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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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상의 바이킹

바이킹은 8세기 말에서 11세기 중반에 걸쳐 활동한 이들을 가리키며, 스칸디나비아덴마크에서 그들 고유어로 협곡(vik)에 사람 명사인(ing)가 붙은 단어로로"협강에서 온 자"란 뜻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정설은 없다. 하지만 이 용어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19세기 범스칸디나비아주의가 발족하면서부터 이 이름들이 발견되는바 당시 민족주의 사상에서 나온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발견된 바이킹 문자는 1차, 2차문자로 나뉘는데 1차문자는 해독되지 않았다. 이거 해독하면 떼돈번다!)

이 명칭은 게르만인들이 북에서(북北의 기준은 그들이 활동하던 구 로마의 영역, 현재의 동/서 유럽을 기준으로 한다) 내려온 노르드인(북게르만)들을 통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참고로 바이킹이라는 발음을 사용하는 나라는 영국[1]뿐이다. 프랑스, 독일, 스웨덴, 덴마크 등의 여타 모든 유럽국가에서 부르는 명칭은 '비킹'. 영어식 발음에 익숙해져있는 우리에겐 뭔가 어색하다.
8세기 이후, 유럽은 점진적인 농업 기술의 발달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지구는 소(小)빙하기를 맞이했으며 이로 인해 세계적으로 기온이 점차 하강하며 겨울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기후의 변화는 농경에 큰 타격을 가져왔고,[2] 특히 북쪽에 살던 노르만족의 경우 자체적인 농업과 어업 생산량만으로는 인구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노르만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남으로 대이주를 시작했고, 이들은 단 몇 세대만에 유럽에서 잔인한 광전사로 묘사되기 시작한다.

이들은 크게 스웨덴계 바이킹과 덴마크계 바이킹으로 나눠지는데 스웨덴계열의 바이킹의 경우 고틀란드를 중심으로 하는 발틱해에서 볼가강과 드네프르강으로 들어가는 동쪽 루트를 선호했으며, 덴마크 계열의 바이킹들은 영국과 프랑스 남부 즉 대서양을 향해 항해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측정할 수있는 근거가 바로 영국의 헤이스팅스 전투 이전까지 존재했던 데인 로(dane law)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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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의 활동 범위 및 이동 경로 (숫자는 최초 진출년도)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가지고 있어서 8세기-11세기 사이에 유럽의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등의 해안지방은 물론이고 동로마 제국콘스탄티노플 근교마저 약탈한 기록이 있다. 카롤링거 왕조가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로 분열되고, 그 내부에서도 친족간의 골육상잔이 벌어지고 있던 상황에서, 프랑스 지역은 바이킹의 약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영국과 아일랜드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서, 영국의 경우 한때 웨일스를 제외한 전 왕국들이 바이킹에게 넘어간 적이 있고,[3] 아일랜드를 침략한 바이킹들은 더블린, 코크 등지에 여러 소왕국들을 세웠다. 해적으로서의 야만스런 바이킹의 인상이 깊게 남아있어서 '도끼를 들고 뿔투구[4] 를 쓴 간지 마초 바바리안'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들은 탁월한 항해사이자 탐험가, 상인이기도 했다. 또한 의외지만 바이킹끼리는 문제가 있으면 대화로 풀었다.[5]

이들은 후에 프랑스 왕으로부터 광대한 영토를 하사받아 10세기 경 노르망디 공국을 건립하였고 정복왕 윌리엄을 시조로 하는 영국의 노르만 왕조를 열었으며, 시칠리아에 나라를 세웠고, 루르의 루스족 등은 강을 따라 러시아로 들어가 몇몇 국가를 세우기도 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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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 11세기 스칸디나비아인의 정착

