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킨게토릭스

1 로마시대에 카이사르와 싸웠던 갈리아의 영웅

1.1 개요

Vercingetorix. 불어 발음인 베르생제토릭스(Vercingétorix)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은 갈리아어로 위대한 전사의 왕(rix)라는 의미이다.

우측의 사진은 알레시아에 세워진 그의 동상. 다만 실제 모습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후대의 상상에 기반한 것이다.[1]


갈리아의 영웅으로 상당수 프랑스인의 가슴에 자존심으로 남아있는 사나이. 프랑스 만화 아스테릭스에서는 그의 항복 장면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발등에 투구를 내던져 찍어버리는 당당한 모습으로 그릴 정도이다(하지만 같은 시리즈에서 '무릎 꿇은 베르킨게토릭스' 버전도 등장한다. 이전 버전에서는 로마인 이야기에 실린 버전이라고 나와 있는데 아스테릭스 시리즈 후반권에 실린 이미지를 로마인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2][3]

1.2 생애

갈리아족의 한 부류인 아르베니족[4]의 족장으로 원래 족장이었던 삼촌이 친로마파였기 때문에 그를 죽이고 아르베니족의 족장이 되었으며 로마에 저항한 최후의 갈리아인이자 최초이자 최후의 갈리아 연합 부족장이다.

당시 갈리아는 거의 로마에 의하여 완벽하게 점령당해 있었고 갈리아 전쟁은 끝난거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는데,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인의 민족주의를 부활시키고는 갈리아 전역의 총봉기를 주도했다. 말 그대로 그 동안 로마가 원했던 갈리아 전쟁의 모든 결과를 수포로 만들어버린 셈.

용의주도한 전술과 뛰어난 전략으로 로마군을 격파하며 수 차례의 승리를 얻었으며,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처음 활동을 시작했을 때가 17~19세 정도로 추정) 분열하기 쉬운 갈리아인들을 휘어잡아 로마에 대항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보잘것 없는 부족 출신의 새파란 젊은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갈리아 연합의 최고 사령관 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수많은 부족들이 중구난방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갈리아 내에선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였다. 그만큼 유능함을 주변에서 인정했다고 봐야 한다.

그의 유능함은 로마 사상 손꼽히는 명장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대로 잘 발휘되었는데 그는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 기간 내내 갈리아 부족들의 내분을 이용하여 우호 부족을 확보한 뒤 보급을 그들을 통해 조달받으며 전쟁을 수행해 왔음을 간파하였다. 이런 먼치킨 따라서 그는 카이사르의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갈리아 부족들에게 내분을 중단하고 자유를 얻기 위해 모두 로마와의 친분을 끊으라고 호소한다.

이러한 호소는 의외로 잘 먹힌 게, 카이사르가 2개 군단이 전멸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아코라는 족장을 부족회의에서 잔인하게 처형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이 부족장들 사이에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주었기 때문이였다. 게다가 카이사르가 그들에게 위협이 되었던 게르만 족과 그의 우호 부족들을 남김없이 격파해 주자 더 이상 로마의 신세를 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이제 그만 로마도 물러나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력 부족장들은 베르킨게토릭스가 유능하긴 하였으나 그의 부족의 세력은 약했으므로 베르킨게토릭스가 로마를 쳐부수고 난 뒤엔 자기네들이 로마의 공백을 메꾸고 맹주 노릇을 할 것이라는 기대도 하고 있었다. 즉 이래저래 베르킨게토릭스의 총 궐기를 하자는 제안은 시기적절한 것이였다.

따라서 처음엔 게르만족을 데리고 와서 설쳤다가 카이사르에게 깨진 부족들만 호응을 받았던 베르킨게토릭스 연합에 점점 유력 부족장들이 호응하기 시작하였고 나중엔 친로마 부족들[5]마저 배신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카이사르가 갈리아 사방에 주둔시킨 군단들은 우호부족에게서 조달되고 있던 보급이 끊긴채 고립되고 만다.

