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희

1 역사 인물 박상희

1.1 박상희(朴相熙)의 생애

1906년 ~ 1946년 10월 6일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사회주의자.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출생.

박정희(1917년생)의 친형(11살 차)이자 김종필(1926년생)의 장인이다. 박준홍의 아버지이다.

1920년 구미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1929년, 처음으로 개교한 대구사범 제1회 입학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는 경성사범, 평양사범, 대구사범 단 3곳의 사범학교만이 존재했다. 월사금 등을 일체 받지 않는데다, 용돈조로 격려금까지 지급되고 졸업과 동시에 교사로 발령이 났다. 따라서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사범학교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무지막지한 경쟁률을 자랑했다. 경성제국대학이 있었지만 제국대학답게 식민지에선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었으며(...)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는 사립학교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3년 뒤, 막내 동생인 박정희가 대구사범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1927년, 신간회에 참여해 활동했다. 1931년 신간회 해소 이후 박상희는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이듬해인 1935년에는 동아일보의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활동했다. 일제말기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건국동맹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수감된 상태에서 광복을 맞았다.

해방구미에서 그의 정치적 인기는 대단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인망이 높아, 구미지역에서 좌우익을 막론하고 지식인,독립운동가 그룹의 리더였다. 건국준비위원회 구미 지부를 창설하고 건준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듬해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았으며, 후에는 조선공산당 선산군당 총책이 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박상희는 반탁운동을 지도하였으나, 박헌영이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선언을 하고 좌파들이 신탁통치 지지의 입장으로 돌아서버리자 그는 침묵을 선택했다. 이런 경우는 당시 민족주의적 좌파들 상당수에게서 흔한 일이었다.
1946년 대구 10.1사건으로 경상북도 일대에 시위가 확산되자, 그는 선산-구미 지역 좌파시위에서 중요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대구를 진압한 뒤 선산으로 진입한 경북도경 - 경기도경 연합부대의 총격을 받아 피살되고 만다.

1.2 기타

박정희에게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큰형으로 사실상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고 하며, 그래서 경찰의 손에 살해당한 형에 대한 복수심으로 잠깐 남로당에 입당하게 되었다.[1]

일제강점기부터 공산주의 활동을 하며, 같은 선산-구미 일대의 지식인으로서 박상희와 친분이 있던 황태성은 대구와 경북 일대의 시위가 진입되자 곧장 월북했다. 한국전쟁 이후 남로당 계열임에도 숙청에서 무사했으며, 남한출신으론 드물게 북한 무역성 부상(무역담당 부처의 차관)을 역임하며 고위직을 지냈다. 황태성은 남한에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와의 친분을 내세워 김일성에게 비밀 특사로 파견을 요청했다. 그렇게 남파되었으나, 박정희와 김종필에 의해서 간첩으로 처형당했다. 다만 이 '황태성 밀사 사건'은 지금도 정확한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고, 여러가지 설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김종필이 이 사건에 관해선 반세기가 넘도록 일언반구 이야기를 안하고 있다.
현재 중앙일보에서 연재중인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에서 관련 증언을 하였다.### 다만 사건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김종필의 증언이지만, 워낙 남은 사료가 없어 구술로만 정리가 가능해 교차검증이 사실상 어려운 점은 감안토록 하자.

1.3 미디어의 추측과 주장, 해석

그것은 알기 싫다의 특집 중 하나였던 박정희 소백과사전에서는 당시 대구 경찰서장이 박상희에 관해서는 신원을 보장한다고 할 정도로 좌우익을 막론하고 존경받던 인물이었으나, 막상 경찰의 진압부대가 들이닥친 것에 위협을 느껴 탈출하여 도망쳤고 그 과정에서 추격하던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고 설명했다. 이 죽음이 박정희에게 상당한 충격이였을 것이라는 해석이 함께 이어졌다.

사실 대구 인근 지역에서는 경찰과 우익인사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으나, 박상희가 장악한 선산-구미 일대에서는 경찰서장도 무사했다. 박상희는 진압부대가 도착할 당시 우익인사들과 함께 있었고, 총성이 들리자 곧장 창문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도망치는 박상희의 뒤로, 우익인사들이 "우리가 잘 이야기해 줄건데 왜 도망가느냐"고 소리쳤지만... 결국 추격한 경찰의 총격에 숨지고 만 것.
박상희는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시위가 격화된 인근 지역에선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졌으니[2] 아무리 우익인사들이 변호한들 박상희가 격앙된 분위기 속에 무사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박상희의 판단 자체는 옳았다.

박상희가 동생 박정희를 갈군 것 자체는 사실이다. 소학교 교사시절 반강제로 결혼한 것이 내키지 않아, 부인의 방에조차 들어가지 않는 박정희에게 역정을 내며 거의 두들겨패다시피하여 방에 밀어넣었다고 한다(...). 이후 박정희가 만주군에서 복무하다 해방 이후 경력자 우대로 광복군 평진지대 중대장을 잠시 맡았는데, 미군정은 일체의 정치단체를 인정하지 않아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개인자격으로 입국하여 인천항에서 DDT 세례부터 맞았다(...). 만주군에 갓 부임했을 때는 정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고향에 왔었는데, 해방 이후로는 이 개인자격 입국 탓에 거지꼴로 돌아와 버려 "그냥 선생질이나 하면 좋았을 걸 괜히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느냐? "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비록 자신은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나름대로 동생의 길(만주군 입대)을 지지하고 이해하였던(실제로는 몹시 화를 냈다), 그래서 나중에 죽은 뒤 박정희가 복수심에 잠시 남로당에 투신하게 만든 계기가 된 것으로 나온다.

실제 남로당 간부들이 박정희에게 '죽은 형의 복수를 해야하지 않겠느냐'면서 설득했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박정희는 결국 남로당에 비밀입당한다[3]. 그러던 것이 여순사건 이후 숙군 사업으로 발각되어, 군당국에 체포되어 종신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백선엽을 비롯한 군 상층부에서, 남로당 고위층이긴 하나 그에 걸맞게 적극 가담한 일이 없으며 죽이긴 아까운 인물이라는 구명운동이 벌어져 1년 만에 석방되어 불명예 제대로 그쳤다.[4]

2 성남 일화 천마 소속의 축구선수 박상희

  1. 사실 해방 이후 경찰과 국군의 대립 또한 심각했다.
  2. 경찰서장의 이마에 도끼를 찍어 살해한 지역이 있는가 하면, 경찰관이라는 이유로 제빙용 톱으로 허리를 썰어 살해한 곳도 있었다. 흠좀무
  3. 박정희가 남로당의 비밀군사총책이 되었다고 올리는 편집자들이 있는데, 당시 남로당의 군사부 총책은 목사(!)였던 이재복이었다.
  4. 박정희의 구명운동에는 일본군, 만주군, 심지어 광복군 출신들도 가담했다. 이는 박정희의 복잡한 이력에 기인하는데, 복무는 만주군에서 했으되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졸업하여 일본육사에 편입, 3등으로 졸업하여 일본육사 졸업생 그룹에게도 구명을 요청할 명분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해방 후 광복군 평진지대 중대장으로 복무하여, 성실히 일하던 것을 눈여겨 본 평진지대장 김학규 장군도 구명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