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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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본 정보

이름 박마리아(朴瑪利亞)
출생 1906년, 강원도 강릉시
사망 1960년 4월 28일, 서울특별시
종교 개신교
가족 배우자 이기붕, 슬하 2남 1녀 (장남 이강석, 장녀 이강희, 차남 이강욱)

2 소개

일제시대에 지식인의 탈을쓰고 조선인들에게 징용, 정신대 적극권장 강연을 펼쳐 친일앞잡이 노릇을 한 개썅년. 제1공화국 시절의 치맛바람 권력인이자 천하의 개쌍년. 줄여 말하면 개년(...)

자유당의 2인자였던 이기붕의 부인. 엘리트 지식인의 탈을 썼으나 출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이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을 짓밟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과 가족들마저 파멸시키고 만 인물이다. 자유당때 이천지역에 돈을많이뿌려 아직도 이천지역에서는 박마리아가 훌륭한 여성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3 트리비아

3.1 구한말 ~ 일제강점기

1906년 강원도 강릉시에서 태어났다. 어렸을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고의대 밑에서 힘들게 자랐다. 어려운 환경에서 목사의 도움으로 경기도 개성의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졸업 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 졸업했다. 미국으로 유학 거기서 남편이 될 이기붕과 만나 연을 맺어 우여곡절끝에 1935년 결혼한다.

귀국해서 이화여전 교수를 지내면서 세 아들 강희, 강석, 강욱을 낳았다. 그러나 여기서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김활란(이화여전), 모윤숙, 노천명, 박순천 등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라는 친일단체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전국을 돌면서 황국신민, 내선일체를 외치면서 정신대 모집과 국방헌금 헌납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 덕에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

3.2 8.15 광복 후 ~ 제1공화국

광복 후, 이승만과 광복 전에 연을 맺었던 이기붕과 함께 이승만과 더욱 더 가까워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특히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가 당시 여성 정치인 임영신[1][2]과 불화가 있었던 틈을 타서[3][4]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프란체스카 여사와 친목을 형성해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별 볼일 없었던 남편을 정계에 들이는데 성공했다. 덤으로 이기붕이 유학을 다녀와서 영어를 잘해서 이승만과 친목을 형성하기도 유리했다.

이 덕분에 이기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내고 서울특별시장을 지내면서 탄탄대로를 걷는다. 그리고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남편이 인기를 끌고 이내 자유당 의장 자리에 앉으면서 드디어 권력의 최중심에 안착한다.

그리고 그 권력을 기반으로 이화여대 문리과대학 학장, 부총장, YWCA 회장이 되었다. 그렇게 탄탄대로를 걸으면 남편을 부통령 자리에 앉힐려고 했지만, 워낙에 이기붕이 스펙이 후달린 남자였기에,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에게 패하면서 부통령 자리를 내주고 만다.

1957년 이기붕과 함께 장남 이강석을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시켜 이승만과의 관계를 더욱 더 공고히 했으며, 1960년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남편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회장을 맡고 있던 대한부인회를 비롯한 여성 단체들을 동원했다. 그중에서 대한부인회는 전국 대회를 통해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3.15 부정선거를 감행하면서 결국 4.19 혁명이 터지고, 자유당 정권은 몰락 이승만은 하와이로 이주[5]하면서 이기붕 일가의 비참한 최후가 시시각각 다가오기 시작하게 된다.

4.19가 일어난 1주일 뒤인 1960년 4월 28일. 아들이었던 이강석 당시 육군 소위에 의해 경무대에서 남편, 아들 일가가 모조리 총에 맞아 살해당하고 이강석 스스로도 자살하고 마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한다. 타살론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였던 곽영주가 이기붕 일가를 살해해 국민여론을 달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막거나 이승만을 반대하는 여론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하지만 애당초 타살론 자체가 무풍지대에서 이환경이 지어낸 썰일 뿐이다.

4 기타 이야기거리

지어낸 서적도 꽤나 충격적이라는데. 이 서적을 신촌 헌책방에서 본 마광수 교수의 에세이에 보면 누가 이 글만 알고 박마리아가 나쁜 사람인지 생각할수 있는가!라고 한탄했다. 박마리아가 악녀라니... 우리가 어찌 알았겠는가...

