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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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水木しげる 1922년 3월 8일 ~ 2015년 11월 30일

본명은 무라 시게루(武良 茂)
일본 오사카 부 오사카 시 스미요시 구 출생. 돗토리사카이미나토 출신. 만화의 신으로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보다 6년 앞서 태어난 일본 만화계 최고원로 중 한 명이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아버지는 친척이 오사카우메다 역 근처에서 경영하던 신문사에서 다니고 있었고, 이 무렵 임신한 어머니는 그를 만나러 사카이 미나토에서 오사카로 도착해 미즈키 시게루를 낳았다. 일단 공동 경영인과 함께 농기구 수입판매 회사를 부흥시키기 위해 아버지는 먼저 가족들을 돗토리 현으로 이사시켰으나,[1] 얼마 후 큰 사업 실패를 당해 돗토리 현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가 자라난 돗토리 출신으로 더 알려져있다.
200px-Shigeru_Mizuki_at_age_3.jpg 3살 때.

어릴 적부터 특이한 아이로 3살이 될 때까지 말을 못했고, 4살 때 처음으로 뱉은 말이 "고양이 똥". 5살 때는 '죽음'에 흥미를 가져, 3살된 동생을 바다에 밀어넣으려다 주위 사람들이 발견하여 말렸고, 부모님에게 실컷 꾸중을 듣고, 친척 큰숙모한테 액땜으로 뜸을 맞기도 했다. 초등학생 1학년 때부터 남의 장례식에 찾아 다니기를 좋아했고, 평생의 취미의 하나가 묘지 산책.

성격은 타고난 마이페이스로 초등학교를 다닐 땐 늦잠을 자고 천천히 일어나 아침밥 다 먹고 2교시 수업이 시작될 때 등교하는 일이 잦앗다. 다른 애들에 비해 체격이 우람했기 때문에 골목 대장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집안일을 도와주러 오는 '논논할멈'이라는 할머니가 요괴 야야기를 자주 들려줘서 요괴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 할머니와의 경험은 후에 <논논할멈과 나>라는 단편집으로 출판된다. 학교 성적은 바닥이었지만, 미술 실력은 대단해서 초등학교 교감의 권유로 그가 그린 그림이 공민관에서 전시회를 연 적도 있었고 톳토리에 천재소년이 나타났다고 신문기사가 나기도 했다. 학내 미술대회에서도 금상을 여러 번이나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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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때 그린 그림

이후 중학교를 졸업해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난다. 어머니는 그를 매우 걱정스러워했지만 반대로 자신은 도시로 나간다는 기대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오사카에 왔을땐 도시의 광경과 밤거리의 불빛에 감격해 마치 축제(마츠리)같단 느낌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한 석판 인쇄사의 하청 판화사에 근무했었지만 일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2개월만에 해고당했다. 이후 두번째로 근무한 회사에서도 해고당해 친척집으로 간 후 황달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것을 보고 노동이 아들한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그림 공부를 가르치기로 다짐했으며, 성격상 시험이나 입학할 때 자격이 없는 미술 학교를 선호해 오사카에 위치한 어느 (교토시 미술 공예 학교를 졸업한 화가가 설립했던) 미술 학교로 들어가 입학했다. 그러나 그 학교는 구조상 개인 학원이었으며 수업 방식도 실전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도안 강습회에 가까웠고, 이 때문에 휼륭한 화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실망하고 인근의 숲이나 산에서 시간을 때우며 얼마 다니지 않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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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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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후반 시절에는 그림책 창작에 몰두.

2.2 전쟁에 떠밀리다

1940년엔 일본 광업학교 채굴과에 응시해 합격한 바 있으나, 성적 부진과 결석 다량으로 인해 6개월 후 퇴학 처분을 받았다. 부모와 의논한 끝에 당시 일본 대학 부속의 구제 오사카 야간 중학교 진학을 권유받아 입학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낮엔 신문 배달을 하고, 밤에는 다카라즈카 가극단에 들르는 일이 많았으며,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징병신체검사를 받은 끝에 보충역으로 투입되었다. 하지만 소집 대상 범위가 넓어지면서 입영 가능성이 높아지자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철학 도서나 불교 서적 및 성경 등을 읽었다고 한다. 얼마 안되 소집 영장이 전송되어, 고향인 돗토리 현에 위치한 보병 제40연대로 입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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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토리 연대 이등병 때, 부모님과 동생과 함께

