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사드

Mossad
히브리어: המוסד

설립연도: 1949년
구분: 해외 정보기관
소재지: 이스라엘 텔아비브
설립목적: 나치의 학살에서 살아 남은 유대인팔레스타인 이주
주요사업: 대(對)아랍 정보수집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 - 잠언 24:6 (과거 모토)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고,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잠언 11:14 (현재 모토)

1 개요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놀라운 정보수집능력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 공작 능력으로 악명 높다. 주요 목표는 이스라엘의 주적인 팔레스타인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레바논 헤즈볼라를 감시하고 암살하는 것.

2 역사

1948년 6월 초대 책임자를 레우벤 실로아흐로 하여 외무부 산하 정치국으로 출범하고, 이후 1949년 12월 13일에 정치국을 확대개편하여 정보조정연구소(the Institude for Coordination, '모사드'는 Institude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로 재출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식명칭은 '중앙공안정보기관(Central Institute for Intelligence and Security, המוסד למודיעין ולתפקידים מיוחדים)'으로, 제2차 세계대전나치의 집단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에 이주시키기 위해서 1949년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의 제안으로 설립되었다. 초대 의장은 레우벤 실로아흐(ראובן שילוח). 이후 1951년에는 총리 직속기구로 재편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모사드의 창설연도를 1951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휘하에 현장투입 및 암살팀인 '키돈'과, 통신감청 전문기술팀 '야호로민', 해당 공작 지역에서 모사드를 도와주는 유대인들인 '캇차'와 '사얀'/'사야님', 그리고 도처에서 운용하고 있는 각국 국적의 모사드 정보원들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953년에 취임한 2대 의장 이세르 하렐(Isser Harel)이 전문가 조직으로 발전시켰으며, 외국에서의 첩보활동·정보수집·비밀정치공작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중동전쟁에서 큰 공을 쌓은 이스라엘 스파이 엘리 코헨의 형 모리스 코헨도 모사드 요원이었다. 하지만 아우가 시리아에서 교수형당하는 걸 그저 TV화면으로 바라봐야 했다.

모사드는 1979년 이전까지는 베일에 싸여있던 기관이었다. 일반인들은 모사드가 존재하는지 조차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정체가 1979년 드러나게 되는데 그 과정이 좀 골때린다. 1979년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일어나는데 대사관 직원들은 인질로 잡히기 전에 기밀 문서를 파쇄기에 넣고 모두 파기했다. 하지만 대사관 내의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할 일이 없던(?) 인질범들은 파쇄기에 갈아넣은 문서들을 하나하나 맞추어 복원해냈다. 여기서 모사드의 존재가 밝혀지게 된다.

1980년대 말~1990년 대 중반은 모사드에게 암울한 기간이었다. 벌여 놓은 각종 작전이 실패해 언론에 알려져 망신을 당해 국장이 여러차례 교체되기도 했다. 높으신 분이 개인적인 욕심으로 정보기관을 휘두르면 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

그러다 2002년 메이어 다간이 국장으로 취임하면서 화려한 부활의 계기를 맞는다. 취임사는 적의 뇌를 삼켜라.

"나는 레바논에 참전했을 때 가문끼리의 싸움이 초래한 비참한 결과를 본 적이 있다.
한 족장의 머리가 깨져서 뇌가 거리에 흩어져 있었다.
주변에는 족장의 부인과 어린아이들의 시체가 있었다.
이때 살아남은 한 아이가 족장의 뇌수를 한 움큼 쥐더니 집어삼켰다.
이것이 레바논 사람들이 가문끼리의 싸움에서 하는 행동이다.

뇌를 먹어 삼켜라.
그렇게 힘의 근원을 취하라.
나는 여러분의 뇌가 다른 자들에게 먹히기를 절대 바라지 않는다.
뇌를 먹는 사람은 여러분이어야 한다.

