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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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를 기록한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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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해군 측 지휘관인 로즈장미 제독

丙寅洋擾
프랑스어 : Expédition française en Corée

1866.9.8~1866.10.13

"나는 오래도록 즐겁게 기억하리, 강화 섬에서의 이 소풍을."

Je me souviendrai longtemps, avec plaisir, de ces excursions dans l'île de Kang-hoa.
앙리 쥐베르 - 한국으로의 원정 中(1866)


신미양요와 더불어 압도적인 군사력 차이로 서구열강에 대한 충격과 공포심을 느끼게 해준 사건

한반도의 국가(당시에는 조선)와 프랑스 사이에 일어난 최초이자 마지막 군사 접전. 물론 한국전쟁대한민국을 돕기 위해(=북한과 싸우기 위해) 파병한 일은 있지만 그건 프랑스로서가 아니라 UN군의 일원으로서고, 헌법이나 대다수 한국인의 정서로써는 북한은 적성이 아닌 반국가단체일 뿐이므로 한국에서의 보편화된 인식에 따르면 한국 VS 프랑스가 싸운 전쟁은 이 사건이 유일하다.

1 개요

1866년, 천주교 신자 8,000여 명과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한 병인박해에 대항하여 프랑스가 조선을 침공한 사건.

2 배경

프랑스 해군 극동함대 사령관 피에르 구스타프 로즈 제독은 병인박해의 생존자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1]가 알린 병인박해 소식에 분노했고 프랑스 정부와 로즈 제독은 조선을 정벌하기로 결정한다. 1866년 7월 8일 프랑스 공사 벨로네는 청나라 섭정이자 총리아문의 수석대신인 공친왕에게 조선을 정복하고 고종을 폐위시킨 다음 조선의 미래와 장래의 왕위를 나폴레옹 3세의 의지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 통보했다. 허나 나폴레옹 3세의 운명은... 하지만 이는 벨로네 공사의 일방적인 행동이었다. 한편 청나라는 매우 놀라서 조선을 변호하며 프랑스를 진정시키려는 한편 조선에 자문을 보내 이에 대해 경고했다.

“방금 북경(北京) 예부(禮部)에서 보내온 자문(咨文)을 보니, ‘전에 프랑스 공사(公使)가 여러 차례 전교사(傳敎士)들이 조선에 나갈 수 있도록 호조(護照)[2] 발급을 청하였는데, 총리아문(總理衙門)에서 습교(習敎)는 조선에서 원하는 바가 아니므로 호조를 발급하기가 곤란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다시 프랑스 공사가 보내온 조회(照會)에 의하면, 고려 국왕[3]프랑스의 주교(主敎) 두 사람 및 전교사 아홉 사람과 본지(本地)의 습교인 남녀노소를 모두 살해하였기 때문에 장수에게 군사를 일으키도록 명하여 며칠 안으로 일제히 소집할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이 이미 이 일을 알았으니 중간에서 해명해 주지 않을 수 없는데, 과연 전교사(傳敎士)들을 살해한 사실이 있다고 하면 먼저 이치에 의거하여 조사할 것이요, 갑자기 병란의 단서를 만들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귀국에 알려 심사숙고하여 처리하게 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조선은 여기에 대해서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재미있는건 이 당시 조선에서 활동했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프랑스인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당시의 조선과 프랑스가 서로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편지 전문은 다음과 같다.[4]

조선 조정이 세실 함장의 편지에 대한 회답을 라피에르 함장에게 보낸 것을 신부님들에게 소개합니다. 이것이 원문과 똑같은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조정이 다음과 같이 발표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난해에 조선 왕국의 영토인 외연도에서 어떤 주민이 외국 함선에서 건네준 편지라고 말하면서 우리 조정에 전해왔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이 소식에 크게 놀라 편지를 펼쳐보니까 당신들 왕국의 세실 함장이 우리 대신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 왕국의 고귀한 인물인 앵베르[5], 샤스탕, 모방[6] 등 어른 세 분이 불행하게도 당신들에 의해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이 무슨 이유로 그분들을 죽였는지를 묻고자 하여 온 것입니다.

당신들은 아마 당신 나라의 법률이 외국인의 무단 입국을 금하는데, 그 세 분이 이 법률을 어겼기 때문에 사형을 당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러나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이 조선에 입국하는 일이 있으면 당신들은 감히 그들을 죽이지 못하고 각기 그들을 자기 본국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나라 사람 그 세 분에 대해서는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처럼 대우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분들이 살인이나 방화나 그와 비슷한 다른 죄악을 범했다면 그분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을 것이고, 이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묵인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죄가 없었는데 당신들이 부당하게 사형에 처하였으니 프랑스 국가에 대하여 중대한 모욕을 준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세실 함장이 보내왔는데, 이 편지에 대하여 우리 조선 조정은 다음과 같이 분명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기해년(1839)에, 어떤 외국인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느 때에 조선에 몰래 잠입하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조선 사람과 같은 옷을 입고 조선 말을 하며, 밤에만 나다니고 낮에는 집 안에서 꼼짝 않고 지내며, 얼굴을 변장하고 흔적을 감추면서 국가 반역자들과 불충한 자들과 흉악무도한 불량배들과 사귀고 어울려 다니므로 우리가 체포하여 문초하였습니다. 그들이 관가에 끌려와서 심문을 받을 때 자기들의 이름이 한 사람은 나 베드로이고 또 한 사람은 정 야고보라고 진술하였습니다.

