 내전 상태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 전역에서 종교개혁 열풍이 불고 있었으므로 스코틀랜드에도 개혁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러나 메리가 프랑스 궁정서 클 동안 섭정이던 어머니 마리 드 기즈는 역시나 프랑스 사람이고 골수 가톨릭이 었기 때문에 두 세력간의 충돌은 빈번했고 초기에는 권력을 쥔 마리 기즈가 여러번 존 녹스를 위시한 개신교 세력을 털었으나 중도에 비튼 추기경이 사망하고, 기즈도 그닥 유능한 인물도 아니었기에 점점 가톨릭 세력은 밀려나고 녹스와 녹스를 후원한 개신교 귀족, 사제들의 세력이 더 커져가고 있었다. 이 때 메리가 스코틀랜드에 온 것이었다.1559년 존 녹스가 스위스에서 귀국하여 대륙의 개혁신학을 전파했는데 잉글랜드의 위에서의 종교 개혁과 다른 형태였다. 당시 스코틀랜드를 통치한것은 메리의 모후 마리 드 기즈였는데 기즈 가문은 프랑스 왕실에서도 경악할 정도로 골수 가톨릭이었고, 그 영향을 받아서 섭정 대비 마리 드 기즈도 역시 가톨릭 성향이었다. 마침 존 녹스가 스위스에서 돌아와 잉글랜드와 가까운 로우랜드에서 개혁신학을 가르치고 나섰고 이에 찬성한 귀족들과 사제들이 점점 늘어나며 기존 스코틀랜드 가톨릭 교회를 수호하려는 기즈 대비와 비튼 추기경, 제임스 해밀턴이 박해에 나서자 내전상태나 다름 없었다.

이 것은 종교적으로도 갈등이 있었지만 정치적 갈등도 내포하고 있었다. 이미 헨리 8세 시기와 에드워드 6세 시기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의 전면전에서 두번이나 처참하게 박살나서 병력이 전멸당했고, 에든버러 까지 약탈 당했기 때문에 국력 격차를 절감한 세력들 특히 잉글랜드와 접경지대인 로우랜드를 기반으로 기존 프랑스에 의존하고 잉글랜드에 적대적인 외교 정책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세력들은 세력의 열세라서 영국국교회로 가톨릭과 단절한 잉글랜드에 SOS를 보내는데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는 신하들이 합법적인 왕에게 반항하는건 명분상 크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친잉글랜드 성향이며 개신교도들 세력이기에 비밀리에 시작하다 아예 대놓고 자금과 무기를지원하며 내전에 불을 더 붙혀 놨었다. 결국 메리와 마리 드 기즈의 친정인 프랑스에서도 개입을 하게 되었고 1560년 1월 에든버러 앞바다에서 잉글랜드 해군이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며 승기를 잡기 시작한가. 마침 메리의 모후 마리 드 기즈도 죽었기에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강화하여 에든버러 조약으로 과부가 된(프랑스 전 왕비) 메리가 귀국하여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며 양국 병력은 스코틀랜드에서 전부 철수하기로 했다. 말이 강화지 신교도 세력이 이기게 된 것이다.
메리는 실질적으로 즉위 후 신교도 왕국의 가톨릭 군주로 매우 고립된 처지였다. 더군다나 메리는 말이 스코틀랜드 여왕이지 6세 때부터 13년간이나 프랑스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프랑스인이나 다름 없었다.
메리는 프랑스어라틴어만 구사했고 정작 스코트어는 거의 구사하지 못했다. 또 풍요롭고 우아한 고급 문화가 발달했던 프랑스와는 너무나 다른 척박하고 음침한 날씨에, 문화적으로도 엄숙하고 특히 이 시절에는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아예 회화, 조각, 거대 건축물 등 눈에 보이는 우상을 배척하던 분위기인 스코틀랜드에 적응을 하지 못해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이 때 스코틀랜드는 섭정을 하고 있던 고위 귀족인 모레이 백작[9]을 비롯해 귀족들 대부분이 신교도였던 것 등 거의 신교도 국가였는데 메리는 가톨릭 교도였으므로 물과 기름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560년에 메리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기 몇 달 전에 딸을 대신해 섭정을 했던 선왕비 마리 드 기즈마저 병사해 아직 어린 여왕이었던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고 그녀를 이끌어 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할 땐 에든버러 조약을 비준하지 않는 등 엘리자베스에게 여러 모로 위협이 되기도 했다. 앞서 에든버러 조약으로 메리와 프랑수아 2세 부부가 적법한 잉글랜드 군주라는 칭호를 포기하기로 합의 했르나 원래 스코틀랜드 가톨릭 세력은 물론 프랑스 궁정에서 자라 반잉글랜드, 반개신교 성향이 강했기에 자신이 적법한 잉글랜드 여왕이라고 계속주장했기 때문에 양국의 관계가 험악해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항목에서 역사 페이지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스코틀랜드는 15세기 부터 지속적인 왕실의 요절 때문에 왕권은 약하고 아예 유력 클랜의 당주인 대귀족, 왕실 직할지로 실질적으로는 자치권을 누리던 에딘버러, 퍼스, 애버딘 등 도시 시의회, 그리고 종교개혁 이전에는 고위 추기경, 개혁 이후에는 장로교 국민 교회의 최고 회의인 장로 총회의 협력으로 돌아가던 과두정이 발달했던 나라였는데 여기서 프랑스 세력을 자꾸 끌고 들어와 현지 연고도 없으면서 갑작스럽게 군주로서 실권을 잡으려고 했던 메리를 냉안시했다.