이때 이탈리아 북부에 머물던 카이사르는 서둘러 북상하였고 교묘하고 재빠른 행군으로 베르킨게토릭스의 눈물겨운 방해공작을 뿌리치며 갈리아의 로마군과 합류한다. 이때는 겨울철이였었는데 당시 전쟁은 겨울철에는 쉬고 봄에 시작해 가을에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6] 그러나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를 중심으로 세력이 규합되고 있음을 보고 받고는 선수를 치기 위해 서둘러 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로 진입한 것이었다. 이때 카이사르는 사람 키 만큼의 눈이 수십킬로를 덮은 지대를 뚫고 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민한 행군 끝에 10개 군단에 이르는 군단을 자신의 휘하에 집결하게 하는데 성공한다.

그러자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 상대로 청야전술을 구사한다. 우호부족들이 모두 이탈한 카이사르군은 오직 약탈을 통해서만 군량을 조달할 수 밖에 없었는데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 주위의 도시를 깨끗히 초토화함으로써 로마군의 보급을 차단하고자 한 것이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우선 주변 마을을 몽땅 불태울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들 중 아바리쿰시는 베르킨게토릭스에게 간청하여 이 도시는 천혜의 요새이니 카이사르의 공격에도 견딜 수 있다고 말하며 승낙을 얻는다. 현지 조달밖에는 방법이 없었던 카이사르는 불타지 않고 남아있던 이 도시를 타겟으로 삼았는데 10개 군단의 맹공을 받은 이 도시는 베르킨게토릭스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점령당하고 그 도시내의 거주민은 모두 학살당한다. 그러자 베르킨게토릭스의 입지는 강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 사태를 내다보고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었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는 이 도시를 점령하고 군량을 조달하여 간신히 한숨을 돌린다.

그 뒤 카이사르는 게르고비아에 있던 갈리아의 지도자 베르킨게토릭스를 직접 타격하고자 하였는데 그 전에 자신의 병력을 둘로 나눠 4개 군단을 라비에누스에게 주어 다른 갈리아 부족을 공격케 하고 자신은 6개 군단을 지휘하였는데 하는데 이는 전사가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대실수로 이로 인해 하마터면 갈리아 정복을 실패할 뻔 했다. 아바리쿰시를 공략하는데 10개 군단을 동원한 반면 게르고비아에 있던 베르킨게토릭스를 공략하는데 6개 군단을 동원한 것으로 이러한 병력의 열세는 베르킨게토릭스로 하여금 게르고비아를 지켜내는데 도움이 된 것이다.

이미 초토화하여 보급을 차단하는데 성공한 베르킨게토릭스는 무조건 지구전으로 갈 생각밖에 없었다. 또한 게르고비아라는 곳이 워낙 방어하는데 좋았기 때문에 천하의 로마군도 쉽게 점령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군대의 숫자도 훨씬 많았으므로... 군량이 이미 바닥난 상태였던 카이사르는 퇴각을 결심하였는데 퇴각하기 전 체면상 최후로 강력한 공격을 한번 해보았는데 흥분한 병사들이 제멋대로 너무도 깊숙히 공격을 하여 전열이 무너져 패배하고 만다. 이로써 베르킨게토릭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최초로 후퇴시킨 인물이 된다.[7][8]

카이사르는 게르고비아에서의 패배로 갈리아에서 철수하기 시작한다. 결국 꿈에 그리던 갈리아의 해방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였다. 그런데 베르킨게토릭스는 느닷없이 갈리아 연합군을 이끌고 철수하고 있었던 로마군을 정면으로 공격한다.