이승만의 정치분석 서적 일본 내막기의 번역에도 이기붕과 박마리아가 관여했다….[6] 책을 번역 의뢰받은 분은 기껏 번역했더니 박마리아가 중간에 가져와서 최덕신 번역으로 먼저 책을 만들어 이승만에게 선물했다…. 나중에 이 책은 동일한 번역자의 손으로 일본 군국주의의 내막이라는 제목으로 80년대 재출간된다.[7]

야인시대에는 6.25 전쟁 이후 등장한다. 배우는 남현주씨가 맡았다. 첫 등장이후 어느 정도까지 할 때만 해도 나름대로 정상인의 범주에 드는듯 했지만, 이승만의 종신집권 관련 개헌(사사오입 개헌 관련)때 한 번 일이 틀어지자 그때부터 표독스럽게 변해서 원래 성격이 나온다. 출세욕과 명예욕은 넘쳐나는데 일이 꼬여만 가니 나중에는 등장만 하면 장관이고 뭐가 까대는 역할로 나온다.

나중에 이기붕이 부통령에 낙선해 내무부 장관이 위로차 방문했다가 박마리아에게 까이자 어이없어 해서 내가 정부의 내무부 장관이지, 이기붕의 내무부 장관이냐라고 반박할 정도. 이후 행보는 4.19 혁명 이후 이기붕, 이강욱과 함께 시골 집으로 피신해 있다가 서울로 돌아왔으며 경무대 별관에서 강욱이보고 힘들었으니 자라고 말하는 한편 자신의 죄를 남편 이기붕에게 용서를 청하며 눈물을 흘린다.[8] 이후 들어온 이강석이에게 역사대로 총을 맞고 죽었다. 여담으로 이 장면에서 이기붕 일가 중 가장 먼저 죽었다.[9]

네이버 지식인 같은 곳을 보면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와 혼동하는 글도 발견되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니 주의할 것. 김마리아와 박마리아의 공통점은 세례명 '마리아'와 여성 교육운동가라는 점 뿐이다. 재미있는게 김마리아 외에도 직접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한 또다른 동명이인의 김마리아(이범석의 아내)가 있는데, 이범석과 이기붕이 라이벌이었던 관계로 이 김마리아는 생전에 박마리아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박마리아와 이기붕 부통령이 살던 신혼집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위치해있는데 현재 1층에는 공구상가가 들어서있다. 관리가 되지 않았는지 외관만 봐서는 거의 폐허 수준. 내부는......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 중앙대학교 설립자, 초대 이사장 겸 총장. 이후 대한여자국민당을 조직해서 부통령 선거에도 출마하였다. 1960년 4.19혁명 당시 중대생 앞에서 "내가 부통령 선거에 떨어져서 학생들이 데모한다고 사람들이 욕할 수 있다. 데모하지 마라"라는 자뻑성 연설을 한 적도 있다. 실제 이승만에게 팽당한 이후론 정치적 영향력은 전혀 없었고, 부통령 선거 결과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2. 한국전 당시 북한의 선전물이나 민족과 운명같은 북한 시대극(?)에서는 이승만의 처 "에리쓰"로 묘사된다.
  3. 임영신이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이 워낙 강해서 돈암장을 들락날락거리자 임영신과 이승만이 불륜관계라고 소문났는데, 그게 해외에 있었던 프란체스카의 귀에 들어가서 급히 귀국하고 임영신의 돈암장 출입을 금지시켰다.(…)
  4. 프란체스카를 만나기 전 이승만은 캘리포니아대 유학중이던 임영신에게 한때 청혼했었다. 그리고 차였다. 보통 국외에서 외국인과 결혼한 독립운동가들이 귀국시에 처를 버리고 오는 일이 많아서 임영신은 안주인을 차지하려고 해서인지 돈암장에 들락거린게 문제가 되었다.
  5. 왜 망명이 아닌지는 이승만 항목 각주 참조
  6. 이 책인 Japan Insideout은 2차대전전에 미국에서 영어로 출간되었다.
  7.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한 탓인지 원저자 이승만의 이름은 작게 표시되어 있다. `그래도 이름 빌린게 아닌게 어디야.
  8. 이에 이기붕은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며 누가 뭐래도 당신은 내 아내라고 말한다.
  9. 이후 이강석은 이기붕→이강욱→이강석 자신 순으로 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