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일영

方一榮
1923년 11월 26일 ~ 2003년 8월 8일

일제강점기인 1923년 11월 26일,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변 동문동에서 방재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방재윤은 원래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의 아들이었으나 당시 아들이 없었던 방응모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방일영은 동생인 방우영과 함께 방응모의 양손자가 됐다. 유년기에 할아버지인 방응모를 따라 경기도 의정부시로 이주하였다.

경성제일고보(경기중학교 전신)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주오대학 예과를 졸업했다. 그 후 1944년 할아버지 방응모의 부름으로 귀국,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사장비서가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조선일보가 복간된 뒤인 방응모 사장이 납북되자 조선일보 이사로 선출되었고, 이후 부산광역시로 피난갔다가 휴전 후 경영권을 잡았다. 그러나 1980년 발행분까지 발행인 대표는 방응모로 되어 있었다.

1964년 회장에 취임하면서 동생인 방우영을 사장으로 임명해 같이 일했다.

1975년에는 방일영의 출연금으로 '방일영장학회'를 만들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을 매년 10명 선발해 수업료 전액과 생활비를 지급했다. 현재까지 3백30여명이 장학금을 받았고, 최근에는 대학원생에까지 규모를 넓혔다.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93년 조선일보 회장직을 동생인 방우영에게 넘기고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되었다.

말년에는 온양 방씨 종친회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할아버지 방응모의 가묘를 마련하기도 했다. 2003년 1월 조선일보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나 7개월 뒤인 2003년 8월 8일 새벽 2시 5분,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나이 81세였다.

국내 최대 언론사인 조선일보의 사주인 그를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밤의 대통령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변호사는 이 나라 여자들의 머리를 가장 많이 얹어준 사람이라고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