이는 카이사르에게 있어 느닷없는 횡재나 다름없었고 훈련의 대부분을 평지에서의 회전에 맞춰왔던 로마군에게 있어 이러한 싸움은 대환영이였다. 더군다나 사령관은 로마 역사상 가장 유능한 장군 중 하나인 카이사르.[9] 베르킨게토릭스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이끌고 왔으나 이들은 그대로 떡실신 당하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알레시아로 퇴각한다.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를 쫒아 알레시아를 겹겹히 포위한다. 로마군의 포위란 띠를 두르듯 방책을 세우고 참호를 깊게 파 물 샐 틈 하나없이 완벽히 차단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게르고비아와는 달리 알레시아는 전혀 포위 당하는 것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아 포위당한지 며칠만에 군량이 바닥나버렸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결사적으로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두차례에 걸쳐 공격했으나 그때마다 큰 피해만 입는다.

그 뒤 갈리아 족의 구원군이 도착하여 로마군의 포위망을 안팍으로 30만여명의 대군이 공격하였으나 카이사르는 이것마저 격파한다.

이 패배로 더이상 저항할 수 없었던 베르킨게토릭스는 직접 카이사르에게 나가 포로로 잡히고 구심점을 잃은 갈리아 부족들은 카이사르에게 항복, 그 결과 카이사르는 갈리아 족의 대대적인 봉기를 진압하는데 성공하고 갈리아 제패를 마무리 짓는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와 원로원 간의 로마 내전이 끝난 후 특이하게도 처형당했다.(로마는 개선식에 쓰인 포로를 죽이지 않고 유배한다) 이는 훗날의 위협이 될 수 있는 요인을 없애버린 처사라고도 볼 수 있다.

1.3 평가

카이사르와 로마에 있어서는 반항적인 이민족 왕이었겠지만 갈리아의 후계라고도 할 수 있는 프랑스 등에서는 애국자이자 민족을 위해 투쟁한 자로 보기도 한다.

베르킨게토릭스가 게르고비아에서의 패배로 인해 속주로 퇴각하는 카이사르를 공격하여 자멸한 이유에 대해선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1차 사료인 갈리아 전기에선 베르킨게토릭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마군은 갈리아를 떠나 속주로 퇴각하고 때문에 당분간의 자유는 확보될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보면 이것만으론 불충분하다. 이들은 대군을 이끌고 돌아올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군수품과 함께 행군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들을 완전히 쳐부술 유일한 기회이다.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병사를 공격하면 로마군은 이를 지키기 위해 꼼짝달싹 못하게 될 것이고 만일 로마군이 군수물자를 버리고 달아난다면 로마군의 그동안 쌓은 명성은 모두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이를 보면 베르킨게토릭스는 1. 로마군의 재 침략을 두려워하고 있다 2. 후퇴하고 있는 로마군은 공격하면 군수물자를 버리고 달아나는데 급급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위 두가지는 베르킨게토릭스가 잘못 판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우선 첫번째의 경우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전쟁은 로마 정부의 방침이라기 보단 카이사르의 개인적인 야심으로 인한 전쟁이였다. 카이사르의 임기는 이미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고 따라서 모든 군대가 갈리아에서 철수한 뒤 다시 갈리아 정복 전쟁을 시작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부족한 상황이였다. 즉, 카이사르의 임기 내에 다시 갈리아 정복을 노릴만큼의 여유는 없는 상황이였다. 카이사르의 임기가 종료된 뒤 새로 파견된 로마 총독이 갈리아 정복을 위해 재침공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뿐만 아니라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철수를 한다면 로마 내의 수많은 정적들에게 카이사르는 엄청난 비판에 시달릴 것이 분명하였다. 당시 로마의 정세는 크라수스가 죽고 폼페이우스가 원로원파로 완전히 돌아선 상황이여서 카이사르는 고립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갈리아에서의 철수는 카이사르에게 있어선 정치생명이 끝날 가능성도 있었다. 즉 카이사르가 한번 철수하면 그것으로 카이사르의 정치적으로 재기불능상태가 되어 다음해에 재침공을 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베르킨게토릭스가 여러모로 유능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으나 로마의 정세와 적 사령관이 처한 입장을 고려하지는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되고 이는 적 사령관의 기질, 성격까지 훤히 파악한 한니발과 대조된다.