이들은 동로마 제국이 지배 중이던 시칠리아[7]를 개박살 내버렸고, 서방교회에 이탈리아 남부 영토를 통해 간섭하던 동방교회에 막대한 타격을 입혀버린다. 이탈리아 남부를 통한 서방 세계에 대한 동로마의 간섭은 결국 바이킹의 지속적인 침공으로 이탈리아 남부를 동로마가 영구히 상실하면서 끝장이 나버렸다 망했어요(주로 바이킹의 정착에서 남이탈리아가 많이 언급돼는데 이미 기독교화와 프랑스화가 됄대로 돼서 프랑스 문화와 정체성을 가지고 프랑스어를 쓰고 군대도 바이킹 특유의 롱보트를 타고 다니는 떙보병 군대에서 중기병 기사 중심의 프랑스식 군대로 완벽히 변화했는데 노르만인들이 갑자기 바이킹으로 변모해서 국가를 세운 양 시칠리아 왕국이 바이킹의 정착이라면 일본제국의 중국침략과 태평양전쟁은 왜구의 중국침략과 동남아, 미국 침략이라는거와 별 차이가 없다). 이미 라벤나 총독부는 동로마가 그놈의 성상파괴운동 때문에 개판이 나있는 동안 롱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개발살 내버린[8] 상태라서 사실상 로마 교회에 대한 압력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했는데, 그나마 남아 있던 라벤나 총독부의 이탈리아 남부 영토도 바이킹 덕분에 개박살나고, 바이킹이 카톨릭으로 개종한, 즉 노르만이 된 다음에는 교황에 대한 충성으로(...) 아예 라벤나 총독부의 최후의 거점 바리까지 밀어버렸다. 여기에 나름대로 동로마를 살리려고 서방 세계를 이용해 먹은 알렉시오스의 계략이 결과적으로 개막장 제4차 십자군이란 결과로 이어짐으로써[9] 이번엔 완전히 망했어요. 한편 9~10세기에 남하해서 남우크라이나 지방에 정착한 바이킹의 일파들은 바랑기안 가드로서 동로마 군에 복무하였다. 반란과 배신이 판을 치던 난세에 용병으로서는 보기 드문 충성심, 그리고 바이킹 특유의 무자비함과 용맹을 발휘하며 동로마 최정예 근위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들의 항해술이 얼마나 경이로웠는지, 아이슬란드그린란드는 물론이고 현재 캐나다 동부, 뉴 펀들랜드까지 바이킹이 진출하여 빈란드라는 식민지[10]를 건설한 흔적이 남아있다. 이것은 바로 만화빈란드 사가》에서 다루는 내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원주민들과의 마찰과[11] 기후의 변화로 결국 그린란드로 돌아가야 했다. 아메리카에서의 정착을 단념하고 철수한 후에도 바이킹들이 캐나다를 방문한 흔적이 보이는데, 이는 배를 만들기에 적합한 양질의 목재를 구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 패스파인더는 인디언 부족 사이에서 키워진 바이킹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거기서 바이킹들은 무슨 모르도르 오크 군단같은 악의 무리로 나온다.(...) 애초에 약탈당하는 입장에서야 그렇게 보일법도 하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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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d/dd/Varangian_routes.png/640px-Varangian_routes.png

