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댐

춘천시의 댐
소양강댐의암댐춘천댐

昭陽江댐/Soyanggang 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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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강원도에 있는 북한강의 지류 소양강.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에 위치한다.

다목적으로 높이는 123m, 만수위는 198m, 제방 길이는 530m, 총 가용저수량은 29억 이다. 완공 당시에는 동양 최대의 댐이었다. 현재도 국내 최대이자 동양 최대의 사력댐이며, 세계에서 4번째로 크다. 수도권지역의 홍수 방지와, 전기공급, 상수도 공급을 위해 1967년 4월에 착공하여 1973년 10월에 완공하였고, 건설비용은 318억 7000만 원이다. 홍수시에 물을 하류로 흘려보내는 시설인 여수로에는 총 9개의 수문이 장착되었다. 댐 건설 당시 만들어진 기존 여수로에는 5개, 그리고 2010년에 건설된 보조여수로에는 4개의 수문이 각각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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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등 매체에서 홍수or가뭄 클리셰 장면으로 유명한 장면, 요새는 가뭄 클리셰로 더 많이 나오는 듯 하다(...)

수도권 지역 및 중부지역에 12억수도를 공급한다. 연간 353GWh의 전기를 생산하여 수도권 지역에 공급하고 홍수를 조절하는 역할도 한다. 짓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넓은 지역이 수몰되었는데 4,600세대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으며, 약 2,700ha의 논밭이 수몰되었다고 한다. 주민의 말에 따르면 산 위에서 보니 집 지붕이 둥둥 떠내려가는게 어린 마음에 참 재미있었다고 한다

국내 최대의 저수용량을 자랑하는 댐인 만큼 한강 홍수 조절의 최후의 보루로 인식되므로 다른 댐들과 달리 수문을 여는 빈도가 매우 적은 특징을 가진다. 소양강댐의 저수 용량이 동양 최대일 정도로 엄청나므로 웬만한 상황이 아닌한 되도록 물을 가두어 버티는 편이다. 규모가 규모인지라 수문을 열게 되면 다른 댐의 수위조절을 비롯해 한강 하류 지역의 홍수 조절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 그래서 소양강댐의 수문이 열리는 상황 자체가 하나의 뉴스거리로 다뤄지곤 한다. [1] 1973년 완공된 이후 1981년 처음 수문을 개방한 데 이어 1984년과 1987년(2회), 1990년(3회), 1995년, 1998년, 2003년(2회), 2006년, 2011년 등 준공 이후 40년이 지난 현재까지 수문을 개방한 횟수는 총 13회에 지나지 않는다. 평균 3년에 한 번 꼴로 수문을 여는 셈. 다만, 여느 댐과 마찬가지로 수력발전 및 평시 한강 수위 조절용으로 이루어지는 보조 배수는 수문의 개방과 관계 없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진다.

2 건설[2]

2.1 사업계획

소양강은 막대한 포장수력을 보유하고 있음이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다. 최초 조사는 1950년대에 유래를 발견할 수 있다.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수립과 함께 대하천 유역의 수자원 다목적 개발의 필요성에 중점을 두었다. 1966년 4월에 특정 다목적댐법을 제정하고 1966년에 한강유역 합동조사단을 구성하여 당시까지 고려되어 온 발전 단일목적 개발을 치수와 이수를 겸한 다목적 개발방식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소양강댐 규모의 최종 결정까지는 건설부와 한전 간에 견해차가 심하여 장기간에 걸쳐 심각한 정책 논쟁의 수렁에 빠지기도 하였다.

2.2 설계

1960년 Smith Hinchman & Grill 기술회사에 의하여 현지조사가 이루어져 제안된 형식은 108m의 콘크리트 중력댐이었다. 1962년 11월 건설부는 일본 공영과 소양강댐 기술조사 및 설계 용역을 체결하였는데 콘크리트 중력식이 무난하다는 고찰이었다. 1967년에는 건설부가 한강유역 합동조사단의 건의에 따라 높이 122m의 중력댐을 검토하게 되었다. 콘크리트 중력댐은 건설 기간 중 돌발 사태에 안전을 기할 수 있으며, 댐 완공 전에라도 발전을 개시할 가능성이 있고, 국산 시멘트 사용은 국가 경제에 호경기를 가져오리라고 판단했다. 1968년 5월, 건설부는 예비설계를 마치고 곧 콘크리트 중력식으로 본설계까지 실시하려는 단계에 이르렀다.

시공을 맡은 현대건설은 Rockfill사력식이면 총공사비 203억원 규모에서 34억원의 공사비를 절감할 수 있으며 공기도 5년에서 4년으로 1년 단축할 수 있다고 설계변경을 제의하였다. 콘크리트 중력댐은 우리나라의 철근, 시멘트 등 건설자재 생산능력의 부족과 막대한 수송비 등으로 막대한 건설비가 소요될 예정이었다. 소양강댐 건설지에는 사력댐에 필요한 바위, 자갈, 모래 등이 풍부한 점이 착안되었다. 또한 콘크리트 댐은 건설 과정이나 평시의 안정성은 높지만, 전시 각종 공격에는 취약하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이유도 들었다. 콘크리트 댐은 폭탄에 맞았을 때 구조가 파괴되지만, 사력식 댐은 그런 식의 충격에서 강하다. 당시는 6.25 전쟁이 일어난 지 10여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라 특히 전쟁에 대한 대비를 고려해야 했던 시절이다.

