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1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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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Σωκράτης (Sōkrátēs, 현대식으론 Sokrátis)
BC 469년 - BC 399년

γνῶθι σεαυτόν

너 자신을 알라.[1]

ho de anexetastos bios ou biôtos anthrôpôi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서양 철학의 아버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2]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어떠한 저술이나 일기를 남기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제자 혹은 지인들, 대표적으로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소크라테스에게 비판적인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등이 남긴 저술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그의 삶과 사상을 알 수 있다.[3]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크라테스의 일화나 행적은 대부분이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 근거한 것이다.

1.1 개인적인 삶

외모는 대머리에다가 못생겼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외모지상주의 풍조가 있던 당시 아테네에서 꽤 고생을 했다고 한다.[4]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 알려진 것도, 그의 미남 제자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면서부터였다 하니, 아테네의 외모지상주의나 소크라테스의 추모(醜貌)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대략 짐작해 볼 만하다.[5]

그의 마누라였던 크산티페는 못생긴 악처(惡妻)였다고 전해지는데,[6] 사실 앞뒤 정황을 따져보면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오히려 현처(賢妻)였을 가능성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유명한 철학자였지만, 사실 아내 입장에선 돈도 없는 주제에 맨날 돈 많은 사람(대표적으로 플라톤)과 사색한답시고 수다나 떨러 다니는 남편으로, 집안 살림은 크산티페가 다 책임졌다. 소크라테스가 물려받았으나 운영 등에 무관심하여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했던 석공소도 크산티페가 직접 운영했다.

허나 이런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를 내쳤다는 기록은 없으며, 외려 소크라테스가 독배(毒杯)를 마시고 자결할 때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물론 다혈질기가 있어서 홧김에 소크라테스에게 물을 뿌리고 구박도 자주 했지만…. 아내의 잔소리에, 소크라테스는 이런 부인이 참을성을 길러준다고 했다나 어쨌다나.(…) 하여튼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크산티페가 악처라고 전해지는 것은 다툼이 많은 친구를 악우라고 하는 것처럼 단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며, '효자보다 악처가 낫다'는 이야기와도 통한다. 소크라테스가 했다고도 전해지는, "젊은이여, 결혼하라. 좋은 처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 라는 농담도 그 행간(行間)을 읽을 필요가 있다.[7]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결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30대 후반에서 40대의 나이에 중장보병으로 종군하기도 했다. 당대 아테네 시민은 신체 및 정신에 장애가 있거나 만 50세를 넘지 않았다면 군복무 의무가 있었으므로, 소크라테스도 군인으로 참여한 것. 대표적인 참전 전투로는 델리온 전투가 있는데, 이때 아테네군이 패배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침착하게 후퇴하는 담대함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소속된 부대도 소크라테스의 침착한 대처 덕분에 무질서하게 패주하지 않고 무사히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8][9] 무려 세 번이나 참전했다고.

《아테네의 변명》과 《소크라테스의 재판》이라는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삶과 당시 세계관이 잘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동안, 위에 서술된 것처럼 세 번 참전했던 것과, 딱 한 번 이스트모스에서 포세이돈을 위해 열리는 대축제였던 이스트미아 제전을 구경하러 간 것을 합쳐, 단 네 번밖에 아테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플라톤의 《크리톤》에서 아테네의 법이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형식으로 자문자답한 《소크라테스의 독백》에 의하면, '우리(아테네의 법)와 우리의 도시(아테네)만으로도' 소크라테스에겐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1.2 삶과 철학

우선 소크라테스의 삶은 가난했다. 일한다는 것 자체가 선비철학자의 삶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히 돈 벌어오라는 다혈질 아내의 구박을 많이 받았고, 이 때문에 상술했듯 티격태격 싸우는 게 일상다반사가 된 것.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하루는 제자들 중 한명이 "스승님, 결혼은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21세기 유부남들도 자주 하는 말이라는 데서 소름.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드는 의문이, 이렇게 가난했던 소크라테스가 일개 수병도 아니고 최소 중산층 이상은 돼야 군장(軍裝)을 마련할 수 있었던 중장보병으로 어떻게 참전할 수 있었느냐다.[10] 이에 역사가들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석공소 주인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아버지 때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재개발 사업으로 단단히 한몫 잡았을 거라는 설, 소크라테스 대신 석공소를 운영했던 크산티페가 의외로 수완이 탁월한 경영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설, 알키비아데스 같은 소크라테스의 금수저 제자들이 스승님을 위해 대신 군장을 마련해 드렸을 것이라는 설 등. 하지만 아직 확실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아테네를 지극히 사랑했던 철학자로서, 소피스트들의 궤변에 아테네가 놀아나고 회의주의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이에 반발하여 보편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등장했다.