또한 바이킹은 동방과도 많은 교역을 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발굴되는 바이킹 무덤의 부장품에 8세기 경 인도 동북부에서 제작된 불상, 알라라고 새겨진 반지, 이슬람 동전 등 수 천점의 동방의 물품이 같이 출토되고 있다. 이들의 동방 교역을 연구한 결과, 볼가강을 따라 카스피해를 지나서 지금의 이란에 도달하는 Volga Trade Route 라고 부르는 바이킹의 교역로가 밝혀졌다. (위 그림의 붉은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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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는 모르지만 뿔투구를 쓰고 다닌다는 인식이 박혀있는데,[12] 이러한 투구들이 바이킹들의 무덤에서 간간히 발견되기는 하나, 실용적으로 사용되기에는 무리인 수준의 그 크기나 장식의 화려함으로 인해 종교적인 용도로 쓰였다고 생각되며, 실제로 이 뿔투구를 쓴 인물을 묘사한 유물들은 덴마크의 시랜드섬에서 출토된 쌍둥이 신 알치의 모습으로 주조된 깃대 장식주물이나 뿔 자체를 신비로운 신앙의 상징으로 여긴 당시 기록이나 묘사들에서 그러한 점을 확신할 수 있다.[13] 실제 전투를 묘사한 당시의 그림들에서는 이런 뿔투구의 모습은 볼 수 없고, 보통은 원뿔 모양의 투구에 덧붙여 눈이나 얼굴 전체를 덮는 가면 모양의 투구를 많이 썼다. 위 그림에서 초창기 바이킹들의 투구 양식을 볼 수 있다.

또한 왠지 지저분했을 것 같다는 편견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위생을 무척 중시하는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바이킹들의 거주지가 있던 곳에서는 빗과 귀이개, 족집개, 면도칼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원시적인 형태의 비누까지 사용했다고 한다.[14] 심지어 바이킹들의 노략질에 시달렸던 영국측의 기록에도 바이킹들은 굉장히 깨끗하게 정리정돈을 하며 산다고 적혀있다. 또한 오늘날의 사우나처럼, 온천의 증기로 목욕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바이킹들하면 헝클어진 장발과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남성을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머리를 짧게 잘랐으며 면도를 했다. 머리에 양쪽 귀를 두르는 선을 기준으로 그 밑에 머리는 다 짧게 자른 머리 모양[15]을 깔끔하다고 좋아했다. 면도도 했는데, 당시에는 거품 비누도 없고 좋은 면도날도 없으니 도끼날로 다듬었는데, 워낙 하기가 힘든 일이라서 고급 문화로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양날도끼와도 연관이 많다고 여겨지지만, 바이킹들은 가벼운 손도끼를 좋아했고, 제의 의식에나 사용했다는 것이 당대의 성상화나 조각품들에서 드러나고 있다.[16] 양날도끼는 보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긴 하나 어느 용도로도 실용성이 전혀 없기 때문.[17]

물론 바이킹의 공격이 당시 서유럽의 여러 국가들에게 큰 타격을 준 것은 사실이다. 바이킹의 공격으로 서유럽의 많은 교회와 수도원, 마을이 파괴되고 약탈되었으며, 상당한 인명과 경제적인 피해를 입었다.

바이킹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부터로, 이때부터는 해안방어 체계가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약탈의 주 수입인 노예 무역이 농노제로 효용이 떨어진 것, 다수 바이킹이 크리스트교로 개종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18] 또한 11세기에 정점을 찍었던 온난한 기후도 다시 악화되어 점차 소빙기 기후로 변해갔다. 그린란드는 더이상 푸르를 수 없었고, 바이킹의 주 근거지는 유빙으로 항해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역사소설가 세실리아 홀랜드는 1066년의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프랑스화한 노르망 바이킹이 승리하고, 뒤이어 영국을 점령하면서 바이킹의 쇠퇴가 시작되었다고 평한다. 만약 이 전투에서 영국 왕 헤럴드가 눈에 화살을 맞고 죽지 않았더라면 잉글랜드는 라틴 문명이 아닌 바이킹 문명 하에 좀 더 남아있었을 것이고, 영국제도를 교두보로 바이킹은 융성했을 것이란 떡밥이다.

하지만 그들은 영어에게 약 139개의 단어를 선물하였고[19]영어권에서는 그들의 신을 위한 요일이 있으니 티르의 화요일, 오딘의 수요일, 토르의 목요일, 프레이야의 금요일이다.

