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文益煥
(1918년 6월 1일 ~ 1994년 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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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게 잘 알려진 모습인 흰머리와 수염을 기른 문 목사.

1 개요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테니까" - 1989년 그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1] 중 에서.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김태훈 열사여! 황정하 열사여! 김의기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이재호 열사여! 이동수 열사여! 김경숙 열사여! 진성일 열사여! 강성철 열사여! 송광영 열사여! 박영진 열사여! 광주 2천여 영령이여! 박영두 열사여! 김종태 열사여! 박혜정 열사여! 표정두 열사여! 황보영국 열사여! 박종만 열사여! 홍기일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우종원 열사여! 김용권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 이한열의 추모식에서 한 명연설.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연설이었다.[2]

대한민국한국기독교장로회[3] 소속의 목사, 한신대학교[4] 교수, 성서학자[5], 통일 운동가, 시인 [6] , 작사가[7]. 문재린 목사-김신묵 사모의 아들이며, 배우 출신 정치인 문성근아버지이다. 부인은 함께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박용길 장로이며 남동생 문동환#s-2 목사도 같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였다.[8]

늦은 나이에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호를 '늦봄'이라고 지었다. 첫 사회 활동인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당시 이미 50대 후반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미국 유학을 거치고 한신대 신학교수로 재직하던 전형적인 개신교 목사였다. 현재 1994년 창립한 통일운동단체 '통일맞이-늦봄 문익환 목사 추모사업회'가 활동하고 있다.

2 초반 생애

만주 북간도 용정 출생이다.[9] 만주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저항시인 윤동주, 윤동주의 사촌형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 장준하, 장군 정일권과 절친한 지인이었다고 한다.[10] 아들인 문성근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아버지가 윤동주, 장준하에 대한 마음의 부채가 있었다"며 "윤동주 장준하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젠 내 차례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라고 말했다.[11]

이후 평양신학교[12]에 입학하려 했으나, 근본주의적인 학풍을 가진 평양신학교를 다니는 것보다는 일본 유학을 가는것이 좋겠다는 부친의 권유로 도쿄의 일본신학교에 입학한다. 여기서 성서비평학을 공부하게 되는데, 원래 축자영감설성서무오설을 중시하는 장로회 출신의 문익환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는 익숙하였으나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비평하는 것에는 적응하기 힘들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신학교수의 충고를 받고 학문적인 영역으로서 존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만주국 봉천신학교를 나왔으며, 1947년 한국신학대학교[13]를 졸업하고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자원입대 미군통역장교로 할약하였다.[14]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54년에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는다. 이후 귀국하여 연세대, 한신대 등에서 신학 강의를 하였다.

1970년대에는 공동번역성서 구약 번역에 참여했다.

3 통일·사회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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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김일성.

1970년대 말까지는 주로 본연의 업무인 목사 겸 신학 교수로 활동했으나,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된 이후 60대의 노구를 이끌고 민주화와 통일 운동의 길로 접어든다. 1976년 59세에 처음 구속된 이래 1994년 77세로 사망할 때까지 생애 마지막 17년 중에서 11년 반을 교도소에서 살았다. 5년 반을 밖에 있었고 11년 반을 교도소에서. 함석헌, 장준하와 함께 진보주의개신교 대표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활동을 하던 가톨릭 대표인 서울대교구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원주교구지학순 다니엘 주교,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문규현 바오로 신부 등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1980년대 내내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의 상징이였으며, 1980년대 말 격렬하게 대립하던 학생운동권 그룹에서 모두 존경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였다. 특히 그 가운데 가장 임팩트가 강했던 사건은 위의 1989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했던 사건.[15] 이 사건은 이어지는 전대협의 임수경 방북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며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의 불씨를 당긴 사건이다. 실제 당시 김일성과의 합의 내용은 이후 1991년 남북합의서와 2000년 남북 공동선언에 거의 그대로 반복된다. 링크 이렇듯 말년에는 특히 통일 문제에 주력하다 1994년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그러나 그는 그가 활동한 단체 조국통일범민족연합에 대해 북한이 대남 공작용으로 이용한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타파하고자 노력했다.[16] 말년에 일방적으로 북한에 끌려다닌다고 판단한 범민련을 해산시키고 새로운 통일운동 단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것도 이 노력의 일환이다.

