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

1 釜馬, 부산+마산

일본한신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부마가 있다. 부울경의 양대 도시(였던) 부산광역시마산시를 묶어서 일컫는 말. 남해고속도로제2지선의 초창기 명칭도 부마고속도로였다. 부마가 들어간 유명한 사건으로는 제4공화국 끝물에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이 있다.

마산창원시의 2개 구[1]로 흡수편입된 2010년대 현재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는 줄임말이지만 종종 이 명칭이 사용되기도 한다.

부산을 연고지로 한 롯데 자이언츠와 마산을 연고지로 한 NC 다이노스는 일명 부마대첩으로 불린다.[2] NC의 창단 때부터 워낙 롯데 구단측에서 노골적으로 창단 반대를 드러낸 것부터 이어진 대립 관계로 빠르게 라이벌이 됐다.

2 駙馬, 사위

옛날 농서(감숙성) 땅에 신도탁이란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이름 높은 스승을 찾아 옹주로 가던 도중 날이 저물자 어느 큰 기와집의 솟을대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하녀가 나와 대문을 열었다.
"옹주로 가는 나그네인데 하룻밤 재워 주실 수 없겠습니까?"
하녀는 잠시 기다리라며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그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잘 차린 밥상이 있었는데, 하녀가 사양 말고 먹으라고 했다. 식사가 끝나자 안주인이 들어왔다.
"저는 진나라 민왕의 딸이온데, 조나라로 시집갔다가 남편과 사별하고 이제까지 23년 동안 혼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처럼 찾아 주셨으니 저와 부부의 인연을 맺어 주세요."
신도탁은 그런 고귀한 여인과 어째 부부의 인연을 맺을 수 있겠느냐고 극구 사양했으나, 여인의 끈질긴 간청에 못 이겨 사흘 낮, 사흘 밤을 함께 지냈다. 다음날 아침에 여인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좀 더 함께 지내고 싶지만 사흘 밤이 한도예요. 이 이상 같이 있으면 화를 당하게 되지요. 그래서 헤어져야 하지만 제 진심을 보여 드릴 수 없는 게 슬프군요. 정표로 이거라도 받아 주세요."
여인은 신도탁에게 금베개를 건네주고는 하녀에게 대문까지 배웅하라고 일렀다. 대문을 나선 신도탁이 뒤돌아 보니, 그 큰 기와집은 간 데 없고 잡초만이 무성한 허허벌판에 무덤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품속에 간직한 금베개는 그대로 있었다.
신도탁은 금베개를 팔아 음식을 사 먹었다. 그후 왕비가 금베개를 저잣거리에서 발견하고 관원을 시켜 조사해 본 결과 신도탁의 소행임이 드러났다. 왕비는 그를 잡아다가 경위를 알아본 다음 공주의 무덤을 파고 관을 열어 보니, 다른 부장품은 다 있었으나 금베개만 없어졌다. 그리고 시체를 조사해 본 결과 정교한 흔적이 역력했다. 모든 사실이 신도탁의 이야기와 부합하자, 왕비는 신도탁이야말로 내 사위라며 그에게 부마도위라는 벼슬을 내리고 후대했다고 한다.
- 수신기(搜神記)(동진 간보(干寶) 저)

2.1 개요

천자의 딸과 결혼한 남자를 말한다.

풀네임인 부마도위(駙馬都尉)는 천자의 행차 때 갑작스런 암살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 어느 마차에 천자가 탔는지 모르도록 하는 예비 마차인 '부거(副車)'를 끄는 말인 '부마(駙馬)'를 관리하던 직책이다. 현대 사회의 직책과 비교하자면, 대통령 3호차의 운전기사 겸 자동차 책임자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평소엔 참으로 할 일이 없지만[3], 그런 주제에 천자와 아주 가까워서 위세는 대단했던 자리다.[4]

하지만 부거라는 게 천자에게 칼을 들이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위치인지라 아무나 앉힐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사마염이 안전 보장을 위해 이 자리에 사위를 임명하기 시작했다. 이게 천자의 사위만이 부마도위를 하도록 굳어지면서 결국에는 '부마도위=천자의 사위'가 된 것. 그 뒤에는 그나마 맡던 역할도 희미해져 명예직에 가깝게 변하였다. 위세는 어디 가지 않았지만.

2.2 조선에서

조선의 경우에는 세조 때부터 '의빈(儀賓)'이라고 했는데[5], 공주의 남편은 종1품 OO위(尉), 옹주의 남편은 종2품 OO위(尉), 군주의 남편은 정3품 OO부위, 현주의 남편은 종3품의 OO첨위 하는 식의 이름뿐인 관직을 내렸다. OO에는 부마의 본관이 들어간다.