그래도 모사드는 해외에서 주로 활동하다보니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졌지, 이스라엘 내 첩보를 주로 맡는 신 베트(Shin bet)는 미국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첩보기관이다. 어느 나라든 그렇지만 모사드와 신 베트는 은근히 사이가 나쁘다고 한다. 그렇긴 해도 같은 이스라엘 첩보기관으로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땐 돕긴 하지만. 2012년에 만들어진 이스라엘 다큐멘터리 영화 게이트키퍼즈에 나온 전직 신 베트 국장들의 증언을 봐도 모사드가 마치 자신들이 우위인양 설쳐댄다고 마구 화를 내며 털어놓는 게 나와서 이를 본 모사드 출신 국장들도 불쾌하게 반론하던 적이 있다. 이 외에도 이스라엘은 정보기관이 꽤 많은 편이다.

3 알려진 주요 행적

주요 공작으로는 다음이 알려져 있다. 모사드는 암살에 대해 가능한 한 긍정도 하지 않고 부정도 하지 않는다. 목표가 자살한 것으로 위장할 수도 있지만 모사드는 휴대폰에 폭탄을 설치하거나 차량을 폭발시키는 등 누가 봐도 암살임이 분명하게 행동한다. 이것은 모사드의 적들에게 공포를 주기 위한 심리전의 일종이다. 특히 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물들을 이용하는데 이는 '언제 어디서든 모사드의 공격이 있을 수 있다'라는 공포를 주기 위한 것이다.

