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노궤

1 개요

사사노궤(沙沙奴跪)는 백제의 장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목라근자와 함께 왜군을 이끌고 신라를 침공하였다.

2 사사노궤의 기록

49년 [1]봄 3월에 황전별(荒田別;아라타와케), 녹아별(鹿我別;카가와케)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구저 등과 함께 군사를 정돈하여 바다를 건너가 탁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때 누군가가 “군사의 수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 사백개로(沙白蓋盧)를 보내 군사를 증원해달라고 요청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곧 목라근자(木羅斤資), 사사노궤(沙沙奴跪)[이 두 사람의 성(姓)은 알 수 없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다.]에게 명령하여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하였다. 그 후 모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만(南蠻)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무찌르고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 또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그때 비리(比利), 벽중(辟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 4읍(四邑)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에 백제왕 부자와 황전별, 녹아별 등은 함께 의류촌(意流村)에 모였다[지금은 주류수기(州流須祇)라고 한다.]. 서로 보며 기뻐하며 예를 두텁게 하여 보냈다. 다만 천웅장언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가서 벽지산(辟支山)에 올라 맹약하였다. 그리고 다시 고사산(古沙山)에 올라서 함께 반석(磐石) 위에 앉았다. 그때 백제왕이 “만일 풀을 깔아서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한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 갈 것 같아 두렵다. 따라서 반석에 앉아서 맹약하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써 지금부터는 천추만세에 끊임없이 항상 서번(西蕃)이라 칭하며 해마다 조공하겠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는 천웅장언을 데리고 백제의 도읍에 이르러 더욱 두터이 예우하고 구저 등을 딸려서 보냈다.

일본서기 권9 신공황후 조

요약
왜국은 황전별, 녹아별, 구저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군사가 부족하다고 여긴 나머지 목라근자와 사사노궤를 지원군으로 보냈다.

그들은 탁순(창원)에 집결하여
1.신라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으며
2.가야 7국을 평정하였고
3.군사를 서쪽으로 옮겨 고해진에서 남만 침미다례 [2]를 물리쳐 백제에게 주었다.

3번에 따라 백제왕 초고와 아들 귀수도 이들과 합류하였고 비리 등 4읍이 이때 스스로 항복하였다.
승전 기념으로 백제군과 왜군은 의류촌에 모였고 천웅장언과 백제왕은 따로 백제의 벽지산과 고사산 반석에서 모여 맹약을 가졌다.

이때 백제왕은 자신이 반석에서 맹약하는 이유를 풀과 나무의 약함과 반석의 강함에 비유해 굳건한 동맹을 맺기 위함이라고 말한 뒤, 앞으로 번국(속국)이라 칭하고 해마다 조공하겠다고 하였다.

또, 백제왕은 천웅장언을 백제의 도읍으로 데려가 대접한 뒤 다시 구저와 함께 돌려보냈다.

3 사사노궤의 국적은?

사사노궤는 이때 한 번 등장하는 인물이다.

일본서기에는 일본인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김현구 교수 등은 대성팔족의 하나인 사(沙)씨를 가지고 있는 점 등을 들어 목라근자와 사사노궤 모두 백제 장군이며 사실 이것은 백제의 가야 정벌과 신라 공격, 마한 병합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3] [4]
  1. 일본서기의 기년으로는 249년이나 이주갑인상에 따라 369년으로 보기도 한다.
  2. 강진 지역, 영산강 유역, 제주도로 보는 등 다양한 비정이 있음
  3. 일본서기 내용에는 왜국이 사건들의 주체가 되어 있다.
  4. 한국 사학계의 통설이 되어 있는 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