참고로 공주는 왕의 적녀로 무품, 옹주는 왕의 서녀로 무품, 군주는 세자의 적녀로 정2품, 현주는 세자의 서녀로 정3품 작위다. 어찌됐든 아내보단 한 끗발 뒤지는 셈(…). 하지만 옹주의 남편인 도위나 부위, 첨위도 업적에 따라서 의빈부 최고 품계인 유록대부(정1품)에 오를 수 있었다. 고종 6년에 공주와 옹주의 남편인 위는 정1품으로, 세자의 적녀인 군주의 남편인 부위는 종1품으로, 역시 세자의 서녀인 현주의 남편인 첨위도 종1품으로 승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진짜인지는 추가바람.#

왕의 사위니 그 대우가 각별하고 편하게 살 수 있지만, 처신을 잘못해서 정치 문제에 휘말려 끔살당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조선왕조의 경우는 부마는 정책적으로 명예직 외엔 벼슬을 할 수 없었다. 가끔 왕명을 받아 공문서를 작성하거나 예전을 맡거나, 중국에 사신으로 간다든가[6][7], 한 마디로 실권은 거의 없으면서 얼굴마담이 필요한 자리에 종종 불려나갔다.

그리고 아내가 왕녀이다 보니 을 둘 수 없었으며, 만약 아내가 먼저 죽기라도 하면 재혼도 할 수 없었다.[8] 간혹 왕의 허락을 받아 재혼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숙종효종의 4녀 숙정공주가 요절한 후 숙정공주의 남편 정재륜이 재혼할 것을 청한 것을 물리치면서 이를 계기로 부마의 재혼 금지가 법제화되었다. 만약 공주가 일찍 죽었는데 후사가 없다 해도, 재혼은 못 하고 무조건 양자를 들여야 했다. 부마 작위는 혼인식 전에 받기 때문에, 식을 올리기 전에 왕녀가 죽으면 결혼도 못하고 홀아비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 왕녀들이 단명하면서 어린 나이부터 수절하는 부마가 늘어났다. 박영효가 대표적인 케이스로 심지어 조선이 망한 뒤로도 소실이 있었을 뿐 정실부인을 들이지 못 했고,[9] 죽어서도 정실부인 영혜옹주(永惠翁主)의 곁에 묻혔다. 조선 역사상 재혼한 부마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였던 덕혜옹주의 전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가 유일했다.

신분도 공주건 옹주건 품계 위에 사는 존재니 아내가 더 높으니 설설 기어야 하고 시부모가 며느리살이(…)를 해야 하는 데다[10], 부마는 벼슬을 못하고 지체높은 양반이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무위도식. 그래서 부마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세조 시절 초대형 사업. 즉 역모를 꾸민 부마도 있지만 결론은 거열형. 그리고 아내는 일시적 노비전락. 뭐 사실 역모는 수양대군이 먼저 꾸민 거고 정종은 억울하게 쫓겨난 처남이자 왕을 도운 것이니, 역모를 꾸몄다는 서술은 틀렸다. 그리고 역모를 꾸몄다기보다는 역모에 연루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일단 가문에 공주를 맞아들였다는 건 왕실과 사돈을 맺는 것이니, 원래 가문의 수준이 어쨌든간에 순식간에 1등급 명문가로 부상하게 된다. 그래서 부마 본인은 거의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해도, 부마의 형제나 가까운 친척은 과거시험이나 조정 내 승진 등에 있어서 알게 모르게 혜택을 받게 되고, 공주와 부마 사이의 자손은 왕실의 외손이라는 이유로 높은 벼슬에 올랐다. 자손대까지 내내 벼슬할 수 없이 무위도식해야 하는 왕자들보다 오히려 낫다고 할수 있다. 일 안 할 좋은 핑계라 니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카더라.

게다가 왕의 성향이나 총애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나긴 했어도 왕녀들의 지참금이란 다른 양반가 딸들과는 단위가 달랐기 때문에(...), 왕녀들이 시집오며 가져온 재산으로 집안을 더 일으키는 경우도 허다했다. 일례로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가 매우 총애하던 딸 화순옹주(和順翁主)[11]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는데, 원래도 명문가였으나 화순옹주가 시집 오면서 일약 갑부가 되어 추사가 그토록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그리고 왕실에서 부마로 찜하면, 본인이나 그 부모가 부마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태종이 후궁소생인 정신옹주(貞愼翁主)를 시집보내려고 지화라는 점쟁이를 시켜 사주 좋은 미혼남을 알아보라고 한 적이 있다. 지화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주를 알아봤는데, 춘천 군수를 지냈던 이속은 지화를 쫒아내면서 "내 아들을 몸종의 딸에게 장가 보낼순 없다. 내 아들은 죽었다. 그러나 상대가 정혜옹주라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 라고 사실상 살기를 포기한 발언을 한다.

