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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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釜林事件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하인 1981년에 부산직할시에서 일어난 군사정권의 대표적인 용공조작으로 꼽히는 사건이다.

창원시에 있는 부림시장의 부림(富林)하고는 한자가 다르며 여기서의 부림은 釜林. 헷갈리지 말자.

1.1 어떤 사건인가?

용공조작이라는 면에서는 제5공화국 집권 초기 당시 통치기반을 다질 목적으로 일으켰던 사건으로 본다.

부림 사건(釜林事件)은 부산의 학림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부림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으며 신군부 정권 초기인 1981년 9월 공안 당국이 당시 부산지역 양서협동조합에서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부산지검 공안 책임자로 있던 최병국 검사(새누리당 전 국회의원)가 지휘했다. 매카시즘적 발언으로 논란이 된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도 이때의 담당검사였다. 한편 당시 김광일 변호사와 함께 변론을 맡았던 노무현 변호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담당검사였던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은 후에 검찰의 결정을 뒤엎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체포해 사형을 구형하게된다.

이 사건은 영화 변호인의 모티브가 되었다.

1.2 사건 개요

이 사건 관계자들은 "영장없이 체포·구속되어 대공분실에서 짧게는 20일부터 길게는 장장 63일 동안 몽둥이 등에 의한 구타와 '물고문', '통닭구이 고문' 등 살인적 고문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조작됐다. 독서모임이 반국가단체의 찬양활동으로 조작됐고 술집에서 두 사람이 만난 것이나 친구 개업식에 선물을 들고 찾아간 것도, 망년회를 한 것도 모두 현저히 사회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로 규정되어 처벌됐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정권의 안보를 위한 도구로 쓰이는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되어 노무현, 김광일[1] 등이 무료 변론에 나서기도 했다. 이 사건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전두환 정권 초기 저항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조작된 사건'이란 정치적 면죄부를 받았으나, 법률적으로는 여전히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부산지법은 2009년 8월에 피해자들에 대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는 면소판결을,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2014년 2월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과 계엄법 위반에 대해서는 상고포기를 하였지만,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건에 대해서는 상고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2014년 9월 대법원은 부림사건 피해자 5명에게 무죄를 확정했다. #그걸 이제야 하냐? 병신들

2 피해자들

2.1 81년 9월 7일 발표 1차 구속자 8명

  • 7월4일~8월14일에 걸쳐 불법연행 후 고문.
  • 설동일 (26세, 서울대 농대, 언양농협 근무 : 이후 부산민주항쟁기념관장, 현 노무현재단 근무.)
  • 송병곤 (24세, 부산대 법대졸, 공장근무 : 이후 법무법인 '부산' 사무장 재직,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던 권양숙 여사의 고종사촌 동생과 결혼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례를 서줌.[2])
  • 노재열 (24세, 부산대 공대 4년휴학 : 1979년 부마항쟁 주도, 이후 민주노총 간부 역임.)
  • 고호석 (26세, 부산대 문리대졸, 당시 부산 대동고 영어교사 : 현 부산 거성중학교[3] 영어교사 재직중.)
  • 이상록 (27세, 부산대 법대졸, 선반공 : 이후 8년간의 정신병 투병 후 1997년 사망.)
  • 송세경 (30세, 서울대 농대졸, 회사원 : 아우성 구성애씨의 남편, 이후 김광일 변호사 사무장으로 활동하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총무이사 역임.)
  • 김희욱 (32세, 부산 대연여중 교사 : 부산환경연합 대표 재직 후 귀농.)
  • 이상경 (부산대 문리대 1년퇴학 : 현재 출판업 종사.)

2.2 81년 10월 15일 발표 2차 구속자 8명

  • 9월11일~30일에 걸쳐 불법 연행 후 고문.
  • 장상훈 (24세, 부산대 약대졸 : 이후 노무현이 39세의 나이로 장상훈의 결혼식에 첫 주례를 선다.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공안검사 출신 한나라당 김기춘(현 청와대 비서실장)과 거제에서 맞붙었으나 패한다.)
  • 김재규 (33세, 부산대 상대졸, 당시 탁구장 운영 : 이후 노무현 후보 국민참여운동본부 부산본부장 및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역임.)
  • 이진걸 (23세, 부산대 : 1979년 부산대 내에 '민주선언문'을 뿌려 부마항쟁 주도. 현 노무현재단 부산지역위원회 공동대표.)
  • 박욱영 (25세, 부산공전졸 : 전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의원.)
  • 윤연희 (24세, 부산대 사범대졸, 교사 : 현 부산 장림여중 음악교사.)
  • 최준영 (29세, 서울대 공대졸, 설비사무사 : 현재 무역업 종사.)
  • 주정민 (24세, 부산대 법대졸.)
  • 전중근 (25세, 공장근무.)