두번째의 경우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의 전력을 과소 평가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위의 연설에서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이 퇴각하고 있으므로 공격하면 물자들 버리고 뿔뿔히 흩어질 것' 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 위의 첫번째 로마가 끊임없이 재침공할 것이라고 파악한 것처럼 두번째의 경우 역시 베르킨게토릭스가 일방적으로 예상하고 전략을 세웠는데 그는 '로마군이 격렬하게 저항하여 공격하온 갈리아군을 패주시킬 가능성'에 대해선 전혀 고려를 하고 있지 않고 있다. 그동안 로마군이 그동안 갈리아 군에게 보인 압도적인 전력의 우수함과 그로 인해 갈리아군이 초토화 작전을 써서 간신히 후퇴시킨 상황을 고려한다면 퇴각하고 있는 로마군이 추격해온 갈리아군을 거꾸로 격퇴할 가능성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였는데 이는 베르킨게토릭스가 우수한 지휘관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여진다.

위의 베르킨게토릭스의 판단착오 외에 다른 이유를 꼽는다면

1. 베르킨게토릭스는 약소 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갈리아 연합의 수장으로 여러 큰 부족들에게 초토화 작전을 지시하였고 이를 통해 로마군이 철수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희생된 부족들이 베르킨게토릭스에 대한 반감이 있었을 것이고, 이는 베르킨게토릭스가 언급한 첫 번째 이유와 연결될 수 있다. 로마군이 돌아올 때마다 초토화 작전으로 맞서야 한다면 로마군 이전에 갈리아인들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베르킨게토릭스의 지시를 받는 것에 대해 거대 부족장들의 거부감은 상당하였다. 로마군이 물러난 뒤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들 부족장들에 의해 숙청될 가능성을 우려하여 로마군을 상대로 명백한 군사적인 성과를 거두길 원했다.

2. 게르고비아 전투에서의 승리로 인해 갈리아 군의 사기가 높았으며 병력의 우세함도 있었으므로 갈리아 족들이 전투를 원했으며 베르킨게토릭스는 이 여론에 따랐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카이사르는 한방에 전세를 역전하였고 이 승리를 바탕으로 역사적 인물이 되고 만다.

1.4 기타

확실히 베르킨게토릭스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은 화폐 하나 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 외에도 카이사르의 개선식 기념주화에도 갈리아인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이 있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어쩌면 이 얼굴이 포로가 된 후의 베르킨게토릭스의 얼굴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근거없는 개인의 추측일 뿐이다.

드라마 ROME에서는 1편부터 인상깊게 등장한다. 1편에서 항복하면서 나체가 되는 갈리아 왕과 후에 개선식에서 죽는 인물이 그인 것이다. 이름없는 갈리아인들이 그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고 화장하는 장면에서 비록 로마인의 문명을 이어받았지만 갈리아인과 게르만인의 후손에 가까운 영국, 미국인의 감성이 느껴진다.

콜린 맥클로우의 Masters of Rome 시리즈[10] 5권인 Casar 편의 전반부에서는 당연히 주인공 카이사르와 대결을 펼치는 최종보스격의 인물로 나온다. 흔히 생각하는 야만인 이미지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민족을 생각하는 제 3세계 게릴라 지도자처럼 그려지는게 포인트, 가상이지만 초반부에 카이사르와 단독 회담하는 장면에서의 카리스마는 일반적인 이미지의 야만인을 넘어선다. 이후에도 상당히 잔인한 면모를 보여주지만 찌질이와는 다른 모습의 적장으로 그려진다.

스위스 출신 포크/멜로딕 데스 메탈 밴드인 Eluveitie는 이름(헬베티)에 걸맞게 베르킨게토릭스의 이야기를 자주 다룬다. 익스트림 메탈 특유의 그로울링 보컬이 베르킨게토릭스의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2 게임 레이스톰의 2면 보스

이름의 모티브는 1번의 베르킨게토릭스. 덧붙여 이외에도 레이스톰에서는 로마에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던 인물들의 이름을 보스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 프랑스[11] 지역의 상공을 날아다니는 전함형 보스다.

