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카시노 전투

1 개요

1944년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중 하나. 독일 국방군 공수부대 팔시름예거(Fallschirmjäger)가 카시노 산을 방어 거점으로 삼고 ·······로 이뤄진 연합군과 맞선 방어전이었다. 또한 항복한 이탈리아 정부군과 현지 파르티잔도 연합군을 돕는 데 가세했다. 독일의 정예 공수부대 팔시름예거의 용맹함을 널리 알린 전투.

2 상세

당시 사진

당시 이탈리아 전선은 이탈리아 반도의 남반부를 포기하고 로마는 계속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간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지연전을 수행하면서 서서히 후퇴하는 독일군과 이를 추격하는 연합군의 추격전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독일군은 구스타프 라인이라 불리는 방어선에 도달한 후 후퇴하는 아군의 후미를 방어하기 위해서 독일 공수부대를 급파한다.

전선에 도착한 독일 공수부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한 몬테카시노 산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이곳에는 수도원이 있었고 이곳에서 방어하면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수도원중세 시대에 지어졌으며 거기에는 가치 있는 고문서들이 많이 있는 중요한 유적이었기 때문에 케셀링 원수는 부대에 수도원에 손 끝 하나라도 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 연합군 지휘부에도 이 메세지를 전달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연합군은 적군의 말을 도통 믿을 수가 없었던데다 산 정상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수도원이 무척 거슬리는 것도 있고, 우연히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구조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는 문서를 연합군이 입수했는데, 돌로 된 외벽의 두께만 3m에 육박하는 수도원이므로 어지간한 야포 따위로는 이빨도 안 먹힌다는 것에 다들 경악했다.

결국 연합군 고위급은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관측병이 수도원까지 올라와서 관측할지도 모른다'는 등의 핑계를 들어서 수도원을 포격과 융단폭격을 통해 완전히 쑥대밭을 만들어버렸다.[1] 이렇게 무리한 폭격이 감행된 이유는 연합군의 이탈리아 전투는 산과 강 같은 이탈리아의 험악한 지형을 낀 독일군의 우주방어를 뚫는 양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진격속도가 느린데 반해 보병의 손해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당장 몬테카시노 전투에 참전한 한 대령은 "이런 험악한 곳에서 연이은 혈전에 지친 병사들에게 그런 요구를 -문화유산을 지켜야 하니 화력지원도 없이 맨땅에 헤딩해라-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참고로 이 수도원은 베네딕토회의 첫 번째 수도원이면서 유럽에서 체계적인 수도원을 구현한 최초의 수도원이자 529년에 세워진 매우 유서깊은 곳이었다. 가톨릭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성 베네딕토가 직접 머무르던 수도원이었다. 그리고 김영옥 대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 당시 수도원 안에는 수도자들과 부상당하거나 피난온 민간인도 다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이탈리아 방어선의 독일군 사령관 케셀링은 수도원을 방어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그 결정을 연합군에 통보까지 한 상황이었다.

미군의 폭격예고 삐라를 본 수도원장은 부랴부랴 피난행렬을 꾸렸지만, 행정상의 착오인지 조급증이 난 미군의 무리한 작전개시인지 몰라도 삐라에 예고된 날보다 일찍이 B-17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수많은 이탈리아 민간인들이 폭격에 희생되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지 독일군 중령 율리우스 슐레겔(Julius Schlegel)이 폭격을 피하기 위해 수도원 지하로 옮겨놓은 중세 필사본 서적 등 수도원의 1만 2천 권에 달하는 장서들과 미술품들을 모두 바티칸의 안전한 곳으로 옮겨두었기 때문에 문화재의 소실은 방지할 수 있었다.[2]

한편, 이렇게 수도원이 박살나서 더 이상 방어거점으로서 작동을 못하면 그나마 미군에게 위안이 되었겠지만, 원래 튼튼했던 요새였던만큼 아무리 폭격으로 두들겨 패도 폐허가 남았고 이 폐허가 보병에게는 매우 유용한 은엄폐를 재공해 주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더 이상 눈치볼게 없어진 독일 공수부대 대원들은 이 남아있는 수도원의 폐허 속에 튼튼한 방어진지를 구축했고, 연합군이 공군포병의 지원을 등에 업고 대규모 공세를 가해도 번번이 패퇴하는 등, 결국 문화유산도 날려버리고 민간인 살상도 한데다 적군에게 방어진지도 헌납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건 뭐... 공포와 편견에 사로잡혀 대국을 보지 못한 결과.

연합군은 이 지역을 돌파하기 위해 기존의 병력에 몇배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하였다. 자신들의 몇배에 달하는 병력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계속해서 공격을 격퇴하였으나 연합군 측도 정예부대였던지라 한번은 양측의 전선이 10m까지 좁혀진 적도 있었다. 결국 이 전투는 독일군의 철수 후미를 경계하며 시간을 끄는 작전에서 독일 공수부대와 연합군 정예부대들간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당시 연합군 부대 중에서는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이 이끄는 폴란드 제 2군단은 특히나 독일에 대한 복수심이 강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당시 독일 제1공수사단 소대장 '하인츠 베르거' 중위의 증언에 의하면 "우리는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군대였고 그 점은 이미 우리의 적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군은 모든 점에서 이성을 상실한듯 보였다. 그들은 흡사 이 전투에서 전원이 몰살당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부상을 입은 어느 폴란드군 부상병이 우리가 다가가자 마치 야수같은 괴성을 질러대며 마구 돌을 집어던지며 저항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하반신 전체는 이미 수류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뭉그러져 있었음에도 말이다". 또한 프랑스 원정군단(FEC) 소속된 모로코의 구미에족으로 구성된 병사들은 자신들의 고향은 험한 산악지형이라 카시노 산을 등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연합군이 엄청난 병력을 동원해서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포함한 산악지역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챈 케셀링 원수의 명령으로 독일 공수부대가 철수함으로써 몬테카시노 전투는 막을 내렸다. 지금 몬테카시노 산에 재건된 수도원에는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묘비가 세워져 있어 그들의 넋을 달래고 있다.

