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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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요약: 여자 이완용

1920년대에 찍은 사진. 즉, 나이가 50대라는 소리.

裵貞子[1] 1870년 2월 23일~1952년 2월 27일

1 개요

조선의 여성 민족반역자이자 친일파로 활동했던 여성 인물. 조선판 말린체라 볼 수 있다. 사실 스스로를 아즈텍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말린체보다도 어찌 보면 더 독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죄질이 죄질인 만큼 온갖 검열삭제 이야기와 소문이 있어서 진상을 알기가 어렵다. 기본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조선비구니 출신이었다가 조선 정보원, 일제 외교관을 지냈다고 한다. 1885년 일본으로 건너가 민족반역자 및 친일파로 변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정탐하는 스파이 역할을 하였다. 경상남도 김해시 출신.

2 출생과 생애

1870년 김해 고을의 아전노릇을 했던 배지홍의 딸로 태어났다. 초명(初名)은 '분남(粉男:개똥이)'.

태어나자마자 명성황후 민씨 일가에 반의(反意)를 표했다는 이유로 졸당(卒黨)으로 축출되어 사형된 아버지와 맹인(盲人) 어머니에 의해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고 부친의 사형 이후 삼족사멸(三族死滅)을 면하여 천민(노비)으로 격하된 후 어머니와 각지를 유랑하였다.

한때 경남 밀양에서 기생으로 팔려갔다가 탈출을 시도한 끝에 양산 통도사로 은신하여 1882년에 불교에 입교(入敎)하여 3년간 수도생활을 하게 되었고 '우담'이라는 법명을 얻어서 공식 비구니가 되었다. 그러나 관가로부터 정체가 밝혀지게 되면서 불교계를 탈퇴하여 부산으로 피신한 끝에 아버지의 친구인 동래부사 정병하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는 말도 있고[2] 이런 쪽에서 나온 흑색선전에 의하면 정병하가 키잡을 했다던가 검열삭제를 했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신빙성은 없다.

2.1 일본으로의 출국, 친일파가 되기까지

정병하가 밀양 부사로 이직하게 되었을 때[3] 그와 일본 상인의 도움으로 1885년 처음으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리고 갑신정변에 참여한 안경수[4]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여학교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후 18세가 되면서 일본인 교관의 지도하에 승마, 수영, 사격, 변장술, 매복술 등 첩자활동 훈련까지 받으며 점차 친일파로 변하게 된다.

2.2 조선으로의 귀국 그리고 첩자활동

1894년 사다코(貞子)로 개명한 이후 조선에 귀국하여 경복궁으로 입궐하고 일본어 통역자를 빙자하여 고종과 밀접을 하게 된다. 그녀의 첩자활동을 몰랐던 고종은 그녀의 매력에 빠지게 되는 바람에 총애를 하게 되었고 궐내에서 자주 만나는 행보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고종을 유혹하고나서는 조선의 기밀정보를 유출시키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등 첩자역할을 하였다. 단순한 첩자라는 말 부터 고종이 연해주로 망명하려는걸 분쇄했다는 등등의 이야기도 있는데. 신빙성은 별로 없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의 밀서를 고종에게 전달한 밀서 사건으로 절영도에 유배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 해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훈령에 따라 석방되어 정계에 복귀하였다. 심지어는 덕수궁의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개명한 것도 安자가 家 아래에 女가 있어 궐문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배정자를 연상케 해서였다는 속설이 널리 퍼졌을 정도.

이와 같이 직접 조선의 조정에서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다녔음에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 이름 한 줄 찾아볼 수 없으며 절영도로 유배됐다는 설 역시 신빙성은 낮다.[5]

2.3 일제강점기 이후 그리고 노골적인 반민족 감정

1909년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중국 하얼빈역에서 저격당하게 되자 그녀는 이를 계기로 더욱 조선에 대한 노골적인 반민족 감정을 고수하며 친일 활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이 되면서 일제 외무부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가 1918년 만주로 건너가 하얼빈 주재 일본 영사관에서 파견근무를 하였다.

