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찬

荀粲
(209 ~ 238)

삼국시대의 인물. 자는 봉천(奉倩). 순욱의 아들.

영천 영음 사람으로 형들은 모두 유학을 했지만 그는 도교를 좋아했으며, 8촌형인 순유가 신중하고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자 도가의 사상에 의거해 아버지 순욱보다 순유가 더 훌륭하다고 해서 형들이 화를 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순찬은 현원함을 논하는 것에 능해 늘 생각하길 자공이 선생님(공자)께서 성과 천도에 대해서 말했다고 하지만 직접 듣지 못했으므로 그렇다면 육경[1]에 남아있는 말이라도 성인의 찌꺼기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그의 형인 순오가 역경에 따르면 성인은 형상을 세워 그 뜻을 다 드러내고 말씀을 엮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드러냈다고 반박했다.

그러자 순찬이 대개 이치 중에 심오한 것은 만물의 모양을 거론해 설명하지 못하며, 형상을 세워 그 뜻을 다 드러냈다고 했지만 그것은 그 뜻 이외의 것은 통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씀을 엮어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드러냈다고 했는데, 그것은 모든 표상을 다 포함한 것이 아니므로 거기에 내포된 모든 개념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당시에 담론에 뛰어난 자들도 그를 꺾을 수 없었으며, 태화 연간[2]부하와 담론을 즐기면서 순찬은 심오하고 현묘한 이론을 펼치는 것을 좋아했다. 부하와 학문적 경향은 달랐지만 갑자기 만나 토론을 펼치면서 서로를 공격해 의견의 일치를 보기가 어려웠으며, 배휘와는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어 두 집안을 오고가는 심부름꾼이 끊이지 않아 마침내 부하와도 친하게 지냈다.

하후현과도 가깝게 지내면서 하후현이 부하와 자신에게 세속적인 사람들이라 공명을 날리는 것에는 자신보다 낫지만 지식은 못할 것이라 하자 부하와 함께 반박했으며, 그는 여성들을 부인의 품덕은 일컫기에 부족해 마땅히 미색을 위주로 해야 된다면서 외모를 중요시했다. 조홍의 딸이 미인이라는 것을 알고 아내로 삼아 그녀만을 사랑했다. 그러나 겨울에 병이 나서 심한 열에 시달리자 마당에 나가 자신의 몸을 차게 해서 안아주면서 열을 식히려고 했지만 끝내 부인이 요절하자 상심에 빠졌으며, 친구가 조문하자 순찬은 사리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상했다.

조문을 온 친구가 "너는 여성은 외형이라고 말했지 않은가. 미인이라면 또 발견될 것인데, 어째서 몹시 슬퍼하는 것인가?"라고 묻자 순찬은 "아름다운 사람은 다시 만나기 어렵다면서 세상을 떠난 사람을 생각하면 경국지색을 다시 만날 수가 없는데, 쉽게 만난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라고 대답했다. 순찬은 애석해하다가 29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특이한 사람이라 보통 사람들과 교제할 수 없었지만 그가 교제한 사람들은 모두 당대의 준걸로 그의 장례식에 간 10여 명은 모두 동시대에 명성을 날리던 사람으로 그들이 곡을 하면서 슬퍼하자 길을 가던 사람들도 모두 슬퍼했다.

순찬이 생전에 부인의 덕은 내세울 것이 없지만 용모만이 제일이라고 했는데, 배해는 이를 듣고 이것은 스스로의 견해일 뿐 덕담이 아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이 말에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된다고 했다.

창천항로에서는 순의를 보고 경서에 집착하면 생각이 쭈그들 것이라 했다가 순의가 논어의 구절을 언급하자 성인은 세상을 삐딱하게 볼 뿐 중요한 인간의 본성이나 하늘의 법칙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는다고 했다. 육경에 대해서는 공자가 울궈먹다 만 찌꺼기라고 하면서 순의를 고지식하다고 여기고 있으며, 순유에게서 화타의 의술을 보고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화타의 의술에 대한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삼국전투기에서도 전투외편 4-3 마지막 부분에서 유엽의 아들 유도와 함께 짧게나마 언급된다.

  1. 시경, 서경, 예기, 악기, 역경, 춘추 등 6가지의 경서를 뜻한다.
  2. 227년 ~ 233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