이 전투에서 독일 공수부대의 별명이 하나 추가되었다. 몬테카시노의 초록 악마들.

3 여담

결국 몬테 카시노를 점령한 것은 자유 폴란드군이었고[3], 전사자 수만도 4,000명을 넘어가는 등 가장 큰 희생을 치러 냈다. 전사자 대부분은 인근 언덕에 묻혔고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폴란드군

우리의 자유와 당신들의 자유를 위해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
우리의 육체를 이탈리아의 흙에
우리의 마음을 조국 폴란드에 바쳤다.

이탈리아의 푸른 악마였던 독일 정예와, 각종 우주방어라인을 분쇄하여 질주한 미군의 전과도 눈부시지만, 잃어버린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폴란드군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진정한 일원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몬테카시노의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은 전쟁이 끝난 후 복구되었는데, 이 수도원은 이로써 총 5회 파괴되고 5회 재건되었다. 현재 수도원의 청동제 정문 하단부 좌측에는 수도원을 처음으로 파괴한 롬바르드족의 얼굴을, 우측에는 2차대전 중에 수도원을 파괴한 연합군 폭격을 뜻하는 군용 철모와 폭탄을 새겨넣어,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 쏠쏠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전투 당시 이곳에는 Krupp K5라는 그나마 실용적인 열차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K5는 일반 철로에도 쓸 수 있어서 한동안 갈긴 뒤 터널 등으로 도망치는 방법으로 나름 활약했지만 후퇴할 때 폐기되었으며, 잔해는 연합군이 확보했다.

<리보위츠를 위한 성가>(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저자 윌터 M. 주니어는 이 베네딕토회 수도원 폭격에 승무원으로 참여했다가 죄책감에 시달려 1996년에 자살했다. 참고로 저 소설도 인류의 문화유산을 수납한 교회에 대한 것이다.

그 외에도 폴란드군 소속으로 활동한 보이텍이 유명하다.

HBO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가니에의 형이 이 전투에서 죽은 것으로 언급되었다.

two-women-movie-poster-1020199521.jpg
당시 이탈리아 중부 몬테카시노에서의 전투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자유 프랑스군 사령관 Alphonse Pierre Juin은 인근 지역(Ciociaria)에서 50시간의 약탈을 허용하였다. 이때 모로코 병사들이 총 2,000여명의 여성들을 강간하고[4], 800여명의 남성들을 살해했으며, 마을을 불태우고, 재물들은 모두 약탈했다.[5] 소피아 로렌 주연의 이탈리아 영화, <두 여자(Two Women, 1960)>는 이 사건 당시 강간당한 두 자매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몬테카시노에서 발생한 강간 피해자들을 이탈리아에서는 Marocchinate라고 부른다. 그러나 프랑스가 나치에게 어지간히 데인 국가였기 때문에 소련군의 범죄와 비슷하게 현재까지도 잘 언급되지 않는다. 또한 프랑스군은 이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도 다시 한번 강간, 살해, 약탈로 악명을 떨쳤고 프랑스 정부는 현재까지도 이 전쟁 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특이하게 불곰이 참전한 전투이기도 하다. 한 폴란드군 손에서 길러진 시리아불곰 보이테크(Wojtek)는 자유 폴란드군 2군단 포병사단 22탄약보급중대 소속으로 참전했으며 하사 계급까지 받았다.군웅(軍熊) 어릴 때부터 인간들 손에 길러진 탓에 야생적 본능은 많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과 레슬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몬테카시노 전투에서는 포탄 운반을 담당했는데 이 모습이 형상화되어 22탄약중대의 부대마크가 되어 장병들의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한 운반중에 탄약을 단 한 발도 떨어트리지 않았다고.어지간한 고문관보다 낫다 다만 안타깝게도 2차대전이 끝난 이후 폴란드는 공산화되었기 때문에 자유 폴란드군 소속이었던 보이테크는 폴란드로 돌아가지 못했고, 글라스고의 동물원에서 살다가 1947년 에딘버러의 동물원으로 옮겨진 뒤 1962년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이란 출신인데 이란으로 돌려보내지

4 관련 항목

  1. 사실 수도원 인근에 수도원보다 더 관측에 유리한 봉우리가 널려 있었기에 독일군이 굳이 연합군에게 잘 보이는 수도원에 자리잡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2. 미국 정부의 입장은 전후 조금씩 정정되어 왔는데, 1969년 최종적으로 확정된 미 육군 공식 문서는 '폭격 당시 수도원은 독일군에게 점거되어 있지 않았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3. 물론 엄청난 서방 연합군의 포위공격이 바탕이 된 것이었지만
  4. 피해자 중에는 현재까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여성도 있다고 한다.
  5. 주민이 2,500명에 불과했던 Esperia시에서만 700명이 강간당한 것으로 보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