전작 레이포스의 3면 보스와 비슷한 패턴을 구사한다. 기뢰 뿌리기 및 꺾어지는 레이저를 구사하고, 화면 뒤로 갔다가 부스터를 분사하기도 한다. 처음에 하면 좀 어려운 상대. 대신 공격패턴은 일정하기때문에 적응되면 어느정도 할만해진다. 다만 내구도는 더럽게 높다. 패턴특성상 록온 공격을 위한 접근도 쉽지 않다. 파츠 먼저 4개 다 부수는 쪽으로 선공을 하자.
  1. 루이 나폴레옹을 닮게 만들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베르킨게토릭스를 존경했고 아예 자신의 이미지를 그에 덮고자 동상을 만들때도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만들게 했다.정작 삼촌은 로마빠였다는 사실은 넘어가자 그러나...프로이센과 전쟁으로 패하면서 물러날때, 그의 반대파들은 그리도 존경하는 베르킨게토릭스처럼 처형당하면 그 이름은 남을 것이라고 야유했다고 한다...
  2. 당연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가 자존심 내세울 처지는 아니었다. 드라마 ROME을 비롯한 많은 창작물에서는 끌려오다시피 해서 무릎을 꿇은 모습이 일반적. 시오노 나나미의 상상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해당 장면에서도 자존심 때문보다는 그냥 카이사르가 발등 찍히고 뛰는 코믹한 모습 연출을 위해 쓴 측면이 크다.
  3. 베르생제토릭스의 항복은 꽤 유명한 주제라서 관련 작품이 많은데, 으로 표현된 사례가 많다. 아무래도 프랑스 쪽에서는 영웅이라 그런듯. 이미지가 보이는 링크가 하나도 없다
  4. 로마: 토탈 워 EB모드의 그 아르베르니 맞다. 팩션 소개에선 아이두이를 '약하다', '악랄하다', '지배할 능력이 없다'라고 마구 까는 것에 비하면... 현실은 시궁창. 아이두이족은 당시 세콰니족과 갈리아를 양분하는 최강 부족이었던 반면 아르베니는 약소 부족에 지나지 않았다.솔직히 베르킨게토릭스 없었으면 얘들은 등장도 못했다
  5. 레미족을 제외하면 모두 배신했다. 심지어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초반부터 든든한 우군이었던 하이두이족마저도! 뭐 덕분에 레미족은 알레시아 공방전 이후 최고 부족의 대우를 받게 된다.
  6. 한니발이 예외적으로 알프스를 넘은 뒤 북이탈리에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군사활동을 하였다.
  7. 사람에 따라서 카세(당시 영국의 부족)의 지도자인 카시벨라우누스를 들기도 한다. 실제로 카이사르는 브리튼 섬으로 건너갔지만 별 거 못 건지고 갈리아로 돌아오긴 했다.
  8. 하지만 갈리아와는 달리 카이사르는 애초부터 브리타니아를 정복할 생각은 없었다. 브리타니아에서 철수한 것도 카시벨라누스와의 전투에서 지거나 불리한 상황이라 그런 것도 아닌, 애초에 계획된 철수였었고.
  9. 사실 카이사르의 군사적 업적은 그 자신의 군재라기보다는 신이 내린 강운에 가까웠지만(예를 들어 알레시아나 파르살루스에서의 승리도 상대의 뻘짓에 기반한 것이 컸다), 어쨌든 당대에는 탑클래스였던 것은 분명하다.
  10. 한국에서는 1권인 로마의 일인자와 2권인 풀잎관만 번역되었다
  11. 작중에서는 올드 골 시티, 즉 갈리아의 옛 도시라는 명칭으로 불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