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철

  • N.EX.T의 리드보컬이자 영원한 마왕을 찾아오셨다면 신해철 항목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헷갈리면 동명이인도 아닌데 이런 문구가 있나
한국 3대 기타리스트
김태원신대철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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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신대철(申大澈)
출생1967년 2월 16일, 서울특별시
본관평산 신씨[1]
소속에코브리드 대표이사
서울종합예술전문학교 (학부장)
한국가온예술종합학교 (학부장)
소속그룹시나위(리더, 기타리스트)
가족3남 중 장남
학력서울고등학교 졸업
서울예술대학교 영화학과 졸업

1 소개

시나위(밴드)기타리스트. 대한민국 3대 기타리스트.[2] 한국 락의 대부 신중현의 아들. 신중현이 대마초 파동 및 금지곡으로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 할 때 신대철이 기타를 배웠다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에서 5학년으로 넘어가는 겨울방학 때, 항상 바빠서 얼굴보기 힘들었던 아버지가 어느날 보니 집에 계속 계시길래. "아버지 기타좀 가르쳐주세요" 라고 부탁 드리고 3개월간 매일 매일 개인 레슨으로 배웠다고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다. 보통 기타학원에서 1주일에 하루정도 몇 시간 기타를 가르쳐주는 식으로 몇 년간 배워야 하는것을 생각하면 3개월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기타의 신에게 3개월간, 그것도 매일이다! 이후 고등학교에 들어갔을때는 이미 국내에 적수가 없었다!. 당연히 뛰어난 기타 실력으로도 유명했해졌으며 시나위(밴드)의 리더였다. 고 2때인 83년에 시나위(밴드) 결성, 86년에 데뷔했지만 그 전부터 인지도는 상당했었다.[3] 이후의 행적은 시나위(밴드) 참조.

2 가족

아버지 신중현, 동생 신윤철, 신석철. 하지만 신해철이 그의 동생이라고 생각하면 심히 곤란하다.[4][5] 참고로 동생 신윤철기타리스트보컬리스트, 막내 신석철도 탈 장르 드러머로 모두 음악인이다. 그리고 가족이 모두 엄청나게 과묵하다. 이 중 신대철이 그나마도 방송을 자주 하기에 가장 수다쟁이(...)에 말이 빠른편. 형제가 모여 인터뷰를 할 때 보면 신대철 혼자 아웃사이더급 속사포 랩을 하고 있는듯이 느껴진다. 3대 기타리스트라고 불리는 사람중에 김도균 김태원과 다르게 예능활동이 별로 없는 이유이기도 한듯. 예 아니오 로만 답을 하니... 소위 음악으로 답하는 가족.

그리고 누누이 말하지만, 신해철은 신대철의 동생은 아니다. 그래도 의형제이긴 하다만...[6]

3 활동사항

3.1 음악활동

3.1.1 데뷔

1986년 시나위 1집 앨범 Heavy Metal Sinawe

3.1.2 참여

김종서, 서태지, 이승철, 박광현, 이현우, 임재범, 박상민, 손성훈, 김장훈, 이상우, 이소라, 이은미, 크라잉 넛 등 80여 명의 가수, 뮤지션 음반 작곡, 편곡, 작사, 연주 및 프로듀싱.

영화 '나에게오라', '북경반점' 등 음악감독.
EBS 다큐멘터리 '시베리아 호랑이', 역사 복원 시리즈 '두만강에서 흑룡강까지' 음악감독.

시나위(밴드) 전집, 신대철 독집앨범 코로나(Corona), 신대철과 자유 1집, D.O.A
도시락특공대 2집 참여 등

3.1.3 교직

2010.12~ 서울종합예술전문학교 실용음악예술학부 학부장
2013.12~ 한국가온예술종합학교 실용음악예술학부 학부장

3.1.4 방송활동

KBS 밴드 서바이벌 TOP밴드에 코치진으로 출연. 시즌3에도 코치로 출연한다.
2012년 9월 MBC 나는 가수다 2시나위(밴드)를 재결성하여 출연.

3.1.5 수상경력

추가바람

4 이야깃거리

4.1 성격과 음악적 성향

성격은 리더십이 강하고 음악적인 고집도 좀 있는 편이라고 한다.[7] 그래서 시나위의 역대 보컬인 김종서임재범보다 동생이면서도 시나위(밴드)의 리더를 맡았고, 어느정도 불화도 있었다 카더라. 더불어 시나위에 있었던 서태지도 신대철을 많이 무서워 했다고.[8]

3대 기타리스트인 김태원과 김도균은 나름 감성적인면이 있으나 신대철은 다소 냉철한편.과거 놀러와 3대 기타리스트 특집으로 나왔을때 김태원과 서로 편지를 읽으며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을때 혼자 오글거려하며 빵터지기도(...)