  • 나치 잔당 색출
    • 아돌프 아이히만 : 유대인 강제수용소 설치와 학살을 지휘했던 주역이다. 15년 동안 추적해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잠복해 있던 것을 찾아냈다. 국제법을 무시하고 납치해서는 국내법을 고쳐가며 교수대에 올렸다. [1]
    • 요제프 멩겔레 : 생체 실험의 주역이었다. 시체가 확인될 때까지 40여 년을 쫓아다녔다.
  • 주변 중동국가에 대한 군사작전
    • 이라크의 MiG-21 파일럿 귀순 : 제3차 중동전쟁 직전에 미인계이라크 파일럿을 유혹해 MiG-21과 함께 귀순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해당 파일럿은 이라크의 소수 민족 아시리아인으로 아시리아인들은 3세기부터 기독교도였다. 그 때문에 19세기에는 심한 핍박을 받았으나 1960년대 시점에선 사담 후세인바트당 치하에서 비교적 우대를 받았다. 이는 바트당의 사상적 기반 구축에 아랍 민족주의자들과 더불어 바로 아시리아 기독교도들이 초기 정당 구성원 및 지도자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때문이다. 이 아시리아인들은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자마자 곧바로 핍박받기 시작한다. 참고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이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도 있다. 망명을 선택하기 까지의 이라크 파일럿의 심정변화 등을 잘 그린 편.
    • 야하 엘 메스하드(Yayha El Meshad) 암살 (1980) : 이라크의 핵물리학자.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방에서 살해되었다.
    • 1981년 6월 이스라엘 공군이 이라크의 오시리크 원자로를 폭격하였다. 모사드에 의한 상세한 사전조사가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 제럴드 불 (1990.3.22) : 캐나다인 대포 개발자로 이라크에 협력하다가 총격으로 암살당했다. 문서 참조.
    • 2007년 9월5일 이스라엘은 시리아가 북한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건설중이던 핵시설을 폭격, 파괴했다. 이 작전의 결정적 단서는 이스라엘 대외 정보기관 ‘모사드’가 제공했다. 모사드는 런던의 한 호텔에 투숙중이던 시리아 고위 관료의 노트북컴퓨터에서 시리아 핵시설 정보를 빼냈다. 호텔 방에 몰래 침투해 노트북에 해킹 장치를 설치했던 것이다. 신문기사
    • 2012년 이란의 핵개발 관련 과학자 4명이 연속으로 암살당했다. 참고 단, 반이란 단체 및 망명 단체들이 모사드에 협조하는 것도 많다고 한다. 과거 팔레비 왕조 시절 비밀경찰 샤바크가 모사드와 동맹으로 서로 정보를 주고 받았는데 호메이니 정부에게 샤바크는 철저하게 숙청당했고 일부 샤바크 관계자는 해외로 이민가서 지금까지도 반이란 활동에 나서고 있기에 이들이 모사드와 은밀히 협력했다는 주장도 많다.
  • 모르데카이 바누누 : 이스라엘인이지만 자국의 핵무기 보유 여부를 폭로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도 독립할 자격이 있다고 하여 이스라엘 정부를 빡치게 만들었다. 직장에서도 이때문에 해고당한 바누누는 그래서 영국으로 도망갔다가 1986년 9월 모사드 공작원의 미인계에 유혹당해 납치된 뒤 온갖 가혹행위를 당하며 심문을 받았고[2] 결국 징역 18년이 선고됐는데 그 18년 중 12년간 독방에 감금됐고[3] 창문 없는 좁은 방에서 24시간 전등이 켜진 채로 지내다가 2년 반이 지나서야 교도소 측이 밤에는 전등을 꺼주어 낮과 밤을 구별할 수 있었다. 다른 수감자에게는 허용되는 신문, 라디오, TV가 금지됐으며 면회도 직계가족과 변호사에게만 허용됐다.[4] 이스라엘 보수파들과 하레디들은 반역자이니 이렇게 당해도 싸다고 한다. 그나마 인권단체의 정부 비난 등에 힘입어 다 채우지는 않고 풀려나간 했지만 출소 후에도 해외로의 출국을 금지당하며 가택 연금되어 있다.[5] 전화와 인터넷도 이스라엘 정부에서 감시하고 있다.
  • 뮌헨 올림픽 참사(1972)에 대한 보복 : 검은 9월단에 의한 뮌헨 올림픽 테러가 발생하자 모사드는 검은 9월단 일원 13명을 9년동안 추적하여 암살하였다. 영화 '뮌헨' 이 이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 와사르 즈와이델(Wael Zwaiter) 암살 (1972.10.16) : 이탈리아 로마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으로, 아라파트의 조카이기도 하다. 직업은 번역가이고, 즈와이델의 지지자는 '검은9월단과 관계없는 지식인'이라고 하며, 이스라엘은 '검은9월단의 사령관'이라고 한다.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다가 모사드 요원들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
    • 마흐무드 함샤리 암살 (1972.12) : 프랑스 파리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전화기에 손을 댔는데 전화기에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있어서 폭사했다. 이스라엘은 그가 검은 9월단의 프랑스 총책이라고 한다.
    • 알리 하산 살라메 암살 (1979) : 검은 9월단의 지도자 중 1명인 알리 하산 살라메는 1973년 7월에 모사드의 암살을 간신히 피했다. 그 이후 CIA의 보호를 받아 모사드의 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1973년 11월 3일 CIA 부국장 '버넌 월터스'는 수단 주재 미국대사 암살 이후 아라파트를 만나 'PLO가 미국인에 대해 테러를 하지 않는다'라는 비밀 약속을 했다. PLO는 중동지역 테러 정보를 CIA에 제공해서 미국인들이 좀 더 안전하게 중동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아라파트는 CIA와의 연락책으로 알리 하산 살라메를 지명했고, 그는 미국 CIA 본부 건물에 초청받아 드나들었다. 모사드는 CIA에게 알리 하산 살라메와의 연락을 끊으라고 요구했으나 CIA는 정보적 가치가 높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알리 하산 살라메는 결국 1979년 베이루트에서 폭탄으로 모사드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모사드의 책임자는 '라피 에이탄'으로, 전설적인 공작 책임자였다고 한다. 레바논 민간인 8명이 주변에서 함께 사망했다. 모사드와 CIA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 아브 다우드 암살 (1981) : 1981년 8월 1일 검은 9월단의 수장이며 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유력한 지도자 아브 다우드가 바르샤바에서 저격당했다. 당시에는 모사드의 관여 만 나돌았지만, 결국엔 모사드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공산 독재국가에 총기를 밀반입해서 암살을 성공시킨 것이니 더욱 어려운 일이다.
  • 팔레스타인 지도자 암살