현재의 시선에서 보면 지극히 잉여로운 인물로, 하는 일도 없이 시장이나 광장을 돌면서 사람들을 붙잡고 묘한 철학적 질문을 해댄 것으로 유명하다[11]. 현대의 시점에서 보면 노동도 벌이도 없는 완전 똥잉여지만, 당대의 시점을 조금 감안할 필요가 있다. 당대 아테네에서는 대장장이가 하루 종일 일하고 내일도 하루 종일 일하면서 1주일 내내 일만 하면 오히려 비난받았다. 아테네에서의 삶은 대단히 많은 부분이 공공의 생활과 연결되어 있었다. 전쟁에서 병사로 참여하는 활동은 물론, 아테네인들의 결속심을 다지는 종교 축제에는 어지간하면 반드시 참여해야 했고, 장군으로 뽑힌다던가 배심원으로 뽑힌다던가 재판을 구경하러 가서 옳다 싶은 변론이면 기세를 보태고 그르다 싶은 변론이면 야유를 보낸다던가 등등, 공공의 삶에 대한 기여가 엄청난 부분을 차지했다.

공동체적인 삶을 강조하는 당대 풍조에 따라 아테네에서는 공공장소에서의 토론이 엄청나게 중요시되었다.[12] 아테네인들은 토론이야말로 가장 좋은 문제해결책이며 토론을 엄청나게 즐기는 아테네인들이야말로 지상 최대의 문명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정치토론에 활발히 참여하며 아마도 승률도 높았을 소크라테스는 의외로 당대 아테네의 똥잉여라기보다는 현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는 중요한 일을 하는 유명인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돈 벌어오라는 크산티페가 악처 소리를 듣는 것도 이러한 부분이 있고.

소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를 신랄하게 비판하여 '아테네의 등에'라 자칭하기까지 했다. 이때 적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는 이후 사형 판결을 받는 원인들 중 하나가 된다. 적들이 생긴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당시의 유명한 소피스트들과 논쟁을 벌여 결국 소피스트의 무지를 드러내는, 일종의 도장 깨기를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소피스트들은 못생긴 소크라테스를 무시하면서 흔쾌히 도전을 받아들였으나, 소크라테스의 논리에 휘말려 결국 자기 스스로 자신의 논리를 부정하게 되고 결국은 망신을 당하기 일쑤였다. 다만 고대 아테네인들은 현대 한국인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토론과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말대꾸 몇 번이나 공공연한 토론에서 볼썽사납게 완패하면 망신을 줬다고 커다란 원한을 사는 한국과는 달리 몇 판 이기고 지는 것쯤은 그러려니 했을 것을 감안해야 한다.

저술보다는 대화를 통해 철학활동을 하였고, 특히 상대방에게 계속 질문을 해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방법을 썼다. 이런 질문을 중심으로 하는 교수법을 소크라테스식 문답법, 혹은 산파법(산파술)[13]이라고 부른다. 확고한 주장을 가지고 있던 피질문자가, 질문자의 문답법에 의하여 결국 자신의 주장을 자기 입으로 자연스럽게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유도심문과도 비슷해 보이지만, 소크라테스가 산파술을 통해 논쟁의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자세는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거나 혹은 심문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상대보다 더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고, 기본적인 것부터 검토해 나아가는 것이다. 때문에 이를 형사가 사용하는 유도심문과 같은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해답을 제시해주지 않는' 단점을 지녔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산파술을 통해 어떤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도덕 철학을 위해 기존에 있는 개념(가령 '경건함', '선함', '좋음' 따위의)을 명료하게 만드는 것에 주목했으므로, 이러한 지적은 핵심을 완전히 잘못 짚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계속 산파술을 시전하고 다닌 끝에, 결국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되고,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는 따라 하기는 쉽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심오한 말을 남겼다.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델포이 신전에 어떤 자[14]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가 있습니까?" 라고 묻자, 무녀는 평소에 늘 쓰던 질질 끄는 은유나 수사들을 생략[15]하고 단 한 마디로 "아니."[16]라는 신탁을 주었다고 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여, 똑똑해 보이는 사람(정치인, 작가, 장인 등)들을 닥치는 대로 만나고 다니며 그들의 지혜를 시험해 봤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똑똑해 보였던"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혹은 편견)조차 몰랐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공자가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라는 말을 남겼던 것과 비교해본다면 흥미로운 대목. 참고로 흔히 알려진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다.[17]