원래 그의 보직은 나팔수였으나, 나팔의 실력이 제대로 늘지도 않고 군 생활에 적응도 힘들어서 보직 전환을 두 번 신청했다가 모두 반려당했다. 세 번째 신청에서 그와 면담한 조장(=상사)이 "남쪽이 좋은가, 북쪽이 좋은가?"라고 물어서 막연히 추운 지역을 싫어했고, 최대한 고향에서 가까운 국내의 큐슈 같은 남부 연대에 배속될 생각으로 남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파푸아뉴기니령의 라바울 전선 배치였고, 이미 남방전선의 참상은 본토에도 익히 알려져 있는 바였기에 라바울 행을 통보받았을때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껴 무척 창백해진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배속되기 전까지 잠시 휴가를 받아 본가에 들렀는데, 가족들과도 기가 막혀서 서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을 정도라고.

이후 그는 보병 제229연대로 배치되어 러일전쟁에 사용되었던 낡은 순양함인 시나노마루를 타고 라바울(뉴 브리튼 섬) 전선으로 도착했다. 이미 제해권이 장악된 상태라 어뢰를 정신없이 피하며 겨우 상륙하였다. 어찌나 혼란스러웠는지 그가 상륙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말이 "여기가 어디죠?"였다고. 그리고 바로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보병 제229연대는 라바울 전선 일본군 최후의 증원부대로, 이후의 증원 시도는 수송선의 격침으로 모두 실패한다. 당시에 참전했던 전쟁 경험은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군대에서 상관에게 뺨을 많이 맞아선지 '싸대기의 왕'이란 별명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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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만화에서도 그려진다. 당시 일본군은 때려야 말을 잘 듣는다고 구타가 일상다반사였다. 이 야만스런 구타 행위 습관은 해방 후 한국군에서도 오랫 동안 고질병이었던 일본군에서 이어진 구습이었다. [2]

이후 보초를 서다 기총소사와 원주민 게릴라를 피해 단검과 훈도시 차림으로 정글을 헤매다 며칠 뒤 자신의 부대로 복귀한다. 동료들은 그를 반겨주었지만 상관한테 무기를 버리고 도망친데 대해 심한 질책을 들었고 이후부터 점차 허무주의적 사고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말라리아에 걸려 후송된 와중에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왼팔을 잃는다. 마취제도 없이 왼팔 절단 수술을 하며 다시금 생사의 고비를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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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짤린 팔에서 '갓난아기'의 냄새가 나면서, 생명의 힘을 느끼고, 무언가가 내면에서부터 도와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아마도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고, 매일 이 갓난아기의 냄새를 맡는다. 하늘의 향기였다. 그리고 신이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는다.

1945년 8월 25일 포츠담 선언에 대한 훈시를 부대장에게 전달받아, 처음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동료들처럼 '전쟁에 이긴 걸까?'란 생각이 들었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전쟁에 패배했다는 것을 깨닫고 동료 병사들은 절망해하고 장교들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전장에서 살았다는 생각에 무척 기뻐했다고. 그뒤 연합군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송환 순서를 기다릴 동안 자신이 잠시 교류한 원주민 부족 트라이 족에게 농지를 나눠줄 테니 같이 살자고 초대받았으나,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이듬해 3월 미귀환병 수송 임무를 맡고 있던 구축함 유키카제에 승선해 일본으로 돌아왔다.

2.3 그림연극 작가에서 만화가의 길

귀향 후엔 병원에서 본격적인 치료를 받은 뒤 1948년 미술학교에 다시 들어가기도 했지만 중퇴하고, 생업을 위해 동생과 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잘되지 않았으며 이때 사업차 들린 고베시에서 한 허름한 건물을 집주인한테 싼 값으로 구입해 '미즈키 장(미즈키 길이라는 주소에 있어서)'이란 이름으로 바꾸고 방을 빌려주고 월세를 받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들어오는 수입은 적었고 부업을 찾기 시작한다. 그때 그림연극 작가의 제자라는 청년[3] 이 건물로 입주한 것을 계기로, 접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 그림 연극을 그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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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연극(카미시바이(紙芝居))이란 1930년대와 전쟁이 끝난 1946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흥했던, 당시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 아이들을 불러모와 그림을 보여주면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대신 과자나 물엿사탕 등을 팔았던 행상인이 손님을 끌기위한 일종의 엔터테이먼트. 만화가 시라토 산페이, 코지마 고세키(아들을 동반한 검객)가 이 그림연극의 그림을 그린 경력이 있다. 나중에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진 황금박쥐는 인기있던 그림연극의 레파토리였다.