1.1 전설의 바이킹 명검 Ulfber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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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d/de/Viking_swords.jpg/623px-Viking_swords.jpg

전투종족 바이킹은 도끼를 비롯한 여러 무기를 사용했지만, 그 중에 Ulfberht 라는 칼이 유명하다. 이유인 즉슨, 서기 800 ~ 1000년 경에 현대의 고탄소강에 필적하는 탄소 함유량이 높으면서 철의 순도도 높은, 당시로서는 오버테크놀러지가 사용된 최첨단 무기이기 때문이다. Ulfberht에 사용된 것과 같은 순도 높은 철을 얻으려면 노에서 1700도 이상으로 철을 가열하여 불순물을 없애야 하며, 유럽에서는 산업혁명 시기인 1700년대 중반 이후에나 이러한 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이킹은 800 ~ 1000 년 경에 이러한 강철을 사용하여 칼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순도 높은 고탄소강으로 검을 만들면, 탄성이 좋아서 충격을 받아도 날이 잘 부러지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날의 가운데가 파인 특유의 디자인은 보다 적은 양의 철로 검을 만들 수 있게 되어 더 가벼우면서 구조적으로 충격에도 더 강하게 된다.

바이킹이 활동하던 당시 유럽에서는 좋은 품질의 철괴를 구할 수 없었고, 무기를 만들 정도로 대량으로 사용했다면 어딘가에는 분명 이를 제련한 흔적이나 유적이 있어야 하는데 유럽 어디에서도 일절 발견되지 않았다. 좋은 품질의 철괴는 Volga Trade Route 를 통해 이란 또는 중앙 아시아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Ulfberht 는 칼날에 VLFBERHT 라고 각인되어 있는데, +VLFBERHT+ 와 +VLFBERH+T 로 2가지 종류의 각인이 출토된다고 한다. +VLFBERH+T 가 탄소 함량이 높은 철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것이 진품이고 나머지는 복제품으로 보고 있다. 어디에나 짝퉁은 있게 마련

이러한 재질과 더불어, 칼을 주조할 때 연철과 강철을 꼬아서 접어 두드리는, 페턴웰디드 접쇠 기법을 쓰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주조한 경우 검신에 무늬가 드러나고 각 철강의 장단점들이 서로 보완되어 강도가 월등한 물건이 나왔다.

유튜브에서 "Secrets of the Viking Sword" 라고 검색하면 Ulfberht 검에 대해 자세하게 다룬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영어로 나오니 해석은 각자 알아서 하자

1.2 바이킹의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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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의 배 (Knarr)

바이킹의 배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탐험, 무역, 전투 등등의 다목적 선박인 드라카르(Drakkars)[20]와 무역, 수송 및 대서양 항해에 특화된 크나르(Knarr)가 있었다 (Knorr 또는 Knörr 라고도 함). 드라카르의 경우, 재질이 가볍고 선체가 안정적이어서 기동성이 당대의 다른 배들보다 우월했고, 노를 저음으로서 강을 역류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현대의 고무보트처럼 전사들이 들고 이동하기도 했다. 바이킹은 유럽을 약탈할 때에도 수로를 많이 이용했는데, 노르드인들은 이러한 뛰어난 기동성을 바탕으로 한 전술을 구사해 당시의 다른 민족(게르만 계통의 고트족, 프랑크족부터 켈트족에 이르기까지)과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크나르는 수송이 주목적이어서 롱쉽과 비교하여 더 짧으면서 넓고 더 깊게 지어졌다.(길쭉한 롱쉽과 달리 비교적 둥글둥글하게 지어졌다는 얘기다.) 최대 24톤을 실어나를 수 있었다 한다.