메리가 외국의 왕족인 것과 에드워드 6세와의 약혼이 깨졌던 것 등의 문제로 헨리 8세가 메리 스튜어트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했지만 메리는 헨리 8세의 누이 마거릿의 손녀이자 헨리 7세의 후손이기 때문에, 가톨릭 세력에잉글랜드에 잔존한 가톨릭 세력에 지지를 받았다.이 때의 메리의 행동은 그 후 엘리자베스와의 사이가 좋아진 것 등을 봐선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기보다는 헨리 8세가 박탈한 왕위계승권을 확실히 인정받으려 하기도 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엘리자베스 1세가 이 당시 그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개인적으로는 메리와 수 차례 긍정적인 내용을 담은 서신으로 교류한 바 있다. 그러나 둘 다 서신으로만 교류했고 메리가 먼저 죽을 때까지 평생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이 점을 근거로 일각에서는 겉으로만 예의상 좋은 말로 교류한 것일 뿐, 사실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 문제로 앙숙일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4.1 불운했던 결혼생활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후에 메리는 결혼 압력에 시달렸다. 엘리자베스 1세가 더들리경을 추천한건 양측 다 진지하게 받아들인건 아니다.

엘리자베스가 나중에 추천한것은 헨리 스튜어트 단리 경 이었다. 단리 경은 헨리 7세의 증손자이라 엘리자베스 1세 후의 유력한 왕위 계승자이며, 메리 스튜어트와 같은 할머니를 둔 사촌 지간이었다.. 즉 단리경은 엘리자베스 1세의 친척으로 역시 영국왕위계승권이 있었다. 사실 엘리자베스 1세이후 튜더 왕가 혈족은 거의 남지 않았고 헨리 8세의 핏줄은 명맥이 끊길 예정이었기 때문에 헨리 7세의 혈통으로 계승자를 찾을 처지라서 단리경은 메리여왕과 더불어 잉글랜드 왕위 유력 계승자였다.
튜더 왕가와 스튜어트왕가 후손으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왕위계승권이 있는 두 사람의 결합은 당연히 정략적이었고, 신하들의 권유로 한것이다. 다만 메리의 이복오빠 (제임스 5세의 서자) 머리 백작은 결혼에 반대했다. 머리백작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지지자였는데 (기왕이면 신교도 외국왕족이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여왕의 남편이 어린데다가 얼간이라는 주장이었다. 결국 결혼이 성사되자 머리백작은 메리에 의해 유폐된다.

이들의 정략결혼으로 애정은 없었으나 1565년에 그 이듬해인 1566년 6월에 제임스 6세를 낳았다.

한편 스튜어트 집안끼리의 결혼이었지만 왕조의 이름이 살짝 바뀌었다. 단리경의 가문은 비록 스튜어트 혈족이었지만 스튜어트가가 스코틀랜드왕가가 되기전에 분가한 집안이었다. 다만 단리경의 증조모 엘리자베스 해밀턴은 제임스 2세의 손녀였기 때문에 부계로도 어느정도 가까운 혈족이었다. 한때 단리의 가문은 한때 조상이 프랑스 궁정에 머물때 철자를 프랑스 식으로 Stuart 라 고쳐써서 기존 스코틀랜드 왕실이름(Stewart)과 좀 달랐다. 아들대인 제임스 6세(잉글랜드 제임스 1세)시절부턴 단리경의 성을 받아서 Stuart를 쓴다. 단리경은 스튜어트왕가의 혈통이었기 때문에 왕(배우자) King Consort와 Duke of Albany 직위를 하사받았다.[10]

엘리자베스 1세도 신하를 보내어 왕자의 세례일에 황금 세례반을 전해주며 축하의 뜻을 전했고 메리의 요청대로 제임스 왕자의 대모가 되어 주었다.[11]

하지만 아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메리와 단리의 사이는 사실 매우 나빠져 있었다. 젊은 단리 경은 원래 연하인데다가 철이 없는 주정뱅이 였고 메리또한 따로 이탈리아 시종을 가까이하며 멀어졌기 때문이다. 사적인 면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단리 경이 속했던 레녹스 공작가는 동시대 스코틀랜드 국정을 좌우지 하던 거대 귀족 가문인 아란, 모튼 공작가를 비롯한 원수 관계. 안그래도 서로 이를 갈고 권력을 잡기 위해 경쟁하던 대귀족 가문 사이 한 가문이 갑자기 왕실의 부군이 되면서 지위가 급상승해버린 셈이니 순탄하게 넘어갈 리가 없다.[12]

여왕 메리는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서 남편에 질려버렸는데 역시나 반대하던측 평대로 형편없는 주정뱅이라서 이탈리아인 시종 다비드 리치오를 가까이 했다. 여왕은 존 녹스의 배려로 종교개혁이 일어난 스코틀랜드에서 유일하게 가톨릭 미사를 볼 권리가 있는 특권(?)이 있었는데 하루 서너번씩 여왕의 시중을 들며 같이 왔다 갔다 하는것이 영락없이 애인으로 보인 모양이다. 어쨌든 진짜 애인인지 아닌지는 알수 없으나 단리경은 여왕이지만 마누라 뺏긴 호구라는 불명예를 참지 못하고 여왕과 외국인에 불만을 가진 귀족들과 짜고 그를 죽여버린다. 여왕과 저녁 식사중에 단리가 사주한 귀족이 리초를 내보낼것을 주장하자 여왕은 리초의 목숨이 위태로운걸 알고 거부했고 결국엔 여왕을 귀족들이 막아서고 다비드 리초를 56차례나 찔러 죽이고 만다.[13]

단리경은 시치미를 떼며 여왕을 보호하는척, 여왕을 안심시키는척 자신은 음모에 관련이 없는 척 하며 메리와 함께 던바로 도망치는데 이곳에서 만난게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 이었다. 이쯤 되선 여왕은 남편에게 정나미가 완전 떨어졌었고 보스웰 백작의 도움으로 병력을 모아서 다시 귀환하여 반란자들은 잉글랜드로 도주해버린다.

