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다이


1913~1997/재위 1926~1945. 베트남 공화국 주석 1949~1955
베트남어: Bảo Đại/ 保大 보대, 휘는 응우옌푹티엔(阮福晪 완복전). 자는 빈투이(永瑞 영서)

1 개요

베트남 제국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자 허수아비. 그렇게 무능하진 않지만 식민지 허수아비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그저 막장으로 흘러가며 살아가다 보니 암군으로 욕을 먹고 있는 인물이다. 더불어 베트남 공화국 초대 주석이지만 이마저도 허수아비였다. 정비로 남 프엉 황후가 있는데 이분이 참 미인이다.

2 일생

1913년 10월 22일 베트남 후에의 황성인 자금성(紫禁城)[1]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프랑스 지배 체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혀 없었다. 프랑스 유학 및 프랑스 감시 체제에서 살아가면서 모든걸 포기하고 술과 여자에만 탐닉해 살아가게 된다. 이런 가운데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베트남에 쳐들어올 당시에도 일본의 허수아비 황제로 그 지위를 유지했는데, 그야말로 부의와 똑같은 신세였다.

하지만 그래도 아예 개념은 없지 않았고, 베트남에서 착취하는 일본에 대하여 "짐은 외국군이 짐의 백성을 해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소." 라며 막으려고 나서긴 했다. 물론 일본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베트남에서 착취하여 수백만 베트남 민중을 굶어죽게 하였다.

결국 이 모든 증오를 일본에게 빌어붙어 그가 벌인 짓이라고 베트남 민중들에게 증오를 받게 된다. 그래도 호치민은 일절 죄인으로 대우하지 않고 황제로서 정중하게 우대하며 황제위에서 흔쾌히 퇴위하길 권유했고, 그도 순순히 받아들여 베트민(越盟) 최고고문 자리에 앉았으나 실권자는 따로 있었으니, 여기서도 허수아비였다.

나중에 베트남 공화국 체제의 초대 주석이 되었지만 여전히 프랑스의 허수아비였기에 자포자기한 그는 짐의 시대가 이렇게 왔다며 절규아닌 절규를 하며 술과 탐욕에 찌들어갔다. 1954년 응오딘지엠을 총리에 임명했지만 응오딘지엠이 실권을 다 차지했고 프랑스가 물러나면서 바오다이도 이젠 이용가치가 없어져 1955년 민중투표에서 강제퇴위를 당한다. 하지만 당시 바오다이는 오히려 "이제서야 지겨운 허수아비 생활을 마감하는군. 30년이나 걸렸어." 라며 홀가분하게 퇴위 서명을 하고 베트남을 떠났다.

이후 프랑스에서 조용히 살아가던 그는 그동안 2명의 황후와 3명의 후궁을 두었고 1997년, 83세에 파리에서 숨질 때는 6번째 결혼한 프랑스인 아내 모니크 뱅 튀가 곁에서 자리를 지킨 가운데 눈을 감았다. 6명의 여인들에게 모두 5남 6녀 자식을 얻었다. 그리고 남 프엉 황후 소생의 장남인 바오 롱(保隆,보륭 1936~2007)이 응우옌 왕조의 명목상 황실 수장 지위를 이어받았다.

3 평가

3.1 긍정적

베트남에서 암군으로서 욕을 먹고 그가 죽은 뒤에도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으나 사치 등의 행각과는 별도로 그의 처지 자체에 대해서는 동정하는 이들이 많다. 허수아비로 살아가던 점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과도 비슷하다.

실제로 이 점을 바오다이 본인도 잘 알고 있어, 젊은 시절 허수아비로서 인생에 대한 좌절감에 취해서인지 프랑스 망명 이후로도 사치를 부리며 잉여스러운 모습만 보였다고 한다. 비록 1972년 북베트남에 보내는 메시지로 전쟁 중단 및 몇몇 언행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다지 부각되진 못했다.