당신들의 함장의 편지에서 언급된 사람들이 혹시 이 사람들입니까?

심문을 받을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프랑스인들이라고 밝히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들 왕국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자백했더라도 우리는 지금에서야 당신들 나라에 대해서 듣게 되었으니 우리가 당신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즉 우리가 어찌 비밀 입국을 금하는 우리 법을 적용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그들이 옷도 갈아입고 이름도 바꾸는 등 변장하면서 흉악한 무리와 어울려 다닌 행동은 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악의에 의한 것이었음을 넉넉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연히 파선을 당하여 우리 왕국에 상륙하게 된 자들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왕국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가끔 외국인들이 풍랑에 파선하여 우리 해안에 표류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들이 낯선 사람이라도 죄가 없고 긴급한 사정이 있으면 우리는 그들을 구조해주고 입히고 먹이고 보호하며, 또 할 수 있으면 각각 자기 나라로 돌려보냅니다. 이것이 우리 왕국의 법률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말하는 저 세 사람들도 파선을 당해서 우리 왕국에 상륙했다면 왜 우리가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과 달리 대우하였겠습니까?

또 당신들 편지에 보면 왜 우리가 그들을 정당한 이유 없이 죽였는지 문책하고 또 당신들 나라에 중대한 모욕을 끼쳤다고 항의하는데, 그러한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의외이고 듣기에 놀랍습니다.

서양과 조선이 수만 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모르고, 편지로나 차편으로나 내왕과 상종이 없습니다. 그런즉 무슨 이유로 서로 원수가 될 짓을 할 것이며 또 무슨 까닭으로 당신들에게 모욕을 끼치겠습니까!

헤아려 보십시오. 만일 우리나라 사람이 당신들의 나라에 몰래 들어가서 변장을 하고 악행을 하면 당신들은 그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겠습니까? 만일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이 당신들 나라 사람들처럼 우리 법을 거슬러 범행하였다면 그들도 우리 법에 따라 처벌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전에 어떤 중국인(주문모 야고보 신부)[7]이 변복하고 몰래 우리 왕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 법대로 잡아서 사형에 처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항의도 없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우리 국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형에 처한 사람들이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은 살인자나 방화자들의 행동보다도 더 큰 죄가 되는 것이므로 그들을 용서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의 국적을 모르므로 우리나라의 형법에 따라서 극형에 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정은 극히 분명하여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년에 보낸 당신들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받으러 당신들이 오리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편지는 필요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요식 절차 없이 전달된 것이므로 우리는 거기에 대한 답장을 할 의무는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개 도의 관찰사가 관여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왕국은 중국 황제에게 종속하여 있으므로 외국인들에 관한 문제는 중국 천자께 품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국 정부의 동의 없이 당신들이 어찌 회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신들이 당신들에게 대답하더라도 그 내용은 이상에 말한 것과 다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당신 나라 상관에게 보고하십시오. 그리고 사태의 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의외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상이 조선 조정에서 세실 함장에게 보낸 회답의 요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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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프랑스청나라의 중재 시도에 사실 병인박해는 조선만의 책임이 아니라 조선과 청나라의 공동 책임이라고 청나라까지 비난했다. 프랑스는 조선과 청나라의 사신 왕래가 활발한 점, 조선이 이미 선교사 처형 계획을 청나라에 통보한 상태였다는 점, 청나라가 조선의 입장을 비호하고 있다는 점, 청나라가 조선을 돕기 위한 원병을 만리장성에 대기시켰다는 점을 들며 청나라를 비난했다. 이에 청나라는 영국을 비롯한 여러 열강들의 중재를 청하는 한편 자신들의 입장에 대해 해명했지만 프랑스는 이 모든 행위가 기만 행위이자 원정을 지연시키려는 술책이라고 비난하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벨로네 공사는 로즈 제독에게 극동 함대를 출발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천주교 만주교구장인 베롤 주교도 조선을 정벌하라고 부추겼다. 어쨌거나 로즈 제독은 벨로네 공사가 본국의 상의도 없이 일방적인 선전포고를 한 점에 대해서 기밀 누설이자 이적 행위라고 비난하며 조선은 프랑스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았으니 이번 일은 전적으로 군인인 자신의 소관이라고 주도권을 분명히 했다.

프랑스 외무성은 벨로네의 본국의 인가를 받지 않은 일방적 발언을 크게 질책했고 그의 모든 조치를 무효화했으며 그에게 앞으로 조선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명령함으로 그를 조선 원정에서 완전히 배제시켰고 9월 7일 프랑스 해군성이 나폴레옹 3세의 공식 명령서를 전달함으로 병인양요가 시작되었다. 프랑스 해군성은 로즈 제독에게 이번 원정이 국가적인 모험이니 매우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주문했다. 프랑스 해군성은 절대로 내륙을 치지 말고 안전한 정박지를 확보해서 그 주변을 위압함으로 조선에게 프랑스의 힘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고 만약 상륙 이후 극동함대만으로 조선 정벌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그때 내륙으로 진공해도 좋다고 했다. 9월 18일 프랑스 극동함대가 측량을 위해 산둥 반도의 즈푸 항을 출발하여 조선으로 향했다.

한편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음력) 8월 13일 부평으로 이양선이 들어섰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이에 온 나라가 전쟁 분위기에 휩싸였다. 부호군 기정진이 이런 분위기에 부응하여 매우 단호한 척사를 주장하는 소를 올린다.

