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영

이름덴튼 트루 영(Denton True 'Cy' Young)
생몰년도1867년 3월 29일 ~ 1955년 11월 4일 (88세)
국적미국
출신지오하이오주, 길모어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890년(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
소속팀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1](1890~1898)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1899~1900)
보스턴 레드삭스 (1901~1908)
클리블랜드 냅스 (1909~1911)
보스턴 러슬러스[2] (1911)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사이 영
헌액 연도1937년
헌액 방식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76.12% (2회)
메이저리그 통산 ELO 레이팅 TOP 5
월터 존슨사이 영레프티 그로브피트 알렉산더그렉 매덕스
2,1692,1382,1142,1052,104
프로야구 역사상 최다 이닝, 최다승, 최다패(?)[3][4][5]등 수많은 대기록을 가진 위대한 야구인.

초기 메이저리그 역사에 빼 놓을 수 없는 전설적인 슈퍼 피처.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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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최다승 기록 보유자

미국 출신의 야구 선수로, 근대 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굇수투수를 언급할 때 항상 월터 존슨과 함께 언급되는 대투수
커리어

이름인 '사이(cy)'는 사이클론의 약자로써, 사이 영이 패스트볼이 사이클론(Cyclone)같아서 붙여진 별명이다. 정확한 경위를 설명하자면, 영이 입단테스트 당시 공을 던지는 쪽 뒤에 있던 판자를 박살냈다고 한다. 그 모습이 마치 사이클론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6]
혹은 사이는 당시 시골뜨기에게 주로 붙던 별명이고, 영이 오하이오 농부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본명은 '덴튼 영'인데,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는 등록명인 'Cy Young'이라는 이름을 공식 이름으로 쓴다.[7]

2 무지막지한 커리어

메이저리그 통산 22년 동안 30승대 시즌을 5번, 20승대 시즌을 10번 기록하며 통산 511승을 거두었다. 참고로 일본에서 최다승 기록이 카네다 마사이치400승, 대한민국의 최다승 기록은 송진우210승이다. 위 기록과는 한마디로 넘사벽인 대기록을 달성했다.

그 외에 최다 이닝 투구(7,355 이닝), 최다 선발 출장(815 경기), 최다 완투(749 경기), 퍼펙트 게임 1회[8], 노히트 노런 3회. 그리고 최다 패배(316패)(…)[9] 이건 뭐 장명부도 아니고...

상술했듯이 퍼펙트 게임을 포함하여 노히트 경기는 통산 3회 기록했는데, 이는 샌디 쿠팩스가 깰 때까지 최다 기록이었다.[10] 아메리칸 리그 창설과 함께 세인트루이스에서 보스턴으로 이적했으며 첫번째 월드시리즈의 첫번째 투구를 했다. 그리고 그 해 월드시리즈 2승을 기록하며 팀을 최초의 월드시리즈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2.1 커리어 초반과 전성기

그는 1867년 3월 29일, 오하이오주 길모어에서 맥켄지와 낸시 영 부부의 5남매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농장에서 부모님의 일을 도와주면서 몇몇 세미프로 팀의 내야수로 뛰었는데, 1890년 칸톤이라는 프로팀에 입단, 15승 15패를 기록한 후 내셔널 리그의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로 $300에 팔렸다.

1891년에 27승을 기록, 이듬해 36승과 1.93의 자책점으로 내셔널 리그 다승왕에 오른다. 초창기에 그는 불같은 강속구로 유명했으니, 이 시기부터 제구력에 신경을 써서 커리어 내내 사구를 거의 헌납 안하는 투수가 된다.

클리브랜드[11]에서 9년, 그리고 세인트루이스에서 2년을 보낸 후 1901년에 출범한 아메리칸 리그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한다. 레드삭스에서의 첫해는 그의 커리어 하이로, 33승, 자책점 1.62, 그리고 158 탈삼진을 기록한다. [12]

2.2 커리어 황혼기, 불멸의 기록들을 세우다

1903년 그는 사상 첫 월드 시리즈에서 레드 삭스의 우승을 이끈다. 1904년엔 아메리칸 리그 첫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고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25와 1/3연속 무안타 이닝을 (퍼펙트 게임 포함) 기록한다. 1908년, 41살의 나이로(...)정말 오래가는 아저씨21승과 1.26 자책점을 기록한 그는 선수경력의 마지막을 보스턴 러슬러스와 함께 하고 은퇴한다.