3.2 부정적

위에 나온 사치야 확실히 비난받을 점이긴 하다. 1952년 미국에선 바오다이가 1년에 500만 달러 가까이를 홀로 쓰고 있으며 스위스프랑스 은행에 상당수 돈을 숨기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당시 베트남 국가예산 5%에 달했던 거액이다. 미국 카투니스트이던 알 허시펠드(Al hirschfeld/1903~2003)는 1947년 바오 다이를 홍콩에서 만났는데 "거만한 돼지가 된 황제."라면서 만화로도 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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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 쑤옌의 보스 '바이 비옌(Bảy Viễn)' 레 반 비옌(Lê Văn Viễn, 黎文園 여문원) 겉보기엔 멀쩡하게 생겼다.

그밖에도 큰 비난거리 중 하나가 조폭 세력인 베트남 야쿠자 빙쑤옌(Bình Xuyên, 平川 평천)을 휘하 부대로 둔 점이다. 그야말로 이득을 위해서라면 친프랑스, 친일파도 된 빙쑤옌은 천하의 개쌍놈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일본의 베트남 침공 당시 친일파가 되어 항일 베트남인들을 가혹하게 학살하고 그 식솔 및 마을 사람까지 팔다리를 잘라버린 일까지 저질렀다. 그런데 빙쑤옌은 정작 일본군이 베트남에서 물러날 기미를 보이자 이번엔 정반대로 친일파 베트남인들을 돌아다니며 죽여버렸고 그 식솔들 팔다리를 잘랐다. 즉 기회주의자. 그러나 자신의 편이 없다고 할 변명이 있을지 몰라도 그 바오다이가 빙쑤옌 보스이던 바이 비옌[2]을 친위대장으로 임명하고 대장 계급을 쥐었던 점은 두고두고 비난거리. 이게 응오딘지엠 탓이라고 하는 이도 있으나 되려 그 응오딘지엠이 이걸 반대했었다. 그 지엠조차도 빙쑤옌을 세균덩어리라고 멸칭할 정도였으며 민중들에게 어떤 반응을 받았는지 알만했다.

참고로 응오딘 지엠은 바오 다이가 퇴위하자마자 빙쑤옌을 군대로 뭉개버렸다. 빙쑤옌은 그냥 조폭이 아니라 사실 군벌 세력이나 다름없었기에 경찰로 뿌리뽑을 수 없었던 걸 지엠이 알았던 거였다. 참고로 빙쑤옌 소탕전은 거의 내전세력 소탕과 똑같을 정도였는데 기관총은 기본이고 박격포에 일부 빙쑤옌은 남베트남군에 대포로 응전할 정도였다. 그래도 결국 빙쑤옌 다수를 뭉개면서 간부들을 공개 총살시켜버리며 거의 뿌리를 뽑았다. 바이 비옌은 프랑스로 튀어서 살다가 1971년 천수를 누리고 뒈지셨는데 참고로 1956년 남베트남 법원은 궐석 재판으로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고 파리에서 몇 번이나 암살을 당할 뻔했는데 갱조직 문제로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빙쑤옌을 미국도 안 좋게 봤기에 거기를 뭉갤 때 미국에서 격찬하며 지지했다. 반대로 빙쑤옌 일로 바오 다이는 더더욱 욕을 처먹을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부터 허수아비로 자라나서 저렇다는 변명도 있겠지만 우리나라로 치자면 바오다이랑 같은 순종이 친일파건 뭐건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저런 짓을 한 학살자들을 휘하 부대로 앉혀 저런 짓을 묵인해줬다면 과연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해해 줄 수 없을 것이다.
  1. 중국 자금성에서 모양을 몇개 따왔다. 그러나 B-52 스트라토포트리스 등의 폭격 레이드로 깨강정 신세...
  2. 1904~1971. Bảy Viễn. 본명은 레반비엔(Lê Văn Viễn, 黎文園 여문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