“전해 들으니 근자에 서양 오랑캐가 창궐하여 흉악한 계책을 수 없이 꾸민 것으로 인해 급기야는 북경에서 자문(咨文)이 오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자문의 내용은 매우 수상하여 반은 공갈인 듯하고 반은 조정(調停)해 보려는 뜻인 듯합니다. 선척이 또한 서해를 침범하여 정박하니, 대개 이적들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흉포한 마음을 품은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뱃길이 얕은 데가 많고 바닷가의 산들이 대부분 험준하여 저들이 의심을 가지고 감히 상륙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비록 그 나라 사람들을 살해했다는 것으로 트집을 잡기는 하지만, 사실 죽여도 돌아오고 죽이지 않았어도 돌아올 것입니다.

지금 이미 온 자들이 상륙하여 흉포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으며, 후에 오는 자들이 있을지 없을지 그리고 그 수가 얼마나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흉포한 행동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은 저들에게 달려 있고, 그들의 변란에 잘 대처하는가 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들이 우리를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변고에 대처할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묘당의 심오하고 장구한 계책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것이니, 초야에 묻혀 있는 어리석은 신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찮은 신의 지나친 근심에는 혹 때를 놓쳐서 후회막급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절박한 충정에서, 평소 자신의 분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감히 몇 가지 조목을 아래에 적어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올립니다.

첫째, 조정의 계책을 미리 정해야 합니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반드시 바뀌지 않을 계책을 먼저 수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계책이 임금과 재상의 마음에 변함없이 정해진 뒤에야 만백성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니, 국론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것은 국사의 가장 큰 병폐입니다.

자문이 나온 이후로 민간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북경에서 행해졌던 일이 장차 우리나라에서 다시 행해질 것이다.’라고 합니다. 다른 때 만약 백관 중 어떤 이가 이러한 말로써 많은 사람들을 의혹시킨다면 신은 말하기를, ‘이는 요망한 말이다. 외국과 통상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지만, 이 오랑캐들은 보통 요망한 오랑캐들이 아니어서 계획을 실천에 옮기고 뜻을 이루어 온 세상을 자기의 손아귀에 넣었다. 그래도 비교적 깨끗한 곳이라고는 오직 우리 조선 뿐이므로 저들은 우리를 눈엣가시처럼 여기어 갖은 방법을 다하여 틈을 내고 구멍을 뚫어 기어코 통상을 이루고야 말려는 것이니 이 밖에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끝없는 탐욕은 우리나라를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들고, 우리의 산하를 자신들의 것으로 하고, 우리나라의 백관을 자신들의 노복으로 만들며, 우리의 예쁜 소녀들을 잡아가고, 우리 백성들을 금수와 같이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만일 통상의 길이 한번 트인다면 2, 3년 안에 전하의 백성으로서 서양화되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절대로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으며 조금의 관용도 베풀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요즘 사치를 좋아하는 경박한 무리들은 서양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쌓아두려 하고 서양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것을 탐내는데 이것은 가장 상서롭지 못한 일입니다. 이는 해구(海寇)의 세력이 우리나라에 침투되고 있다는 조짐입니다.

그러므로 중앙과 지방 관리들에게 명하여 전인(廛人)들이 쌓아두고 있는 서양 물건들을 수색하고 압수하여 네거리에서 불태워버리도록 하소서. 이렇게 한 후에도 계속 사들이는 자들에 대해서는 외적과 내통한 죄로써 처벌하소서.

둘째, 먼저 사령(辭令)을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두 나라가 서로 전쟁을 하게 되면 사신(使臣)이 각국의 군대 사이에 끼이게 되는데, 사신의 논리 정연한 말로써 상대를 설득하면 상대가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곤 하였습니다. 저들이 자기네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고 우리에게 문책할 때 우리의 대답이 공명정대하고 분명하지 않으면 문책하는 사람은 기세가 등등해질 것이며 대답하는 사람은 기가 꺾이게 될 것이니, 기가 사느냐 꺾이느냐에 곧 승패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의(大義)에 당당하게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외국인에 대하여 대접을 본래 박하게 하지 않았다. 배가 고프다고 하면 먹을 것을 주었고, 병을 앓는다고 하면 약을 주었으며, 배가 기울고 새면 재목을 주었다. 어려움을 당한 이를 불쌍히 여기고 구원하려는 뜻이 어찌 멀고 가까움에 따라 차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약 지방관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변장하여 몰래 들어와서 성안과 여염을 돌아다닌다면 이는 바로 정탐하는 행위이며 외적을 끌어들이는 길잡이다. 이에 나타나는 즉시 체포하여 형벌을 가하는 것은 세상 모든 나라들의 떳떳한 법인데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더구나 이들은 이미 이와 같은 죽을죄를 범하였고 또 무뢰배들을 불러모아 임금을 배반하고 아비를 저버리는 교리로써 꾀어내어 남녀의 도리를 어지럽히고 인원수에 따라 공물을 받는 등 갖은 추악한 행동을 하였으니, 이들은 우리나라의 죄인일 뿐 아니라 바로 너희 나라의 수치이기도 하다.’라고 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대답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8]

용강현(龍岡縣)에서 저들과 문답한 내용을 적은 글을 보건대 저 추악한 무리들의 물음에 대하여 우리는 처음부터 대답한 말이 없었으니 기가 꺾여버린 상황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령에 능한 사람에게 미리 대답할 말을 만들어 연해의 진과 읍에 반포하도록 하소서.

