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그레 이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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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이글스
Binggrae Eagles
창단년도1986년 3월 8일
명칭 변경년도1993년 11월 1일
모기업(주)빙그레
연고지대전광역시(1986~1993)
충청남도·충청북도(1986~1993)[1]
홈구장한밭 종합운동장 야구장(1986~1993)[2]
청주 야구장(1986~1993)[3]
구단명 변천사빙그레 이글스(1986~1993)
한화 이글스(1994~)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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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 리그 진입을 앞두고 충무체육관에서의 빙그레 이글스 창단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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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3월 8일 1군 리그 진입 창단식을 마치고 대전시내에서의 카 퍼레이드.
뒤에 배성서 초대 감독과 노진호 단장이 보인다.[4]

한화 이글스가 1993년까지 사용한 팀명이자 7구단 시대를 연 구단이다. 대한민국 프로야구 사상 첫 신생팀. 1986년에 대전, 충청권을 연고로 하는 7번째 구단으로 창단되었다. 사실 빙그레 이글스는 처음부터 한화그룹 소속의 프로 야구단으로서 창단되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한화그룹이 대중에 잘 알려져있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도 화약 제조 혹은 방위산업체 이미지가 강했으므로 일반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그룹 계열사 중 유일한 소비재(식품) 업체인 빙그레의 이름을 빌려 온 것이다. 1993년 오너 형제의 재산 분할로 빙그레가 계열 분리되면서, 한화그룹 내에 남게 된 야구단은 1994년 그룹명을 따라 한화 이글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2 8090 시기의 대표적 강자

초창기의 6개 구단에 비해 늦게 창단된 구단임에도 불구하고 신인 선수들이나 타팀에서 전력보강 차원으로 영입한 선수들의 포텐셜이 폭발하면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리그를 선도하는 신흥 강호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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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올스타전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현역 시절의 유승안,
이강돈, 당시 신인이었던 송진우, 한희민.[4]

빙그레는 창단 당시 6개 구단 보호선수 외 특별지명 선수들 중 삼성 라이온즈 출신의 선수들을 많이 지명했는데, 또 그걸 삼성이 웬만큼 다 수용했다. 그런만큼 삼성이 많이 줄 수 있던 여력이 있기도 했다. 경북고, 대구상고를 중심으로 한 대구 팜은 1970~1980년대에 고교대회에서 엄청난 성과를 냈었고, 그에 비례하여 좋은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많았다. 그리고 삼성에 워낙 선수들이 많다 보니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린 선수들이 빙그레에 왔던 거지. 이제나 저제나 삼성은 리그의 굇수 빙그레 초창기에 대구 출신 선수들이 많았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침 단장도 그쪽 구단서 일한 데다 창단 감독도 그쪽 동네 사람이라(...). 그냥 저땐 삼성 2중대

특히 김영덕 감독의 지휘 아래 창단 2년 뒤인 1988년부터 1992년까지 1990년 시즌을 제외한 KBO 한국시리즈에 4번 진출하였으며 1989년, 1992년에 페넌트레이스 1위도 2번이나 차지했다. 순수 신생팀 기준 창단 이후 3시즌 만에 한국시리즈 진출은 KBO 신생팀 사상 최단 기간 한국시리즈 진출 기록이다. 그 다음이 창단 4시즌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SK 와이번스. 창단 첫 해인 1990년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덜컥 우승까지 차지한 LG 트윈스는 순수 신생팀이 아니었으므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LG는 전신인 MBC 청룡의 역사를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LG의 이름으로는 첫 우승이 맞지만 구단 전체 역사를 통틀어서는 창단 이후 8시즌 만에 우승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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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한국시리즈 이후 준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는 송진우.
콩그레가 된 이유는 이게 다 해태 때문이다[4]

허나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던 상대가 의외로 강했기 때문에 결실은 맺지 못했다.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 중 3번이 빙그레 상대였으며, 1992년에는 박동희염종석이 있던 롯데에 농락당했다. 사실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염종석보다 박동희의 활약이 더 컸었다. 염종석장어 먹고 탈이나 4차전에서 강판당하기도 했다. 참고로 1992년 정규시즌의 81승 42패 2무, 팀승률 0.651은 당시 정규시즌 최다승 신기록이었으며[5], 당해 정규시즌 2위 이었던 71승 54패 1무의 해태 타이거즈와의 게임차는 10.5 경기였다. '92년 정규시즌 최종 순위표또는 1992년의 정규시즌 최종순위 참조.

그리고 빙그레 자체도 페넌트레이스 때와는 다르게 플레이오프에서는 약한 면모를 보였으며, 중요한 고비에서 치명적인 실책을 범하는 등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예를 들면 1989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장종훈의 알까기와 1991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송진우의 실책 같은 게 대표적이다. 그리고 2연속 준우승을 2번이나 달성한 팀이다. 그래서 최초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한화 이글스로 바뀐 후 1999년에 이루게 된다.

이강돈, 장종훈, 이정훈, 고원부, 강정길 등을 중심으로 하는 공격 야구를 펼쳤으며, 이는 한화그룹의 화약 제조업을 본뜬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 불리며 빙그레 이글스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이상군, 한용덕, 한희민, 송진우 등이 중심을 이루었던 투수진도 리그 상위권이었다. 한국시리즈 우승만 못했지, 사실상 이글스 프랜차이즈의 리즈 시절이다.

여담으로, 홈런왕 장종훈과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영향으로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당대 어린이팬들이 많았던 팀이기도 했다. 소비재 라이벌??

3 운영주체 변경 - 빙그레에서 한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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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출시된 빙그레 이글스 전화카드.[6]

그러나 투수진이 1992년 정민철을 배출해내고 한용덕, 송진우의 기존 선수도 꿋꿋이 버티면서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타선이 이렇다할 신인을 배출해내지 못하고 노쇠화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1993년, 결국 몰락하게 된다. 이후 이글스는 개명 후로도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인 1996년 신인 4인방이 등장 때까지 이렇다 할 선수를 배출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몰락과 동시에 모기업인 한화그룹이 2세 오너 체제로 재편되면서 상속 분쟁으로 인해 빙그레한화그룹에서 이탈하여 자연스럽게 야구단 운영에서 손을 떼게 되었고 형제간의 재산분할로 인해 그룹인 한화는 장남 김승연에게, 빙그레는 차남 김호연에게, 그리고 제일화재(現 한화손해보험)는 장녀 김영혜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사실 2세 오너의 경영은 1980년대부터 이미 하고 있었다. 창업주 김종희 회장이 1981년에 갑작스럽게 타계했었기 때문. 이 시기의 재편은 그룹 구조의 재편이었다.

이후 1993년 시즌 종료 직후 11월 1일에 한화 이글스로 구단명이 변경되어 1994 시즌부터 한화 이글스라는 이름으로 리그에 참가하게 된다. 그 때 김영덕 감독도 물러나 강병철 감독으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그리고 전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모든 역사에 대해서는 한화 이글스쪽을 참고할 것.
  1. 이 당시에는 광역연고제가 적용되던 시절이었다.
  2. 이후 한화 이글스로 역사가 이어지며, 한화 이글스가 된 이후에도 그 구장을 쓰고 있다.
  3. 제2홈구장. 이 곳 역시 한화 이글스로 구단명이 바뀐 이후에도 제2홈구장으로 쓰고 있다.
  4. 4.0 4.1 4.2 4.3 한화 이글스
  5. 현재 단일시즌 최다승 기록은 2016년 두산 베어스의 93승
  6. 참고로 상대팀인 해태 타이거즈 전화카드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