소크라테스의 많은 제자들 중 특히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만의 철학이 독특하고 흥미롭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제자들보다 소크라테스를 더 자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책에 기록한다. 어쩌면 소크라테스가 기록을 전혀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대비책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플라톤은 그리스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을 또 감명 깊게 받은 제자들 중 한 명이 바로 그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다. 서양 고대철학 3대장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고대 그리스 역사의 먼치킨인 알렉산드로스 3세이니, 따지고 보면 알렉산드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증손제자에 해당된다. 인류 역사상 손꼽힐만한 스승-제자 라인이 아닐까?

또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플라톤 말고도 유명한 자들이 있다. 몇 차례 연급된 크세노폰 역시 그러하며,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가 그러하다. 또한 키레네 학파를 창시하게 되는 아리스티포스 역시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 키니코스 학파의 창시자이자 유명한 디오게네스의 스승인 안티스테네스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 메가라 학파의 창시자인 에우클레이데스 역시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18]

1.3 죽음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으로 위와 같은 말을 남긴 적이 없다. 다만 비슷한 뉘앙스의 말은 한 적이 있다. 후술된 내용 참조.[19][20]

하지만 그의 이러한 행위가 신들을 부정하고 젊은이들을 현혹하여 아테네의 전통을 해친다고 생각되어, 당대 아테네 상류층에게 위험인물로 낙인찍혔고, 실제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 위험인물들이 꽤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스파르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양쪽을 모두 몇 차례씩 배신한 배신자 알키비아데스와, 전쟁에서 이긴 스파르타의 힘을 업고 권력을 잡아 반대파는 (민주파 외 온건 과두파들까지) 죄다 죽여 버리고, 시민의 수는 3,000명으로 고정시키고선 나머지 인원들은 언제든지 즉결처분 시키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한 폭군 크리티아스[21]가 있다. 결국 참다못한 아테네인들은 8개월 만에 크리티아스를 축출했고, 그로부터 4년 후, 이러한 사태의 시발점으로 거론된 소크라테스는 고발당하고 재판을 거쳐 사형에 처해진다.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이 직접민주제가 타락하면 중우정치(衆愚政治)가 될 수 있다며 부정적으로 보게 된 이유들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22]

하지만 정작 소크라테스 본인은 자신을 따라다녔던 청년들의 과두정치(寡頭政治) 체제를 몹시 부정적으로 평가했을 뿐 아니라, 과두정에서 살라미스 사람 레온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자 그냥 쌩까고 집으로 돌아가는 등 반대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과두정이 조금만 오래 유지되었더라도, 그 일로 인해 소크라테스 본인이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또한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플라톤의 사상이라는 중론이 있지만) 과두정치 체제를 상당히 하등하고 부정적인 체제로 간주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과두정치의 시발점이라는 혐의는 부당한 면이 적잖이 있다.

어쨌든 표면상으로 소크라테스의 기소 혐의는, 아테네가 믿는 신을 우습게보고, 새로운 우상을 섬기면서 젊은이를 타락시킨 죄였다. 황당해 보이지만, 크리티아스를 처단하고 내전의 장기화를 우려한 아테네에선 민주정을 회복하는 대신, 그동안 상대방에게 했던 잘잘못은 따지지 않기로 하는 대대적인 사면령이 내려진다. 당연히 여기엔 아테네 시민인 소크라테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배신자 알키비아데스와 폭군 크리티아스라는 위험인물을 키웠다는 혐의를 적용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 그래서 진짜 목적은 알카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의 정신적 스승을 처벌하려던 보복성 고발이었지만, 겉으로는 엉뚱한 걸 만들어 제시한 것이다.