그가 남긴 기록은 511승, 316패, 7,356이닝, 그리고 그의 500승 이상으로 깨지기 힘들다는 749 완투.

2.3 은퇴 후

1913년에 연방 리그의 클리브랜드 그린 삭스의 감독직을 맡기도 했었지만, 은퇴후 첫 20여년의 대부분을 아내 로바와 오하이오 피올리에 있는 농장에서 보낸다.[13] 1937년에 명예에 전당에 두번째 투표로 입성했는데, 첫회 입성 실패에 대단히 실망했다고 한다.

1933년에 아내와 사별을 한 후 오하이오 뉴커머스타운에 있는 농장으로 이사를 가 거기서 친구들과 말년을 보냈다. 그가 1955년 11월 4일에 숨을 거두자 이듬해 MLB수장 포드 프릭이 사이영 상을 제정한다.

3 사이 영 상

사이 영 사후 그의 업적을 기려 1956년부터 매년 각 리그의 최고 투수에게 주는 상인 '사이 영 상'이 제정되었다.

사이 영 상 제정은 그와 비슷한 때 마침 레전드급 선수인 사이 영이 타계한 분위기가 컸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MVP 경쟁에서 투수에 비해서 타자가 많이 유리한 편이다. 이에 당시 야구계에서 그 해 최고의 성적을 올린 투수만 따로 수상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마침 역대 최다승을 올린 사이 영이 사망하자 상 이름도 '사이영상'으로 정해졌다. 그때 사이 영이 사망하지 않았으면 '월터 존슨 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도 있다. 그런데 월터 존슨 상보다는 사이 영 상이 입에 착착 감긴다 애초에 월터 존슨은 본명이고, 사이 영은 '사이클론'에서 따온 별명(본명은 '덴튼 영')이기 때문에 사이 영이 더 어감이 세다.

4 그에 대한 평가

그의 루키시절부터 모든 스카우터들이 눈여겨 본것은 그의 압도적인 체구였다. 188cm에 95kg로, 19세기 중후반에 드문 우수한 신체조건이였다.

4.1 끔찍한 혹사의 데드볼 시대를 유일하게 20여년이나 견뎌 낸 철완중의 철완

사이 영의 기록들이 당시 투수 기용 성향상 무식하게 오래 뛰어서 세운 기록들이라고 폄하하거나 좋은 투수임은 맞으나 큰 임팩트[14]는 없었던 투수라는 의견도 있다. 그 근거로 명예의 전당에 첫 해에 헌액되지 못하고 2회째 투표에서 76.1%의 득표율로 헌액된 점을 든다. 하지만 첫 해 투표에서 들어가지 못한 것은 커리어의 절반 가량을 19세기에 뛰었기 때문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명예의 전당 설립 당시 투표를 하는 기자들은 과거의 선수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과거의 선수들을 명예의 전당에 보내기 위해 베테랑 위원회(Veteran Committee)를 만들었다.[15] 사이 영도 명예의 전당 취지상으로는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헌액되는게 합리적인 상황이었으나 오히려 베테랑 위원회로 가지 않고 당당하게 '투표'로 헌액되었다. 실제로 19세기에 데뷔한 투수 중에 사이 영을 제외하고는 투표로 헌액된 투수가 없는 걸 보면 2회차 헌액이라도 오히려 사이 영의 위엄이라고 볼 수 있다.[16][17] 또한 사이 영 당시에 선발투수의 로테이션이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그래서 투수들의 선수 생명이 지금보다 많이 짧았다. 그렇게 꾸준히 많이 던지고도 22년이나 투수생활을 유지한 선수는 사이 영밖에 없으며 사이 영과 같은 해 데뷔한 레전드 투수인 키드 니콜스의 커리어 시즌이 15년(통산 361승)인 것만 봐도 사이영이 독보적이라 할 수밖에.... 사이 영은 22년 선수생활 동안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던지고도 별다른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며 은퇴도 번트 수비가 안 돼서 은퇴했다. 모두 꾸준한 자기관리 덕분이었으며 이 역시 사이 영의 위엄이다.