이런저런 팔레스타인 지도자 암살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 칼릴 왈 아지르, 또는 아부 지하드 (1988) : PLO 군사지도자. 튀니지에서 집에 있다가 살해당했다. 30명의 암살자가 배편으로 튀니지 해안을 통해 침투했다. 일부는 관광객으로 가장해 알 와지르의 집을 포위했고, 일부는 튀니지 군복을 입고 거리를 봉쇄했다.
  • 파트히 샤카키 (1995) :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이슬람 지하드' 간부. 몰타에서 암살당했다.
  • 야햐 아이야시 (1996) : 하마스의 폭탄 제조자. 가자지구에서 이동전화를 사용하다가 전화에 장치된 부비트랩에 의해 사망.
  •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 (2004) : 하마스의 창시자이자 간부. 과거에 체포해서 투옥시켰다가, 1997년 칼리드 마샬 암살 실패 당시 협상에 의해 석방하였다. 그러나 2004년 이스라엘에 의해 폭탄으로 암살당했다.
  • 엘 딘 셰이크 칼릴 (2004) : 하마스 소속.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했다.
  • 이마드 무그리예 (2008): 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 차량 폭발로 사망했다. 1983년 베이루트 주둔 미 해병대에 대한 테러 공격의 배후 인물로 25년간 미국과 이스라엘에 의해 추적당하고 있었다.
  • 마무드 마부 (2010) : 하마스 지도자. 두바이의 한 호텔에 투숙하고 있을 때 호텔 객실에 침입해 베개로 질식사시켰다. 하단 문단 참조.
  • 위험에 처한 유대인 및 자국민 구출
    • 엔테베 작전 (1976) : 독일과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테러범들에 의해 공중납치되어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인질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 여객기 승객들을 구출]]하는 작전이었다. 활동 자체는 이스라엘군 특수부대가 시행했으나, 모사드가 그 활동을 도왔다. 이륙한 비행기가 케냐에서 급유를 받았는데 그것이 모사드의 활동이었다고 한다.
    • 1992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유대인 수백 명을 구출했다.

실패한 사례도 몇 몇 있다.