드라카르의 속도에 대한 입증된 기록으로는 1893년에 바이킹 선을 재현해 대서양을 횡단한 사례가 있다. 이 항해는 28일만에 성공했는데 이는 하루에 평균 185km를 이동한 것이다. 유럽을 공격했을 때 몽골군의 이동속도가 3일에 280km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경악할 만한 수준이다.[21]

드라카르는 수위가 낮은 강에서도 사용될 수 있었으며, 반대로 대양을 건너는 것에도 사용되었다. 빈란드 사가[22]에 기록된 전설적인 붉은 에리크(Erik the red)가 신대륙을 발견해낸 항해에서 사용했던 배도 이 종류의 배다. 군사목적 이외에도 무역, 이주 목적의 항해에도 사용된, 바이킹의 상징과도 같은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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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만화, 빈란드 사가에서 묘사된 롱쉽의 모습.

유명한 바이킹 배로는 노르웨이 오세베르그에서 발견된 잘 보존된 바이킹 배로 '오세베르그 배'라고 불린다. 무덤근처에서 발견되었고, 젊은 여성과 나이 든 여성 두명의 유골도 있으며[23], 사치스러운 부장품도 많이 있었기때문에 의식용으로 만든 배라는게 정설이다. 결정적인 증거로는 배에 있는 장식등은 너무나 정교하게 만든 반면 실용성은 별로라고... 항해보다는 아마 해안에서 열리는 의식에 활용된 배라고 보고 있다.

1.3 노르드인과 바이킹 그리고 노르만족

노르드인[24]과 바이킹은 동일시 되지만 노르만족과는 다르다. 바이킹은 배를 타고 이동하는 해적을 칭하고 노르드족은 해적뿐만 아니라 교역과 평화적인 정착 그 시대에 정착이 과연 평화적이었겠냐만은..을 한 북유럽에 사는 민족을 통칭하는 말이다. 넓은 의미에서 바이킹은 노르드인이라고 칭하는게 옳겠다. 왜구가 일본인의 전부가 아니듯이..
하지만 노르드인과 노르만 족은 북쪽사람이란 의미로 같지만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노르만족은 프랑스에 정착해 프랑스어를 쓰고 카톨릭을 신봉하는 프랑스화된 노르드인을 말한다. 유전적으로도 프랑스인과 수대에 걸쳐 혼인관계를 통해서 노르드인과는 다르다.

1.4 유명한 바이킹들

1.5 바이킹계열의 유명한 후손들

1.6 미디어의 바이킹들, 혹은 모티브로 한 것들

볼드체는 바이킹이 주역인 작품들

2 바이킹(탐사 계획)

1970년대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무인 화성탐사계획. 화성에 무인탐사선을 착륙시켜서 수년동안 각종 과학실험과 관찰을 진행하였다. 타이탄로켓에 의해 발사되었다. 칼 세이건도 이 계획에 참여하였다.

  • 바이킹 1호
    1975년 7월 20일 발사. 1976년 7월 20일 화성 착륙. 1982년 11월 13일 통신두절.
  • 바이킹 2호
    1975년 9월 9일 발사. 1976년 9월 3일 화성 착륙. 1980년 4월 11일 작동정지.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3 놀이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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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들이 타고다닌 배를 본따서 만든 놀이기구. 길죽한 배 모양으로 생겨서 앞 뒤로 흔들리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놀이기구를 통칭하는 스윙 보트(Swing Boat)라는 명칭이 있지만, 이 이름보다는 "바이킹"으로 많이 통한다. 그 이유는 1980년대 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에서 국내 최초로 스윙 보트를 설치했는데, 여기 붙인 놀이기구 이름이 "바이킹"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큰 인기를 끌면서 그대로 보통명사로 굳어졌다. 이건 해외도 마찬가지로, Pirate Ship(해적선)이라는 명칭이 보통명사화 되어 있다. 북한말로는 "배그네"라고 한다.