2.3 82년 4월 이후 3차 구속자 3명

  • 도피중 체포.
  • 이호철 (24세, 부산대졸 : 부마항쟁 주도, 이후 배재여행사 경영, 전 참여정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 설경혜 (23세, 교사 : 1차 구속된 설동일의 동생, 이후 계속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 정귀순 (22세, 부산대졸 : 현 '이주민과 함께' 대표로 이주노동자 인권운동가로 활동.)

2.4 대학시위 중 구속자 4명

  • 김진모 (부산대 4년.)
  • 최병철 (부산대 4년.)
  • 유장현 (부산대 4년.)
  • 김영 (23, 부산대, 당시 탈영군인 - 소설집 '완전한 만남'의 김하기 작가.)
(부산지방검찰청 공소장 1981.10.21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구속자 석방요구 청원서, 각종 신문기사 참조)

2.5 피해자 진술

《부산민주운동사》 에서 밝힌 당시 사건 피해자들의 현재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 김모씨(33·상업) - 부림사건은 20여명이 관련된 부산지역 최대의 국가보안법 조직사건으로 영장없이 불법구금과 고문 등으로 완벽하게 조작된 사건이다. 사건의 수사책임자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일하는 것은 부적절 하다고 판단해 총선 연대에 낙천명단에 포함시켜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 송모씨(26·농협근무) - 대공분실에 끌려가 통닭구이, 몽둥이로 맞는 고문을 당했다. 당시 최병국 검사가 대공분실로 찾아와 수사를 지휘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당시 검사가 관련자들에게 3년에서 10년의 중형을 구형한 것으로 보면 사건 조작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당시 시대 상황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면 최소한 반성과 용서를 구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 최모씨(당시 피의자 최모씨 부인) - 당시 남편이 사건을 끝까지 부인하자 최병국 검사는 “사건을 인정한다는 반성문을 쓰면 당신 남편만 빼주겠다”고 회유했지만 뿌리쳤던 경험이 있다. 최 검사가 사건 조작의 책임자이다.
  • 고모씨(26·교사) - 관련자들 중에는 재판을 받기 위해 법원에 가서야 처음 상견례를 한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로 서로 거의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우리 모두 그들의 각본 속에 끼워 넣어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어 냈다. 당시 몇 명이 다방에 앉아 얘기 나눈 것까지 ‘반국가단체 고무·찬양’으로 몰아붙여 징역 10년에서 3년까지 중형을 구형했다.

3 영화화

부림사건을 다룬 영화로 2013년 12월 개봉한 변호인이 있다.[4] 송강호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에서 모티브를 따온 주인공 역을 맡아 열연했으며 피해자 진우 역할을 맡은 임시완 역시 부림사건의 피해자와 똑같은 부산대학교 공대 출신이란 점에서 화제가 되었다. 2014년 1월 18일 천만 관객을 달성했다.

영화내에서도 E.H.카가 저술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불온서적이라는 주장이 억지라는 것[5]과 실제 노무현 대통령이 발언했던 비유[6]까지 영화에서 각색되어 재현되었다.

2014년 1월 22일에 TV조선에서 방송된 강적들에서 영화 '변호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실제 '부림사건'과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제의 사건과 비교했을때 영화가 여러가지 이야기와 깊이가 더해진 것은 사실이고 그뿐만 아니라 추가적인 허위 사실이 더해진것 등등 tv 조선 같은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영화적 연출을 위해 사실과 다르게 각색하거나 드라마틱하게 바꾼 몇 가지 소재를 제시하였다. [7] 자세한 내용은 변호인 항목 참고.[8]

4 노무현 변호사의 역할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헌신적인 노력에 깊은 감사의 뜻을 밝혔다.#
고호석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법정에서 격앙되어 판사와 싸울 정도로 열정적으로 변호했다고 증언하면서[9] 그의 당시 헌신적인 변호 덕분에 33년이 지나 무죄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2,#3
박욱영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차분하고 논리적이면서도 때로는 거칠게 판검사들을 밀어 부쳤다며 증언하였으며#, 최준영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편한 길을 갈 수 있었음에도 부림사건 피해자들을 변론하느라 험난한 길을 걷게 되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내었다.#
윤연희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자신들의 무료변론요청에 흔쾌히 응해준 것에 감사해하며 재판에서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당당하게 변호해 주었다고 회고했다.
부림사건의 판사였던 서석구씨 역시 노무현 변호사가 재판에서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이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하여 사회적 주목도를 높였다고 증언하는 등# 부림사건의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노무현 변호사의 역할이 컸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런 당시 관련자들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일각에서 말하는 노무현 변호사가 부림사건 당시 아무 것도 안 했다느니 하는 극소수의 주장들은 아무 근거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5 관련 서적 목록