  • 알리 하산 살라메 암살 실패 (1973.7) : 모사드는 노르웨이의 릴레함메르에서 애꿏은 모로코인 웨이터 아흐메드 부치키를 검은 9월단의 지도자 중 하나인 알리 하산 살라메로 착각해서 살해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알리 하산 살라메는 그 도시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숨어 지내고 있었다가 모사드의 암살 시도를 간신히 모면했다. 모사드 요원들은 아흐메드 부치키를 임신한 아내가 보는 앞에서 총으로 쏘아 죽였다. 살해한 요원 중 6명(남성 4 여성 2)이 노르웨이 당국에 살인죄로 체포당했으며, 이 사건에서 체포당한 요원들이 활동내용을 자백하는 바람에 모사드의 유럽 내 활동에 큰 타격을 입었다.[6] 1996년 이스라엘 정부는 사죄하며 유족에게 배상금을 지불했다. 비록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알리 하산 살라메는 결국 1979년 폭탄으로 암살당했다.
  • 칼리드 마샬 암살 실패 (1997.9.25.) : 하마스의 간부. 벤야민 네타냐후 총리가 지시하여 캐나다 여권을 소지하고 요르단으로 여러 명의 요원이 입국해 칼리드 마샬의 귀에 독극물을 주입했다. 경호원이 암살단 중 2명을 현장에서 붙잡았다. 요르단 국왕이 격분해 '이스라엘이 해독제를 넘겨주고 요르단과 3년간의 평화협정을 맺어야 요원들을 풀어주겠다'라고 조건을 제시했다. 캐나다가 여권을 도용당해 항의를 했고, 미국이 당시 중동 평화 협상을 이끌던 중이라 모사드에 불만을 표했기 때문에 모사드는 해독제를 보내주었으며 투옥중이었던 하마스 지도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을 포함해 하마스 조직원 22명을 석방했다. 칼리드 마샬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하마스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요르단 역시 모사드 요원 2명을 풀어주었다. 당시 모사드의 최고책임자였던 대니 야톰 국장은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다만, 이 때 풀려난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은 2004년 폭탄으로 암살당했다.
  • 2005년 3월에 뉴질랜드에서 모사드 요원들로 추정되는 2명의 인물들이 체포되어 6개월형과 미국달러로 $32,500의 벌금을 뇌성마비환자들을 위한 기부금으로 내라는 판결을 받았다.BBC 영어기사 이스라엘 출신인 Uriel Zosha Kelman와 Eli Cara는 모사드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다. 내무부에서 이 둘의 입국심사과정에서 이상한 점을 알아낸 후 전화를 도청하는 등의 감시를 한 후에 체포하였다. 이 둘은 위조여권을 통해 입국한 뒤 범죄조직들과 일한 적 있음이 밝혀졌다고…. 이후 각각 2개월, 3개월 뒤에 이스라엘로 추방됐다고 한다. 당시 헬렌 클락 정부는 이스라엘 대사의 입국을 취소시켰고 사과를 요구해 정식으로 이스라엘 정부의 사과를 받아냈다.
  • 스위스 베른에서 전화도청 장비를 설치하다 옆집 아줌마의 신고로 경찰에 1명이 체포당했으며 도청 장비도 압수당했다. (1998.1.19)
  • 크피르의 도면을 빼돌릴 때에도 이웃 주민에게 걸렸다.
  • 모사드의 내부 배신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중 하나로, 2013년 초, 2010년 이스라엘의 비밀 감옥에 수감 중 사망한 '죄수 X'라는 죄수가 호주 출신의 모사드 요원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요원이 2010년 2월의 하마스 지도자 '마무드 마부' 암살 작전에 참가했었는데, 민감한 정보를 출신국인 호주 정보부에 넘기는 등 이중간첩 행위를 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당하고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 한편으로는 모사드조차 이런 일을 겪을 정도로 이중간첩이 무서운 존재라는 것이 드러난 셈이기도 하다.

모사드는 나치 독일의 SS 중령이었던 오토 슈코르체니를 포섭하여 나치 잔당 사냥을 함께 하기도 했다.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암살 미수사건 진상 파악에 관여했다. CIA는 배후를 KGB로 추측하였으나, 모사드는 친 이란계 테러조직에 의한 사건임을 밝혀내고 교황청에 은밀하게 보고했다.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에 대한 교황의 태도는 현격히 순화됐고, 이스라엘과 바티칸의 수교를 허용했다. 신문기사

허나 2010년에 일어난 크라이스트처치 대지진 때 타고있던 승합차가 돌에 깔려 사망한 이스라엘 여행객에게서 5개의 위조여권이 발견되고, 혼잡한 틈에 12시간도 안 되어 이스라엘 대사와 몇몇 이스라엘 여행객들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복구작업을 위해 투입된 뉴질랜드 SAS가 이들의 흔적을 조사했다고 한다(물론 공식발표는 이들의 뛰어난 구급조치와 인명구조능력 때문에 생존자 구출을 위해 투입되었다고 한다.). Stuff 뉴질랜드 (영어)

미국 FBI 요원에 따르면 냉전 시절 모사드의 미국 내 활동은 소련 다음으로 활발했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로 FBI의 대이스라엘 첩보 부서의 규모가 소련 데스크 다음으로 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3.1 2010년 암살

