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미증식계획

1 개괄

産米增殖食計劃

일제강점기인 1920년 ~ 1941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식량 및 원료 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실시한 농업정책. '산미증산계획'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 증산량보다 많은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등 일본의 조선에 대한 수탈 중 일부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기처럼 강제로 뜯어가는 형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상업적 교역의 형태로 이출(수출)되었다. 일본의 쌀 시세가 조선 쌀 시세보다 더 비싸기 때문에 지주들이 판 것이다.

개항기때부터 일본은 조선의 쌀 수입국이었다. 더욱이 일본에서는 식민지인 조선을 본격적인 식량기지로 키우고자 했다. 거기에 더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18년 일본 농촌인구의 이농(移農)현상과 도시집중 현상으로 인해 쌀 재고량이 바닥나며 '쌀 소동(米騷動)'[1]을 겪게 되었고[2], 일본 정부의 쌀 재고 확보계획, 그리고 동일한 엔 통화권 내의 쌀 유통 촉진에 따른 외화 부담 절감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식계획을 발표한다.

1.1 1차 증식계획

1차 증식계획은 1920년부터 실시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쌀 460만석을 기준으로 일본으로 보낸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여 단계적으로 양을 늘리기도 했으나 경제여건상 열악한 조달방식과 농민들의 반발 때문에 결과는 부진했으며, 오히려 일본인, 친일 조선인 지주들만 이득을 보았다.

1.2 2차 증식계획

1차 증식계획이 부진하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26년부터 2차 증식계획을 발표하여 계획된 재고량보다 더 많은 쌀을 유출시켰다. 이것은 일본 본토의 공업화를 위해서 일본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유지하고 치솟는 인플레이션으로부터 미곡가를 지켜서 노동자들의 생계를 유지시켜 그들이 사회주의에 물들지 않게 해야했기 했기 때문이었다. 총독부 입장에서는 쌀의 품질이 일본쌀에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개선되고 조선 농민들의 소득이 이전에 비해서는 확실히 상승하는 등 1차보다는 성공적이었지만, 하필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고, 일본 국내의 조선쌀 유입증가로 인해 일본 농촌경제가 악화일로로 치닫자 일본 농민 등 국내의 집단반발에 부딪히게 되면서 결국 1934년 산미증식계획은 실패로 끝을 맺었다.

1.3 3차 증식계획

1940년, 일본은 다시 10년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41년 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2 결과

산미증식계획은 일제의 지나치고 무리한 계획으로 시작되어서 정책적으로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책 자체보다는 오히려 정책에 영향을 받아 민간에서 주도된 농업변동 쪽이 농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2.1 일본 내부

산미증식계획은 실상 큰 효과를 보지못하였지만, 정책적인 효과와 별개로 조선내부에서는 쌀을 생산하여 일본으로 이출하는 것이 인기였으므로 많은 양의 쌀이 일본으로 이출되었고 이시기를 거쳐 조선에는 기계를 이용한 벼도정이 자리잡으면서 쌀의 도정상태가 매우 좋아졌다. 이때문에 벼를 주로 가정에서 도정하던 일본산 쌀보다 조선쌀은 더 값이 낮고, 품질은 더 좋았다. 이런 이유로 일단 일본 내부의 쌀 부족 현상은 해소되었지만, 반대로 조선산 쌀이 유입되면서 일본농가의 소득이 감소하면서 일본의 제국의회에서는 쌀의 이출을 두고 농림성과 조선총독부가 매번 갈등을 빚었다.

쌀농사를 짓지 않는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는 쌀값이 낮아져 물가안정에 보탬이 될법싶으나, 쌀값 폭락기가 경제공황시기와 맞물려 있을 때는[3] 농사에 종사하지 않는 인구라 할지라도 경제적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

2.2 김제평야의 개간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논농사의 물을 대는 수리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수리조합개설운동이 벌어진다.

그 중 논농사의 보급이 가장 원활한 지역은 현 전라북도로, 그때까지 전라북도의 김제와 익산을 비롯한 평야지대는 허허벌판에 미개간지로서 황무지나 습지인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초기와 중기에는 유명한 곡창지역이자 풍요지대로 명성이 높았지만 관리와 개간, 경작의 미비로 인해 일제시대에 다다르면 들짐승이 거주하고 인적이 드물었다.

