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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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박영길((朴永吉)
생년월일1941년 11월 5일
출신지부산광역시
출신학교경남고 - 동아대
포지션외야수(중견수, 우익수)
투타좌투좌타
소속팀남선전기
육군
한국전력
지도자 경력롯데 자이언츠 감독(1982~1983)
삼성 라이온즈 감독(1987~1988)
태평양 돌핀스 감독(1991)
롯데 자이언츠 역대 감독
박영길[1]
(1982~1983)
강병철
(1984~1986)
삼성 라이온즈 역대 감독
김영덕
(1984~1986)
박영길
(1987~1988)
정동진
(1989~1990)
태평양 돌핀스 역대 감독
김성근
(1989~1990)
박영길
(1991)
정동진
(1992~1995)

1 소개

대한민국의 야구인이자 한국 야구 최고 타격이론가[2]그리고 외야수 출신 감독 중에 KBO 리그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다.[3]

2 선수 시절

1960년대 실업 리그 최고의 강타자였던 김응용에 비견되어, '좌영길 우응용'이라 불리며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명성을 떨쳤다. 김응용과는 당시 국가대표 룸메이트로 십수년을 같이 보낸 인연으로 현재도 서로 막말을 하며 지낼 정도로 친한 사이. 김응용 못지않은 슬러거였지만 정교함까지 갖춘 타자로, 이승엽 이전까지는 올드 야구 팬들에게 국내 최고의 좌타자로 인정받았다. 참고로 실업야구 통산 100홈런 이상을 기록한 네 명의 타자 중 한 명이다. 나머지 3명은 故 박현식 옹(前 삼미 감독), 김응용, 김우열(前 OB-빙그레). 1971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야구 선수권대회에서는 8게임에서 5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대한민국이 우승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실업야구 통산 타격왕 6회, 타점왕 3회, MVP 4회를 수상했으며 철저한 체력 관리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37세까지 현역으로 활약했다.

3 지도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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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의 롯데 입단식에서. 당연히 오른쪽이 박영길.

은퇴 후 실업리그 롯데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프로야구 출범 직전 해인 1981년 우승을 거머쥐었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때 부산 야구의 대부로서 롯데 자이언츠의 창단을 주도했으며, 초대 롯데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성적 부진으로[4] 1983년에 중도 사퇴하고 타격코치였던 38세의 강병철에게 지휘봉을 넘겼다.(롯데는 이듬해인 1984년 불세출의 대투수 최동원을 앞세워 우승.)

최동원 투수는 20년이나 30년만에 하나 나오는 투수다. 두고 보시라고. 30년 후에 롯데에 최동원 투수가 나오겠냐고.

ㅡ1983년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재직 당시.[5]

1984년삼성 라이온즈의 타격코치로 부임한다. 1984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있었던 져주기 게임 당시, 삼성의 코칭스태프 중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상대로 롯데를 고르는 것에 대해 반대한 인물이라고 한다.[6] 1987년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며, 그 해 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팀 타율 3할을 달성했다.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했으나 막상 한국시리즈에서는 플레이오프에서 천신만고 끝에 OB 베어스를 간신히 꺾고 올라온 해태 타이거즈에게 4연패로 스윕당하며 준우승에 그치는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7][8] 1988년에는 창단 3년차밖에 안 되는 꼬꼬마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와 플레이오프에서 붙어 힘 한번 못 써보고 스윕을 당하는 바람에 결국 해임되었다.

삼성 감독에서 물러난 뒤에는 해설가로 일하면서 야인으로 지내다가 1991년 시즌을 앞두고 김성근 감독이 물러난 태평양 돌핀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이 당시 태평양은 막강한 투수진과 달리 사상 최악이라 할 만큼 형편없는 타선으로 유명했는데, 단타와 작전 위주의 스몰볼에 최적화된 김성근의 타격 이론과 정 반대 성향이었던 박영길은 팀 타선의 장타력을 키우기 위해 선수들의 타격 폼을 전면적으로 교정하려고 했다. 거기에 김성근이 7.5m로 높혀놓은 도원구장의 펜스를 5m로 내리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동기김경기를 제외하고 박영길 식의 타격 이론을 소화할 만한 선수가 태평양에는 없었고, 그해 팀 성적 5위라는 그저 그런 성적과 함께 프런트와의 불화로 1년 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나 정동진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성적 5위면 5-8-8을 기록한 김용희선동열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는건 없었지만, 그해 그 짧은 인천 도원구장에서 두자릿수 홈런을 친 선수가 아무도 없었다.[9] 이후에는 사실상 현역 지도자로서는 은퇴했으며, 2011년 현재 실업야구연맹 및 일본 독립리그 서울 해치의 회장직 및 스포츠서울 객원기자를 맡고 있다.