군사정권이 당시 피해자를 만들어낸 불온서적 목록이다. 그런데 웃기는 건 이 서적들은 당시 버젓이 서점에서 팔리고 있던 책이었다는 점이다. 쉽게 구할수 있었던 책이란 점에서 왜 불온서적이 된건지 어이가 없을 뿐이다. 군사독재정권의 논리라면 불온서적을 찍어낸 출판사부터 먼저 조졌어야 되는거 아닌가?? 관심있는 위키러는 읽어보고 그들이 만들어낸 빨갱이(?)가 되어보도록 하자(...). 심지어 이 책들 중 일부는 해당 분야에서 고전으로 취급되는 책도 포함되어 있다(...).

  • E.H.카 "역사란 무엇인가"[10]
  • 이영협 "일반경제사론"
  • E.R.셀리그만 "경제사관의 제문재"
  • 박현채 "전후 30년의 세계경제사조와 민족경지론"
  • 유인호 "한국경제의 실상과 허상"
  •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11]
  • 리영희 "우상과 이성"
  • 리영희 "중국 8억인과의 대화"
  • 아세아문제연구소 발간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4, 5권"
  • 조용범 "후진국경제론"
  • 최종식 "서양경제사론"
  • 리영희 "경제학"
  • 폴 스위지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 중 제3장 '공황과 불황' 제4장 '제국주의'
  • 조지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 사무엘 팔머 "제3세계의 이해"
국내학자들의 책은 빼고라도 역사학계의 불멸의 고전인 <역사란 무엇인가>나 경제학계의 거두인 조지프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처럼 국제적으로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책들까지 불온서적이라고 한 것은 그야말로 무식의 증거일뿐이다. 당시 5공정권과 사법부가 얼마나 협소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1. 부림사건 재심 변호인이다.
  2. 영화 변호인의 등장인물인 '박진우'의 실제 모델.
  3. 거성중학교는 1990년 8월 까지는 대동고등학교와 같은 재단의 사립학교였다. 부림사건 이후~1990년 8월 사이에 재단에서 거성중학교로 발령한 이후에 거성중학교가 계열분리된것으로 추측.
  4. 작중에서는 '부독련 사건' 으로 나온다.
  5. E.H.카는 영국인이며, 영국 외교관으로서 학계와 외교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던 사람이다. 또한 영국은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에 파병한 한국의 우방국이다.
  6. "조지 포먼하고 무하마드 알리가 권투시합 해가 내가 알리 응원하는데 김일성이도 알리 응원하모 내 국보법 어긴깁니까?"라는 발언,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과 북한이 축구하는데 북한 응원하면 그게 국보법 위반이냐"라는 발언을 했었다고 한다.
  7. 영화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대부분의 변호를 독자적으로 하지만 실제 사건 당시에는 5명의 공동 변호인 중 한명이었다. 그러나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의 미디어물에서 특정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각색과 연출로 작품의 완성도와 극적 몰입도를 높이는 것은 널리 허용되는 기법이다. 또 당시의 폭압적 정치사회에서 인권을 위해 인권변호사로 뛰어든 점은 높이 살만하다. 다만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노무현 변호사가 가장 열성적으로 변론에 임했다"고 증언하고 있는 걸로 보아 영화를 마냥 허구로만 볼 수 없다.
  8. 더 충격적인 사실은, 심지어 최근에도 이름을 말할 수 없는 모 사이트를 비롯한 일부 극우파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이유는 단순한데, 단지 사건을 소재로 쓴 영화 변호인노무현 대통령을 다룬 영화였기 때문(...)
  9. 거의 공범 수준으로 변호했으며 피해자 가족들이 변호사가 저렇게 싸우듯이 변호해도 되나하고 우려할 정도였다고 한다.
  10. 위에서도 이야기했듯 억지 주장이다. 이 책은 현대 역사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고전 중 하나로 꼽히는 명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책이다. 심지어 국정교과서 시절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첫 장에 E. H. 카의 역사관을 주요 역사관 중 하나로 소개하며 그의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표현이 인용되어있기도 했다. 이런게 목록에 들어가 있다는 것부터 실소를 금치 못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듯.
  11. 20세기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사회학자이자 전설적인 기자 출신인 리영희 선생이 저술한 명저로 처음으로 노무현 변호사가 송병곤을 면담하는 과정에서 송병곤씨에게 이 책을 추천받아 읽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노무현 변호사는 불온지정서적을 모두 읽고 변론을 준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