셋째, 지형을 잘 살피는 일입니다. 물에서 날랜 자는 뭍에서는 날래지 못한 법입니다. 저들을 제압하는 방법은 아마도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요격하는 것 이상의 방책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넷째,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일입니다.

다섯째, 바른말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내치에 힘쓰고 외적을 막는 일입니다.

조목들은 매우 많지만 그 귀결점은 사람들의 마음을 결속시켜야 한다는 한 마디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쓰거나 정사를 돌볼 때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결속시켜야 한다는 점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국가로서는 매우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3 전개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병인양요/전개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3.1 한강 탐색

로즈장미 제독은1839년의 기해박해[9]를 항의하기 위해 출병했던 함대가 좌초당했던 전력을 참고하여 조선으로 진입하는 안전한 해로를 확보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기함 프리모게 함, 포함 타르디프 함, 통보함 데루레드 함 등 3척이 9월 18일에 즈푸 항구를 출발하여 한강 수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데루레드 함이 21일에 한강으로 진입하는 수로를 발견했고 프랑스 해군 함대는 영종 첨사의 항의를 모두 무시한 체 한강을 거슬러 한성으로 진공했다. 이에 조선이 발칵 뒤집혔다. 김포 군수 정기화가 허겁지겁 이들 함대의 목적에 대해 질의하자 펠릭스 클레르 리델[10] 신부가 조선을 구경하러 왔다고 대답하며 식량 구입 의사를 전했고 이에 정기화는 돼지, 을 전달했다. 이 와중에 프리모게 함이 또 좌초되면서 청나라로 회항했고 남은 두 배 타르디프 함과 데루레드 함은 여유롭게 북상했다. 이들은 행주를 지나 양천에 이르렀고 양천 현령 윤수연도 이들 함대의 목적에 대해 질의했다. 프랑스 함대는 김포에서와 같은 대답을 전달한 다음에 소, 닭, 달걀, 청태, 백채를 구입했으며 부평에서도 조선이 전달한 생필품들을 전달받았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이 프랑스 함대가 도착하기만 하면 전국의 천주교도들이 몰려올 것이라 허풍을 떤 탓에 프랑스 함대는 많은 천주교도들이 몰려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한강 양안에는 수많은 구경꾼만 나타나서 함대를 구경했을 뿐 아무런 일도 없어 프랑스인들은 당황했다. 한편 회항한 프리모게 함은 영종첨사 심영규가 파견한 병방 이우식에게 프랑스 무기들을 구경시켜 주었지만, 이우식이 질의한 프랑스 함대의 목적과 남은 함정들의 행선지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다. 프랑스 해군 장병들은 한양을 향해 계속 전진했고 조선 측이 제공한 신선한 식료품과 질좋은 생사, 호의적인 구경꾼들로 인해서 조선에 대한 호감을 품게 되었다. 로즈 제독은 조선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 틀림없었다고 장담했지만 조선의 호의적인 태도에 놀라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이 프랑스 함대가 한양에 도착하게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조선은 9월 26일 프랑스 함대를 구경하는 것을 금지하고 염창항에 군선들을 파견해 한강을 봉쇄했다. 이에 프랑스 함대가 더 이상 전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로즈 제독은 조선 측에 90분내에 조선 수군 군선들을 철수시키지 않으면 군선들을 전멸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조선은 이를 묵살했고 결과 첫 번째 교전이 벌어졌다. 양측 함대의 포격전은 당연하지만 조선의 참패로 끝났고 조선 함대는 한강 양안으로 퇴각했다. 한강변에 따라 조선군이 집결해 대규모 포격, 총격을 퍼부었지만 무기의 성능이 형편없던 관계로 프랑스 함대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못했고 오히려 프랑스 해군의 공격에 와해되었다.

교전에서 승리한 프랑스 함대는 서강에 이르렀다. 도성까지 10여 리를 앞둔 지점이었다. 하지만 타르디프함이 좌초되면서 프랑스 함대의 전진은 중지되었다. 프랑스 함대는 9월 27일 한강 하류로 퇴각했다. 조선은 이용희 지휘 하의 병력 1천 명을 급파한 상태였으나 프랑스 함대의 철수로 더 이상의 교전은 없었다. 프랑스 함대는 퇴각하면서 대동강에서 제너럴 셔먼 호가 행패를 부리다 불타버렸다는 소식과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강화되었단 소식을 들었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는 군함 1척을 남겨 조선의 박해를 저지하자고 제안했지만 로즈 제독은 이를 거부했다. 9월 30일 프랑스 함대는 정박지인 작약도를 떠났고 10월 3일에 즈푸항에 돌아왔다.

한편 조선은 프랑스 함대의 진입을 수수방관한 지방관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들끓다가 프랑스 함대가 한양의 코앞까지 왔단 소식에 발칵 뒤집혔다. 백성들은 물론 관리들까지 혼비백산하여 식솔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즉시 포도청에서 치안 유지를 위해 순찰을 강화했고 의병 궐기를 촉구했다. 프랑스 함대가 철수한 것이 확인된 이후 고종은 3만 냥의 내탕금을 하사하며 전국의 수군 전력을 강화할 것을 명령했고 이 자금으로 노후화된 전선들을 수리했다.