산도 없이 드넓은 평야가 계속되는 김제평야지대에 지주들과 농민들의 주도로 개간과 수리시설의 정비등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게된다. 총독부에서도 관용 수리시설의 개설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참여도나 추진력이 낮아 실패하였고, 되려 민간에서 주도된 수리조합개설이 활발해지면서 논농사를 위한 수리시설의 정비와 개설끝에 [4] 전라북도 일대에는 광범위한 논농사지대가 형성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쌀을 일본에다 이출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대지주들이 형성되었다. 현재 한국 최대의 미곡생산지역이 전라도인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5]

2.3 조선인의 경제적 삶

정책의 효과는 차치하더라도 이시기의 대지주(일본인과 조선인)들은 확실히 이득을 보았다.[6] 당시의 소작제도하에 지주들은 땅을 소작내어준 농민들에게 수확한 벼의 절반을 수취하였고, 이렇게 쌀을 축적한 지주들은 해외시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일본으로 판매하고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 자작/소작, 자소작농민은 식량의 자급과 판매를 조선내부에서 거래에 의존하는데에 반해 지주는 도정설비를 갖추고 벼를 도정하면서, 직접 유통하여 시장에다 내다파는 등 유통과 판매를 겸하여 더 큰 수익을 얻었다.[7] 더불어 수리조합개설이나 수리시설 확충 등 농촌 기반 시설을 투자하기 위한 예산도 농민에게서 수리조합비를 별도로 거둬서 부담을 전가하여 농민의 세부담이 증가되어 농촌빈부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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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미증식계획 시기에는 쌀 생산량이 늘고 일본으로 이출량도 증가하였지만, 생산량보다 이출량의 증가가 급격하였고, 또 조선내 쌀값은 지속적인 상승세로 벼를 자가 소비하는 것보다 판매하는 것이 금전적으로는 이득이었으므로 조선인 1인당 미곡 섭취량은 오히려 감소하였다.

기존의 학설은 만주산 잡곡등의 유입으로 농민의 섭식은 오히려 악화되고, 농작상황의 악화로 유랑민이 증가하여 만주로 이민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중심으로 상반되는 연구결과등이 발표되어 반론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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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일제시대는 인구증가의 시기였던 데다가 식료구입의 총량이 증가하였고, 평균신장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단순히 1인당 쌀섭취량의 감소가 생활수준과 식생악화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재래 조선의 농업은 논농사보다 밭농사의 비중이 많았고, 애초부터 쌀보다 잡곡의 섭취량이 많았으므로[8] 다른 식품군의 섭취를 제껴두고 쌀의 섭취량 감소만 두고 식생수준이 악화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찌됐건 산미증식계획 실시기의 농촌 빈부격차는 확연하게 커졌지만, 빈부격차 외에 농민의 식생수준이나 신장등의 생활수준 자체가 악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종합하면 이시기 빈부격차는 농민의 소득이나 삶이 크게 저하됐다기 보다 지주의 소득이 급격하게 올라가서 벌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9] 한편, 이시기를 경유하여 조선지주[10]들의 재력이 강해져 전통적인 고율의 소작료율이 굳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 EBS 교과서에는 쌀 폭동이라고 나와있다. 각자 알아서 판단할 문제
  2. 아이러니컬하게도 1918년이 지나자마자 이번엔 반대로 동유럽산 곡물들이 세계시장에 터져나오면서 쌀값이 폭락한다
  3. 하필 쌀값이 크게 폭락할 때 경기도 함께 폭락했다. 1차세계대전시기에 쌀값은 전체적으로 상승하다가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간 수출을 안하고있던 동유럽 국가들이 곡물수출을 재개하자 쌀을 비롯한 곡물가격이 급락함과 동시에 유럽각국이 공산품도 자급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산업도 같이 침체되었다. 또한, 1930년대 쌀값하락기에는 세계경제대공황이 겹치면서 쌀값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일어났다.
  4. 이영훈ㆍ장시원 외, <근대조선수리조합연구>, 일조각, 1992
  5. 조선시대에는 오히려 전라도와 경상도의 농업생산량은 크게 차이가 나지않았다. 오히려 생산량에서 경상도가 더 높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단, 경상도가 애초에 전라도보다 훨씬 면적이 큰 점은 감안해야 한다.
  6. 일찌기 개항이후부터 해방이전까지 조선땅은 지주들의 세상이었다.
  7. 이때 얻은 수익으로 재화와 사치품을 구입하고 주식투자를 병행하여 경제가 활성화되었다. 자세한 것은 식민지 근대화론 참조
  8. 조선인의 식사량이 많은 이유중 하나가 잡곡을 주로 섭취해서라고한다.
  9. 애초에 지주는 소작농들이 농사를 지어서 수확한 쌀의 일정한 량을 소작료로 받아 수입을 얻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소작농의 수확량이 많아져야 자신들의 이익도 증대된다. 다시말해 지주가 성장하려면 소작농도 성장해야된다는 이야기다.
  10.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까지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