1920년 일본군러시아에서 일어난 레닌러시아 혁명을 막기위해 출병을 했을 때 일본 영사관 직원으로 만주, 시베리아를 오가며 군사활동을 하였고 그 후에는 간도, 중국 상하이 등에서 조선의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 반일 마적 체포의 선봉장으로[6] 나서서 이들을 검거하는 스파이 역할을 하였다가 1922년 조선으로 돌아와서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촉탁 근무를 하였고 이후에도 총독부 경무국장의 훈령에 따라 만주중국을 오가며 조선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 색출과 검거에 앞장섰다가 1927년 은퇴하였고 은퇴 후에도 총독부의 금전지원을 받아왔다. 당연히 이로인해 당시 중국만주에서 활동중인 조선 독립군 및 독립운동가들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2.4 태평양 전쟁 그리고 일본 패망 이후

1941년 일본미국 하와이 진주만 기습이 발발하였던 태평양 전쟁 때 70대의 노인이 된 후에는 이 때부터 조선의 처녀 및 부녀자들을 징집하며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 군도까지 끌고가서 일본군의 성 노리개감 역할을 하라는 모진 강요를 하였다.

이에 대한 대가를 인정받아 업자로부터 금품과 뇌물을 받아가며 친일 행위를 계속하게 되었다가 1945년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조선이 광복을 맞이하게 되자 마침내 잠적하게 된다.

2.5 광복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듬해인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되면서 그녀는 마침내 서울특별시에서 친일행위죄로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그러나 체포당시 병이 있었고 정치적인 이유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해산되면서 결국 석방되었다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특별시에서 병으로 죽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모임을 통해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서도 친일파 명단에 표기되기도 하였다.

3 정말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인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엉터리 날조 거짓 뻥이다. 국내에 널리 퍼진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혹은 첩)이라는 설을 비롯해 위의 기록들 대다수는 역사적 근거가 단연코 없다. 예로 고종이 배정자에 휘둘렸다는 둥, 절영도로 유배갔다는 둥 하는 부분마저도 근거가 약할 정도다[7]

일단 배정자-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설은 모두 배정자 자신의 기록이 출처다. 사료라고 할 수 있는, 당시 조선과 일본의 언론 기록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일본 최고위직 정치가가 아무런 신분 배경도 없는 미천한 조선인 소녀를 양녀로 받아들였다면 이는 조선과 일본의 화합을 상징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퍼포먼스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데 이러한 정치적 기사나 이토 히로부미의 족보를 비롯해 어디에서도 수양딸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사료적 근거는 전무하다. 조선과 일본의 신문에 쓰여진 배정자의 과거사에 대한 기사들 역시 모두 배정자를 인터뷰했거나, 또는 거리에 나도는 풍문을 엮어 만든 글이 전부다. 덧붙여 이토 히로부미가 생전에 입적시킨 수양자녀는 아들인 이토 히로쿠니(伊藤博邦)가 유일하다.

또 첩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토 히로부미 생전에 사귀었던 여성들이 낱낱이 밝혀진 현재까지도 배정자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는 사료나 일본 쪽 언론 기사는 없다. 수양딸설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오직 한국에서만 나도는 얘기다.

이렇듯 정병하와 김옥균 등이 등장하는 개인사를 비롯해 배정자 개인의 기록들은 사료를 근거로 비추어 보며 신빙성과 신뢰도가 매우 낮다. 그래서 주로 언급되는 것이 배정자가 말년에 인터뷰한 일종의 자서전인 배정자실기가 주요 매체가 되는데, 이 역시도 나가요 언니들의 회고담 내지는 군대 전역한 사촌형의 무용담 수준이다. 단적으로 본문에도 있는 것이 1885년 정병하에 의해서 구출되어서 일본으로 보내진 이후에 김옥균의 문하에 들었다는 것인데, 정병하가 동래 부사로 부임한 것이 1888년이고 김옥균이 일본에서 유배를 간 것이 1887년이다. 어딜 어떻게 끼워맞춰도 불가능하다라는 이야기다. 다만 다른 기록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본문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4 일화

그녀의 둘째 남편이 소설가 현진건의 친삼촌, 호적상으로는 오촌 당숙이었던 현영운이었다. 현영운과의 사이에서 딸인 현송자를 얻었는데 그녀(현송자)는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치오와 결혼했다가 훗날 이철과의 불륜으로 이혼하게 된다. 그 뒤 이철과 재혼하여 산 듯. 문제는 현진건의 친형이자 호적상 6촌형인 현정건의 부인은 윤치호의 7촌 질녀였다.족보가 어찌되는고

상당히 동안이라서 나이가 든 후에도 기품있는 중년 모습을 보여주었고 상당히 현대적인 마스크를 가졌다. 실제로 남아 있는 사진 대부분이 50대에 찍은 것인데 40대도 안되는 포스를 보여준다. 물론 해방후는 급노화돼서 체포한 수사관들 조차도 그렇게 초라한 중늙은이가 요화였다는 걸 믿지 않았다고 한다.