3.2 강화도 공격

로즈 제독은 한강 봉쇄령(The Blockade of the Salee River)을 중국 정부 및 각국 공사관에 발송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프랑스군은 먼저 조선으로 떠나기 전인 10월 10일에는 주청 영국 해군 사령관 킹 제독이 직접 참관하여 그들의 훈련을 지켜보는 가운데 쿵둥다오(崆峒岛) 일대에서 해상기동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 다음날인 10월 11일[11] 프랑스 해군은 차푸항에서 군함 7척(전함 게리에르(Guerriere), 순양함 프리모게(primauguet)와 라플라스, 포함 타르디프(Tardif), 르 브레통(Le brethon), 통보함 캉샹(Ken-Chan), 데룰레드(Deroulede)), 해군 육전대 800여명, 장교 약간과 부사관수병 725명의 병력이 참전한 총 1,525명[12]의 군세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9월 6일 프랑스 군함들이 팔미도에 나타났단 보고가 떨어졌고 9월 8일 강화성이 프랑스 해군의 함포 사격에 유린당했다. 강화 유수 이인가와 선봉중군 이용희는 맥없이 강화도를 내주고 달아났고 이에 조정은 그 둘을 처벌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흥선대원군이 의정부에 글을 보내 독려하고 조정은 훈련대장 이경하를 순무사로 삼고 이용희를 선봉장으로 보내 응전하게 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9월 11일에 이경하와 로즈 제독은 매우 살벌한 내용의 편지를 교환했다.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면 반드시 망하고, 국법(國法)을 어기면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 하늘이 백성들을 세상에 내려 보냄에 이치로써 순(順)하게 하고, 나라의 봉강(封疆)을 나눔에 다스리어 지키게 하는 것이다. 순(順)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질면서 해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수(守)라는 것은 무엇인가? 침범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거스르면 반드시 망하고 어기면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며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너그럽게 대해주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도(道)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너그럽게 대하여 이름도 알 수 없고, 도리(道里)도 알 수 없는 나라 사람들이 매번 우리나라 경내에 표류해오면, 수토지신(守土之臣)에게 명하여 영접하고 사정을 물어보면서 마치 오랜 우호관계를 수행하듯이 하였다. 굶주렸다고 하면 먹을 것을 주고, 춥다고 하면 옷을 주었고, 병들었다고 말하면 약을 지어서 치료해 주기도 하였으며, 돌아가겠다고 하면 식량까지 싸서 보내주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대대로 지켜오는 법으로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온 천하가 우리를 일컬어 ‘예의지국(禮儀之國)’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약 우리 사람들을 인연(夤緣)하여 몰래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의 옷으로 바꿔입고 우리말을 배워가지고 우리 백성과 나라를 속인다든지 우리의 예의와 풍속을 어지럽힌다면, 나라에 상법(常法)이 있는 만큼 발각되는 대로 반드시 죽인다. 이는 세상 모든 나라들의 한결같은 법인데 우리가 상법(常法)을 실행하는 것에 대해서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성내는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면 우리가 묻지도 않았는데도 지금 너희들이 이것을 트집 잡아 말하는 것은 이미 도리에 몹시 어긋나는 것이다.

일전에 너희 배가 우리 경강(京江)에 들어왔을 때는 배는 불과 2척이었고 사람도 1,000명이 못되었으니 만약 도륙(屠戮)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방법이 없었겠는가?[13] 하지만 몰래 침입한 자들과는 구별되었으므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사람들을 대해주는 의리에서 차마 병력을 가하여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경내를 지나며 같은 것을 요구하면 그때마다 주었다. 작은 배가 왕래할 때에 말로써 물으면 먹을 것은 받으면서 돌아가라는 말은 따르지 않았으니 너희들이 우리를 배반한 것이지 우리가 어찌 너희를 배반한 것인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고 갈수록 행패를 부려서 지금 우리 성부(城府)를 침범하고, 우리 백성들을 살해하고 재물과 가축을 약탈하는 행위가 한이 없으니 실로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고 나라 법을 어기는 자들로서 이보다 더 심한 자들은 없었다. 그러니 하늘이 이미 그들을 미워하고 사람들도 그들을 죽이려 하였다.

듣건대 너희들이 우리나라에 전교(傳敎)를 행하려고 한다는데 이는 더욱 안 될 일이다. 수레와 서책이 같지 않으며 각기 숭상하는 것이 있으니 정사곡직(正邪曲直)에 대해서는 아예 거론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학문을 숭상하고 너희는 너희의 학문을 행하는 것은 사람마다 각기 자기 조상을 조상으로 섬기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남에게 자기 조상을 버리고 남의 조상을 조상으로 섬기라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만약 죽음을 면할 수 있다면 하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너희를 은(殷) 탕(湯) 임금이 갈백(葛伯)에게 하듯이 대해 주었는데, 너희는 우리를 험윤(玁狁)이 주(周) 나라 선왕(宣王)를 배반하듯이 포악하게 대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지인지덕(至仁至德)하더라도 제멋대로 난동을 부리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천만(千萬)의 대병(大兵)을 거느리고 지금 바닷가에 나와 하늘의 이치를 받들어 토벌의 뜻을 펴려고 한다. 우선 내일 이른 아침에 서로 대면하자는 약속을 급히 보내니 군사의 곡직(曲直)과 승패(勝敗)가 결정되리라. 너희들은 퇴각하여 달아나지 말고 머리를 숙이고 우리의 명령을 들어라.


