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3세

라틴어: Paulus III
이탈리아어: Paolo III
영어: Pope Paul III

교황명바오로 3세 (Paulus III)
세속명알레산드로 파르네세 (Alessandro Farnese)
출생지교황령
사망지교황령 로마
생몰1468년 2월 29일 ~ 1549년 11월 10일 (81세)
재위기간1534년 10월 13일 ~ 1549년 11월 10일 (15년 28일)
문장
역대 교황
219대 클레멘스 7세220대 바오로 3세221대 율리오 3세

1 개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220대 교황. 세속명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

종교개혁이 불꽃처럼 독일에 번지는 가운데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는 등 가톨릭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개혁운동을 착수한 동시에, 르네상스 예술을 전폭적으로 후원한 교황으로도 유명하다. 전임교황들이 저지른 친족 등용과 직권 남용을 그대로 이어받아 비판받긴 하지만, 종교개혁의 확산을 막고 전대인 클레멘스 7세가 젊은 혈기로 말미암아 교황령을 둘러싸고 온갖 분란을 벌인 것을 그럭저럭 수습했다는 평을 받는다.

2 재임 전

이탈리아 카니노 지역의 명문 가문인 파르네제 가문 출신이다. 로마시대 귀족 후예로 명문가인 오르시니 가문이나, 콜론나 가문만은 못하지만 그럭저걸 뼈대는 있는집안인데 파르네제 가문은 원래 용병대장 출신이다.
그는 로마피렌체에서 인본주의 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과 연관을 맺으며 공부하였고 훗날 교황 레오 10세가 된 조반니 데 메디치와도 친분을 가졌다.

늙어서 교황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지만 소싯적에는 날마다 사교 클럽에 참가하여 수많은 여성들과 교제하는 호색한(!)이었고, 그의 누이 줄리아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정부로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 25세에 교황의 애첩인 누이 줄리아 파르네제의 덕으로 25세에 추기경이 되었지만, 이전의 생활은 버리지 않았다. 특히 한 정부와의 사이에서는 4명의 자녀를 보았을 정도였다. 성직자가 되기 전에 낳았다는 쉴드가 있지만 사실무근인게 장남 피에로 루이지가 1503년생이다. 뱃속에서 20년은 있어야 가능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사제독신 규정이 느슨한 시기에 한 여인에게서만 낳았다는 점이다. 이 중 장남이자 파르마 대공인 피에로 루이지의 차남 오타비오는 부친의 뒤를 이어 파르마 대공이 되었고 훗날 교황의 종교적 파트너인 카를 5세의 서녀와 혼인을 맺게 되며[1], 장손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제는 추기경 자리에 오른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서품을 받아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마음을 다잡은 후, 로마 교회의 재산 관리자를 거쳐 1493년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그런데 이런 벼락 출세 뒤에는 그의 누이 줄리아가 알렉산데르 6세가 가장 아끼는 첩실이라는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는 흑역사가 있다. 하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1509년 알렉산데르 6세와는 원수지간이던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도 파르마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알렉산데르 6세, 비오 3세, 율리오 2세, 레오 10세, 하드리아노 6세, 클레멘스 7세 등 도합 6명의 교황을 모시면서 추기경단 의장으로도 활약했던 바오로 3세는 1534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선종하자 67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경험과 재치를 인정받아 만장일치로 교황직에 올랐다.

3 교황 재임기

원래 하드리아노 6세 사후에도 교황 선출이 유력했으나, 누나 줄리아 파르네세가 알렉산데르 6세의 첩실인 인연으로 치맛바람으로 추기경이 된 흑역사에다가 성직에 있으면서도 사생아를 넷이나 두었기 때문에 에지디오 추기경에게 집중 공격을 받아 무산되었다.

15년 후라 그런 흠에 대한 비판은 약해졌고 무엇보다 67세의 에다가 맡은 직책마다 유능했기에 쉽게 선출되었다.

전임 교황들의 오점인 친족등용과 가문 퍼주기는 바오로 3세도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자신의 가문인 파르네제 가문의 퍼주기의 일환으로 나이가 고작 16세, 14세에 불과한 두 손자를 추기경단에 입회시켰고, 알렉산드르 6세가 체사레에게 퍼주었듯이 피에르 루이지를 교회의 최고 지휘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파르마와 피에첸차를 퍼주려고 전쟁을 벌인것은 큰 오점으로 꼽힌다. 피에르 루이지의 아들 오타비오를 카메리노 군주에 심어주고 메디치가의 마르게리타와 결혼 시키기도 했다. 어쨌든 파르마와 피아첸차는 200년간 파르네제 집안이 다스리게 되었다.

1536년 사육제를 다시 부활시켜서 로마에서 투우 경기를 열고 무도회와 연회를 벌였고, 건축 분야에선 로마 줄리아 거리에 팔라초 파르네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미켈란 젤로에게 캄피돌리오 광장의 설계를 맡겼고 안토니오 상갈로에게 베드로 성당 건축을 맡긴다.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상을 캄피돌리오 광장 한가운데 옮긴 것도 이 시기의 일.

