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감

1 서진의 인물 석감(石鑒) (? ~ 294)

중국원균

서진의 관료. 자는 임백(林伯).

악릉군 염차현 사람으로 청빈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고상한 마음을 가져 공평하고 정직했으며, 위나라에서 상서랑, 시어사, 상서좌승, 어사중승을 역임했지만 수많은 잘못을 바로잡는 탓에 조정에 그를 꺼렸고 지방에서 병주자사, 가절, 호흉노중랑장이 되었다. 265년에 사마염이 황제가 되자 당양자에 봉해졌고 중앙에서 사례교위, 상서 등을 역임했으며, 진주, 양주 등이 강족의 공격으로 무너지자 도독농우제군사가 되었고 270년에 두예에게 독발수기능을 공격하게 했지만 두예는 상황을 보고 봄까지 기다렸다가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하자 두예가 군사를 일으키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상주해서 함거에 갇히게 했다.

석감은 공을 허위로 논한 것에 연좌되어 면직되었다가 진남장군, 예주자사가 되었고 271년에 오나라를 공격할 때 수급을 허위로 부풀려서 면직되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광록훈, 사례교위를 역임하고 점차 특진이 더해져 우광록대부, 개부가 되어 사도를 거느렸다. 전 대의 세 공은 재상을 높여 도우라는 것으로 인해 책봉을 받아 작은 집회를 베풀었다가 이것이 끝난 뒤로 폐해져 행해지지 않다가 석감이 조서를 통해 집회를 주최해 항상 열리게 되었다.

태강[1] 말에 사공이 되어 태자태부를 거느렸고 290년에 장소와 함께 산릉을 돌아보다가 사마량양준에게 의심을 받아 상에 임할 수 없어 영채에서 나와 성 바깥에 있었는데, 사마량이 양준을 토벌하고 싶어한다는 고변이 나오면서 양준이 두려워해 무도황후를 통해 혜제가 조서를 쓰게 하고 석감은 장소와 함께 능의 병사를 인솔해 사마량을 토벌하게 했다. 장소[2]가 빨리 가기를 재촉했지만 이에 따르지 않고 이를 지키면서 가지 않았으며, 은밀히 사마량을 엿보아 이미 다른 길로 허창에 돌아갔기에 양준이 그를 공격하려던 것을 그쳤다.

논하는 자들은 이를 칭찬했고 산릉에 이르러 창안현후에 봉해졌으며. 290년 10월 6일에 태위가 되었다가 나이가 팔십여 살이 되었어도 장대하면서 강개해 만나는 것이 마치 소년과 같았다고 한다. 이 때 사람들은 이를 아름답게 여겼고 294년 1월 1일에 사망하자 시호를 원(元)이라 했다.

삼국전투기에 등장했는데 겨울왕국의 한스 왕자로 패러디된 것으로 보인다. 인성갑이라 평한다. 하지만 하는 짓을 보면 갑질로 점철된 인성으로 묘사... 석감의 기록은 그의 개인적인 성품과 정치적인 행보 사이의 괴리라고 해석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요즘 인터넷에서 흔히 쓰이는 인성[3]을 논하는 기록이 아니라, 석감의 정치적인 스탠스에 대한 기록에 가깝다. 즉 인성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점에서 일종의 비꼬기인 듯.

개인의 성격으로 평가하자면 온화하지만 야심이 있는 사람, 사회적으로는 적당히 실속있는 프로 정치꾼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사실 기록의 묘사는 조금 이상하지만, 의외로 보편적인 정치인임을 알 수 있다. 인성 같은 걸 논할 자리가 없는 평가다.

2 후조 6대 황제 의양왕(義陽王) 석감(石鑒)

오호십육국시대 후조의 역대 황제
5대 팽성왕 석준6대 의양왕 석감7대 신흥왕 석지
묘호-
시호의양왕(義陽王)
연호청룡(靑龍, 350년 1월 ~ 350년 윤2월)
석(石)
감(鑒)
대랑(大郞)
생몰기간? ~ 350년
재위기간349년 ~ 350년

석호의 서자로 349년 석준을 살해하고 황위에 올랐다. 황위에 올랐으나 석민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였다. 석감은 석민을 죽이려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오히려 350년 윤정월에 실권자 석민(후에 염민으로 개명)에게 살해되었다.

3 비누의 일본식 이름

石鹸. '셋켄' 정도로 발음한다. 한국에서는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수필이나 소설에 자주 등장한다. 이외에 사분(Savon)등으로도 불렸다. 자세한 것은 비누 항목 참조.
  1. 280 ~ 289년이다.
  2. 양준의 생질.
  3. 보편적 선의 + 행위의 목적에 해당하는 인간을 대하는 태도. 등등으로 해석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