사형 판결을 받은 재판도 내막을 들여다보면 황당한 점이 많다. 참고로 소크라테스가 고소되었을 때의 죄목들은,

1. 소크라테스는 국가 공직의 추첨제를 비판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국가제도를 경시하게 했다.

2. 병에 걸리거나 소송을 당할 때 아버지나 친척은 도움이 안 되며, 의사나 법에 밝은 자가 보다 유용하다고 하여 부모나 어른을 공경하지 않게 했다.
3. 호메로스의 시구를 악용하여 젊은이를 오도하게 했다.[23]

이 재판은 우선 투표(배심제)로 유죄/무죄를 가린 후, 유죄로 결정되면 다시 고발자가 제안하는 처벌과 피고 본인이 제안하는 처벌 중에서 투표를 하여 채택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특정 당파에 소속되지 않았다고 변론하며, 최종적으로 281:220, 61표차로 유죄가 결정됐다. 표차가 생각보다 안 났다는 건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먹혔다는 걸 의미했기에, 이때까지는 소크라테스가 사형 판결을 받을 확률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고무된 소크라테스가 다시 특유의 어그로를 시전하며 자신은 무죄라며 사형은커녕 오히려 국가유공자급으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장황하게 말한 후, 마지막에 "하지만 다른 사람이 벌금형을 제안하라고 권했으니 그렇게 하겠다" 라고 배심원들의 심기를 자극하는 안 좋은 수를 두고 만다.[24] 쉽게 말하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피 본 사람들이, 그래도 소크라테스까지 죄를 묻는 건 옳지 않은 거 아닌가, 라며 편을 들어주고 있는데, 그렇게 쉴드 쳐주는 사람들 심기까지 건드리는 ‘나의 위대함을 알라’ 식으로 발언한 것.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 자기변호 이후 361:140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사형 판결을 받고 만다. 말하자면 무죄 쪽에 표를 던졌던 사람들도, 소크라테스의 자기변호를 들은 후에는 사형 쪽에 표를 던지게 된 것.[25]