정신옹주는 신녕궁주(愼寧宮主) 신빈 신씨(信嬪辛氏)의 소생인데, 신녕궁주가 태종의 승은을 입기 전에 원경왕후를 모시던 몸종이었다. 정혜옹주(貞惠翁主)는 정의궁주(貞懿宮主) 의빈 권씨(懿嬪權氏)의 소생이였는데, 간택받아 후궁이 된 명문가의 규수 출신이였다. 한마디로 모친의 혈통이 맘에 안든다는걸 저딴식으로 표현한 것.

당연히 이속은 빡친 태종에게 끌려가 곤장 100대를 맞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그러자 사헌부사간원의 신하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죄에 비해 처벌이 너무 가볍다고.(...) 심지어 도승지 조말생은 "이 새끼가 한 짓거리는 역모 수준이니까 삼족을 멸해야 하는데, 전하는 마음이 너무 약하시네요. 전재산을 몰수하고 귀양은 보내는 정도는 하셔야 합니다." 라고 간언했다. 태종은 신하들의 상소러시에 항복하고 전 재산을 몰수하고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훗날, 조말생 본인도 상소러시로 목이 따일 뻔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엔 의정부육조의 신하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저 정도도 너무 약하다고. "첫째로 왕의 명을 거역한 죄, 둘째로 왕명을 수행중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죄, 셋째로 왕녀에게 천한 혈통 운운한 죄까지 따져볼수록 역모니까 목을 잘라야 합니다." 라고 태종을 볶아댔고, 결국 2차 항복을 하고 이속을 관노로 만들었다. 덤으로 이속의 아들에겐 평생 솔로부대로 살라는 처벌이 떨어졌다. 걍 아들래미 내놓을 걸 그랬다..

그리고 거기에서 만족을 못한 신하들은 이속의 신상을 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꼬투리 잡힌 것이, 3년전 이속의 5촌 당숙인 김사문이 상중에 이속과 술을 마신 일이다. 그 자리에는 이속의 매형의 딸인 하옥생과, 그 남편인 유복중이 같이 있었는데, 신하들은 김사문과 하옥생이 바람을 피웠다고 주장했다. 단 둘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완전 억지 혐의 국문크리가 터져 둘을 심문했으나 마시고 윷놀이한 게 전부라고 항변했고, 사헌부에선 고문을 허락해 달라고 태종에게 청했다. 태종은 "김사문은 상중에 술을 마셔 불효하였으니 곤장 80대, 하옥생은 남녀칠세부동석을 어겨 풍기문란하게 하였으니 곤장 80대. 이걸로 끝!" 으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세종대왕이 즉위하자 신하들은 다시 노비로 전락했던 이속을 끝내 목을 따야 한다고 상소질을 해댔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기록에 따르면 이속은 오만해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는데, 말하는 모양새도 보면 미움받기 쉬운 성격인듯 하다. 일단 뇌에 필터가 없다. 신하들이 이토록 위아더월드 한 것을 보면 어지간히 인망이 없었던 모양.

어쨌건 세종대왕이 이 청을 거절하면서 이속의 수난은 간신히 막을 내린다. 그러나 이미 전재산 몰수당하고 노비인데.

반대로 윤향은 이미 왕명을 거역한 죄로 귀양 중이었는데, 사주단지를 LTE급 스피드로 보냈다는 이유로 귀양을 파하고 형조판서로 임명되었고, 그 아들 윤계동은 부마가 되었다.(...)[12] 태종은 이를 계기로 간택제도를 만들어 가능한 지원자 중에서 왕족의 혼사를 처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조선에서 부마 거절했다간 X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각인하게 되었다. 어? 부마 싫다고? 너 이속처럼 되고싶냐?

예외적인 경우로 배짱 두둑한 부마의 경우에는 아내를 구타폭행하거나, 공공연히 바람을 피우거나, 홀대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여종과 바람이 나서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는 당연히 난리가 나서 대대적인 국문크리. 예를 들어, 중종은 딸인 효정옹주가 남편의 홀대를 받다가 요절하자 분노해서 그 부마를 처벌하기도 했다.

중종의 딸로 숙원 이씨(淑媛李氏) 소생의 효정옹주가 남편 조의정의 바람과 무시, 학대를 당하다 난산끝에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었다. 심지어는 난산을 겪던 딸을 위해 왕이 보낸 의녀를 조의정이 못 들어가게 대문을 안 열어주었다. 이쯤 되면 아내가 빨리 죽기를 원했던 것이라고 볼 수 밖에... 결국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옹주가 죽자, 격노한 중종이 조의정을 국문에 부쳤다가 직위를 박탈하고 귀양보냈다.

