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

1 문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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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 시대를 앞선 귀두컷 윤종신이 귀두컷했다면 저모습
仇甫 또는 丘甫 朴泰遠 1910.1.6.[1] ~ 1986.7.10.

서울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호세이대학 법정학과를 다니다가 중퇴했다.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 활약했던 문학단체 구인회의 일원이기도 했다.

경성제일고보 시절인 1926년에 시 "누님"으로 등단했고, 1930년 단편소설 「수영」을 통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대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의식의 흐름을 제대로 살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2]과 <천변풍경>[3],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방란장 주인>등이 있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에도 꽤 모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경향문학이 주류였던 당대 문단에서 꽤 독한 비판을 받았다. 박태원은 <내 예술에 대한 항변-작품과 비평가의 책임> 등의 글에서 이런 비판에 대해 항변한 적이 있지만, 그래도 계속 까였던 모양이다. 일제의 압력이 심해진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중반에는 중국 소설들을 번역하며 지냈다. 다만, 이 시기에 약간의 친일 작품이 있다고 한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으나, 친일 문학인 명단에 등재되어 있다.

박태원이 쓴 수필에 의하면, 저 바가지머리는 억센 직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헤어 스타일이라고 한다. 결혼하고 나서도 머리 관리가 귀찮아 저 머리를 고수했다고 한다.

6.25 전쟁 때 아내와 자식을 두고 홀로 월북한 그는 평양문학대학에서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하지만 남로당 계열이라는 이유로 숙청당하고 4년 간 평안남도 강서 지방의 한 집단농장에서 강제 노동을 하며 지내다가 1960년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강제 노동의 후유증으로 영양실조를 겪은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1965년에 망막염으로 실명하고, 1975년에 전신불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1977년부터 3부잔 대하 역사소설인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마지막 3부를 지을 때는 구술 능력까지 상실하여 후처 권영희[4]가 자료를 가지고 작성한 원고를 불러 주면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만 할 수 있었기에 공동 저작으로 발표되었다. 결국 이 소설의 완간을 보지 못한 채 1986년 7월 10일에 고혈압으로 타계했으며, 이듬해인 1987년에 마지막 3부가 완간됐다. 정인택의 차녀이자 정인택의 사후 박태원 슬하에서 자란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월북 후 행적이 조금이나마 알려져 있다.

갑오농민전쟁의 집필 전인 1964년에 발표한 소설 『계명산천은 밝아 오느냐』는 갑오농민전쟁의 도입부 성격이라고 한다.

영화감독 봉준호가 그의 외손자다. 정확히는 6.25 전쟁대한민국에 남겨진 첫번째 부인에게서 나온 차녀의 아들이 봉준호라고 한다. 박태원은 첫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두고 있었는데, 전쟁 중 그가 월북하고 나서 얼마 후에 장녀도 월북했다.

2 도타 2 프로게이머

박태원(프로게이머) 문서로.

3 KBS 30기 아나운서

박태원(아나운서) 문서로

4 음악가

朴泰元 (1897년 6월27일 ~ 1921년 8월5일)

대구 출생의 성악가, 작곡가. '켄터키 옛집', '클레멘타인', '올드 블랙 조', '스와니강' 등을 번안하였다. 여러 편을 작곡하기도 하였으나 전해지는 것은 없다.

1897년 6월27일 대구에서 포목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동생은 연세대학교 음대 학장을 역임한 작곡가 박태준이다. 계성학교를 거쳐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연희전문학교으로 옮겼다. 연희전문 재학 시절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음악회에 독창자로 출연하였고, 졸업 후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수학 중 폐렴으로 1학기만 마치고 귀국하여 고향인 대구에서 25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한 때 정신여고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서울 YMCA 회관에서 열린 음악회에서는 큰 호평을 받았고, 조선호텔에서 열린 선교회의 초청을 받아 테너 가수로 독창을 한 일도 있다. 혼성합창대를 조직하여 헨델 작곡 '할렐루야' 외 수 곡의 종교곡을 합창하는 등의 합창 운동을 펼쳤다.

  1. 일부 문서에서 박태원의 생년월일을 1909년 12월 7일이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음력을 기준으로 해서 그렇다.
  2. 중편 소설로, 1938년 출간된 단편집의 표제작이다. 단편집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은 <성탄제>, <옆집 색시>, <5월의 훈풍>, <사흘 굶은 봄달>, <피로>, <딱한 사람들>, <전말>, <거리>, <길은 어둡고>, <비량>, <진통>, <방란장 주인> 등 12편이 수록되어 있다.
  3. 청계천변 주민 삼십여 명의 일상사를 다루는 개별 삽화 형식의 소설로 한국 현대문학의 리얼리즘 걸작이라 평가받는다. 1938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4. 6.25 전쟁 때 같이 월북한 작가 정인택의 아내로, 정인택이 휴전을 앞두고 1952년에 사망한 뒤 1956년에 박태원과 재혼하였다. 참고로 정인택은 박태원과 고교 동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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