이 일로 메리와 단리 경의 사이는 영영 틀어져 버렸다. 이미 이 시점에 보스웰 백작은 메리 여왕의 남편급 영향력을 끼치는데 급기야 메리는 이미 이시기에 단리경 처단 음모를 꾸몄고 보스웰 백작의 조언에 따라 단리를 안심 시키기 위해 리초살인범들을 사면까지 해줬다.출산 직후에 산실에 온 단리 경에게 갓 태어난 제임스를 보여주며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을 선물해 주셨다."라고 선언하며 그 곁에 있는 다른 귀족들에게 "나는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선 심정으로 고백한다. 나는 (불륜 혐의에 대해) 결백하니 이 아이가 왕위계승권자라는 사실의 증인이 되어 달라."는 말까지 했다. 이를 통해 메리가 자신에게 여전히 앙금을 갖고 있다는 걸 눈치채자 당황한 단리 경은 냉담해진 아내를 피하기 시작했다. 보스웰은 거의 여왕의 남편급으로 행세하며 제임스 왕자의 세례식준비까지 맡았고 아무런 혈연도 없는 주제에 귀빈으로 참석했다.

그 이후 메리와 단리 경은 한동안 별거했다. 단리 경은 계속 부친 레녹스 백작이 있던 글래스고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1567년 봄에야 메리는 뜬금없이 매독을 앓고 있는 단리 경에게 화해하자며 설득해 그를 '커크 오 필드'로 데려왔다. 둘이 단란한 시간을 몇일 보내는척 하다 여왕은 외출을 나가는데 그러나 불과 며칠 뒤에 단리 경이 머무르고 있던 저택에 큰 폭발이 일어나는 사고가 생긴다. 집에 있던 단리 경의 측근들은 모두 끔찍하게 폭사했고, 단리 경 역시 교살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 참사는 당연히 정황상 여왕의 복수심과 여왕의 새 남편이 되고 싶어한 보스웰 백작의 합작이었고 역시 비슷한 소문이 스코틀랜드 내부에서는 물론 국외에까지 돌았다. 자연히 메리는 대내외적으로 신뢰를 잃었고, 엘리자베스는 그런 메리에게 "부군 살해사건을 공정히 처리하라."며 스스로 혐의를 벗으라고 조언했다.

이후 메리는 남편의 애도 기간을 가졌고, 멘탈 갑 4월에 제임스가 보내져 자라고 있는 스털링 궁으로 찾아가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그 다음날 홀리루드 궁으로 돌아오려다 무장 군대를 이끌고 나타난 보스웰 백작에게 납치당한다. 왠지 짜고 치는 고스톱 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그랬다고 한다. 이때 보스웰 백작이 왕세자 제임스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게 메리와 보스웰의 패착으로 보인다. 마(Mar) 백작이 죽어라고 방어해서 보스웰이 제임스를 찾는데 실패했고 살해를 면 할수 있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가 아무리 왕권이 약하고 왕을 개호구로 알아도 왕을 납치하고 강간(?) 했다는데 최소한 다른 신하들이 가만이 있을 상태는 아니었다. 이미 보스웰 백작과 메리는 죽이 맞아 간통하는 사이였다는게 아귀가 맞는다. 보스웰 백작도 평이 개차반인 사람이었고 메리도 남자보는눈이 거기서 거기고 자신도 남편 모살에 공모했기에 그밥에 그나물이 었다. 더군다나 남편 모살전에 메리나 보스웰 백작이나 유부녀 유부남 이었다. 보스웰 백작은 자신의 부인을 협박끝에 결혼 20여일전에 강제 이혼 시켰는데 조강지처 설득이 빨랐다면 당연히 메리랑 더 빨리 결혼 했을 것이다. [14]

그런데 단리 경이 죽기 전에도 보스웰 백작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메리가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가는 등 둘 사이가 심상치 않았다는 루머가 널리 퍼져 있었다고. 그러나 이 결혼 소식이 들리자 남편이 끔찍하게 살해당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남편의 암살을 주도한 자로 추측되는 이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메리에 대한 여론은 심하게 악화된다. 얼마 가지 않아 단리 경의 암살 의혹과 메리의 종교 문제까지 더해 나빠진 여론으로 결국 반란이 일어나고 말았으며, 이미 메리는 개신교도들은 물론이고 자신에 호의적인 가톨릭 신하들까지 남편 죽음에 해명을 요구하며 메리를 버렸고, 거의 모든 귀족들이 그녀의 폐위에 찬성했다. 그녀를 몰아낸 귀족들이 왕세자 제임스에게 양위하라고 강요했다. 강요에 따르지 않을 경우 그녀가 보스웰과 주고 받은 편지들[15]을 공개하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메리는 치욕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양위에 동의하는 서류에 서명했으며, 이에 당시 막 돌을 지난 제임스가 왕위에 오르고[16] 메리의 이복오빠였던 머레이 경이 섭정이 되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결국 보스웰과 메리가 주고 받은 편지들을 의회에서 공개한 것은 물론 이 편지들의 사본을 외국 궁정에까지 보내 메리가 다시 왕권을 회복할 수 없게 만들었다. 메리는 패배하여 호수 속 섬에 세워진 로클레벤 성에 감금된다. 치욕스런 감금생활 동안 메리는 보스웰과 가졌던 쌍둥이를 유산하고 만다.