재임 초기의 그는 개신교에 대해 강경책 대신 유화책을 사용하여 관대하게 처우하는 한편, 수십년간 지켜봐 온 교황청 내부의 부조리를 바로잡고자 내부적인 개혁에 착수하여 추기경단을 물갈이하고 수도회를 일신시켰다. 또한 전임 교황인 클레멘스 7세가 세속 군주인 카를 5세와 맞서다 처참하게 개발살난 꼴도 목격했기 때문인지 가급적 원만한 관계를 지키도록 노력했다. 그 결과 교황령에서 종교로 말미암은 폭동이 일어나는 사태는 미연에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성공회를 창시하여 수장령을 선포한 잉글랜드헨리 8세에게는 매우 단호하게 대처했다. 사건의 발단이 된 앤 불린과 헨리 8세의 결혼은 이미 전대 클레멘스 7세 시절에 있었지만, 그로 말미암은 잉글랜드와 교황청의 불화는 바오로 3세 재임기에 극대화되었다. 헨리 8세가 수장령을 선포하자 불같이 화를 낸 바오로 3세는 1538년 즉각 파문 조치를 취하여 잉글랜드의 왕을 이단자로 단죄하였다.

이 시기 이후 바오로 3세는 처음의 관대한 모습에서 강경파로 돌변한다. 1542년에 로마에 이단심문소를 창설하여 교황청 차원의 개신교인 색출 및 처벌이 진행되었으며, 독일의 루터교도들과 대치중인 카를 5세에게도 적극적인 활약을 주문했다. 한편으로 스페인에서 창설된 예수회를 공인하여 가톨릭의 강경화 및 해외 포교에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개신교에 맞서 가톨릭을 결속하기 위해 1545년 반(反)종교개혁 차원에서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내부의 혼란과 분열을 수습하고 각종 규범을 확립하여 그간 안습한 모습을 보여준 가톨릭을 쇄신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가톨릭은 더욱 결연한 태도로 개신교와 맞서게 되었고 교황청의 입지는 탄탄해진다.

이 과정에서 개혁을 위한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는데 훗날 바오로 4세가 되는 카라파 추기경도 있었다.카라파 추기경의 보고서는 성직매매와 면벌부 판매, 주교관할구에서 축재등 기존 관행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교황에게도 직격탄을 날렸다. 친족 등용과 가문 퍼주기를 대놓고 비판했다.

그 외에 끝물로 접어든 르네상스를 후원하였으며 이를 통해 '르네상스를 후원한 마지막 교황'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또한 클레멘스 7세에 이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최후의 심판을 완성할 수 있게끔 지원했고, 바티칸 도서관을 확충하였으며 교황의 긴급 피난처인 산탄젤로성을 프레스코화로 세련되게 꾸몄다. 미켈란젤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책임을 맡기면서 그에게 설계에 관한 전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는 재임 15년만인 1549년에 82세의 고령으로 선종했다. 말년은 평온하지 못했다. 1547년 아들 피에르루이지의 영지 피아첸차에서 폭동이 일어나 아들이 살해당한 것. 게다가 파르마도 바오로 3세에 항거하여 도시를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 5세에 들어 바치려고 했고, 이에 관계된 추기경을 로마로 소환하여 그의 모자를 집어던지고 격분한지 몇 시간 후 사망했다고 한다.

이같은 바오로 3세의 업적은 교회 개혁, 학문과 예술의 진흥, 트리엔트 공의회 소집 등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재임기에 크게 결속한 가톨릭은 후대로 가면서 더더욱 강경해져 프로테스탄트와 격렬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4 기타 매체의 바오로 3세

4.1 튜더스에서

배우는 피터 오툴

시즌 1에서는 언급만 되다가 시즌 2에 특별 게스트로 간간히 등장. 헨리 8세나 카를 5세 같이 우리에겐 군대가 없지만 그대신 다른 힘이 있다며 노회하고 경륜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람 앞에서는 로마를 순례중인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가 어버버할때 이교도 때려잡을거지? 하면서 등떠밀었는데 분위기상 어쩌지 못하는 모습이 나온다. 프랑스로 돌아가자 쌩깐건 함정

미켈란젤로에게 벽화를 그리게 하는 장면에 미켈란젤로가 아주 짤막하게 지나간다. 회의 와중에 장손 알레산드로(이름은 교황의 속명과 같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방문하자 무척 반가워하면서 다른 추기경들에게 손자가 좋은 추기경이 될 것이라 말한다. 또한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서 예수회를 적극 지지하며 지원하는 장면도 나온다.

여기에서 그의 모습을 확인하자.
  1. 그 아들이 스페인 제국군의 명장 파르마 공 알레산드로 파르네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