감독으로서의 능력은 그저 그랬지만, 1987년의 삼성 타선에서 볼 수 있듯 타격 이론에서는 국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지도자이며[10] 대한민국 야구에서 최초로 작전을 최소화하고 장타율출루율을 중요시하는 빅 볼 스타일의 야구를 지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11] 최근에도 단기 인스트럭터 자격으로 여러 팀에서 타격 지도를 했으며 2009년 시즌을 앞두고는 최희섭의 단기 인스트럭터를 맡아 최희섭이 슬러거로 부활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런데 2009 시즌 종료 후 가르친 2명의 롯데 타자 장성우오장훈의 경우에는 2010 시즌 기준 타격이 오히려 떨어지기도...
#당시 기사
그와중 2016 시즌전 두산베어스 타격 인스트럭터로 참가하셔서 오재일,김재환을 터트리셨다. 두산팬들은한번 더 오셔서 국해성도 터트려주길 바라고있다.

4 트리비아

  • 오랜 시간 야구인생을 보낸 덕에 야구 다큐에 야구원로로 얼굴을 자주 비춘다. 그런데 비슷한 또래인 김응용,김인식 등과 달리 나이에 맞지않게 패션감각이 꽤 뛰어난 편이다.
  1. 시즌 도중 사퇴로 강병철 코치의 잔여 시즌 감독 대행으로 마무리.
  2. 삼성 타격코치 시절 84-86년 삼성은 사상최고의 타격을 자랑했으며 감독 재직시절인 87년에는 프로팀 최초 팀타율 3할을 찍었다.물론 그게 태평양에서는 통하지 않았다는게 함정
  3. 한 차례 한국시리즈 준우승(1987년)을 했다. 나머지 외야수 출신 감독들의 성적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이를데 없다. 예를 들면 LG 팬들에게 금지어로 찍힌 이 양반이나 좌우놀이에 중독된 돌덩이라던가 아니면 맨날 입만 주구장창 털던 이런 놈이라던가...
  4. 당시 롯데는 투타 균형이 안좋던 상태였다.타격이 터지면 투수들이 불을 지르고 타격이 안되면 투수들이 엄청 잘막았으나 1점만 내주고 지는 경기가 많았으며 83년 야심차게 데려온 최동원,심재원이 부진하면서 성적은 바닥을 찍었다.
  5. 2015시즌 린동원이라는 별명을 가진 투수가 등장했지만 2016년의 부진으로 최동원과 비교는 어불성설. 물론 15년의 혹사가 부진에 한몫한다.
  6.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실업 롯데 감독으로 있을 당시 이미 최동원의 실업야구 한국시리즈 활약상을 소속 팀 감독으로서 직접 본 인물이다. 당시 최동원의 시리즈 성적은 시리즈 6경기에 모두 출전해 2승 1무 2패 1세이브 42와 3분의 1이닝 투구. 흠좀무. 그러나 그의 의견은 결국 묵살되었고, 결국 1984년 한국시리즈는 그의 우려가 현실화되고 말았다.
  7. 이 시리즈 1차전에서 당시 좌익수였던 장효조는 어이없는 실책으로 1차전 패배와 시리즈 완패의 주범으로 몰렸고, 결국 1988년 시즌 후 롯데 자이언츠트레이드되고 만다.
  8. 이 우승이 무등야구장에서 해태(KIA 포함)가 안은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다.
  9. 1992년 쌍방울의 형편없는 투수진이 140피홈런을 기록했는데, 거기에 비교적 준수했던 태평양의 투수진이 125피홈런을 기록한 것을 보면 인천이 얼마나 타자친화적인 구장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 거기다 지금도 깨지지 않는 SK창단년도 195피홈런도 이 도원구장에서 나왔다 홈경기 115/원정 80으로 이거 빼도박도 못한다 한경기에 2개씩 맞은 셈
  10. 김성근 감독도 타격에 관해서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당시 야인으로 지내던 박영길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11. 박영길 이후로는 김용희, 김인식 감독이 이쪽 계열로 꼽힌다.
  12. 본인도 이 사실을 몰랐다가 최동원과 계약하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