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고 다카모리

西郷隆盛
분세이 10년 12월 7일 (1828년 1월 23일) - 메이지 10년 (1877년) 9월 24일.
키는 179cm. 체중은 116kg의 거구였다.

"세고동(西郷どん)"[1]이라는 애칭으로 일본인들에게 사랑받는, 일본 메이지 시대의 군인이자 정치가. 유신 3걸의 한 명.

1 생애

가고시마 출신으로 사쓰마 번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아츠히메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와 결혼할 때는 혼수품을 준비했다.

주군 나리아키라가 에도 막부 14대 쇼군 후계자 다툼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했다가 최종적으로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쇼군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게 이이 나오스케가 주도한 이른바 안세이 대옥에 연류되어 유배형을 받았다. 여기서 고생을 많이 했는지 같은 사쓰마 출신인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도막 (막부 타도) 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후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에 응하여 조슈 번과 삿쵸동맹을 맺고 에도 막부를 멸망시킨 후 메이지 유신을 달성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2]와 함께 유신삼걸로 알려져 있다. 200년 넘게 유지되던 도쿠가와 막부를 끝내고 메이지 시대를 여는 데 큰 공로를 세워 신정부의 요직에 있었으나, 정한론의 문제로 인해 이 당시 같은 뜻을 내세우던 이들과 함께 중앙정부와 대립, 결국 귀향하였다. 이후 서남전쟁 (세이난) 도중 자결하였다. 부검 결과 질환으로 인해 고환이 비정상적으로 거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자세한 내용은 서남전쟁 항목 참조.

2 정한론자?

한국에는 정한론의 대표주자로 알려져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의 대표주자인지 아닌지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다. 왜냐하면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자이고, 메이지 정부에서 사이고의 주장을 반대했다는 것은 일본의 메이지 정부가 한국을 정벌할 야욕이 없었다는 강력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자가 아니라면, 메이지 정부가 조선을 침략할 야욕이 있었다는 정황 증거가 될 수 있기에 양국의 논의가 분분하다.

  • 부정설
사실 메이지 정부 내에서 대조선 정책에 있어 거의 유일한, 그리고 매우 온건한 외교주의자였다. 오히려 "우리가 외무성 하급 관리를 보내는 등 대조선 외교를 성의없이 처리했는데, 저쪽이 하급 지방관으로 대응하고 우리의 요구를 수용 안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조선의 요구대로 외교관에게 전통 복장을 입히고 조선에 공손히 응대하여 그들의 진중한 반응을 끌어내자. 내가 사절로 가서 조선에서 죽임을 당하면, 그때 쳐들어가도 늦지 않다."라고 발언했고, (견한론) 그나마 마지막 문장은 공식발언도 아닌 편지에서 외교론을 거부하는 정한론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타협책이었다. 그의 주장이 각의에서 받아들여져 특명전권대사로 파견될 뻔 했으나, 다수의 각료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에 일단 유보한 상태였다. 이후 사절단으로 갔다가 귀국한 이와쿠라 등의 주도[3]로 사이고의 의견이 묵살당해서 쓸쓸히 귀환한다. 관련 글 이 설은 모리 토시히코가 주장한 개인 연구에 가까운 설인데,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무시당하고 있고, 학계 외의 다카모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설이다. 다만, 사이고 다카모리가 조선을 침략해서 지배하려고 했느냐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고, 서양 열강이 아시아로 쳐들어오는 국제 정세에서 중국, 조선, 일본의 조화를 꾀했다는 견해가 있다.
  • 긍정설 (주류)
위와 같은 발언(나 죽거든 공격하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정한론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당장 침략하는것을 반대한다고 해서 정한론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후에 이토 히로부미가 증명.) "메이지 정부는 조선침략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사이고를 반대한 것"이라는 투의 일본 측 주장에 반박하자고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막연한 감정으로 "사이고는 정한론자가 아니다"라고 보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급진과 온건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결국은 정한론자이다. 나그네 외투 벗기기
게다가 당시에 서구 열강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있었으며, (도굴꾼 오페르트조차 처음에는 단순히 통상을 요구했을 뿐이었다.) 유교 질서 유지를 중시한 흥선대원군과 민중의 반감을 샀기 때문에 결국 오페르트 도굴사건이라든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이 일어나는 지경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칭 "황제국"의 신하가 "근대 외교를 하자"고 찾아오는데 수용할 도리가 있겠는가. 그나마 환상을 품었던 근자감 사람의 하나일 뿐, 친한파라거나 평화주의자로 볼 여지는 없다.[4][5]

3 생존설

워낙 인기가 많아서 실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생존설이 러일전쟁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그중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이 훗날 니콜라이 2세가 되는 니콜라이 황태자가 일본에 방문할 때 전국적으로 퍼진 <사이고 생환설>이었는데, 쿠로다 키요타카가 유럽 각지를 순방할 때 블라디보스톡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키리노 토시아키를 만나 훗날 일본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결의했고, 실제로는 사이고와 키리노, 무라타 벳푸 같은 서남전쟁의 수뇌가 시로야마산에서 탈출해 러시아 군함을 타고 도주해서 살아있었으며 니콜라이 황태자와 함께 일본으로 귀환하여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일본 전역에서는 난리가 났고 환호와 의심이 뒤범벅이 된 가운데 신문사들은 검증도 안된 소문을 사실인 양 마구 남발하여 혼란을 가중시켰다. 사이고의 출신지인 가고시마규슈에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환영무드가 조성될 정도. 여기에 메이지 덴노가 시중에게 "사이고가 돌아온다면 메이지 10년의 전투(서남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들의 훈장을 박탈하고 맞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미확인 소문도 있어 경관인 츠다 산조가 이를 두려워하여[6] 니콜라이 황태자를 칼로 베는 황태자 암살미수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4 외모와 동상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진.
실은 메이지 16년에 그가 죽은 지 6년 후에 그려진 것으로, 닮았다고 일컬어졌던 친동생인 사이고 쥬도(西郷従道)의 윗얼굴과 사촌동생의 얼굴의 아래부분을 합성한 몽타주 초상화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암살을 염려해서인지 사진을 찍는 것을 꺼려했다.