메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건강을 회복한 뒤 탈출하여[17] 자신에게 협조하는 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병사들을 모집하고 왕위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준비한다. 메리는 에든버러에 통첩을 보내는 한편 3천 병력을 모아서 재기에 성공하나 싶었는데 에든버러의 섭정 모레이 백작은 협살하는 척 질질 끌다가 병력이 반쯤 모이자 급습하니 오합지졸 메리 병력들은 박살이 나고 잉글랜드로 부랴부랴 도망가게 된다. 잉글랜드에선 가톨릭 여왕이 개신교 신하에 쫓겨오니 불청객이고, 그렇다고 돌려보내자니 엘리자베스 여왕의 가장 가까운친척이라서 쫓아낼 수도 없었다. 그녀의 존재로 인해 잉글랜드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일단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망명을 받아주었지만 메리를 그다지 달가워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자신에게 자식이 없으므로 사실상 메리가 잉글랜드의 제1왕위 계승권자인데다가 가톨릭 교도라 프랑스, 스페인 등 구교도 국가에선 엘리자베스를 인정하지 않고 메리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의 망명을 받아들인 것은 일단 엘리자베스도 군주이므로 '신하들이 여왕을 몰아내는' 상황을 좋게 보지 않았고,[18] 도움을 요청한 가까운 친척을 버리는 것은 인간적으로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메리를 프랑스나 에스파냐에 보내게 된다면 가톨릭 국가인 그들의 지원을 업고 군대를 동원해서 침공하면 국내 가톨릭 세력과 연합하여 왕권에 지대한 위협을 가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스코틀랜드로 송환하자니 메리 그것은 메리에게 너무 가혹한 일 이었다.[19]

메리는 망명시 땡전한푼 없는 신세였지만 엘리자베스가 거쳐를 마련해주고 같은 신세로 쫓겨난 스코틀랜드 가톨릭 세력과, 잉글랜드내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받아서 어느정도 형편이 피었고, 이번엔 합법(?)적으로 스코틀랜드 왕위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공개 질의서를 보내 스코틀랜드의 섭정들에게 강요에 의한 서명은 인정할수 없고, 섭정들은 여왕의 명에 따라야 한다고 잉글랜드 요크에서 협의회를 열것을 요청했으나, 스코틀랜드에선 전 남편 단리 경의 아버지 레녹스 백작이 메리를 간통과 남편 살해혐의로 조사위원회에 역고발하게된다. 법정에서 레녹스 백작이 메리가 보스웰 백작과 나눈 편지와 시들을 공개할 예정이라는 소리가 들리자 메리는 망신을 당할 위기라 재판을 포기해버렸다.

이후 메리가 모반을 꾸몄다는 증거가 여러 차례 발각되었다 실제로 스코틀랜드 여왕시절 메리는 프랑스 궁정의 영향으로 골수 가톨릭 이라 자신을 적법한 잉글랜드 여왕으로 자처한적이 었었으며 잉글랜드 국내 가톨릭 세력들은 공공연히 메리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망명한지 겨우 1년여만인 1569년에 가톨릭 세력들이 잉글랜드의 노퍽 공작과 메리를 결혼시키고 둘을 잉글랜드 군주로 추대한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 원래 노퍽공작과의 결혼른 엘리자베스 1세뿐만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에서도 찬성에서 순탄할걸로 예상했으나 노퍽공작은 엘리자베스가 주의 신호를 보냄에도 가톨릭 반역세력과 놀아나자 노퍽공작은 런던탑에 갇힌 뒤 처형되고 무리들은 체포되거나 외국으로 도망갔다. 메리를 처형하는건 주변 가톨릭 국가에 침공의 빌미를 주는 것인데다 일단은 친척이어서인지 여러 번 덮어두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내에서는 뭐가 잦으면 뭐가 나온다고 메리에 왕위를 찬탈한다는 계획이 탄로났고 이로 인해 말이 많았고 결국 메리의 사형을 주장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녀가 역심을 품었든, 그렇지 않았든, 가톨릭 교도인 그녀는 그 자체로 잉글랜드 내 가톨릭 교도들의 구심점이 되었고 이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성공회 교도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어차피 그녀는 절반 이상은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메리의 망명은 공식적으로는 친척인 엘리자베스에게 도움을 구하러 온 것이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큰 문제가 없는 한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엘리자베스는 망명 온 메리 스튜어트를 유폐시키고 슈루즈버리 백작 등 관리인을 붙여서 감시하게 했다.