사이 영의 성적은 오래 뛰기만 하면 세울 수 있는 기록은 절대로 아니며 리그 톱 급 성적을 20년간 찍어야 달성할 수 있는 극강의 임팩트와 꾸준함을 동시에 갖춰야 하는 기록이다. 실제 사이 영은 커리어 내내 리그 톱 급 선수였다.

  • 커리어 22년 동안 17번 리그 다승 10위 안에 들었으며 16번 방어율 10위안에 들었다.[18]
  • 최다 이닝은 19번 10위 안에 들었다.
  • 방어율, 다승, 이닝 등 주요 투수기록에서 리그 10위권에 든 횟수가 월터 존슨보다 더 많다. 그래서 리그 10위권에 얼마나 자주 랭크되었는지를 점수로 메기는 Gray Ink는 사이 영이 1위이고 월터 존슨은 2위이다.[19] 참고로 사이 영은 22시즌, 월터 존슨은 21시즌을 뛰었다.
  • 비율 스탯도 매우 뛰어난데 7356이닝이나 던졌음에도 조정방어율은 138이며(역대 19위), WHIP은 1.130이다. 비율 스탯은 오래 뛸수록 일반적으로 나빠지는 걸 감안하면..
  • 통산 볼넷이 1217개에 불과하며 9이닝당 볼넷비율은 1.489로 역대 23위이지만 이닝을 감안하면 사실상 역대 1위라고 할 수 있다.[20]

결론적으로 사이 영을 월터 존슨과의 비교를 통해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따지면 월터 존슨을 제외한 모든 역대 투수들이 다 그저그런 투수가 될 것이다. 실제로 각종 설문이나 전문가 의견, 세이버메트릭스 분석에서 사이 영은 월터 존슨 다음인 2~3위를 다투는 위대한 투수이다.[21]

그리고 알아둬야할 점으로, 사이 영의 남아있는 각종 일화를 모아본다면, 사이 영은 그렉 매덕스처럼 두뇌파 투수였으며, 투구한개 한개를 아껴 던지는 스타일이었기에 이리 장수하면서 던질 수 있었다고 보인다. 사이 영은 자신이 활동했던 1900년대에 이미 "요새 투수들은 너무 공을 함부로 던져"라고 말했다. 이미 투구개수의 중요성을 100년도 더 전에 인식하고 있었다(...)

은퇴후 그의 인터뷰中:
"전 다른 투수들처럼 경기전 워밍업 하는데 10-15분을 소비하지 않았어요. 3-4분 정도 몸을 풀고 5분되면 마운드로 갔죠. 그리고 절대로 불펜으로 간적이 없어요. 오, 물론 구원등판한적은 엄청 많지만 그냥 벤치에서 바로 마운드로 직행, 거기서 포수랑 몇번 캐치볼 하는걸로 준비 끝이였죠. 그정도면 컨트롤이 됐어요. 공을 던질땐 꼭 최대한 적은 투구수로 맞춰 잡으려고 노력했는데, 이게 제가 이틀에 한번[22]뭐라고요? 등판할 수 있는 비결이였어요." [23]

4.2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은 역대 최고의 생존왕

사실 그의 기록은 당대 그와 자웅을 겨루던 라이벌들 처럼 300승 문턱에서 멈출 수 있었다.

1901년, 그가 새로 출범한 아메리칸 리그에 이적하기 전에 11년동안 286승을 거둔 그의 나이는 34세로, 명백히 하락세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실제로 그는 전 시즌에 커리어 로우를 기록했는데, 처음으로 20승을 거두는데에 실패했고 이닝수도 커리어 최저였다. 타자들은 그때 "그 어느때보다도 상대하기 쉽다"라고 도발했고, 언론들은 수시로 그의 이름에 Old를 붙이는(...)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스턴 레드삭스[24]는 당대 최고 수준인 $3,500의 연봉으로 우대한다. 아무리 하락세인 사이 영이라도 신생의 아메리칸 리그에서 평타이상은 해주겠지라는 기대감에 비롯된 계약이였다. 그러나 세간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절대로 적당히 할 생각이 없었다.