무서워하는 사람은 되게 무서워한다.[26] 구조상 멀미하기가 굉장히 쉽다.걔다가 심장이 왕복 후 올라가는 시점에서 심장이 떨어지는느낌+바람이 합세하면 비명이 나오는 느낌, 롤러코스터 입구에서 토하는 사람은 못봤어도 바이킹 앞에서 토하는 사람은 한두번 봤을 것이다. 그리고 내려가는 시점에서 그곳이 간지럽다. 참고로 남자 한정. 국내에서 가장 큰 바이킹은 에버랜드의 콜럼버스 대탐험이며 월미도 놀이동산의 이것이 특히나 유명하다. 신나게 놀고 있는데 안전장치가 올라가는 사고로 유명하다(...).[27] 겪어본 사람이 은근히 있다. 주의할 것.

그밖에 사람이 곁에서 열심히 움직여야 도는 수동 바이킹도 있다. 사실 신기할 것도 없다. 수동 바이킹은 한국의 놀이터에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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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사진. 저거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데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지는거다

물론 저건 웃기자고 찍은 것이지만 시리아에서 찍혔다는 작은 수동 바이킹도 그리도 신기한지 넷상에서 흡좀무이니 뭐니 이러는데 70년대, 아니 80년대 중순까지만 해도 작은 수동 바이킹은 한국에서도 노점으로 있었다. 아이들 4명 정도 태우는 수준으로 곁에서 노점 운영자가 열심히 움직여주고 1명당 돈을 받고 시간 얼마씩 재서 태워주던 거였다.

신장 제한이 있는데 보통 110~120cm다.

일부 놀이공원의 경우는 360도 회전, 즉, 아예 한바퀴 다 돌아버리는 바이킹도 있다.

뒷좌석에 타는 것이 가장 스릴있다고 하며 가운데 좌석이 가장 덜 무섭다고 한다. 구조 특성상 뒷좌석이 가장 높이 올라가고 낙폭이 크기 때문이다. 바이킹 공포증이 있다면 참조할 사항. 사실 타지않는게 가장 최선의 선택이긴 하다.

4 일본어로 뷔페라는 뜻

뷔페식을 일본 등에선 바이킹이라고 한다.

그 유래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뷔페형식의 레스토랑을 개점한건 제국호텔인데, 사내공모를 통해 '바이킹레스토랑'이라는 이름으로 개점하자 상당한 인기를 얻어 이후 일본에서 이런 뷔페형식의 대명사로 굳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봉고'가 박스형 승합차의 대명사로 불리우게 된 것과 비슷하다.