여담으로, 보스웰 백작은 단리 경 살인 혐의로 기소돼 사형되는 일을 면하기 위해 1567년에 스코틀랜드를 탈출해 노르웨이로 갔으나 거기서 체포되어 덴마크로 보내졌다. 메리를 몰아낸 스코틀랜드의 귀족들과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의 살인 공모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보스웰 백작을 스코틀랜드로 송환하고자 했으나 메리의 외가친척인 프랑스의 기즈 가문 사람들이 손을 써 그가 송환되는 일만은 막았다. 하지만 여러 감옥을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고, 그렇게 10여년을 감옥에서 보내며 비참한 감금 생활을 하다 급기야 광증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1578년에 4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역시 여담이지만 메리는 세번째 남편이었던 그의 행적을 수소문했다거나 그를 구명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메리에게 호의적인 학자들은 메리가 마지 못해 보스웰과 결혼했다가 왕권을 잃었다고 동정하고 있다.

4.2 사형

약 18년 동안 유폐 상태로 지냈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그녀를 견제한 잉글랜드의 대신들이 엘리자베스의 의심을 수시로 부추겨 메리는 점점 열악해지는 대우를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비록 자유는 없었으나 정기적으로 나오는 연금 덕분에 수많은 하인들을 거느렸고 식사는 밸더킨[20] 아래에서 정찬을 먹을 수 있었다. 감시병이 늘 따라다녔지만 산책과 사냥같은 제한된 야외활동도 종종 허용되었다. 하지만 자주 하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날을 정교한 수를 놓거나 시녀들과 소일하고, 외국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새와 개를 키우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옆구리에 간헐적인 통증이 일어났는데 신경성일 가능성이 높았다. 벅스턴 온천 여행이 몇 차례 허용되었지만 상태가 호전되지는 않았다. 말년에는 발이 심각하게 붓고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는 등 운신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아져 운동을 거의 못했다. 실제로 사형당할 당시에는 몸이 비대해져 있었던 데다가 거의 대머리 수준이라 가발을 착용하고 있었다고. 그럼에도 자유를 얻으려는 희망을 끝내 놓지 못하고 외부와 비밀리에 서신 왕래를 계속했으며 간간이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던 아들 제임스에 대한 그리움과 제임스를 잉글랜드로 데려와 직접 기르고픈 소망을 내비치기도 했다. 또 이런 어려운 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낸 행복한 유년기를 회상하는 것으로 견뎌냈다고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모반을 꾸민 편지가 발각되었다. 프랑스 사제에 넘어간 신학생 발라드와 스페인 군인에 포섭된 안토니 배빙턴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배빙턴은 한동안 메리의 첩자노릇을 맡았었다. 총 여섯명의 연루된 조직이 붙잡혔고 이들은 엘리자베스 1세를 암살하면 메리를 여왕으로 추대할것을 자백했다. 곧 메리는 체포되었는데, 당연히 그녀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청원이 빗발쳤다. 그러나 그녀의 처우를 두고 엘리자베스는 예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처형하자니 폐위 되었다곤하나 자신의 혈육을 처형한다는 선례를 남기게 되고, 처형하지 않자니 몇 번이나 그랬듯 국내 가톨릭 세력의 구심점으로써 끝없이 반란의 불씨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메리를 처형시키라는 여론이 들끓어 결국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재판케 했다. 메리는 변호인도 허락되지 않은 재판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다. 게다가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 간곡하게나마 사형만은 면해줄것을 요청했다.. 사실 제임스는 고작 생후 10개월 때 어머니와 헤어진 데다가 이후 메리에게 적대적인 귀족들에게 키워지면서 그들로부터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들어 왔기에 어머니에게 애틋한 정이 별로 없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도 메리의 죄는 무겁지만 목숨만은 부지해줄것을 정중하게 요청했었다. 무엇보다 엘리자베스에게 맞설 경우 자신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이 박탈당하는 등 정치적으로 득이 되는 것이 없었기에 제임스는 엘리자베스에게 일단 형식적으로 선처 요청만 했으며 메리가 처형당한 후에도 이를 빌미 삼아 잉글랜드와 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다.[21]

결국 1587년 2월에 메리는 사형을 당한다. 메리는 처형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조건을 걸었는데 먼저 자신을 프랑스땅에 묻어줄것...둘째 자신의 뒷바라지를 한 시종들에게 유산과 연금을 줄것, 처형은 공개된 장소에서 할것 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마지막 순간에도 가톨릭식 기도를 하고 자신은 죄를 지은 게 없다고 생각하며 죽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어쩔 수 없이 사형 집행장에 서명하기는 했지만, 메리 사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며 사형서류를 가져론 데이비슨에게 화풀이를 했고, 몇몇 신하들은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그런데 이틀뒤엔 사형을 농담거리로 삼고 며칠뒤엔 침울해져서 후회하고 종잡을수 없이 변덕을 부렸다한다.

하지만 곧 복권시킨 것을 보면 우환거리가 사라진 거에 대한 후련한 마음이 더 앞섰을 듯하다.[22]

저 당시 발견된 증거에 대해선, 대체로 위조된 건지 아닌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일단 편지의 경우, 엘리자베스의 심복 측이 메리를 제거하기 위해 함정을 팠는데 메리가 낚였다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많다.