이렇게 현대건설의 고집으로 1968년에 중반에 이르기까지 설계변경안으로 마찰을 빚는다. 착공이 1967년 4월이었는데, 대단히 늦어진 셈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주영 회장이 건설부 장관과 대동한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마음을 돌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이런 자리는 없었고, 건설부 장관의 단독 보고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되려 사력식댐이 적절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무엇이 진실이든 박정희 대통령이 즉석에서 판단을 내린 것만은 사실로 보인다. 포병장교 출신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콘크리트 댐이 적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을 잘 알았다.

2.3 규모

한전은 전력 단일목적에 유리한 저댐(10억톤)을 계획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한전은 마침 정부가 일본 마루베니(丸紅)상사와 차관계약을 서두르고 있음을 포착한다. 정부는 이 저댐 건설에 필요한 기자재 공급원으로 1967. 4.12 마루베니와 차관($13,956,000)의 계약을 체결한다. 1967. 4.22 경제기획원 승인을 받아 1967. 5.20 L/C를 개설하여 전격적으로 저댐 건설을 기정사실화하고 댐 전체공사의 건설을 한전이 담당하겠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한편, 미국의 기술지원하에 구성된 한강유역 조사단은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소양강댐 규모는 고댐(145m)이 최선의 방안이고, 중댐(122m)은 차선이며, 저댐은 부적당하다는 의견이었다. 한강에 있어서 충주 및 소양강 지점은 대체불능의 전략적인 댐 지점이므로 최대한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무총리가 건설부, 상공부 및 한전의 책임자들을 소집하여 2차에 걸쳐 조정을 시도해 보았으나 계속 결정이 지연된다. 건설부의 최종성 차관은 이문혁 수자원국장을 대동하고 대통령에게 직접 브리핑하여 소양강댐은 다목적 중댐 규모로 개발하도록 하라는 결단을 받아냈다.

2.4 시공

주 시공을 맡은 현대건설 등 국내 굴지의 건설업체에도 장비가 갖춰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차관을 들여 건설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고, 그것을 건설업체에 대여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때 양성된 기능공과 기술은 현대건설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고 알려진다.

건설 과정은 기술 부족으로 매우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자재를 덤프트럭에서 실어다 그대로 부어 만드는 Dumped riprap 공법이 사용되었다. 이 공법은 싸고 안전했지만 외관이 좋지 못하여 그 이후 건설된 사력댐은 표면이 매끈한 Handed riprap 공법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삼성물산이 시공하던 소양강댐의 추가 보조여수로 공사에서 2005년과 2006년에 보조여수로 붕괴사고가 있었다.

2.5 비화

정주영 회장은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설계 변경 과정의 다소 충격적인 비화를 말한다. 당시 소양강댐의 건설 예산은 일본의 식민지 배상 청구권 명목의 차관에서 배당되었다. 최초 설계사인 일본공영이 유리한 설계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공사비를 착복할 의도가 있었으며, 건설 사정에 밝지 않은 건설부가 이에 넘어갔다는 식의 진술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의문이 든다. 당시는 댐 규모를 결정하는 데만도 한강유역조사단, 건설부, 한국전력공사의 3개 안이 있었고 그 외 많은 회사들이 예비조사와 설계에 참여했다. 특히 한강유역조사단에는 미국의 기술지원도 이루어졌다. 설계, 감리, 시공이 일괄적으로 이루어지는 턴키 방식이 아니었던지라 착복은 어렵지 않았을까. 또한 그러한 비화는 오직 정회장의 자서전에서만 나오는 주장이며 다른 곳에서는 비슷한 진술을 찾을 수 없다.