병인년(1866) 9월 11일【술시(戌時)】 조선국 순무영(巡撫營)
프랑스 황제의 명령을 받은 전권대신(全權大臣)은 각초(各哨)의 용맹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준절히 효유(曉諭)한 일을 당신들 순무사(巡撫使)는 다 잘 알라. 나는 본 조정 황제의 명을 받고 우리나라 군사들과 백성들을 보호하려고 이곳에 있는 것이다. 올해에 이 나라에서 무고(無辜)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은 우리나라의 전교사(傳敎士)로 추중(推重)되던 사람이다. 너희는 어질지 못하게 불의(不義)로 그를 죽였으니 공벌(攻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전교사는 매우 어질고 의로운 사람이라 털끝만치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그를 죽였으니 천리를 어긴 것이다. 그러니 죄악은 세상 법에서 온전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에서 지난 몇 해 전에 일어난 일을 듣지 못했는가? 그들이 불인(不仁)을 행하고 이런 흉악한 행위를 저질렀다가 우리 대국에서 토벌하니 머리를 숙이고 우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번 프랑스 전권 대신은 불인불의(不仁不義)한 나라인 조선을 징벌하기로 정하였으니 만약 귀를 기울여 명을 따르지 않으면 전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하나. 세 사람이 관청을 부추겨 우리나라 전교사를 살해한 것에 대해 엄정히 분별할 것이다.
하나. 너희 관청에서는 조속히 전권(全權)을 지닌 관원이 조속히 이곳에 와서 직접 면대하여 영구적인 장정(章程)을 확정하라. 재해(災害)와 흉환(凶患)이 지금 가까이 닥쳤으니 너희가 재난을 피하려고 한다면 조속히 회답하고 명령을 받드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본 대신이 기일을 앞당겨 너희들에게 환난(患難)을 줄 것이니, 너희 백성들이 재난을 당하는 근원이 될 것이다. 그 때 가서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마라.


기원 1866년 양력 10월 18일”

이에 흥선 대원군도 의정부에 군사들을 독려하는 격문을 내린다.

“사람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고금(古今)의 천지(天地)의 상경(常經)이다. 양이(洋夷)들이 여러 나라들을 침략한 것은 본래 있었지만 지금까지 몇백 년간 이적들은 감히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몇 해 전 중국이 화친을 허락한 다음부터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곱절이나 더해져서 도처에서 포악한 행동을 감행하여 모두 그들의 해를 입게 되었다.

오직 우리나라에 대해서만 감행하지 못한 것은 실로 옛 성인이 하늘에서 음덕으로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알게 된 것은 우리의 예의(禮義)이고 우리가 의지할 바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굳게 뭉치는 것이다.

지금 상하(上下)의 사람들이 만약 의심하거나 겁을 먹는다면 모든 일은 와해(瓦解)되고 국사(國事)는 그르치게 된다. 나에게 마음 속으로 굳게 정한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이 굳은 맹세를 알고 나의 뒤를 따르라.

첫째, 고통을 참지 못하고서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이다.

둘째, 그들의 해악을 참지 못하고 교역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행위이다.

셋째, 적들이 도성에 쳐들어왔다고 해서 만약 도성을 버리고 간다면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이다.”

3.3 결말

9월 18일엔 프랑스 측이 2척의 함정과 해군 육전대원들로 한성근과 지홍관이 150명의 병사로 지키던 문수산성을 공격했다. 프랑스 해군의 빠른 사격에 조선군은 3명의 전사[14]와 2명의 부상자를 냈는데 이에 놀란 조선 군대는 을 버리고 달아났고 프랑스 해군은 문수산성을 불살라버렸다. 조선군은 프랑스 해군에게 사격을 퍼부어 5~60명의 피해를 주었다고 주장했지만[15] 본인들 스스로도 그들이 자신들이 총을 쏘자 그냥 엄폐한 것인지 부상당한 것인지 죽은 것인지도 가늠 못하는 처지였다. 이 패배로 사실상 강화도프랑스 해군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분노한 이시원과 이지원 형제가 음독자살하기도 했다.

이어 9월 22일에 광성진과 갑곶진을 점령해 불태웠고 조선 를 보이는 대로 포격해 격침시켰다. 조정은 급히 4천명의 지원군을 급파했지만 조선군은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목만 사수하며 강화도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고 조정은 강화도를 무력하게 내준 장수들을 처벌하며 분풀이를 했다. 기고만장해진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강화도 곳곳의 민가와 요새, 관청, 창고를 불사르고 약탈을 자행했다.

그런데 10월 3일 프랑스 해군은 60명의 장병을 보내 정족산성을 정찰한 다음에 점거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는데 매복하고 있던 양헌수가 기습을 가해 동문에서 2명, 남문에서 4명의 수병을 사살했다고 기록했다[16]. 조선군 전사자는 1명이었고 촌민들이 40명 가량의 전사자를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양헌수의 병인일기에 따르면 진시[17]에서 미시[18]까지 계속된 전투에 조선군의 탄약이 바닥났을 무렵 때마침 프랑스군이 물러났다고 한다. 계속된 승리에 방심한 프랑스 해군은 당나귀음식을 잔뜩 싣고 거의 나들이를 가듯이[19] 정족산성에 진입했는데 이것이 패착이 되어 패하고 말았다. 결국 조선이 협상할 의사가 없음만 확인한 로즈 제독의 원정군은 10월 9일부터 축차적으로 퇴각했고, 10월 13일에 완전히 조선에서 철수한다.

