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진(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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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1년 4월 17일 (44세)
제20대 국회의원 (서울특별시 강북구 乙/ 더불어민주당)

신일중학교-신일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2 생애

전라북도 장수군 출생. 1979년 부친의 근무지가 서울로 변경된 후 그는 현재 서울 강북구(당시 행정구역은 도봉구) 소재의 화계초등학교로 전학하여 그 곳에서 졸업했다. 이후 신일중학교, 신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던 1989년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그의 고2 시절 담임선생님이었던 이수호 선생이 결성 주도 인물로 구속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박용진은 학교 동기생들과 교내 시위를 주도한다. 고등학교 내내 1987년 6월 항쟁 이후 분출된 정치, 사회의 민주화 흐름에 민감한 시절을 보냈다.

1990년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학년 때이던 1991년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의 죽음을 계기로 시작된 5월 정국의 말미에 그의 대학 선배인 김귀정이 시위 도중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용진은 시신이 안치된 백병원으로 찾아간 뒤 장례가 마무리 될 때까지 그 곳에 있었는데, 이 때의 경험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1994년 성균관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어 그 해 6월 벌어진 전국철도기관사협의회와 서울지하철노동조합, 부산지하철노동조합의 연대 파업을 지원하던 도중 구속되어 첫 번째 감옥 생활을 경험하였다. 100여 일의 수감생활 이후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총학생회장 임기를 마치고 그 해 12월에 현역으로 입대하여 1997년 2월 부산 53사단 해안레이더 기지에서 복무를 마치고 만기 제대하였다.

제대하고 1997년 마지막 학기를 마치기 위해 복학한 뒤 김귀정추모사업회 사무국장 활동을 전개했다. 대학 졸업 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의 정치부장으로 일하며 그 해 말 있었던 대통령선거를 진보진영 독자후보로 치러내겠다는 계획을 가졌다. 1997년 9월 결성된 국민승리21에 전국연합에서 파견되어 대변인실 언론부장으로 일했다. 대선을 마친뒤 전국연합을 그만두고 권영길 당시 대선후보를 따라 진보정당 결성의 길에 나섰다. 국민승리21에서 언론부장, 조직부장, 기획부장, 청년사업부장, 청년실업대책본부 상황실장, 대표 수행비서 등을 겸직하며 진보정당 건설에 힘썼고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2000년 1월 문화일보가 선정한 '차세대 리더 100人'으로 선정되었다..

민주노동당 창당 직후인 2000년 4월, 16대 총선에 서울 강북(을) 선거에 만 29세의 나이로 도전했다. 13.3%의 득표율로 7명의 후보자 중 3위였으며 이는 민주노동당 서울출마자 중 최고 득표율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치열한 경선을 뚫고 지금의 최고위원 격인 전국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노동운동을 대표하던 정윤광 전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과 지금은 고인이 된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의장 등 쟁쟁한 인물들이 그의 경쟁상대였다.

2001년 3월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전국민중대회’에 참여했다가 구속되었고, 2년 1개월 후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1주년 기념 사면으로 출소했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복권시켜주지 않아 2004년 총선에 출마하지 못했지만 민주노동당은 원내진출에 성공했고, 원내 3당이 된 민주노동당은 그를 대변인으로 임명했다. 총선이 끝나고 한 달 뒤 그는 복권되어 피선거권을 회복했다. 그때부터 2007년 12월 대선 선대위 대변인까지 중앙당에서 활동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에 반대했지만 진보신당이 결성되자 그 후보로 서울 강북(을)에 출마해 11.8%를 득표, 낙선했다. 2010년 진보신당의 부대표가 되었다. 3기 진보신당 지도부 중 유일하게 야권대통합에 동의했다. 2011년에 '진보대통합'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2011년 9월 25일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진보정당을 출범한다"고까지 합의가 되었으나, 뒤이어 열린 진보신당 당대회가 합의안을 부결함으로써 결국 '진보대통합' 논의는 무산되었다. 이에 지속적으로 '야권대통합'을 주장하던 그는 진보신당을 탈당하였고 ‘민주노동당-노회찬, 심상정 등의 진보신당 탈당파-국민참여당’ 등이 참여해 결성한 통합진보당 동참 역시 거부했다.

진보신당 탈당 뒤 문성근 등이 주도하는 ‘국민의 명령’ 운동에 함께하고 2011년 9월 '혁신과통합' 상임운영위원으로 야권통합운동에 합류했다. 혁신과통합이 결성한 시민통합당 지도위원으로 창당에 함께했다. 시민통합당이 민주당과 통합해 만든 민주통합당에서 최고위원 선거에 도전해 컷오프를 통과했다.이후 전국을 돌며 정치혁신과 정권교체를 주창했지만 최고위원 당선에는 실패했다.

민주통합당은 2013년 5월 4일 전국대의원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의결하여 '민주당'으로 개명하였고, 이에 따라 박용진은 민주당 대변인으로 당직승계하여 활동하였다. 2014년 1월 민주당 홍보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2014년 7월 30일까지 활동하였다. 2015년 8월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위원회 상근 부의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더불어민주당에서 당직승계되어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그리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서울 강북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서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이후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3 트리비아

배우 문소리성균관대학교 선후배 사이다. 문소리는 박용진이 2000년 총선에 출마할 때 민주노동당원이 되었다고 한 바 있으며, 지지 활동도 했다.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북 을)민주노동당8,381 (13.3%)낙선 (3위)
2008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북 을)진보신당7,088 (11.7%)낙선 (3위) [1]
2016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북 을)더불어민주당37,445 (50.7%)당선 (1위)
  1. 2000년 2008년 선거는 비록 낙선했지만 진보정당 이름을 달고 지역구에서 이정도 득표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진보정당의 한계를 느꼈는지 민주당으로 갔지만, 진보진영에서도 그의 당선을 축하하는 분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