칼을 갈고 준비하며 개막된 아메리칸 리그 원년,

그는 다승왕, 삼진왕, 최저자책점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한다. 개막전 오프시즌에 노화로 위력이 줄어든 직구를 보조하기 위해 커브볼 두개를 추가로 장착했는데, 각이 큰 오버핸드 커브볼과 사이드암 커브볼이였다. 그것도 투구마다 다른 팔각도로 바꿔가며(!) 던졌고, 가끔씩 언더핸드로도 던지며(!) 타자의 타이밍을 빼았았다.[25] 예나 지금이나 투구폼을 바꾸면서 던지는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무리수인데, 그는 이렇게 10시즌을(...) 더 던졌다. 30대를 기점으로 체중이 늘고 갈 수록 직구의 위력은 떨어졌으나 그때마다 제구를 더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그 결과, 그는 그를 말년의 스타로 영입한 레드삭스 구단의 예상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며 은퇴는 커녕 당당한 현역으로 10시즌을 더 뛰며 192승을 더 추가했다. 그 10년동안 리그에서 가장 적은 수의 사구를 기록하는 등, 40대에 리그를 지배하는 사상 첫 선수였다.

스포츠 기자 프랜시스 리히터는 1910년, 사이 영이 43세가 된 해에 이렇게 썼다: "저에게 야구라는 게임이 경험한 역대 최고의 투수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사이 영이라고 답하겠어요. 그는 20년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아요."