2010년 2월 20일에 두바이에서 일어난 하마스의 지도자 '마무드 마부'(50) 암살사건의 배후로 추궁당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다면 본 기사기사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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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명의 범인이 5개 국적의 위조여권을 이용해 4곳의 공항에서 입국해서 19시간만에 암살을 저지른 뒤 7곳의 공항으로 탈출했다. 서로간의 연계점이 없게 보이기 위해 택시도 모두 따로 타고, 호텔도 각각 다른 곳에 투숙했다. 신분 추적이 안 되게 하려고 위조여권, 선불제 휴대폰 7개, 다른 사람의 명의로 발급받은 신용카드 17개를 사용했다. 암살 용의자 중 8명은 1년전부터 4차례 이상 두바이를 들락거렸다.

공항 대기조, 호텔 정찰조 여러 팀, 암살 실행조 등 여러 팀으로 나누어 임무를 수행했다. 테니스복 차림에 테니스 라켓을 든 남성 2명이 알 마부를 미행해 객실 번호를 알아냈다. 이후 남녀 2인 (아래의 '게일 폴리어드' 포함)이 객실 내에 실제로 그가 있는지 알아냈다. 이후 게일 폴리어드와 함께 건장한 체구의 남성 4명이 방으로 들어가 20분만에 알 마부를 암살하였다. [7] 호텔 CCTV에 수차례 인물들이 드나드는 장면이 포착되었는데, CCTV에 사진이 찍힐 때마다 용모와 복장을 지속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전혀 수상해 보이지 않았다. 밝은 미소를 띄면서 사회성 좋게 호텔 직원들과 이야기했기 때문에 전혀 음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암살단은 범행이 이뤄진 호텔 이외에도 알마브후흐가 두바이에서 머물 때 자주 이용했던 호텔에도 여러 명의 요원을 배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상황에 따라 제2, 제3의 작전 시나리오까지 준비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마부 역시 암살에 대비해 이런저런 조치를 취했다. 독극물을 두려워해 확실한 음식 외에는 절대 음식물을 먹지 않았고, 자신이 어느 나라에 가는지 최대한 알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모사드의 행동은 그의 대비보다 훨씬 치밀했다.

여권위조를 비롯한 여러 국제법 위반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묶인 사건이라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초법적 처형'이 많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영국 중대조직범죄청(SOCA)이 이스라엘에 수사관을 보내 위조 여권 사용경위를 조사하여 밝혀진 위조수법은 이스라엘에 영국인들이 입국할 때 이스라엘 공항직원들이 영국인의 여권을 체크한다면서 가져갔다가 복사하여 개인정보를 빼낸 뒤 20분 후 돌려주는 방식이었다. 이건 뭐 나라가 범죄조직도 아니고 2010년 3월 영국이 국내주재 중인 모사드 관련 이스라엘 외교관을 추방하였는데, 영국에 입국할 때 모사드 암살요원들이 소지한 영국 위조여권이 모사드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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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 여권

게일 폴리어드 (가명)는 이 암살의 주요 실행범 중 하나이다. 게일은 복도에서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와 통화하는 척 하면서 목표물이 방에 들어가는지, 다른 투숙객이 지나가지는 않는지 감시했다. 게일은 호텔 직원을 가장해 목표물이 거부감 없이 방문을 열도록 유도했다. CCTV를 보고서는 윙크를 하기도 했다. 살해 후에는 빠져나가면서 방문에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표식을 걸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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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외국인 관광객을 방불케 하는 평범한 옷차림.

마부가 암살당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2008년 가자 전쟁에서 하마스는 이란제 다연장로켓을 사용했다. 이스라엘 군부는 이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 이란에서 무기를 반입한 인물이 누구인지를 추적한 결과, 알 마부인 것으로 추측되었다. 하마스 지도부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그의 활동을 알고 있었다. 2010년 초 알 마부는 가자지구에 있는 친척에게 휴대폰으로 '두바이에 간다'라고 무심결에 얘기했다. 인터넷으로 자신이 숙박할 호텔을 예약하기도 했다. 모사드는 사실 확인을 위해 팔레스타인에서 하마스의 앙숙인 파타당 협력자들로부터 추가정보까지 입수했다.