5 미해군 항공대 소속의 함상 대잠초계기 S-3 바이킹

6 스타크래프트 2: 자유의 날개테란 유닛 바이킹

7 러시아자동권총 MP446의 별명

8 메이플스토리의 몬스터

항목 참조
  1. 그리고 미국과 미국의 문화에 익숙한 한국과 일본
  2. 8세기 이후 신라 등의 농경 상황을 보면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마야를 말아먹은 게 이 소빙하기라는 의견도 있다.
  3. 이 지역을 데인로(Danelaw)라 부른다.
  4. 바이킹 뿔투구는 역사상 딱 하나 발견됐다... (참고: http://www.history.com/news/ask-history/did-vikings-really-wear-horned-helmets) 그리고 역사학자들은 이걸로 토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킹들은 뿔투구가 아닌 그냥 투구를 썼다고 정한다. 우리가 알고있는 스테리오 타입 바이킹은 1870년데 니벨룽에 반지의 오페라에서 복장 디자이너인 Carl Emil Doepler 바이킹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쓰게 했다. 이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스테리오 타입이 등장했다.
  5. Horrible Histories: Vicious Vikings에서 참고됐음.
  6. 바이킹에서 기원한 류릭과 그의 후손인 류리코비치 가문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러시아의 기원이다. 일단 바이킹 러시아의 첫 중심지이던 키예프 공국이 류릭의 후손들에 의해 세워졌고, 키예프가 갈려나간 뒤 러시아의 새로운 중심지로 대두한 모스크바 공국 역시 류릭의 후손이 세운 나라다. 분할 상속 전통때문에 영토가 쪼개져서 군소국가군이 난립하기는 했지만, 류릭의 후손들이 통치한 영지를 합치면 대충 유럽 러시아의 중심부 전체가 나온다. 또한 왕조로써의 류리크 가문은 1598년 이반 4세의 삽질로 단절되기까지 700년동안 러시아를 지배했고, 이후 혼란 시대를 거쳐 탄생한 로마노프 왕조 역시 류리크 가문과의 혼인을 근거로 왕위를 요구했던 것이나, 류리크 왕조의 단절 이후 러시아가 혼란시대로 빠져든 원인 자체가 '류리크 가문의 직계가 아닌 이상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어서' 였다는 것 까지 생각하면, 현대까지 이어지는 강대국 러시아의 기원은 바이킹이 건설한 국가들이라고 봐야 할 듯.
  7. 대 그리스, 마그나 그라시아라고도 불리는 지역이다.
  8. 이 사건은 온갖 야만인들의 침공으로 서로마가 증발하면서 터진 헬게이트를 로마 교회가 뼈저리는 노력을 들여 야만인을 개종시키는 것으로 버틴 서방 교회에 대한 동방 교회의 불성실한 태도로 인해 쌓이고 쌓인 악감정을 뻥 터트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것이 당장 로마가 롱고바르드족에 의해 함락될 뻔했다.(...) 결국 동서 교회는 완전히 분열되고 만다.
  9. 알렉시오스는 확실히 서방 세계를 잘 써먹어서 위기에 처한 동로마를 부흥시키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동로마는 서방 세계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했다.
  10. L'Anse aux Meadows
  11. 그들에게 우유를 선물로 받았다 소화불량에 걸린 원주민들이 우유를 독으로 오해해 적대적 입장으로 돌아섰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
  12. 이런 고정관념은 중세 이후에 고착화되었는데, 추정키로는 바이킹을 악마와 동일시한 성직자들의 인식들이 그대로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뿔 장식은 11세기 때 그레이트 헬름의 장식물로 널리 쓰이긴 했다.
  13. 폴 조르주 상소네티, '성배와 연금술', 2005, 문학동네 교양선, 106P
  14. 재료는 마로니에 열매의 속살. 이것을 으깨서 물을 섞어 반죽을 하고, 다시 물기를 짜내서 쓰기 좋은 모양으로 빚어낸 후에 햇빛에 건조시켜 만들었다고 한다.
  15. 이렇게 하면 대한민국 중고생 공공의 적인 귀X컷 모양이 나온다.
  16. 위의 책, 106P
  17. 무게중심이 안맞아 같은 무게의 평범한 도끼에 비해 어떤 방향으로 휘두르든 위력이 감소된다.
  18. 같은 기독교인, 정확히는 같은 종파에 속한 기독교인들을 노예로 부려먹을 수는 없으니까.
  19. [1]
  20. 영어로 롱쉽(Longship)이다.
  21. 단, 수로와 육로의 차이는 감안해야 할 점이다. 기원전부터 해로에 의한 이동거리가 육로에 의한 이동거리보다 훨씬 길었다. 사실 몽골군의 이동속도도 전차와 항공기가 일상화된 20세기 이전의 전쟁에선 경이적인 속도다.
  22. 동명의 만화는 같은 소재를 다룬 것이다.
  23. 나이 든 여성은 높은 계급의 여성이라는게 확실시되나 낮은 계급의 여성은 불확실하다고 한다. 혈육은 아니나 비슷한 음식을 먹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나이 든 여성의 하녀를 순장처럼 같이 죽인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24. 엘더스크롤에 등장하는 부족의 모티브가 된 실제로 존재했던 부족이다.
  25. 붉은 머리 에리크가 모티브다.
  26. 심지어 어떤 사람은 웬만한 놀이기구는 재밌게 잘만 타는데 유독 바이킹은 무섭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어릴적 탄 미니바이킹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27. 월미도 놀이동산에서도 사고가 발생했다. 해당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