배정자가 여러 사람들의 육노예나 첩이었다는 소문은 신빙성이 없다. 일본인과 결탁기 때문에 일본인의 첩이라는 흑색선전은 돌았고 앞에서 서술했듯이 자신의 친일을 정당화하고자 젊은 날의 고생담을 강조한 측면에서 이전에 자신을 농락한 조선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 것도 있다.

소문과는 별도로 상당히 남자 관계가 복잡했는데. 20세 연하의 순경과 동거한 적도 있었고. 은퇴 후에도 여러 남자와 동거한 정황은 있다. 심지어 반민특위로 체포될때도 연하남과 동거중이었다고 한다.

192-30년대를 풍미하였던 무용가 배구자는 배정자의 조카였지만, 사실은 이토 히로부미와 배정자 사이에서 태어난 숨겨진 사생아 라는 소문이 꾸준히 돌았으나 진위는 확인할 수 없다.[8][9] 배정자를 닮아 남자 관계가 문란하긴 했다. [10]

5 미디어에서

실제 한국사에서는 비중을 다루지 않았던 인물이었지만 국내에서 제작된 영화나 소설 등에서는 가끔 친일 성향의 여자로 등장하였으며 일부 소설 구절에서는 조선에서 태어나지 않고 일본에서 태어났었으면 좋았었다. 조선은 내 인생을 망치고 상처를 준 더러운 나라였다. 일본이야말로 고마운 은혜을 줬던 나라라고 말하는 구절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실사(實史) 못지않게 친일 성향이 매우 짙었음을 알려주고 있다.이완용에 버금가는 악성 친일파라고 불리는 인물이니.

유인촌이 나온 역사는 흐른다라는 드라마에서는 대놓고 나오지는 않아도 배정자를 연상케하는 캐릭터가 나온다. 유인촌을 사모하다가 이런 저런 사정으로 가문에서 쫓겨나고 김영철이랑 결탁해서 일본의 앞잡이가 되는 역할이다. 승마를 하면서 스파이 업무를 하는 장면은 이혜영의 카리스마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는 부분. 나름 잘 나가다가 어른의 사정으로 PD와 싸우는 바람에 중간에 독립군에게 살해되는 것으로 리타이어 된다.

류주현의 소설 조선총독부에서는 어느 정도 독립군 세력과 손을 잡은 이중인격으로 그리고 있다.[11] 해방이 된 후 정신이 돌아서 애들을 상대로 헛소리를 한다고 묘사한다. 그녀가 독립군 세력과 나름 결탁한건 묻혔다는 이야기. 실지로 이런 서술때문에 작품 자체가 필요 이상으로 욕을 먹은 점이 있다.

60~70년대에는 장희빈만큼이나 영화에서 악역이나 젖소부인류의 색마겸 요화로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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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제 1공화국에서 반민특위 부분에서 잠깐 서술과 함께 끌려가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이때 배정자 역은 여인천하의 한상궁, 고 한영숙. 어차피 대사도 없다.

80년대 KBS 대하사극 독립문에서[12] 스칼릿 오하라 코스프레를 하고 고종과 댄스를 추는 모습의 스파이로 묘사되기도 했다. 이때 배정자역은 여배우 트로이카로 유명한 정윤희(...)

2012년 영화 가비에서는 유선이 배정자 역을 맡았으며, 극중에서는 정자의 일본 발음인 사다코로만 불린다. 고종을 커피로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하는 찌질한 역.

배정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도 만들어진 바 있다. # 배정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에서는 어째 막판에 개과천선하고 자기 목숨을 바친다던가, 독립군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상당히 미화되어 나왔다. 물론 실제 역사에선 절대로 그딴 거 없다.