이만큼 자세하게 사건의 경위가 알려지고, 현장에 전혀 출입하지 않은 요원들의 위조여권까지 발각된 것은 두바이 경찰이 엄청난 양의 CCTV 데이터를 분석했기 때문이다.

4 직제, 조직문화

모사드는 다른 나라의 해외 정보기관과 마찬가지로 매우 위험한 일들을 많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어려운 임무를 성공시키기 때문에 굉장히 주목받고 있다.

다음을 성공 요인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 방첩기관(신 베트)과 해외정보기관(모사드)의 분리가 확실히 이루어져 있다. [8]
  • 전세계에 유대인 협조자가 있다. 신문기사 2000년대에는 약 35,000명 정도로 추측된다.
  • 강대국에서도 살인, 납치, 여권 위조, 절도 등을 하지만 총리가 외교부를 통해 다 막아 주기 때문에, 현장 공작 요원들은 외교적 문제 같은 것을 신경쓰지 않고 가장 이익이 되는 형태로만 행동하면 된다. [9] CIA의 비호를 받고 있던 알리 하산 살라메도 암살당했으며 이로 인해 CIA와 모사드의 관계도 냉각되었지만 이런 것조차 꺼리지 않는다. 알리 하산 살라메 암살 실패 당시에는 노르웨이와 단교 직전까지 갔고, 캐나다 여권을 도용하다 캐나다와도 단교 직전까지 갔던 적이 있다. 폭탄을 사용할 경우 무고한 민간인이 함께 죽기도 하지만 반드시 보상을 해 주는 것은 아니다.
  • 이득이 된다면 누구와 협력하든 가리지 않는다. 나치 독일, 그 중에서도 SS 중령이었던 오토 슈코르체니를 고용하였다.
  • 국장의 임기가 5년 가량으로 매우 긴 편이다. 총리의 위상을 돋보이기 위해 행동하는 게 아니다. [10]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베개로 눌러 죽이기도 하고, 전화에 부비트랩을 설치하기도 하며, 총으로 쏘아 죽이기도 하고, 귀에 독극물을 부어 죽이기도 한다. 차에 미리 폭발물을 설치하기도 하고, 차량이 도착할 만한 장소에 폭발물을 설치해놓기도 하며, 달리는 차량에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이 접근해 자석으로 폭탄을 붙이기도 한다. 미인계, 협박 등 다양한 테크닉이 이용된다. 굉장히 창의적인 수단이 많이 동원되는 것을 볼 때 혁신적인 내부 조직문화가 뒷받침 될 것으로 추측된다.
  • 많은 규모 : 메이르 아미트 (3대 국장, 1963~1968 재직) 시절에는 1200명 정도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11] 돈도 많이 들어갔을 것이 분명하다.

모사드는 8개 부서로 구성되어 있다.

  • 정보수집국 : 해외 공작을 책임지며 모사드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모사드 요원들은 해외 공관의 외교관 신분과 신분 위장을 통해서 해외에서 활동한다.
  • 정치 활동 및 연락국 : 세계 각국 정보기관과의 연락.
  • 특수작전국(Metsada) : 암살, 비정규전, 심리전 등.
    • 암살-납치 부서 '키돈'(Kidon) : 언제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르나, 60~80년대가 아닐까 추측만 하고 있다. 키돈 여성요원의 존재는 2004년에야 세상에 드러났다. 키돈의 훈련과정은 2년인데, 각종 무기, 폭발물, 미행 기법, 호텔 객실 침입 방법, 속옷 안에 권총을 은폐하는 방법, 위장 방법, 미인계 등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진다. 규모는 50~70명 정도로 추측되고 있다.
    • Lohamah Psichologit Department : 심리전과 정치 선전 그리고 기만 작전을 담당한다.
  • 연구국 : 15개 분과로 나누어 보고서 생산 (일일, 주간, 월간 등등). 미국, 캐나다, 서유럽, 남미, 옛 소련 지역, 중국, 아프리카, 마그레브(모로코·알제리·튀니지), 리비아, 이라크, 요르단,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란.
  • 기술국 : 첨단 장비 제공