어린 시절을 프랑스 궁정에서 보내 화려함과 우아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던 메리는 죽는 순간까지도 패션에 신경을 썼다.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그 위를 검은색 망토로 덮었다고 하는데, 이는 가톨릭에서 순교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즉 옷차림을 통해 자신은 가톨릭 순교자임을 선언하려 한 것이었다. 단두대의 받침대에 목을 올려두고는 쉼 없이 "인 마누스 투아스, 도미네, 콘피데 스피리툼 메움(In manus tuas, Domine, confide spiritum meum. '주여, 당신께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라는 뜻)"이라고 되뇌었다. 첫번째 일격은 뒤통수에 빗맞았고, 이때 메리는 고통스럽게 신음했다고 한다. 두번째 일격으로 숨을 거뒀으며, 세번째 일격에 목이 완전히 잘려 나갔다. 목이 완전히 잘린 뒤에도 입술은 15분간이나 계속 움직였다고 한다. 메리의 드레스 속에 있던 메리의 작은 반려견은 메리가 숨지자 그 속에서 나와 메리의 핏물 위해 누워 애통해하다 계속 먹이를 거부하고 죽었다고.

이후 관계자들은 메리의 시신을 발가벗겨 사망 당시에 입고 있던 옷가지를 전부 태우고 메리의 피가 튄 모든 곳을 깨끗이 닦았다. 교황 절대주의자들이 유품으로 삼을 만한 물건이나 순례할만한 곳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메리의 시신은 새 옷으로 갈아입혀져 알콜로 방부 처리된 뒤 납관에 안치돼 피터버러 사원에 매장됐다. 훗날 엘리자베스 사후에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한 제임스 6세가 비로소 메리의 시신을 발굴해 엘리자베스가 안장되어 있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다시 매장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로써 일생을 두고 대립했으되 평생 직접 만난 적 없던 두 여왕이 사후에 나란히 누워 있게 됐다.

5 그의 사후 평가

당대 미인 중 하나였다고 전해지며 특이하게도 키가 180cm가 넘었다고 한다. 지금보다도 평균 신장이 훨씬 낮은 시기임을 감안할 때 어마어마하게 큰 여인이었다.[23] 아름답고 교양이 풍부해 매력적인 인물로 여겨지기는 했으나, 감정 기복이 심하고[24] 자제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아 바로 이웃나라의 여왕이자 친척인 엘리자베스 1세와는 여러 모로 비교되기도 한다. 실제로 메리에게는 엘리자베스만큼의 통치력이나 정치적 기술이 부족하다는 점이 드러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즉, 지식이 많아 똑똑하고 틀에 박힌 예절 때문에 교양은 있는데 정작 자제력이 없는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정말 잘난 사람은 남들이 인정해줘도 자만하지 않는다. 이런 인간적인 결함 때문에 평생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녀의 사망은 의외로 큰 영향을 끼쳤다. 일단 1년 뒤에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고 엘리자베스 1세 사후 튜더 왕조가 단절되면서 튜더 왕조의 유일한 후손이자 스코틀랜드 왕으로 있던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 왕위도 계승하여 '스튜어트 왕조'가 열린다. 그 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동군연합을 이루게 된다. 메리 스튜어트가 헨리 7세의 유일하게 남은 후손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평가는 "술수에 능한 요녀, 악녀"와 "종교 분쟁과 왕위 갈등의 희생자"라는 평으로 갈리는데, 전자는 그녀에게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은 성공회 교도들과 잉글랜드의 일반적 평가고, 후자는 최근에 점점 조명을 받는 시각[25]. 본토인 스코틀랜드에서도 평가가 좋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프랑스에서 자란 사람이라 당시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엄숙하고 우상을 배격했으며, 소박하고 근엄한 문화였던 현지 민심에 어긋나게 휘황찬란하고 우아한 프랑스 문화를 고집했으며, 현지에 연줄도 없고 능력도 없는 주제에 어설프게 국왕 행세 하려고 했다가 나라를 열강 사이 국제전에 휘둘리게 한 뒤 신하들에게 쫒겨났기 때문이다. 종교적, 정치적으로도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을 추구했던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왕권이 역사적으로 굉장히 약했고 이에 따라 유력 귀족, 도시민, 성직자들의 과두정 중심 정치 체제를 가졌으며, 개신교 중에서도 가장 매파에 속했던 장로교 엘리트와 정면 충돌했기 때문에 존 녹스, 조지 뷰캐넌, 엔드류 멜빌 등 당대 개혁가, 문필가들에게 두고 두고 까였다.

이러다가 현대 들어서 비운의 절세 미녀 여군주로 다시 재조명 받으면서 각종 영화, 티비쇼 등에서 다시 재조명 받게 되었는데, 이건 또 나름대로 역사학자들 사이에 비운의 미녀 여왕이고 나발이고 애초에 알맹이는 생판 외국인인 주제에 분별력도 없어서 당연히 쫒겨난 걸 드라마틱한 면만 보고 관광객 용으로 미화시키고 있다라는 식으로 까이고 있다(...). 실제로 이 시기는 스코틀랜드 입장에서는 종교 개혁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고유의 개신교 교파인 장로회의 큰 기틀이 마련되고, 중세 후기 부터 지속 된 귀족, 도시민, 성직자의 삼각 과두정 체제가 제도적으로 뿌리를 박은 매우 중요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차원에서는 사실 군주로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메리의 드라마틱한 개인적인 삶, 여성성만 두고 계속 떠들면서 정작 중요한 사건, 인물들은 무시 당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26]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그녀의 이야기를 다룬 매게체 중에서 오페라로써는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마리아 스투아르다가 대표적이다.[27] 이 오페라는 도니제티의 여왕 3부작[28]중의 하나로 역사적 사실보다는 "돈 카를로스"[29]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쉴러의 희곡을 바탕으로 쓰여진 각본이지만, 음악은 벨 칸토 오페라답게 아름답다는 평이 대부분이며, 실제 역사에서 전혀 만나지도 않았던[30]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가 서로 만나서 신경전 벌이는 부분(...)[31]은 이 오페라 최고의 명장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 엘리자베스 1세와 펠리페 2세의 대결을 그린 2007년도 영화 <골든에이지:엘리자베스>에서 사만다 모튼이 연기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영국과 스페인사이에 벌어졌던 칼레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배경지식이 없으면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해하기가 힘들다. 사실 흥행에 실패한 원인도 이것 때문인데, 배경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보면 상당한 명작이다.

