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노 이루카

蘇我入鹿
(? ~ 645)

아스카 시대의 권신. 소가노 에미시의 아들. 다른 이름은 쿠라츠쿠리(鞍作).

642년에 고교쿠 덴노가 즉위하자 스스로 국정을 장악해 그 위세가 아버지 이상이었으며, 도적들조차도 그의 위세에 떨었고, 길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아무도 주우려 하지 않을 정도[1] 였다고 한다. 겨울 12월에 모든 나라 안의 백성, 180부곡을 징발해 미리 쌍묘를 만들 때 여러 묘 중에 하나가 소릉이라 부르고 이루카의 묘로 삼았다고 한다.

643년 겨울 10월에는 아버지 소가노 에미시가 병으로 조정에 나오지 못하게 되자 아버지로부터 관직을 받아 대신의 자리에 준하게 되었으며, 12일에 쇼토쿠 태자의 왕자들을 폐하고 후루히토노 오호에(古人大兄)을 덴노로 만드려는 음모를 꾸몄다. 11월 1일에 사람을 파견해 야마시로노오호에노미코(山背大兄王)를 습격했고 야마시로노오호에노미코를 군사를 통해 포위해서 자살하도록 몰아넣어 죽게 만들었는데, 이로 인해 에미시가 이루카에게 어리석어 난폭한 짓을 행하고 생명 또한 위태로워졌다고 질책했다.

644년 겨울 11월에 에미시와 함께 나란히 우마카시노오카(甘禱岡)에 집을 지어 이루카의 집을 골짜기의 궁문이라 불렀으며, 화재, 군사의 습격에 대비해 물을 담은 배를 세워놓거나 무기고를 만들고 장사를 배치하는 등의 조치를 했다.

645년 6월 8일에 왕자 나카노오호에(中大兄)가 쿠라야마다노 마로노오미(倉山田麻呂臣)과 함께 이루카를 죽이기 위해 함께 모의했으며, 12일에 고교쿠 덴노가 대극전을 나간 틈을 탔고 이루카는 의심이 많아 항상 칼을 차고 있었지만 나카토미노 카마코노무라지(中臣鎌子連)의 지시를 받은 배우를 통해 칼을 풀도록 했고 이루카는 웃으면서 칼을 풀어놓았다.

나카노오호에가 대극전에서 군사를 이끌고 숨어있을 때 쿠라야마다노 마로노오미가 상표문을 읽었고 읽는 것이 거의 끝나가는데도 나와서 공격하기로 한 사에키노 무라지코마로(佐伯連子麻呂), 카츠라기노 와카이누카이노무라지아미다(葛城稚犬養連網田) 등이 이루카의 위세에 눌려 나오지 않아 쿠라야마다노마로노오미는 목소리를 떨어 의심을 살 뻔 했으나 재치로 넘겼다.

이 때 나카노오호에가 군사를 이끌고 뛰쳐나오면서 이루카는 머리, 어깨를 베이자 놀라서 일어났고 사에키노 무라지코마로에게 한 쪽 다리를 베였다. 이루카는 넘어지면서 마땅히 황위에 있어야 할 사람은 하늘의 자식으로 자신이 죄가 없음을 이야기했고 나카노오에에게 고교쿠 덴노가 자신이 모르는 일이라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카노오호에가 쿠라츠쿠리가 황실은 빼앗고자 해서 하늘의 자손의 자리를 쿠라츠쿠리가 함부로 넘보게 해서야 되겠냐고 하면서 교코쿠 덴노는 그대로 궁전에 들어갔으며, 이루카는 사에키노 무라지코마로, 카츠라기노 와카이누카이노무라지아미다 등에게 죽었다.
  1. 여담으로, '길에 떨어진 물건조차~'하는 구절은 사기 등 다른 한자 문화권의 역사서들에서도 '엄격한 법치로 평화가 실현된 세상'을 묘사할 때 쓰이는 단골 래퍼토리이다. 즉 실제 역사적으로 그런 일화가 있었다는 '기록'이 아닌 '관용적 표현'의 하나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