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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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군사관학교 졸업 사진

1939년 11월 15일 ~ 1980년 3월 6일.

대한민국의 군인. 최종 계급은 대한민국 육군 포병대령. 박선호 등과 함께 10.26 사건에 연루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강원도 춘천시 태생으로 학창 시절 당시 국내에서 손꼽히는 명문고였던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등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원체 집안이 가난했던 지라 등록금 걱정이 없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박흥주를 비롯한 16~18기 전후의 입학생들이 이러한 사정으로 육사에 들어온 경우가 많았다. 대학 입시에서 최상위권을 다투던 상당히 우수한 인재들이었지만 금전적인 문제로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일반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육사로 진로를 전환한 것. 이들 입학 당시 집권하던 이승만 정권은 사실 군사정권이 아니었기 때문에 출세를 목적으로 진학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은 육사 출신이란 자부심과 엘리트 의식이 엄청나게 강했으며, 이는 전두환을 필두로 한 하나회 세력의 결집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박흥주는 육사에서도 변함없이 공부벌레의 모습이었고 덕분에 18기 생도들 중에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그의 우수한 졸업 성적 덕분에 6사단에 배치되자마자 관측장교 보직을 건너뛰고 바로 전포대장에 보임 되었다.

전포대장 보직을 마치고 6사단장전속부관이 되었는데, 이 때 그의 인생이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박흥주가 전속부관으로서 모신 사단장이 다름아닌 김재규. 이때부터 박흥주는 김재규의 심복이 되었다. 또한 임관 초기부터 주목을 받을 정도의 뛰어난 기량이 더해져, 78년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대령을 달면서 말 그대로 초고속으로 진급했다. 전속부관 때의 인연으로 박흥주가 대령이 되었을 때 김재규의 추천으로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가 되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의 최측근으로 근무하고 있었음에도 박흥주는 성동구 행당동 산동네의 허름한 판잣집에 살 정도로 청렴함까지 갖추고 있어 주변의 인망이 대단히 두터웠다고 한다. 전두환의 심복이었던 그 장세동조차 사형 집행 후 "유족들에게 연금이라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가 한소리 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상사를 잘못 만난 것도 죄라고 해야 할지, 10.26 사건 때 김재규의 지시를 받고 안가 경비원 이기주, 의전과장 박선호, 차량 운전수 유성옥과 함께 식당에 있던 경호원 사살에 가담하였고,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한 김재규가 보안사에 체포되면서 박흥주 대령 자신도 쇠고랑을 차고 말았다. 그러나 박흥주 대령은 체포 후 교도소 벽에 "남자는 자신을 위해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는 낙서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거사 계획을 말했을 때 부하들이 군말없이 모두 따랐다는 점을 보면, 김재규의 카리스마와 부하들의 신망은 대단했던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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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박흥주의 선처를 눈물로 탄원하는 두 딸들의 모습

김재규는 유능한 부하들이었던 박흥주 대령, 박선호 등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그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 주장하며 선처를 바랐고, 초등학생 두 딸이 기자들 앞에서 "박흥주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 라는 플래카드를 펼치고 울부짖으며 강력히 탄원했지만, 공범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상황 이었기 때문에 군법 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결국 1980년 3월 6일 41세의 나이에 총살형으로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로 형 집행을 당한 것이었기 때문에 현역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었고, 경기도 포천시 재림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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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 집행 당시 모습 (가운데)

그는 군법 재판에서 "각하를 살해하면 변란이 되고, 김재규 세상이 된다. 그가 성공했을 때, 만일 내가 가담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반역으로 몰려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고, 공을 세우면 출세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이유로 살해에 참여했다고 진술했다. 군법 재판은 단심제[1]였던 바 형의 집행도 관련자 중 가장 빨랐다. 그리고 현역 군인이었기 때문에 박흥주 대령만 총살[2]되었다. 주범인 김재규 등은 민간인이었으므로 교수형 집행. 그러나 관련 사건의 재판[3]이 아직 진행 중임에도 박흥주 대령만 사형을 우선 집행한 것은 일반 재판이든 군법 재판이든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위에서 장세동이 같은 소리 했을 때 갈궜던 전두환도 집권 후기에 박흥주 대령에 대해 다시 알게 되고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 그를 복권시키려고 여러차례 노력하였다. 1987년 유족들에게 연금이라도 지급하라고 지시했으나 현행법상으론 불가능하자 유족들을 수소문해 찾아내어 금일봉을 전달했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선 김응수, 드라마 <제4공화국> 에서는 노영국, 같은 시기 방영된 코리아게이트 에선 황범식이 박흥주 역할로 출연했다. 그리고 <제5공화국>에서는 김성준(본명 김진근)이 박흥주 역을 맡았는데, 13화(K-공작계획)에서 최후를 맞는다. 총살대에 묶인 후 "하늘을 보고 싶다" 라며 눈가리개 착용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죽는다.[4] 사망 당시 아내와 생후 8개월인 아들, 국민학생인 두 을 두고 있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아내에게 몰래 유서를 전했다고 하면서 그 내용도 소개를 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인에게,
"애들에겐 이 아빠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으며 그때 조건도 그러했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긍지를 불어넣어 주시오. 앞으로 살아갈 식구를 위해 할 말은 못하고 말았지만 세상이 다 알게 될겁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가정을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게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의연하게 떳떳하게 살아가면 되지 않겠소."
두 딸에게,
"아빠가 없다고 절대로 기 죽지 말고 전처럼 매사 떳떳하게 지내라. 아빠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너희들은 자라나는동안 어머니와 친척어른들의 지도를 받고 양육되겠지만 결국 너희 자신은 커서 독립하여 살아야 하는것이다. 독립정신을 굳게 가져야한다. 조금 더 철이 들 무렵이나 어른이 된 후에도 공연히 마음이 약해지거나 기죽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헤쳐나가려는 강한 정신력을 가져야한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것이 바로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겠느냐. 자기 판단에 의해 선택하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지게 되어 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한다."
  1. 현재는 군법 재판의 경우에도 보통군사법원-고등군사법원-대법원 순으로 3심제로 진행한다.
  2. 오로지 현역 군인 신분을 가진자(병, 부사관, 장교 및 후보생들) 및 군무원의 사형 방법은 군형법 제 3조에 따른 총살형으로 집행된다.
  3. 그것도 대법원 전원합의체
  4. 그때 그 사람들에서도 윤여정이 나레이션으로 이 사실을 언급하는데, 언급 직후에 "대한민국 만세 좋아하시네. 으이그, 철딱서니 없기는."라고 깐다(...). 아무래도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이 후에 신군부의 폭주라는 후폭풍을 불러왔다는 것을 까기위한 장치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