초반부터 엘리자베스 1세(케이트 블란쳇 분)의 명에 의해 포더링헤이 성에 감금되어있는 상태로 나온다. 엘리자베스를 죽이기 위해 암살단을 꾸리고 스페인과도 연결루트를 구축해 영국 여왕으로 즉위할 음모를 꾸미지만 여왕의 충신인 프랜시스 월싱엄(제프리 러쉬 분)이 뒷조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여왕이 예배를 드리러 행차하는 날 암살을 기도한다.

그런데 이 암살단의 단주가 미쳤는지 자객의 총에서 총알을 빼두는 바람에 암살 시도는 허무하게(...) 실패하고 음모자들은 모조리 반역죄로 처형당한다. 당연히 메리도 무사할 수 없었고 결국 사형판결을 받고 목이 잘려 끔살.

  1. 그녀가 태어난 지 고작 6일 만에 그녀의 아버지 제임스 5세가 사망해 바로 여왕이 됐으며 생후 9개월만에 대관식을 치렀다.
  2. 현재의 알자스-로렌.
  3. 애초에 기즈 가문은 프랑스 궁정에서 특수한 위치인데 기즈 가문, 기즈 가문의 본가인 로렌 가문, 사보이 가문들은 신성로마제국 제후이기에 유럽의 통치 가문 대우를 받아서 왕족과 동일한 혼인이 가능했다. 카페 가문의 방계 부르봉 가문처럼 프랑스 궁정에선 준왕족 대우를 받았다.
  4. 로버트 1세의 외동딸로 월터 스튜어트와 결혼한 마조리 브루스(Majorie Bruce).
  5. 원문은 "It came with a lass; and it'll go with a lass" Lass는 스코트어로 여자 아이를 뜻하는 말로, 출처는 존 녹스의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사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거의 150년 뒤의 일이지만 스튜어트 왕조 최후의 군주가 여왕이었음으로 현실이 된 건 맞다. 비록 제임스 시대에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6. 별칭이 투명인데 존재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선량하여 투명하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행적을 보면 개인으로선 몰라도 전쟁도 잘 하고 신하들도 잘 조지는 등 별로 선량해 보이진 않다(...)
  7. 제임스 5세는 제임스 4세헨리 7세의 딸 마거릿의 아들인데, 그가 헨리 7세의 후손이라는 점이 훗날 튜더 왕조가 단절되자 그의 손자이자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가 상속받는 큰 이유가 된다.
  8. 훗날 메리의 두번째 남편인 헨리 스튜어트(단리 경)가 메리와 처음으로 동침한 후에 "여왕은 처녀였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다는 야사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프랑수아가 메리와 합궁 자체를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일부 전기 작가는 메리와 프랑수아가 당시에 모두 어린데다 메리에게 프랑수아는 남편보다는 돌봐줘야 할 병약한 친구라는 인식이 커서 성적으로 끌리지 못했을 거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9. 제임스 5세가 정부와 낳은 아들로 메리에게는 이복오빠가 된다.
  10. 왕(배우자) 직위는 물론 Duke of Albany작위 또한 범상치 않은데 어릴때 죽은 메리의 오빠, 제임스 5세의 차남에게 준 작위였다.
  11. 스코틀랜드의 외교관이자 메리와 인간적으로 가까운 심복이었던 제임스 멜빌 경의 비망록에 의하면 엘리자베스는 사자로 온 그로부터 제임스 왕자의 탄생 소식을 듣자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데 스코틀랜드 여왕은 아들을 낳았다!'라며 상심하고 분노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전혀 이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으며, 엘리자베스가 왕자의 탄생에 대해 '감사한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멜빌 경의 기록은 신빙성이 낮다고 본다.
  12.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진 이런 막장드라마를 본 엘리자베스는 이런 연유로 레스터 공작 로버트 더들리와 평생 친구이자 연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결혼은 결코 하지 않았다. 여군주가 신하들 사이에 남편을 고르면 당시 봉건제 체제와 성 관념 때문에 필연적으로 국내 정치가 개판으로 꼬여버렸기 때문이다.
  13. 제임스 6세(1세)가 리치오의 아들 소문이 떠돈게 사실이다. 훗날 프랑스에서도 제임스가 리치오 핏줄이라며 정식왕으로 인정치 않고 공격했다
  14. 보스웰이 중혼이었다는 소리도 있다. 어쨌든 골수 가톨릭 신도인 메리라면 이혼은 불가능인데 이혼했든 안했든 유부남과 간통하여 중혼이다.
  15. 일명 '보석함 편지'라 불린다. 단리 경의 살인을 모의하거나 보스웰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을 약속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진위 여부에 대해 논란이 많다. 메리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슈테판 츠바이크는 메리의 반대 세력들이 편지를 위조할 틈조차 없었다며 진짜라 주장했으나 다른 학자들은 위조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16. 참고로 이로써 스튜어트 왕가는 내리 3대가 아주 어린 시절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메리의 아버지 제임스 5세는 부왕 제임스 4세가 전사하는 바람에 만으로 2살이 되기 전에 즉위했고, 메리는 생후 6일만에 제임스 5세가 사망해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 6세는 1살 무렵에 어머니가 폐위당하자 즉위했다.