죽기 직전에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빚졌다며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서, 당시 아테네에서는 병에 걸렸다 나으면 이 신에게 감사의 표시로 제물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자신이 독약을 마시고 죽음으로써 모든 질병에서 해방되니 고맙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화를 상징적으로 해석해서, 삶 자체가 질병이고 죽음은 그 '삶'이라는 병의 치료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으나, 소크라테스의 평소 언행은 그런 허무주의와 관계가 없었으므로, 진실일 가능성은 낮다. 다른 각도의 해석으로는, 평소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쇠가죽만큼이나 두꺼운 아테네인들의 '무지의 가죽'을 가렵게 하는 '등에(쇠파리)'에 빗대었듯이, '아테네인들의 무지의 병을, 나 대신 치유해 달라'는, 철학자로서의 임무를 완수해달라는 부탁으로 보기도 한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설(異說)들이 있다. 병으로 고생하다 나은 적이 있는데, 제물을 아직 올리지 않았기에 죽으면서 부탁을 남긴 것일 뿐이라거나, 또는 단지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이웃 사람에게 진짜로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었다거나, 심지어 그냥 농담이었다는 설까지 있다(…). 황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대체로 할 말을 직설적으로 했지 은유적으로 빙빙 돌려가면서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굳이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고 의미를 해석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며, 직설적인 의미로 해석하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플라톤의 책 《파이돈》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독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파이돈》이라는 책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파이돈이 에케크라테스라는 사람에게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해주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파이돈》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먹고 누운 상태로 몸이 굳어지다가 경련을 일으키면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차분한 죽음의 모습은 플라톤이 포장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플라톤은 이 시기의 소크라테스와 엮이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26]에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죽을 시기에는 소크라테스 곁에 없었다. 두 번째 이유로, 당시 그리스에서 널리 사용된 독약을 먹으면, 심한 구토 증세를 일으키면서 전신의 마비와 경련과 함께 사망한다. 플라톤의 묘사와는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먹은 독약은 일명 독당근(Poison Hemlock, Conium Maculatum)으로 알려진 물건이다(알칼로이드계 독극물인 Coniine). 앞서 말한 구토 증세를 일으키는 독약은 중추신경계를 공격하는 독미나리이고,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당근은 심장에서 가장 먼 부위부터 말초신경계를 공격해 마비시키는 독약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최후는 오히려 플라톤의 서술과 같은 품위 있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건 어떻게 죽었냐가 아니라, '왜 그가 죽음을 선택했는가?'다. 소크라테스의 나이는 이때 이미 70세를 넘겼고, 남은 삶은 길어야 몇 년 되지 않을 나이였다. 일단 그는 재판장에서도 자기 신념을 꺾느니 죽겠다고 말한 데다가, 겉으로 공표한 것이야 어쨌든 속의 진짜 죄목은 매국노와 폭군의 정신적 스승으로 많은 아테네 시민들의 증오의 대상이었으니, 재판에서 타협의 여지는 없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이들을 대놓고 돕거나 한 게 아니라, 단지 정신적 스승일 뿐인데 사형은 너무하다는 평가가 아테네 내부에서도 꽤 많았으므로, 형벌을 벌금형 정도로 줄일 수가 있었는데 스스로 그것을 —어그로 끌며-- 내동댕이쳤다. 또한 감옥에서 탈옥할 수 있었는데도 이를 거부했다. 법이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적용받고, 불리할 땐 피한다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던 논리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기에, 자신의 논리를 스스로도 실천한다는 일관성을 위해서 탈옥하지 않았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독배를 든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사실 소크라테스는 《대화편》에서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없다. 사실 이 말은 고대 로마의 법률 격언 “두라 렉스, 세드 렉스(dura lex, sed lex, 법이 지독해도, 그래도 법이다)”를 번역한 말이다. 로마의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가 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역시 자기 책에 저 격언을 인용했을 뿐이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한 말은 '악법도 법이다'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크리톤》에서 친구 크리톤이 탈옥을 권유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법에 의한 판결을 (비록 그 판결이 부당해 보이더라도) 개개인의 판단으로 부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반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게. 가령 이곳에서 도망할 작정으로 있는 우리한테로, 이 짓을 어떻게든 일컫건 간에, 법률과 시민 공동체가 다가와서는 막아서고서 우리에게 묻는다고 말일세. “소크라테스여, 말해다오. 그대는 무엇을 하려고 하고 있나? 그대는 그대가 하려는 이 일로써 우리 법률과 온 나라를, 그대와 관련되는 한, 망쳐놓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겠나? 혹시 그대가 생각하기엔 이런 나라가, 즉 나라에서 일단 내려진 판결들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개인들에 의해 무효화되고 손상되었는데도, 그런 나라가 전복되지 않고서 여전히 존속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크리톤, 우리는 이 물음들이나 또는 이와 같은 부류의 다른 물음에 대해서 뭐라 대답할 것인가?(50a~b)

이에 대해서, 그가 계약론적 사고를 가졌다는 해석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에게 한 말을 보면, 아테네와 아테네의 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다른 폴리스로 떠날 자유가 있었는데도 평생 아테네를 떠나지 않고, 아테네가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면, 이는 아테네의 법률을 지키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탈옥을 한다면, 그 계약을 어기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외국으로 피하길 원했다면, 애초에 재판정에서 영빈관에서 밥 사라고 어그로 끌지 않고 순순히 추방형을 제안했다면 충분히 받아들여졌을 텐데, 이제 와서 판결에 불복해 해외로 도피하겠다는 건 모순이라는 것도 소크라테스 스스로 지적한다. 이 계약론적 사고에 대해서 부가적인 설명을 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강하게 신봉하는데, 결국 이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압축적으로 보면,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택한 이유는 그 자신의 철학 때문인데, 그는 철학이 유일한 인생의 이유라고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Unexamined life for a man is not worth living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소크라테스는 인생의 이유는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행하기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는 신과의 계약이며, 영혼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니,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포기하고 도피를 하면 아테네와의 계약은 지키더라도, 신과의 계약을 어기는 행위가 되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으리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의 행동에 대한 설명으로, 처음부터 국가의 안정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켰다는 설명이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배 및 이후 벌어진 피바람의 원인에 대한 청산 의도를 갖고 추진된 재판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고, 제자들이 저지른 막장행위로 인해 벌어진 아테네의 혼란과 몰락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할 입장으로서 재판에 순응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정황을 통한 추측일 뿐, 소크라테스는 그런 의미를 암시하는 말조차 한 적이 없다.