5 기타

  • 그의 마지막 경기가 최악이였다. 브루클린 다저스를 상대로 6이닝까지 3실점으로 호투하고 있었는데, 3실점 모두 비자책점이였고 (3대 3 동점 상황) 3피안타와 볼넷 하나가 전부였다. 그런데 7이닝 1아웃부터 자그마치 8연속 안타 (순서대로 나열하면 3루타 -> 안타 -> 안타 -> 안타 -> 안타 -> 2루타 -> 2루타 -> 2루타(...))를 맞고 강판당한다. [26]
  1. 지금은 사라진 내셔널리그 팀으로,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아예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아메리칸리그 소속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직접적으로 이어진 전신팀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전신이 되는 팀은 클리블랜드 블루 버즈, 브롱코스, 냅스 등의 이름을 가졌었다. 밑에 서술된 클리블랜드 냅스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전신팀으로 인디언스로 이름을 바꾸기 직전의 팀명이다.
  2.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전신. 보스턴 레드삭스와 관련없음.
  3.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승 수가 넘사벽급으로 많아서 그렇지
  4. 한 시즌 최다패는 몰라도 통산 최다패는 충분히 명예로운 기록이다. 그만큼 오랜 기간동안 수준급 능력을 보여줬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통산 100승 50패의 투수보다 통산 300승 300패의 투수가 훨씬 위대하듯이.
  5. 일례로 210승으로 KBO 최다승 투수인 송진우 역시 통산 153패로 최다패 투수이다.
  6. 그 당시에는 스피드 건이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구속은 전해지지 않는다.
  7. 사이 영 뿐만 아니라 등록명을 공식 이름으로 쓰는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심지어 21세기 선수 중에도 존재한다. 버스터 포지가 대표적이며, 한국계 미국인 최 현 콩거는 행크 콩거라는 등록명을 쓰고 있다.
  8. 그 경기는 라이벌이던 루브 워델과의 라이벌전이었고 사이 영은 퍼펙트를 한 것보다 워델에게 이긴 것에 더 통쾌해했다. 그 전 맞대결에선 웨델에게 1피안타 완봉승을 당하고 도발을 당했던 터라 부아가 치밀어있던 상태였다. 심지어 퍼펙트게임의 마지막 타자가 웨델이었고 그가 플라이아웃되자 영은 기쁨에 겨워 웨델에게 도발을 시전했다고.
  9. 워낙 많은 경기를 뛰었기 때문에 패가 많은 것일 뿐 승률은 61.8%로 좋은 편이다.
  10. 이후 놀란 라이언이 최다 노히트(7회) 타이틀을 가져갔다.
  11.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클리브랜드 인디언즈와는 다른 팀이다.
  12. http://www.biography.com/people/cy-young-9539398#synopsis
  13. http://www.biography.com/people/cy-young-9539398#synopsis
  14. 일단 사이영이 활동하던 시대, 특히 19세기말 시절에는 1년에 500이닝 이상을 던지는 에이스 투수 있는 팀이 많았고 600이닝을 초과하는 괴물 성적을 거둔 선수들도 있었는데, 사이 영은 600이닝은 커녕 500이닝도 던진적이 없다. 주로 1시즌에 300이닝대를 유지했고, 453이닝이 최고 이닝 기록이며 400이닝 시즌이 총 5번 밖에 안 될 정도로 당시로서는 관리 잘받은 에이스 투수 대우. 19세기에는 300~400이닝이 관리였단 말인가 그래서 누적 대비 임팩트가 약했던 건 사실이다. 못 믿겠다면 찰리 레드번, 퍼드 갤빈, 윌 화이트, 조지 브래들리, 팀 키프 같은 혹사 전설들의 기록을 찾아보자. 1시즌 기록으로는 사이 영과 차원이 다르다. 단지 다들 결국 관절 장애가 생겼다는 문제가 물론 그의 누적 기록은 동시대 다른 임팩트 있던 선후배 투수들의 커리어를 한참 넘는다. 그들은 사이 영만큼 오래 선수생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팩트로 넘을 수 없는 절대 누적기록이다. 참고로 월터 존슨은 사이 영과 동시대 선수로 인정되는 선수가 아니고, 17년이나 데뷔차이가 나는 한참 후배다.사이 영 말년에 월터 경 데뷔
  15. 당시에는 Old-Timer Committee
  16. 최초의 5인인 호너스 와그너도 19세기에 데뷔했지만 19세기에 뛴 햇수는 3년이다. 사이 영은 10년을 19세기에 뛰었다.아니 일단 와그너는 투수가 아니야 와그너를 제외한 19세기 출신 투표 입성 야수는 재수로 입성한 냅 라조이와 4수로 입성한 윌리 킬러가 있다.
  17. 지금까지 명예의 전당에 첫 투표로 헌액된 선발투수는 15명 뿐이다. 이것도 2014, 2015년에 5명의 선발 투수가 무더기로 들어가서 그렇지 그 전까지는 10명이었다. 피트 알렉산더레프티 그로브도 삼수, 사수끝에 입성했다. 또한 첫번째 명예의 전당 투표는 뽑아야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경쟁률이 지나치게 치열했다. 그럼 그건 거기서 독보적으로 1등 먹은 타이 콥의 위엄 아닌가
  18. 이 중 12번은 5위 안에 들었다.
  19. Gray Ink를 제외한 나머지 HOF Stat은 죄다 월터 존슨이 1위...
  20. 볼넷이 현재처럼 확립된 1889년 이후 2000이닝 이상 투구한 투수 중 3위이며 3000이닝 이상 투수 중에는 1위이다. 물론 당시에는 9이닝당 볼넷비율 같은 통계는 집계하지 않았지만 그 만큼 사이 영의 제구력이 좋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치
  21. 사이 영과 순위를 다투는 투수로는 피트 알렉산더, 레프티 그로브, 그렉 매덕스 등이 있다.
  22. 상술된대로 그 시절엔 이 정도면 에이스 중에서 많지 않은 편이었다. 화이트처럼 1시즌동안 일주일에 5일씩 계속 등판한 투수도 있었다. 심지어 절반 이상을 선발로.. 그래서 어깨 고장나고 은퇴
  23. http://web.archive.org/web/20071229062724/http://www.cmgworldwide.com/baseball/young/quotes.htm
  24. 당시 이름은 보스턴 아메리칸즈
  25. http://sabr.org/bioproj/person/dae2fb8a
  26. http://www.hardballtimes.com/ten-worst-career-ending-performances-of-all-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