그렇게 한 그림연극 회사의 전속 작가가 되기는 했지만 무명 신인 작가이자 실적이 별로 없어서 돈은 많이 받지 못했다. 이후 프리랜서로 전향한 뒤 현재의 필명인 '미즈키 시게루'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1953년, 마침내 '미즈키장'을 팔아 빚을 갚고 니시노미야 현으로 이사하였다. 그 뒤로 조금씩 자신의 작품을 창작하면서 노하우를 다졌고, 당시 그림연극이 텔레비전과 대본소 만화에 밀려 쇠퇴하면서 35살 때 대본소 만화가로 전향해 1958년 '로켓맨'을 출판하면서 만화가로 데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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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켓맨 표지와 내용, 보다시피 캐릭터는 수퍼맨표절. 그림체는 땡땡의 모험의 영향도 보인다. [4]

대본소 만화가 활동 초기엔 원고료로 한권당 2만 5천에서 3만엔을 출판사로부터 지급받았는데, 이는 당시 일본 공무원 초임보다 높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한달에 1권을 그리기는 벅찬 일이었으며 당시 영세했던 대본소 만화 출판사는 경영악화로 도산해 원고료 떼 먹고 야반도주 도망치는 일도 흔했고, 열심히 그려도 작품이 잘 팔릴만한 내용이 아니면 출판을 해주지 않기도 해서 미즈키 시게루는 항상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자신의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전기물(전쟁기록물)을 시리즈로 출판했는데, 일본군측이 승승장구 이길 때까지는 잘 팔렸다가, 갈 수록 미군에게 지기 시작한 상황을 그린 작품들은, 독자들이 싫어해서 출판을 중지당한 적도 있었다. 1962년 부모의 강한 권유로 맞선을 치뤄 같은해에 결혼식을 올렸다. 맞선에서 결혼을 하는데 5일이 걸렸으며, 신혼여행을 할 여유도 없이 도쿄로 이동해 작품 제작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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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을 올리며 아내와 찍은 사진.[5] 아내는 후에 두 사람의 결혼생활을 다룬 자서전 '게게게의 여보'를 썼고, 영화와 NHK 연속 TV 소설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이 시점엔 일본의 대본소 만화 산업이 몰락해 가는 시기로, 그의 대본소 만화는 판매량이 떨어졌고, 어느 날 세무서 직원이 집을 찾아와 "이렇게 소득이 없을리가 없다"며 의심하자 그는 전당표 뭉치[6]로 내보이면서 "우리들 생활을 너희가 알 턱이 있냐"며 화를 내며 쫓아내기도 했다. 이듬해 딸이 태어나면서 생활고로 만화가를 그만둘 생각까지 한다. 그러던 중 그림 연극 작가 시절 그렸던 키타로를 소재로 한 '묘지의 키타로' 시리즈를 다시 그려보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첫 작품인 '유령 가족(幽霊一家)'을 대본소용 만화잡지에 게재한다. 허나 그림연극에 가까운 전개의 음울한 괴기물을 그려내 전혀 팔리지 않고 잡지연재는 2회만에 중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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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로 시리즈의 프롤로그가 된 '유령 일가'. 위 그림의 두 명이 키타로의 부모다.