아버지 문재린 목사와 어머니 김신묵 여사도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고 더불어 남동생 문동환 목사도 한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훗날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평화민주당 부총재를 지내기도 하였다. 문익환 목사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부인 박용길 장로는 2011년 9월 25일별세하였다.

4 기타

여담으로 강풀의 <26년>에 잠깐 나온 적이 있다.# 비중있는 역할은 아니지만, 작품 속 흐름 내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영화)에 잠깐 등장한다.

아들인 배우 문성근이 무릎팍도사에서 밝히기를 성격이 시니컬한면이 있어 학생들 사이에서의 별명은 문이꽝이었다고한다(...) 한성격하는 분이셨기에 아들에게도 냉정하게 대한적이 더러 있었다고.

문성근이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문익환 목사와 똑같은 외모가 되어가고 있다.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사람이라 카더라.
  1. 아들인 문성근이 낭독하기도 했다.유튜브
  2. 문 목사의 절절한 몸짓과 애절한 목소리가 영상으로 남아 있다.유튜브
  3.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장로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과 대조적이게, 보수성향이 아닌 진보성향의 교단이다. 한상렬도 여기소속
  4. 교회의 보수성을 비판하던 한국신학대학교(조선신학교) 총장 김재준 목사가 박형룡을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 목회자들에게 배척당하고 예수교 장로회에서 제명된 후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을 설립하였는데, 그 한국신학대학교의 후신이 한신대학교다. 이런 탓인지 신학교임에도 대단히 사회참여적, 진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특히 한신대학교 경제학과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이 중심인 곳이다. 김수행, 정운영, 이해영 등 유럽유학파 출신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들이 모두 이곳 교수였다. 단 한신대학교가 교단 분리 당시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비판받았던 것과 달리, 칼 바르트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신정통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곳이다.
  5. 1970년대 천주교-개신교 공동성서번역에 장로회 대표격으로 참여하였다.
  6. 그는 잠꼬대 아닌 잠꼬대, 한뫼의 신화 등의 여러 시를 작시 한 시인이다. 그의 시를 모은 시집 또한 있다.
  7. 그는 21세기 찬송가 582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의 김재준, 조원길과와 공동 작사가이다.
  8. 형의 그늘에 많이 가려졌지만, 문동환 목사도 기독교교육학자로 한신대 교수를 지냈으며, 형보다 먼저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재야세력의 대표로 김대중 대통령이 이끌던 평화민주당 부총재를 지내기도 하였다. 현재는 미국 뉴저지 주에서 통일운동을 하고 있다.
  9. 문익환 목사 집안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윤동주 시인 집안, 김약연 집안 등과 함께 5가문이 집단적으로 이주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용정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조선인 공동체가 생겨난다. 한때 안중근 의사가 문목사 집에 머물면서 총연습을 하셨다고 한다.
  10. 여담이지만 시인이 되고 싶었던 문익환이 윤동주에게 자신이 고심해 적은 시를 보여주자 윤동주의 반응은 "이게 시냐?"라는 것이었다고(...). 이에 쇼크를 받은 문익환이 시인의 길을 포기했다는 일화가 있다.
  11. 이 3명은 간도 명동소학교 동창이다. 실제 윤동주 시집이 발간시에 문익환 목사가 서문을 썼다. 서문은 경향신문의 기자로 있던 연희전문 친우인 강처중의 도움으로 정지용(당시 경향신문 주필)이 작성했다. (참고로, 발문은 강처중이 작성함.) 1976년 민주구국선언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도 1975년 장준하의 의문사에 충격을 받아서였다고 한다. 이들 3명과 반대의 길을 간 정일권까지 합치면 이래저래 한국 현대사에 대단한 영향을 끼친 4명의 동창생들이다.
  12. 장로회신학대학교총신대학교의 전신
  13. 한신대학교. 중간에 교단분리되었을 때 잠시 조선신학교로 이름을 바꾼다.
  14. 197~80년대 민주화운동의 버팀목이 되는 문익환, 리영희, 정경모도 모두 미군통역장교 출신이다.
  15. 하지만 민간인 신분으로 허가 없이 북한에 방문해서는 절대 안되며, 이것은 엄연한 범법 행위이다. 절대로 따라하지 말자.
  16. 그는 여기에서 남측본부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