이 때 프랑스 해군의 사기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대국 프랑스의 군대가 아시아 깡촌의 소국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참전했던 프랑스 해군 장병들은 격분해서 로즈 제독에게 복수전을 하자고 주장했지만 제독은 퇴각을 고집했다. 이후 그는 프랑스의 위신을 실추시켰다며 가루가 되도록 욕을 먹었다. 특히 복수하려고 했던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식민지에서 여러 차례 쌓은 실전 경험으로 정예 부대로 꼽히는 편이었기에 프랑스 해군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싸우려고 했었다. 다행히 프랑스군이 별 관심을 두지 않아서 실행하지는 않았다. 말단 수병들이나 하급 장교들이나 그랬다는 것이지, 로즈 제독은 전쟁 이후 잘만 승진했다.

최종 피해
프랑스군 사망 3명, 부상 35명
조선군 사망 5명, 실종 7명, 부상 2명 + 문화재 약탈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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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의의

교과서에선 단순히 프랑스를 물리쳤다 정도로 서술하고 근대사를 다룬 국내 드라마에서는 실제 침공해 온 프랑스 해군이 아니라 아예 쳐들어온 적도 없는 프랑스 육군을 개발살내는 왜곡을 보여주어 그냥 프랑스에게 이겼다 정도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병인양요 항목에서도 보았듯이 프랑스 해군을 대파하거나 하는 사건은 없었으며, 오히려 프랑스 해군의 공격을 받고 문수산성이 함락되면서 처참하게 개발살되고 성 내 누각이 모조리 불타버리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다만 수백 명의 병력이 섬멸되고 지휘관 어재연까지 전사한 신미양요와는 달리 병인양요에서는 지휘관급의 피해는 없었고 사상자도 수십 단위를 넘지 않은 걸로 보고됐다.

조선군은 확실한 피해 집계는 전해지지 않으나 실제 피해는 막심했을 것으로 보이며 대략적으로 조선군 10,000명 vs 프랑스군 600명의 싸움이었다. 프랑스 해군의 피해는 정확하지 않은데 양헌수는 최소 수병 6명을 죽였고 퇴각하는 프랑스 해군을 구경한 촌민들이 죽은 프랑스 군인들을 40명은 족히 보았다고 증언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로즈 제독은 전사자는 없고 부상자가 30여명이라 보고 했다. 영미권과 일본, 중국 등의 다른 나라 저서들에서도 프랑스 측과 비슷한 기록을 하고 있다.

4.2 프랑스 측 관점

다만 전투를 치른 프랑스측에서도 이를 자신들의 패배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은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유명한 쥐베르의 글에서는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당시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관 의사였던 마르탱이 1883년에 잡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명백히 병인양요를 "패배"로 규정하고 있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20] 신부는 프랑스 함대의 철수를 야반도주라고 불렀으며 장교 이하 병사들이 원통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즈 제독이 철수를 계획한 이유도 정족산성을 점령하려면 최소한 500명의 병력과 1개 포병 중대가 필요한데 현재 수준으로는 뚫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공세종말점에 도달해서 더 이상의 작전도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거기에 프랑스가 조선의 개항을 관철시키지 못했고 약탈품 외엔 얻은 것이 없으니 결국은 전략적인 패배. 실제 접전에서는 조선을 개박살낼 수 있지만 그런다고 해서 본인들이 이루려는 목적을 이룰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전반적인 서양에 대한 반감이 커졌으며 1870년에 일어난 중국의 텐진 교안도 이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4.3 프랑스가 조선에 관심을 두지 않은 까닭

그러나 프랑스가 병력의 운용 실패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역사적 맥락을 잘 모르는 주장이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군제국주의 열강의 투톱이었다.[21] 무장이나 훈련도 면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특히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여러 식민지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 때문에 실전 경험도 무척 많았다. 프랑스가 조선에서 비교적 빨리 물러난 이유는 군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세적인 것으로, 당시 식민지화에 힘을 쓰던 인도차이나 방면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원정대의 주력은 베트남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방면 등의 인도차이나에서 원정 중이었고, 당시 베트남을 지배하던 응우옌 왕조의 산발적인 저항에 부딪혔기 때문에, 더이상 극동에 신경쓰기 힘들었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화는 1880년대야 마무리되며,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저항세력 뿐만 아니라 베트남에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나라와도 전쟁(청불전쟁)을 치러야 했을 정도였다.[22] 마찬가지로 남북 전쟁이 끝난 직후의 미국도 전후 복구와 서부 개발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신미양요 이후로 딱히 조선에 진출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틈을 타서 조선에 무력 도발하여 강제 개항에 성공한 것이 일본이며, 이는 일본의 국력이나 군사력이 프랑스나 미국을 앞섰기 때문이 아니라 프랑스와 미국이 조선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4.4 영향

프랑스 측 지휘관 피에르-귀스타브 로즈 제독은, 이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해군소장(contre-admiral:영미의 rear-admiral에 해당)에서 중장으로 승진하여 보불전쟁에도 참가했으며, 1875년에는 지중해 분함대(Escadre de la Méditerranée) 사령관을 맡았다. 로즈가 중장으로 승진한 것이나 지중해 분함대의 위상을 따져본다면, 일각에서 주장하는 좌천설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흥선 대원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쇄국정책에 더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조선의 개국과 근대화는 더욱 더 멀어졌다. 그리고 약탈해 간 각종 문화재 및 서적들은 서양의 동양 역사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1993년 방한했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도서관 사서들의 반대[23]를 누르고[24] 반환을 약속하기도 했다.