그런데 연재가 중단된 후 일부의 독자들이 잡지 연재 재개를 요망하는 편지를 보내오자, 파산 직전이었던 해당 서점은 묘지 키타로 시리즈의 출판을 계속 이어나간다. 이것이 인기작이 되어 서서히 미즈키 시게루의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고, 키타로 시리즈는 출판사와 잡지를 옮겨가면서 발표해 1965년 별간 소년 매거진에 연재한 '테레비군'이 제4회 코단샤 아동 만화상을 수상하면서부터 45세로 인기 만화가의 자리에 앉게되었다. 이듬해 많아진 작화 작업[7]을 분담할 겸, 업무 처리를 위해 미즈키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이케가미 료이치츠게 요시하루 등이 그의 어시스턴트로 일하기도 했다. [8] 이때, 어시스턴트를 고용하면서 점묘법을 사용한 치밀하고 한 편의 그림 회화같은 정교한 배경 그림과 선화로 그린 심플한 만화체의 인물이 한 화면에 등장하는 미즈키 시게루의 독특한 그림체가 완성된다. 외국의 만화 평론가들도 이런 거는 처음 본다고 놀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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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이런 그림. [9]

잠시 인기가 사그라들은 1980년대 초기엔, 아내가 부업이라도 해야하냐고 물어볼 정도로 재정 상태가 악화된 적도 있다. 한때 그도 "요괴따위는 없다"며 영적세계에 대한 관심과 창작의욕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둘째 딸이 수학여행에서 요괴(目目連)를 봤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며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후 자신이 그렸던 만화들의 영상화와 재방송이 거듭되면서 다시 인기가 쌓여 일본에서 세대를 거듭한 만화가 중 한명으로 자리매김했다. 나이가 든 후에는 방송 인터뷰 등에서 보여준 특유의 재미난 말솜씨와 독특한 인생관이 시청자들의 호감을 얻어, 만화가로써 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나 자서전적 드라마가 만들어져 방송되기도 했다.

2015년 11월 11일, 자택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쳐 수술을 받고 입원치료를 받던 도중 건강이 급속히 약화되어 2015년 11월 30일 새벽,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영면하였다. 향년 93세.

2016년 1월 31일도쿄에서 미즈키 시게루를 추도하는 행사가 개최되었다. #

3 작풍

일본 만화계가 관동(간토)을 중심으로 한 만화 진영과 관서(간사이)를 중심으로 한 극화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던 경향에서 자유로웠던 몇 안되는 만화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귀향 이후 그림연극 일에 임했던 것과 더불어 전후 일본에 전파된 미국 코믹스에 영향을 많이 받아 초창기 그림체는 극화체에 가깝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극화에 가까운 그림체였을뿐, 그가 '극화공방'[10]의 회원이나 기타 극화 단체에 참여한 경력이 없고, 소년만화 잡지로 만화 연재를 옮긴 것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결정한 판단이기 때문에 섣불리 한쪽 진영의 만화가로 단정지을수 없다. 그와 비슷하게 미국 만화에 영향을 받은 만화가론 테라사와 부이치, 몽키 펀치 등이 있다.

초기 대본 만화가 시절엔 주로 전기 장르와 개그 장르를 더불어 다양한 장르의 만화를 그렸다. 여러 개의 필명을 활용해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이 빛을 보지 못하면서 작풍에 그로테스크한 경향이 늘어나 출판사한테까지 외면받으며 점점 상황이 불우해져 갔다. 한때 다른 필명을 사용한 작품들이 작가 자신의 의사에 상관없이 멋대로 필명이 변경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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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소 만화가 시절의 작품들

1966년부터 소년 선데이 연재의 '이상하고 이상하고 이상한 이야기'의 발표를 시작으로 요괴의 그림이나 관련된 전승들을 실은 요괴 도감 만화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이 존재하지 않는 요괴는 그가 직접 모습을 그리기도 했기 때문에, 일본인한테 그런 요괴들의 이미지를 각인시킨데 대해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 중 하나로 반드시 들어간다. 1995년 세계 요괴 협회를 설립해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전쟁을 주제로 하는 작품도 많이 발표했고, 이 장르의 대표작인 '총원 옥쇄하라!'는 내용의 90% 이상이 실제 자신의 경험으로 그려졌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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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원 옥쇄하라!와 같은 전쟁 만화들은 병사가 전사했을 땐 일반적으로 애도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스토리 전개에선 데즈카 오사무의 몇몇 단편이나 맨발의 겐과 동일한 사실주의적 전쟁 체험담을 그려내며, 일본의 피해자 행세를 강조하는 연출은 나타나지 않는다. 동남아시아로 배치되었을 때 보았던 일본군의 전쟁 범죄를 묘사해내기 때문에 전후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자료로 평가받기도 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증언 성격의 작품을 그린적이 있다. 태평양 전쟁 당시의 위안부를 목격한 것을 만화로 그렸다. #

4 작품 목록

  • 게게게의 키타로 - 대표작.
  • 악마군
  • 캇파의 산페이
  • 총원 옥쇄하라!
  • 논논할멈과 나 - 국내에는 "농농할멈과 나"라는 이름으로 발간.
  • 코믹 쇼와 역사
  • 미즈키 시게루의 고대 이즈모

그외 작품들은 위키피디아 문서 참조바람.