도쿄 우에노 공원에 있는 그의 동상.
위의 초상화를 토대로 만든 동상. 동상의 제막식에 참석한 다카모리의 아내가 "이렇게 생긴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실제 얼굴과는 다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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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 2기 7화에 나오는 그의 동상들. 가고시마현의 시로야마 공원에 있다.

개가 없는 이유 - 우에노에 있는 유카타를 입고 개를 데리고 유유자적하는 산책하는 동상은 1898년 제작된 것으로 한창 메이지 유신 관료들이 일본 정국을 지배하던 관존민비(官尊民卑)시기로, 그 메이지 관료들과 맞섰던 털털하고 반관료적인 서민적인 이미지의 다카모리 상이 추종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이고, 가고시마의 육군 대장의 군복을 입은 동상은 쇼와 초기에 만들어져 한창 일본이 한국도 집어삼키고 군국주의에 들뜬 시기로 정한론의 선견지명을 가진 군인의 이미지의 다카모리가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이유는, 정한론논쟁으로 오쿠보 도시미치 등과 의견충돌을 일으키고 집에서 히키코모리 출근 거부를 하던 시절, 메이지 6년(1873년) 건강을 염려해서 메이지 천황이 독일인 서양의사 호프만을 보냈고, 진단을 받고 비만 치료를 위해서 가벼운 조깅과 산책을 하라고 처방을 내렸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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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초상화와 동상들과 달리 우키요에에서는 상당히 풍성한 수염을 기르고 서양식 관복을 입은 것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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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비슷하다고 평가받는 초상화, 1927년작. 肥後直熊筆「西郷隆盛像」(黎明館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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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서 있는 인물이 사이고 다카모리의 진짜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사진. 뒷면에 사이고 다카모리의 본명(통칭)인 사이고 키치노스케 서명이 있다. 기존에 알려진 외모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5 그 외

메이지 6년의 정변에서 유우부단한 태도를 보이다 사이고에게 호통을 들어먹은 오쿠마 시게노부는 죽을 때까지 사이고 디스에 평생을 바치게 된다. 생각이 짧다, 뚱뚱하다, 눈물이 많다, 애 같다 등등.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하지만 사이고 다카모리 본인도 "뚱뚱해서 죄송합니다~"라는 개그를 날린 적이 있다.

은혼의 등장인물 사이고 토쿠모리의 모델이다.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에도 등장한다. 여기서는 자신이 쓰는 고리타분한 어미가 신경쓰여 여러번 바꾸려고 시도하다 실패하며 결국 포기하는 아저씨로 표현되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일본에서 김옥균과 많이 비교당한다.

지금까지도 가고시마 현과 그 일대에서는 영웅으로 존경[7]받으며, 서남전쟁에 대한 옹호 여론도 강한 편이다. 실질적으로 가고시마의 상징. 대부분의 이벤트(2011년에 있었던 규슈 신칸센 전면 개통이라든가...)에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것도 등장.

일본의 동요 "一かけ二かけて"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관련된 가사가 나온다. 주로 가위바위보나, 공놀이를 할 때 부르는 노래라고 한다.#

1990년 NHK 대하드라마 '나는 듯이'에 이어서 2018년 NHK 대하드라마 '세고돈'에서 주연 인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6 관련 항목

  1. 사이고 님에 해당하는 사이고도노의 가고시마 사투리 발음이다.
  2. 이 사람이 누군지 와닿지 않는다면, 바람의 검심카츠라 코고로가 바로 이 사람이다. 실제 카츠라 코고로는 기도 다카요시의 옛날 이름.
  3. "현재 우리 일본에 산적한 문제도 많고, 지금 시점에 조선을 상대하다간 서구의 압력을 피할 수 없다."면서 메이지 덴노의 재가를 받았다.
  4. 이 주장이 국내 사학계에서 주류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함의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단 결과적으로 봤을 때 일본은 끝내 조선을 병합해버렸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을 강행하려다 메이지 정부의 반발을 샀다"는 기존의 주장을 고수할 경우, 이는 "20세기 초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건 정한론 같은 게 아니라 조선을 근대화시키려는 선의의 목적이 깔려있었다"는 식의, 전형적인 흥아론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거나 다름없다. 안병직도 이런 소린 안한다.
  5. 결정적으로, 고작 40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동양학계는 일본의 연구성과를 유의미한 변형 없이 그대로 답습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6. 츠다는 서남전쟁에 종군하여 맹활약하여 훈7등을 수여받았으며 이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삼았는데, 훈장을 박탈당한다는 소문을 굳게 믿고 이에 대한 불안과 절망을 주변인들에게 한탄했다고 한다.
  7. 예산과 관리 문제로 슬쩍 생가의 다다미를 플라스틱 다다미로 교체했다가 지역 언론에서 성토 당하고 다시 전통 다다미로 바꾸기도 했다. 다른 지역에서 위인의 생가에 까는 다다미를 뭘 쓰든 관심도 없다는 걸 생각하면 가고시마에서 사이고의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