이때, 풍가이라는 조의정의 도 같이 처벌되었다. 그녀는 원래 옹주의 몸종이었으나 조의정이 그 미모에 반해서 강제로 첩으로 삼았다. 박색이었던 옹주를 몹시 싫어한 조의정은 정실인 옹주를 죽이고, 풍가이를 부마에게는 원칙적으로 금지된 첩으로 들이려 했다. 그래서 중종이 풍가이를 귀양보내라 명했는데, 조의정이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고(!)[13] 풍가의를 숨겨둔 채 게속 정을 통해왔던 것이 발각났다. 그러나 풍가의가 그의 첩이 된 것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강요에 의한 것이었고, 풍가이가 평소 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효녀라는 점 때문에, 대신들이 극력 옹호한 덕분에 장을 100대 맞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상궁 은대[14]가 사람을 시켜, 가뜩이나 곤장 100대를 맞아 반죽음이 된 풍가이를 구타하고 수십일 동안 방치하여 죽게 했다. 신하들은 은대를 처벌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중종이 끝까지 비호하여 1년 남짓 귀양 살고 풀려났다.

정작 조의정 본인은 재산과 지위를 박탈당하고 귀양가는 선에서 그쳤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높은 관직을 지냈던데다 효정옹주가 낳은 조의정의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종이 아무리 사위 조의정을 미워해도, 외손주의 앞날을 생각하면 차마 사위를 죽일 수 없어서 그랬다고 한다.

한국사 최후의 부마는 영혜옹주와 결혼했던 철종의 부마 박영효다. 덕혜옹주와 결혼했던 소 다케유키는 안 쳐준다 덕혜옹주소 다케유키가 혼인한 것은 1931년으로 이미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였기 때문이다.

2.3 항목이 작성된 부마 목록

2.3.1 실존인물

  • 임우재 : 삼성그룹가의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과 결혼했고, 삼성 고위 임원으로부터 '옛날에 부마는 잘못하면 산속에서 살았다'는 모욕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도 엄청난 압박과 스트레스들을 받았다고 한다. 항목 참조.
  • 충선왕: 원나라 계국대장공주의 남편

2.3.2 가상인물

3 부어라+마셔라

주로 호프집 간판으로 사용된다. 대학가 등지에서 보이기도 한다. 역덕이나 지덕은 1,2번항목을 먼저 떠올린다.
  1. 마산합포구, 마산회원구.
  2. 낙동강 시리즈라고도 한다.
  3. 그나마 귀찮은 게 부거를 관리하는 것 정도인데 대리인을 세우고 제대로 관리하는지 확인하면 땡.
  4. 천자의 비서 역할을 맡는 환관십상시도 절대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던가.
  5. 대군, 군 등의 종친들을 관할한 종친부처럼, 부마들을 관할한 의빈부(儀賓府)가 있었다.
  6. 보통 사신단의 수장인 정사를 부마나 왕족이 맡았는데, 사신단의 격을 높이기 위한 얼굴마담 느낌이 강했다. 외교실무는 정사의 아랫사람인 부사나 서장관 등이 거의 처리했다.
  7. 박지원의 유명한 열하일기영조3녀화평옹주에게 장가간 팔촌 형 금성위(錦城尉) 박명원이 중국에 진하사로 갔을 때, 박지원이 꼽사리 껴서 따라가 쓴 기행문이다.
  8. 홀아비가 되고 나서 첩을 두는 것은 왕실에서도 눈감아 주었다고 한다.
  9. 다만 소실을 통해 후손을 본 결과 일제가 내린 후작 작위를 계승할 자손은 있었다. 일제 입장에서 이미 망한 조선왕조의 규칙은 의미가 없었기 때문.
  10. 오죽하면 효도를 철칙으로 알던 시대인데도 공주나 옹주는 시부모에게 절을 안 해도 괜찮았다!
  11. 정빈 이씨(靖嬪李氏) 소생. 남편이 죽자 친정아버지 영조의 만류에도 식음을 전폐하며 애도하였고, 얼마 후 남편의 뒤를 따라 죽음에 이르렀다. 조카 정조 대에 이르러 화순옹주는 열녀로 지정되었는데, 이는 조선의 왕녀들 중 유일한 것이다. 화순옹주는 남편 김한신과 함께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합장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그녀의 열녀문인 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 유형문화재 제45호)도 있다.
  12. 그냥 비유가 아니라, 태종이 "윤향이 나와 진짜 사돈 맺고 싶은가 본데 빨리 데려와라." 하고는 즉시 귀양을 쫑냈다. 심지어 윤향은 왕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사람이라며 칭찬까지 곁들였는데, 이미 왕명을 거역한 죄로 복역중인 사람한테 어울리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13. 왕조시대 임금을 속이는건 기군망상이라고 해서 역모급으로 간주되었음
  14. 옹주의 이모란 설과 궁중 내 해결사라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