5 트리비아

  • 일본 만화가 중에서는 드물게 수면시간을 충분히 유지하는 만화가였다. 그래서 2쪽 단편 만화 '수면의 힘'의 내용으론 데즈카 오사무와 이시노모리 쇼타로가 어느 출판사에서 그를 만났을 때 철야 작업 진행 중임을 알리자 자신이 수면시간에 의한 수명 연장을 설파해 경고하기도 했다고.참조 그러나 매우 바빴을 때는 밤을 새가며 작업한것 때문에 현기증과 이명 증상이 나타났었다고 한다.
  • 작가 자신이 사용하는 인칭은 '미즈키 상', 이전엔 와타시나 오레, 보쿠를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 한쪽 팔을 잃은 것에 대해 "나는 한쪽 팔이 없어도 다른 사람의 3배의 일을 해왔다. 만약 양팔이 있으면, 타인의 6배는 일할수 있었을 것"임을 말했으며, 왼팔을 잃은 것에 대해 슬프다고 생각한 적이 있나는 질문에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목숨을 잃는 것보다 한쪽 팔이 없어도 살아있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답했다.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제작 당시, 요괴에 대한 자료 제공에 이노우에 히사시 등과 같이 참여한바 있다. 동시에 영화에 단역으로 등장한 미즈키 선생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 1993년부터 돗토리 현 사카이 미나토 시에 미즈키 시게루 로드의 공사가 시작되어 2003년 미즈키 시게루 기념관 개관과 더불어 완공되었다. 거리 이미지 2011년엔 동일본 대지진에 대해 자신이 표현한 그림이 뉴욕 타임즈에 게재되었으며, 2013년 코단샤에 의해 미즈키 시게루 만화 대전집이 출간되었다.
  • 어린 시절부터 대식가이기도 했는데, 생전 미즈키 프로덕션 트위터에 음식들을 먹는 사진이 가끔 올라오기도 했다.
  • 초기 작품은 대부분 소재를 해외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런데 1966년 아사히 소노라마에서 간행된 네코타마의 한 단편이 표절임을 인정해 사과문을 게재했으며 이후 아사히 소노라마와의 합의 끝에 소노라마 측에서 별도의 합의금을 지불해냈다. 이후 발매된 네코타마 단행본에서 그 단편은 삭제된 채 발매되었다. 사실 195,60년대 일본 만화계에서 표절 행위가 많았던 경우에 비교해 볼 때 이런 해결 사례가 있었던 경우가 드물었기도 했었음을 감안해보면, 다른 만화가들보다 저작권에 대한 시각이 앞서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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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전했을때 한쪽 팔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2015년 사망하기까지 현역으로 활동했다.
  • 자살률이 늘고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그들은 죽는 것이 행복한 것이었으니까 (자신이 좋아서 죽을 거니까)죽지, 군인들은 살고 싶어도 살수 없었습니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 교고쿠 나츠히코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미즈키 시게루 선생처럼 되고 싶다고. "미즈키 시게루의 최고걸작은 미즈키 시게루 본인이다(水木しげるの最高傑作は水木しげる、本人である。)"라고 평했다.