딱 한 권 정상회담 자리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반환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외규장각 도서의 영구대여방식[25]으로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한국으로의 반환이 양국 정상 간에 합의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외규장각 도서 전체의 반환에 대한 세부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합의문 비준을 눈앞에 두고 후임인 김대중 대통령의 비준 거부(프랑스가 약속 엎은 게 아니었다! 자세한 전후 사정은 한불관계 참조.) 및 협상 중단 선언으로 외규장각 도서는 돌아오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 때 프랑스 측에 협상 재개를 요청해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고, 이명박 정부가 프랑스와 교섭에 성공해 G20 회의 기간 중 외규장각 서적들을 프랑스로부터 돌려받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국내법상 '반환'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못했으며, '영구 임대' 표현은 프랑스 도서관의 반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대신 '5년마다 자동 갱신 임대' 형식으로 사실상 영구히 돌려받게 되었다. 이에 '실리를 택한 것이다', '소유권을 명확하게 우리 쪽으로 돌리지 못했다'라는 논쟁이 일었다. 어찌되었든 외규장각 서적들은 10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5 관련 항목

  1.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
  2. 오늘날의 여권에 해당.
  3. 이때까지 서양은 조선을 고려, 즉 코리아라고 불렀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4. 다만 이때는 병인양요 직전은 아니고, 1851년의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언급하는 박해는 병인박해가 아닌 기해박해 등 그 이전의 박해를 말한다.
  5.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샤스탕 신부, 모방 신부,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과 함께 시성되었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
  6.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양성, 유학보냈다. 최방제는 유학 도중 병으로 죽었지만, 김대건최양업은 무사히 자라나 신부가 되었다.
  7. 한국 천주교에서 활동한 최초의 성직자.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으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되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중 하나.
  8. 실제로 조선 조정은 프랑스에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밑에 참조.
  9. 이때 프랑스인 사제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가 순교했다. 이들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항목 참조.
  10.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
  11. 이 문서는 기본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라 서술했기 때문에 음력이 기본이나 10월 10일 운운은 프랑스의 기록이라 양력이다. 음력으로는 9월 3일에 해당한다.
  12. 이에 대해서는 자료가 확실치 않으나 보통 1,500여 명이라고 하므로 여기에 기재한다.
  13. 헌종 시절에 신유박해에 항의하며 개항을 요구하던 프랑스 함대가 홍주 외연도에 고립되었던 사건을 의미한다.
  14. 최장근(崔長根)ㆍ김달성(金達城)ㆍ오준성(吳俊成)
  15. 프랑스 측 기록엔 이 전투에서 사망자가 3명 발생했다고 쓰여있다. 한 가지 웃기는 점은, 여기서 조선군이 쓴 전술은 뒤에 있는 정족산성 전투와 마찬가지로 성벽 뒤에 매복해 있다가 적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착각하고 들어왔을 때 일제히 사격을 퍼붓는 것이었다. 똑같은 전술에 2번이나 당할 정도로 당시 프랑스군은 조선군을 만만히 봤던 거다...
  16.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외 여러 서양 열강들의 기록인 프랑스측 부상자만 35명에 맞지 않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다.
  17. 8시
  18. 14시
  19. 그 때문에 야포를 갖고 가지 않았다.(...) 이 링크로 가서 정족산성 전투도를 보면 알겠지만, 공격측이 성문을 공격하기 몹시 불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야사에 따르면 프랑스 해군이 버리고 간 와인과 음식은 조선군이 챙겨서 먹었다고 한다. 전리품이 고급 프랑스 와인?! 땡잡았네!
  20.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
  21. 나머지 하나는 당연히 영국. 이 당시 세계는 영국과 프랑스가 다 갈라 먹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22. 프랑스군은 보불전쟁 직후라서 사정이 말이 아니었지만, 조선보다 군사력이 월등했던 청나라군을 격파하고 베트남의 종주권을 탈취했다.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에서 물러난 것은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23. 골때리는 건 이 당시 사서들 중에는 고문서를 복제해서 원본을 밀반출한 천하의 개쌍놈들도 있었다는 것. 나중에 프랑스 경찰에 체포가 되면서 알려졌는데, 복제하는 과정에서 훼손된 고문서도 많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들이 반대한 이유가 단순히 문화재 보호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범죄행각을 감추려는 목적이 아닌가 의심받기도 했다.
  24. 우리는 일반적으로, '외규장각도서 반환 약속 이후에 사서들의 반대가 불거졌고 프랑스 정부가 그것을 빌미로 약속을 엎었다'고 알고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름이 한국측 협상단장 등의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사서들의 반대는 미테랑 대통령의 반환약속 전에 있었던 일이다.
  25. 대여라는 명칭에 피약탈국으로서 아니꼬움이 폭발하지만, 현실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국/일본 등의 다른 국가들과 성사되었던 약탈문화재 환수사례들과 비교해 보면 프랑스 정부가 제시한 '영구 대여'는 압도적으로 좋은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