하지만 단순히 배신자, 폭군의 스승이라는 것만으로 아테네인들이 소크라테스를 미워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소크라테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위대한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이라는 풍자극에서, 소크라테스를 교묘한 궤변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원수지간으로 만든 궤변론자로 묘사하고 있다. 결국 소크라테스도 그가 조롱했던 소피스트들과 별 다를 게 없다는 것. 모든 권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가 설파하는 '보편적 진리'가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거대한 권위로 변질할 것을 우려했고,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매도한 것이다.

1.4 평가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책을 쓴 적도 없고, 자신만의 사상을 전개한 적도 없다. 중앙대 심리학과 이장주 교수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책이 기억력과 사고력을 감소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에 책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27]이런 사고방식은 고대 세계에서는 의외로 그리 드물지 않았다. 어떤 의미로는 노장(老壯)사상과도 통하는 데가 있다.

참고로, 그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플라톤에 의해 날조된 인물로 의심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만으로 실존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뿐만이 아닌, 다른 제자들이나 당대의 다른 소피스트들의 글에서도 볼 수 있었다. 다만, 다른 문헌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특히 제자인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언행은 플라톤의 것과 상당히 차이가 있다. 플라톤의 후기 작품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이름만 소크라테스일 뿐, 플라톤의 고유한 사상을 소크라테스라는 등장인물이 말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철학적 업적 자체는 적다고 생각하는 이가 더러 있는데, 이는 상당히 잘못된 생각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통해 비로소 대상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직접적으로 계승되어, 더 나아가서는 2,600년 서양 철학사를 꿰뚫는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형상철학으로 이어지기 때문. 때문에 철학적 업적 또한 결코 적지 않다.

따라서 비록 플라톤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철학적 업적과 영향력은 상당한 편. 그리고 더 나아가 인지도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최고[28]를 달리는데, 이에는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삶의 모습과 진리를 대하는 참된 자세, 그리고 죽음의 상징성[29]이 매우 크게 작용했기 때문인 듯. 고로 철학적 업적에 있어선 플라톤, 칸트 등이 많이 거론되나,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한, 가장 모범이 되는 철학자론 소크라테스가 많이 꼽히는 편이다.

또한, 사상 최강의 토론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사람이기도 하나, 그 기록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저작에서 비롯된다. 플라톤의 저작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를 포함한 14:1의 토론에서도 무쌍을 펼치나 플라톤의 저작에 대한 정의는 대화편이고, 이건 철학과 문학의 중간 형태라고 보면 된다. 초기 《대화편》이 내용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잘 표현해주었을 수도 있으나, 이 안의 묘사는 어느 정도 문학으로 파악해야지 곧이곧대로 역사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물론 이건 당대 사람들이 읽으라고 쓴 글이며, 토론의 무간지옥인 고대 아테네 전성기에서 아가리 파이터로 유명했던 소크라테스가 토론에 대단히 뛰어났다는 것 정도는 사실일 것이나 그의 전적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다 하고 표현하는 것은 과장에 속한다.

그리고 사실 멍청한 척하면서 산파술을 펼치는 모습은 주로 플라톤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고, 크세노폰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는 그냥 나는 내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무지를 강조하기보다는, 박식하고 박력 있는 사나이의 모습이다. 뭐가 진실인가는 요즘도 학자들의 연구주제이긴 하다.(…)

1.5 제자들

2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로 2011년 12월 사망했다. 소크라테스(축구인) 참조.