사력댐의 문제 역시 컸다. 공사 과정에서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응 능력은 중력식 콘크리트 댐보다 떨어진다. 약 7년에 걸쳐 일본공영만이 아닌 많은 회사와 함께 설계안을 잡았는데, 시공사의 주장만으로 설계 변경하기는 도박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현대건설은 댐 건설 이력조차 없었다. 이런 회사에 세계 최대 규모의 사력식 댐의 설계, 시공을 전부 맡기는 방안이 현실적이었을까? 따라서 사력댐 반대에 타당성이 없다 볼 수 없고, 되려 박정희 대통령의 즉흥적인 결정으로 7년간 준비한 설계안이 뒤집혔다는 사실이 이례적으로 보인다. 7년 동안 조낸 굴렀는데 백지화!! 실제로 건설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며, 매우 큰 위기상황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즉 건설부가 우둔했거나 정략적인 이유만으로 사력댐을 반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콘크리트 중력댐은 콘크리트가 많이 소요되는데, 시멘트 사업부(현 현대시멘트)를 소유했던 현대건설이 왜 반대했겠느냐, 정회장의 선의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당시 현대시멘트 공장은 충북 단양에 있었다. 소양강 댐에서는 매우 먼 위치다. 막대한 양의 시멘트를 이송하면 그만큼 큰 비용이 든다. 과다한 이송비는 당시 현대건설의 설계변경 주장의 각론 중 하나였다. 따라서 현대건설이 아닌 지리적으로 유리한 다른 시멘트 회사가 이득을 가져갈 가능성도 있었다. 한편 1967년 전후하여 많은 시멘트 공장이 충북에 건설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필요한 콘크리트 수요를 염두에 두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댐이 아니더라도 수요가 충분하리라는 계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설계안을 따르면 기자재와 장비를 일본에서 들여오므로 그들이 많은 이득을 가져가게 된다는 반론도 있다. 마루베니 상사를 통해 기자재를 도입한 상황은 있다. 또한 몇몇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많은 일본계 상사들이 로비를 했다는 정황도 포착된다. # 그러나 이 부분은 댐의 규모 확정 과정의 이야기로 수주경쟁을 뜻한다고 보인다. 댐 규모 확정 과정에 이견이 많았다는 진술들이 이와 일치한다. 그러나 콘크리트 댐과 관련된 일본공영의 착복 시도는 여전히 정주영회장의 진술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콘크리트 중력댐 건설안을 내면서, 국산 콘크리트 사용은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콘크리트 중력댐이든, 사력댐이든 기자재와 장비가 없기는 똑같은 상황이었다.

물론 정회장의 선의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 많은 공사비가 절감되었으며, 이는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황상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회장에게 악의가 있었다기보다는, 당시 정황에 근거한 막연한 추측을 말하지 않았나 싶다.

한편 소양강댐 건설 과정에는 많은 기관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착공 직전까지 많은 방안이 난립하는 모습이 보인다. 심지어는 1967년에 착공이 되었는데도 많은 이견이 있었고, 최종 설계는 1968년 8월(!)에나 확정된다. 지금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사업진행방식이다. 여러 의견들이 난립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결정으로 최종 정리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당시 개발시대에 흔히 보이는 행태였다. 좋게 보면 당시의 특수한 상황이고, 나쁘게 보면 매우 비효율적인 모습이다.

3 교통

버스나 자가용으로 갈 수 있다. 버스는 남춘천역이나 춘천역에서 11번, 150번 버스를 타거나, 춘천역에서 12번, 15번을 타면 된다. 15번은 주말에만 운영하니 주의하자. 자가용 이용 시 거의 꼭대기까지 주차장이 있지만, 주차 공간이 협소한 편. 댐 하부에 넓은 주차장이 있으며, 여기에서 시내버스 또는 셔틀버스를 타면 된다. 상부 주차장은 악천후에는 운영하지 않으니 주의할 것. 또, 청평사로 가는 유람선과 양구군과 북산면으로 가는 여객선이 운항되며, 소양호를 한 바퀴 도는 유람선도 운행 중이다.

4 관광

소양강댐의 건설로 생겨난 소양호는 그 자체가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며 춘천시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댐으로 길이 수몰된 탓에 청평사나, 댐 안의 몇몇 마을은 그야말로 '육지의 섬'이 되어버렸다. 수자원공사에서 만든 물문화관이 있으며 소양호 근처에 있는 청평사도 유명하다.

2005년경까지만 해도 주차장에서 배타는곳까지 노점상과 포장마차들이 즐비했었으나 물문화관 공사 시작쯤해서 전부 정리되었다.

5 기타

이 댐이 완공함으로써 소양강을 따라 국도로 춘천시와 왕래하던 양구군이 도로의 수몰(...)등으로 육지 속의 섬이 되어버렸다. 정확히는 소양호를 따라 끝없이 굽이치는옆으로 답이 없는 배후령도로를 내었으나[3], 양구~춘천 1시간이라는 경악스러운 소요시간과 미친 차멀미을 기록하는 등의 여러 문제점으로 인하여 국내 최장의 배후령터널이 개통하였다.
  1.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한강 수계의 홍수로 이어졌다.
  2. 한국대댐회 소양강댐 40년사스포츠한국미디어 기사 외 다양한 자료를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3. 평화의 댐을 올라가는 아흔아홉 굽잇길과 거의 비슷한 수준, 배후령터널 개통 이후 배후령 고갯길 자체에 별다른 관광자원이 있는것도 아닌지라 통행량이 극히 적어져 관리가 전혀 안되어 있다. 주변에서 떨어지는 낙석등으로 인해 이륜차는 운행이 매우 위험한 수준. 가끔 자전거타고 등판하는 사람이나 심심해서 차끌고 올라가는 사람만 있는 수준이며 스포츠카 타고 드리프트연습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지 원형의 스키드마크가 빽빽히 나있는 구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