5 한국 내부에서의 활동

※《기드온의 스파이》참조. 물론 모사드에서 해당 작전내역이나 공작을 인정할 리는 없다.

중동에 수출된 북한무기의 경우 모사드가 직접 한국으로 무기들을 보내주기도 했으며, 굳이 북한제가 아니더라도 중동 전쟁 동안에 T-72 등 러시아제 전차들을 입수한 이스라엘은 이걸 군용기에다 실어서 한국에 보내주기까지 했는데, 이를 이용한 시험 데이터는 북한군의 전차 성능 연구와 차세대 국산 전차 개발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2014년 1월에는 선진 정보기관에 대해 배우기 위해 7명의 한국 국회의원이 모사드를 방문했다. 다만, 이 때 해당 국회의원들이 한국 언론에다 방문 일정을 예고한 바람에 모사드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대한민국 국내에도 당연히 모사드 요원이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 [12] 모사드 외에도 각국 정보기관에 있어 서울은 대북정보수집에 있어 정말 긴요한 도시이다. 서울 시내를 활보하는 천만 명의 내외국인 중에 모사드를 비롯한 각국 첩자들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13]

6 픽션 속의 모사드 요원

  1. 이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계 언론들은 "아이히만이 나쁘다"라는 보도만 줄기차게 해댔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유대인 측에겐 그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인 인간. 게다가 대량학살을 저지른 죽어도 쌀 놈이었기 때문에 아이히만을 옹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2. 물론 같은 유대인이라서 팔레스타인인들에 비하면 약하게 해준거다.
  3. 이는 서방세계에서의 가장 긴 독방 수감기간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됐다고 한다. 사실 원래는 종신형이었는데 많이 봐준거였다.
  4. 직계가족도 아내와 자식들외엔 부모와 친척들에게 의절까지 당했다.
  5. 본인에게만 해당. 가족은 해당안된다.
  6. 이 사건은 이라크로부터 당시 최신형 소련제 미그기를 탈취하는 작전 이래로 그간 비교적 승승장구하며 꽤 주목할 만한 첩보계의 플레이어로 주목받던 모사드에 타격을 준, 이른바 릴레함메르의 실패라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작전목표 달성 실패는 물론 이 때문에 유럽 내 공작망이 붕괴되어 다시 재구축할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이후 모사드의 요원 훈련 교범 및 코스에서 주 교훈으로 삼는 실패 사례가 되었다고.
  7. 사실 여성 1명 정도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완벽하게 제압해서 완벽하게 성공시키기 위해서인 듯 하다.
  8. 국정원은 양쪽 모두 같은 조직
  9. 대개의 선진국 정보기관은 강대국에서 불법적인 정보활동을 하는 것을 꺼린다. 외교적으로 불이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10. 한국 국정원은 평균 1년 정도이고, 대통령이 자신의 뜻에 맞는 고위 인사를 앉히며, 그 고위 인사는 군대, 행정공무원, 검사, 인권변호사 등 다양한 커리어패스를 거친 사람이 뽑힌다.
  11. 1968년 이스라엘 인구가 280만명이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매우 인원이 많은 것이다.
  12. 국정감사에서는 2003~2013년 북한 이외의 국가에 현지 협력자로 활동하던 한국인 30여명이 처벌받았다고 한다. 이 중엔 우방국 정보기관의 비밀공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13. 잡는 방법은 방첩기관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