  1. 소크라테스가 말 한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소크라테스 이전에 이오니아 학파의 탈레스가 한 것이 가장 유력하다.
  2. 국내 한정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만, 애초에 4대 성인(聖人)이란 말 자체가 공신력이 없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3. 이로 인해 발생한 게 바로 '소크라테스 문제'. 누가 남긴 어떤 기록을 얼마나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소크라테스를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건너건너 들은 정도인 아주 약간의 이야기들도 남아 있긴 하다.
  4. 실제로 고발되어 잡혀온 창녀가 예쁘다는 이유로 무죄방면되기도 했고,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에는 질 게 뻔한 전투에 참여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회의에서 퇴각해야 하는 이유를 조리 있게 설명했지만, 못생겼다는 이유로 그의 주장이 묵살당한 병사의 이야기도 나온다. 고대부터 이어져온 외모지상주의
  5. 하지만 크세노폰의 기록에 따르면, '용맹하고 남자의 풍모가 넘치는 미남'이라고 한다. 다만 크세노폰은 뼛속까지 소크라테스 빠돌이였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라는 점을 참고하자.
  6. 플라톤은 사모라고 할 수 있는 크산티페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거의 없었다. 부정적인 묘사가 없다기보다도 철학적인 면을 조명한 바가 크기 때문에 크산티페가 등장하는 대목이 얼마 없다. 개중에 부정적인 묘사라고 하면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크산티페가 울부짖었다는 정도다. 크산티페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대개가 다 크세노폰으로부터 비롯한다.남편 제자들한테 차별대우를 했었나
  7. 어쨌든 행복하거나 똑똑해진다는 얘기니 결혼이 나쁘단 얘기는 안 했다.
  8. 아테네군의 운 좋은 일부 패잔병들끼리 뭉쳐 소규모 집단이나마 전열을 다시 갖췄다. 추격하던 기병들은 소규모이지만 저항할 태세를 갖춘 중보병 무리들을 괜히 상대하다 다칠까봐 회피하고, 지천에 널린 손쉬운 먹잇감인 비무장 도망병들에게로 말머리를 돌렸다.
  9. 실제로 전투에서는 패닉 상태에 빠져서 무질서하게 패주하면, 궤멸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패배하더라도 침착하게 전열을 어느 정도 갖춘 상태에서 후퇴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특히 그리스식 보병 방진은 전열이 무너지거나 흐트러지면 답이 없지만, 뭉쳐있으면 상당히 강력해서, 퇴각 상황에서도 전열을 유지하고 있으면 추격하는 기병이라도 함부로 덤비기가 상당히 부담스럽다.
  10. 고대와 중세에서, 고급장비는 병사나 기사 개인이 장만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재력이 빵빵한 주군에게 고용된 기사라면 예외가 될 수도 있겠지만. 중장보병의 군장(軍裝)은, 오늘날의 물가로 계산해서 어지간한 고급 중형차 한 대 값이라고 보면 되고, 기병(騎兵)용 말과 고급 장비는, 현재물가로 환산하면 웬만한 집 한 채 값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아테네도 처음엔 민주정이 귀족과 자산가들 위주로 이루어졌다.
  11. 광장에 이놈이 뜨면 다들 고개를 돌리고 모른척 했다고 전해진다.
  12. 물론 노예와 외국인의 노동이 뒷받침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13. '조산사'라는 뜻의 산파(産婆)와 같다(!). 어머니가 산파였기 때문에 진리의 분만(?)을 도와준다고 "산파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는 석공인데, 이것도 진리를 점차 찾아간다는 것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도. 그런데 이 방법을 개발한 사람이 대표적인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스 철학자 전기작가였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Diogenes Laërtius, 생몰년일은 불명. 그러나 남긴 저작을 분석으로 3세기 사람으로 추측)가 그런 기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설령 소피스트가 이런 방법을 개발했다고 해도, 소크라테스가 산파술을 활용한 방향은, 인습과 개념의 구분을 하지 않던 소피스트들과는 정반대로, 인습에서 벗어난 개념을 정립하기 위함이므로, 소크라테스의 위상에는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14. 소크라테스의 친구였던 카에레폰(Chaerephon)이 질문했다는 설이 있다.
  15. 대표적으로 크로이소스의 신탁이 있다. 리디아의 왕이었던 크로이소스가 무녀에게, "우리 전쟁하면 승리함?"이라고 물었더니 무녀 曰, "크로이소스가 전쟁을 한다면, 그는 대제국을 멸망시키리라" 라는 답변이 튀어나와서, 이를 믿고 키루스의 페르시아와 전쟁했더니 되레 패배해 리디아가 멸망했다. 신탁에서 말한 멸망한다는 대제국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리디아였던 것.
  16. 다른 설도 있는데, 당시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의 신탁은 두 가지 방법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하나는 많은 돈을 받고 정식으로 써주는 거창한 신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적은 돈을 받고 예/아니오만 알려주는 약식 신탁이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요청한 소크라테스의 친구는 이 약식 신탁을 받아서 답이 딱 떨어졌다고도 한다.