드라마 각시탈에서는 그녀를 토대로 해서 만든 채홍주라는 여성이 나온다. 채홍주는 원작만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로 드라마의 오리지널 캐릭터이다. 단 끝내 반성을 안하고 말년에 허무하게 사망한 배정자와 다르게 채홍주는 마지막에서는 갱생을 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1. 일본으로 건너간 후 사용한 일본식 이름.
  2. 1882년부터 3년간 수도를 했다니 정병하를 만난 게 최소 1885년이라는 얘기가 되는데 그해 동래부사는 조병필과 김학진이었다
  3. 정병하가 밀양부사로 부임한 때는 1888년이다. 부임 전에는 고향인 경기도 안산에 있었다. [1]
  4. 갑신정변과 춘생문 사건에 모두 참여한 신기한 인물. 독립협회의 초대회장이기도 하다. 독립협회 해산과정에서 온갖 문제가 벌어지면서 일본으로 망명. 이후 고종이 안전을 보장하는 형태로 송환요청을 하였으므로 조선에 귀국하였다가 영선군의 모반 사건에 참여한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당연히 외교적 관례를 어긴 고종과 일본의 외교적 갈등이 벌어진 것이 이어졌다. 개화기 지식인답게도 복잡한 인생역전과 가늠하기 어려운 정치적 위치를 가진 인물로, 출세지향적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고종에 의해 죽지 않았다면 박영효 마크2가 유력했을 인물.
  5. 구한말 절영도(현재의 부산 영도)는 일본인들이 멋대로 들어와 땅을 사서 창고나 상점, 집을 짓고 살 정도로 일본과의 왕래가 많은 지역이다. 그런데 곳에 친일 성향의 배정자를 유배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6. 신화같은 이야기로 마적두목의 첩으로 위장잠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7. 주변 인물과의 정황증거라거나 당시 소문을 기록한 것 정도에서 나오는데, 이런 류의 신뢰도가 개판이라는 것은 매천야록만 봐도 알 일이라서...
  8. 배구자의 동생 배한라가 "언니가 이토 히로부미와 고모 배정자 사이의 딸이었던 까닭에." 라고 회고한 적은 있다.
  9. 다른 일화를 말하자면 좀 긴데, 배정자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열살도 안된 배구자를 당시 유명한 서커스단이었던 덴카츠 곡예단에 맡기고 가버렸다. 다행이 단장 덴카츠가 이토 히로부미와 친분이 있던지라, 배구자는 덴카츠의 양녀가 되어서 총애를 받으며 곡예단에서 갖가지 기예를 배웠고 곡예단의 인기인이 된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을 당하자 따돌림을 당하게 되고, 이를 견디다 못한 배구자는 곡예단이 평양 공연을 할 때 탈출한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배정자와 만났지만 왜 그랬냐고 따지듯이 물어대며 뒤도 안 돌아봤다고 한다.
  10. 그러나 배구자는 말년에 정신이 햇가닥 돌았는지 자신이 메이지 왜왕의 10번째 딸이고, 할머니는 민자영 이고, 자신의 어머니는 조선의 공주라는 이 뭔 개소리야. 미친 개소리를 조잘 거리고 다녔다.
  11. 정확하게는 이 소설 후반부에 일종의 주인공 캐릭터로 등장하는 가공인물 커플인 박충권-윤정덕 커플, 더 정확하게는 그 중에서도 윤정덕하고만의 개인적인 연결관계에 가깝다. 이 소설에서 윤정덕은 미와 경부와도 얽힌 이중첩자로서 겉으로는 '제2의 배정자를 노리는 야심찬 일본 첩자'이지만, 실제로는 '그 이미지까지 활용하여 독립군을 위한 첩보활동을 펼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급 첩자'라는 설정. 첩자 활동을 위해 조선 총독부 고위 관리의 집에 위장신분으로 하녀로 잠입해 있던 윤정덕의 정체를 배정자가 눈치채고도 그 때 마침 은퇴 후 폐기물(?)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던 것에 대한 환멸 때문에 윤정덕을 눈감아 준다.
  12. 이순재옹의 출세작 풍운의 후속작. 이미 사망하거나 은퇴한 인물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풍운의 인물이 그대로 나왔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본측 인물들이 카리스마 있게 나와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