6 수상경력

  • 1965년 - 테레비군 : 제6회 코단샤 아동 만화상 수상
  • 1989년 - 코믹 쇼와 역사 : 제13회 고단샤 만화상 일반 부문 수상
  • 1991년 - NHK 제작 '논논할멈와 나' : 1991년도 문화청 예술 작품상 수상, 자수 포장 수상
  • 1996년 - 제25회 일본 만화가 협회상 문부 과학대신상 수상.[11]
  • 1998년 - 성운상 예술 부문 수상
  • 2003년 - 제7회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특별상, 아사히 소綬章 수상
  • 2005년 - 오리베 상 그랑프리 수상
  • 2007년 - Non Non Bâ(논논바오와 나) : 제34회 앙굴렘 국제 밴드 데시네 페스티벌 공식 2007 최우수 코믹상 수상.[12]
  • 2008년 - 쵸후시 명예시민상 수상
  • 2009년 - Opération Mort(총원 옥쇄하라!) : 제36회 앙굴렘 국제 밴드 데시네 페스티벌 유산상 수상
  • 2010년 - 문화 공로자 수상
  • 2011년 - 도쿄도 명예도민상 수상
  • 2012년 - Onward Towards Our Noble Deaths(총원 옥쇄하라! 영어판) : 2012년도 아이즈나 최우수 아시아 작품상 수상
  • 2015년 - Showa A History of Japan(코믹 쇼와 역사 영어판) : 2015년도 아이즈나 최우수 아시아 작품상 수상
  1. 그 이유는 '오사카는 공기가 나빠서 모유를 먹이기에 나쁘다' 라며, 이때가 태어나서 2년 정도 쯤으로 추정된다
  2. 덤으로, 영화 인간의 조건에서도 이런 군대 안에서 일어나는 구타와 이지메를 생생하게 고발하고 보여준다.
  3. 이 청년이 14살 때 그림연극 업계에 들어와, 후에 황금박쥐의 창시자 스즈키 이치로의 대본을 바탕으로 1950년에 '황금박쥐 수수께끼편'의 그림을 그린 카타 코우지. t02200136_0329020313045138623.jpg
  4. 그외 다른 표절 의혹이 있다. [1].
  5. 미즈키가 키가 작은 것이 아니라, 부인이 어릴 적 별명이 '키다리'였을 정도로 키가 170이 넘게 크다.
  6. 전당포에 물건을 저당을 잡고 돈을 빌렸을 때 받는 증명서로, 이것이 많을 때는 쌓여서 3센치가 넘었다고 한다.
  7. 절정기에는 한 달에 11개 잡지에 연재했다고 일본 위키피디아에 기록되어 있다.
  8. 츠게 요시하루는 대본소 만화가 시절부터 미즈키와는 만화가들의 모임에서 몇 번 마주 친 인연이 있었고, 가로의 편집부에서 미즈키 선생이 어시스턴트를 구한다는 소개를 받아 그를 찾아갔다. 이 당시에는 츠게는 이미 프로로 활동하는 만화가여서 일반적인 어시스턴트라기보다는 바쁠 때만 일주일에 2,3일 도와주고 일당을 받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어시스턴트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가로에 발표한 작가주의 단편 작품이 독자들로부터 혹평을 받자, 만화가 생활은 때려치고 다른 일을 하던가, 미즈키 선생의 어시스턴트로 계속 일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결국 어시스턴트 생활은 1년 반 정도 했다. 나중에, 자신이 받는 일당이 미즈키 선생한테는 꽤나 부담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어시스턴트를 고용하면 매월 인건비가 장난이 아니게 지출된다. 더구나, 츠게 요시하루는 이미 프로로 만화가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일당은 두둑히 챙겼다. 덕분에 츠게는 생활고 걱정은 덜었다.) 미즈키 시게루가 자서전과 인터뷰에 밝힌 바에 의하면 이케가미 료이치는 어시스턴트 시절 엄청 성실하고 부지런했고, 츠게 요시하루는 과작이면서 같은 만화를 여러번 재출판하면서 인세를 받는 것을 비꼬며 '일을 안하려하는 게으름뱅이'라고 평했다. 좋은 의미로 분발하라는 속뜻이었다.
  9. BS 망가 야화에서 분석하기를 이것은 고도로 계산된 연출로, 만일 캐릭터도 배경 그림과 같은 스타일로 그려버리면, 그 배경에 뭍혀버리면서 혼돈이 일어난다고. 그림으로써 분위기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화가로써의 미즈키와, 캐릭터로 스토리를 이어가야 하는 이야기꾼으로써의 미즈키가 절충해서 만들어낸 스타일이다. 이것은 한 때 어시스트를 한 츠게 요시하루한테도 영향을 끼친다.
  10. 1956년 오사카에서 설립된 1세대 극화 만화가 단체.
  11. 게게게의 키타로와 다른 요괴 만화들에 대하여.
  12. 일본인의 수상은 이 경우가 처음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