  17. 원래는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져 있는 말이라고 한다. Gnothi Seauton. 영어로는 Know thyself/yourself. 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18. 한국은 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시하여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철학적으로도 타당하다. 하지만 철학에 대한 기반이 탄탄한 서구의 기준으로 봤을 때 헬레니즘 철학이나 중세 철학에 있어 이러한 중요한 철학자들의 누락은 아쉬운 바가 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해 자세히 알고자 한다면 역시 유학을 가야 한다.
  19. 이는 서기 2세기 로마의 법률가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가 책에 로마 법률 격언을 인용하여 저술한 말로 전해지며, 1930년대 경성제국대학 법과 교수 오다카 도모오(尾高朝雄)가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소개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한다. 군부독재시절에도 국민들에게 재갈을 물리기 위한 명언(?)으로 요긴하게 써먹었다고. 이 때문에 당시 민주투사들 사이에선 소크라테스가 인기가 없었다는 우스갯소리도.(…) 헌법재판소는 이미 2005년 11월에, '악법도 법이다'를 소크라테스의 어록으로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부적격하다는 의견을 냈다.
  20. 상술했듯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많이 알려진 말도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다.
  21. 이 크리티아스는 플라톤의 친척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대화형식으로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크리티아스》라는 저술을 남겼으며, 그 유명한 전설 속 대륙 아틀란티스도 바로 이 《크리티아스》에 등장한다.
  22. 플라톤은 신들에게 항상 감사를 드리던 네 가지 중 하나로 소크라테스 시대에 태어난 것을 꼽을 정도로 그를 존경했다. 참고로 나머지 셋은 동물이 아닌 사람, 여자가 아닌 남자, 그리고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그리고 그의 수제자이자 반박론자이기도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인이라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원장 자리를 승계하지 못하고, 아테네를 떠나 고국인 마케도니아로 돌아간다.
  23. 물론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건 아테네인들도 알고 있었으므로, 본질은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의 사상적 스승으로서 아테네를 파멸로 몰아넣은 죄였고, 소크라테스 자신도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사형을 받아들인 것이다.
  24. 소크라테스는 정의에 대해 아테네 사람들이 숙고하도록 만드는 철학적 행위야말로 어떤 행위보다도 숭고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고로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사상과 철학을 가르친 공로가 있는 자신은 국가에 엄청난 봉사를 한 것이므로, '영빈관에서 나한테 밥이라도 한 끼 사야 되는 거 아니냐' 라는 식으로 어그로를 끌었던 것. 참고로 아테네 시민이 영빈관에서 대접받으려면, 개선장군이나 올림픽 경기 우승자급 위업을 이룩해야 했다.
  25. 이런 시각도 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한 법정에서도, (듣는 내가) 기분 나쁘다, 좋다에 따라 판단했다는 것.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이 자신에게 사형판결을 내리게 만듦으로써, 그들이 알고 있고 행하고 있다고 생각한 정의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자신의 죽음으로써 증명한 셈이라는 것이다. 물론 배심원들을 저주했다는 말도 있다.(…)
  26. 플라톤 본인은 당시 몸이 아팠다고 말한다. 다만 당시에도 그 이야기를 믿어준 사람은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27. 비슷한 일례로는 인간의 조건 시즌1의 휴대폰이 없다면에피소드에서 개그맨 김준현한 말인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라는 말이있다. 즉, 기록에 의존해서 기억력과 사고력이 단축되고 감소되는것을 지적한것이다.
  28. 당장 한국만 해도, 플라톤을 모르는 이는 널리고 널렸지만, 소크라테스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29. 자신이 믿는 진리와 정의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모습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 비견될 만큼 상당히 충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