  17. 첫 번째 탈출에선 세탁부로 위장하여 배를 타다가 드러난 팔이 너무 하얗게 드러나 신분이 탄로나서 적발로 무산. 두번째엔 성 문지기 아들을 유혹(?)하여 밤중에 열쇠를 훔쳐 탈출에성공 한다
  18. 당시는 왕권신수설이 절대적인 통념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엘리자베스 1세 역시 당연히 왕위는 신이 내려준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신하에 불과한 반역자들이 주의 기름 부음을 받은 여왕인 메리를 내쫓은 상황'은 불경 그 자체로 볼 수밖에 없었다. 메리가 그녀의 왕관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은 전제군주라면 달갑게 여길래야 여길 수가 없는 것이었다.
  19. 이런 상황에 대해 파커 대주교는 '우리의 여왕(엘리자베스 1세)께서는 늑대 귀를 잡고 계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0. 군주의 위엄을 나타내는 천개 모양의 상징물.
  21. 메리만 제임스를 애타게 그리워한 듯하나, 메리는 가톨릭 세례를 받은 제임스가 신교도로 자라자 유언으로 자신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펠리페 2세에게 양도하겠다고 한 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모자 모두 서로에 대한 정이 그닥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해석도 있다. 무엇보다 제임스 탄생 당시에 아이의 생부이자 남편인 단리 경과 사이가 심각히 나쁜 관계였던지라 제임스에게 어머니 노릇을 제대로 안 했다는 견해도 있다. 에든버러 요새에서 태어난 제임스는 거의 곧바로 스털링 성으로 보내져 거기서 대대로 어린 왕족들을 돌봤던 귀족들 밑에서 자랐다. 설령 메리가 자신의 곁에서 아이를 직접 기르지 않는 것은 스코틀랜드 왕실의 관례라고 볼 수 있어도 출산 후 불과 4주만에 뱃놀이를 간 것은 당시 기준으로도 논란이 됐는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22. 사실 그녀의 '격노'는 스페인, 프랑스와 같은 카톨릭 국가의 군주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한 정치적인 연기였다. 그녀를 따르는 대신들조차 연기를 그만 두길 은근히 종용할 정도였다고.(...)
  23. 여담이지만 메리 스튜어트의 일생의 라이벌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도 170cm가 넘는 장신이고 이걸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당연히 메리가 더 컸다. 야사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가 자신보다도 더 크다는 얘기를 듣자 대체 키가 얼마나 큰 거냐며 놀랐다고.
  24.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인 존 녹스와의 대담키배에서 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5. 특히 슈테판 츠바이크가 평전을 쓰면서 메리를 호의적으로 비평한 것이 유명하다. 하지만 츠바이크는 소설가이지 역사학자가 아니었다. 실증적인 관점에서 보면 츠바이크는 개인으로서 메리의 드라마틱하고 비극적인 인생만 부각했지, 군주로서의 입장을 고려한 역사학적 판단을 한 것이 아님으로 이에 기반하여 메리를 재평가하려는 시도에 반발하는 의견도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많다. 사실 스코틀랜드 역사학계 입장에서 보면 우리나라로 치면 원균명장론급의 역사왜곡이 대중 문화를 통한 어설픈 우상화로 인해 훨씬 더 많이 퍼진 급이라...
  26. 물론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시시콜콜한 신학적, 이념적 문제 보다 미녀 여왕의 로맨스와 비극적인 삶이 더 흥미로운게 당연하고, 기본적으로 녹스, 뷰캐넌, 멜빌 같은 동시대 스코틀랜드 역사를 주름잡은 종교 개혁의 거두들이 인간적으로는 하나 같이 꼬장꼬장하고,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광신도 꼴통스러우며, 다혈질에다가 개신교 개혁가 주제에 알콜 중독자인 별로 호감이 안 가는 타입이란 요소도 있긴 하지만....
  27. 마리아 스투아르다(Maria stuarda)는 메리 스튜어트의 이탈리아어 발음이다.
  28. 앤 불린의 이야기를 그린 안나 볼레나, 메리 스튜어트의 마지막을 그린 마리아 스투아르다, 엘리자베스 1세의 내연남 에식스 백작이 처형되기까지의 내용을 담은 로베르토 데브뢰를 통틀어서 여왕 3부작이라 부른다. 앤 불린은 여왕이 아니지만, 영어로 왕비와 여왕은 "Queen"이라 쓰는것이 맞으니까...
  29. 주세페 베르디의 그랜드 오페라 "돈 카를로"가 바로 쉴러의 원작을 바탕으로 작곡된 것이다.
  30. 많은 매개체에서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가 만나는 장면을 그리고 있지만, 이는 가상이다. 둘은 생애 한번도 직접 만난적은 없다. 다만,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 스튜어트의 사형집행서에 사인하는 것을 주저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31. 이 장면은 원작자 쉴러의 가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