블루스와 메탈을 기반으로 한 1980년대 뮤지션임에도 의외로 음악적 성향이 진보적인데, 나는 가수다 2와 새 앨범 Mirrorview에서 보여준 일렉트로닉 사운드나 '슬픔의 이유'등에서 사용된 우쿨렐레 등의 악기를 새로운 걸 받아들이기 힘든 나이 임에도 스스로 배워서 수준급의 연주를 보여주었다! 물론 기타를 오래 쳐서 운지법 등이 익숙한 건 감안해야겠지만 말이다.

최근에는 국산 하이엔드 기타를 메인 기타로 사용 중이다. 역시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국산이여도 하이엔드면 좋은붓이 아닌...

그리고 역시 한국의 명 기타리스트들인 김도균, 김목경과 함께 펜더에서 커스텀 기타를 헌정 받았다!# 아버지 신중현에 이어 부자가 펜더 사에게 기타를 헌정받은 셈.

신대철의 음악중에 가장 잘 알려진것은 크게 라디오를 켜고[9]인 듯 하지만, 실상은 91년도에 했던 밴드 자유에서 작사 작곡 그리고 직접 부르기까지한 멀어져간 사람아이다. 물론 박상민의 리메이크로 잘 알려지게 된 것이지만. 신대철을 아는 사람이라면 몰래 아는 명곡.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박상민 판보다 멋진 기타 연주와, 기교없이 수수하지만 진솔한 목소리에 팬들이 좋아한다.

4.2 발언

신중현과 더불어 말이 하도 없어, 시나위 데뷔 후 부자 락커로 인터뷰를 진행했을 때 거의 "예, 아니오"로만 대답을 하여 인터뷰 진행이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사실 말은 별로 없는 편이라고. 사실 말수가 적은 건 동생들도 마찬가지라서 이 네 부자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 입장에선 매우 힘들다고 한다(...). 실제로는 보는 사람도 힘들다.

그나마 가족들 중에 신대철이 제일 말수도 많고 말도 잘하는 편이다(!). 아버지 다음으로 대중에게 많이 노출됐을 뿐만 아니라 2010년대 들어 여기저기 방송출연도 많아졌기 때문인지 자기 소신을 조리있게 표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적응이 됐는지 할 말은 다 하는 달변가가 됐을 정도.

기타 친다 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명한 명언인 "기타가 펜더면 뭐하나 손가락이 펜더여야지"라는 지름신 물리치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의 나름 명언으로 TOP밴드 시즌1 코치 결정전에서 남긴 "후회하지 말고 저한테 오시면 됩니다"가 있다. 코치 결정전에서 게이트 플라워즈와 리카밴드 둘을 선택한 상황에서 후반부에 '갈 길 잃은 밴드'들을 포섭하기 위한 말이었다.

지인의 꼬임에 힘입어 페이스북에 가입했다!! 매일 자신의 장비 사진을 올리거나 개인적인 감상 등을 적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현재 팔로워가 10,000명이 넘은 상황. 조용필의 빼앗긴 저작권 이야기나 이철호의 사랑과 평화 상표권 등록 문제같은 음악계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거나 송포유를 까는 등 페이스북을 시사적으로도 잘 쓰고 있다.

게다가 지적인 수준이 상당하다. 한번 읽어보자.#[10] 본인 말처럼 지속적으로 알고자 노력하는 듯.

그런데 가끔 '해장국에 들깨를 넣으면 술이 들(덜)깨' 같은(...) 개드립도 치거나 '넘을 수 없는 벽이라면 부숴버리겠다!' 같은 말(...)을 하는 등[11] 어째 개그 캐릭터가 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그래도 대철 옹이 유들유들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건 엄청난 반전이라는 거다.

4.3 신해철의 돌연사와 신대철의 대응

신해철의 돌연사 이후 신대철이 "복수해줄게"라는 글을 페북에 올렸고, 이것이 촉매가 되어 의료사고에 대한 이야기가 커졌다.[12] 이후 신해철이 수술을 받은 병원과 병원장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였고, 이후 이미 화장을 결정했던 유족을 설득하여 검시를 받게 하는 등의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오직 신대철만의 생각이나 행동은 아니었겠지만[13][14] 그 나름의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는 셈. 실제로 이후 관련 시사 프로에서 모습을 비추며 유족의 입장이나 당시의 상황을 전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본인의 페이스북에 신해철이 생전에 선물했던 기타를 공개하여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다만 그를 감안해도 결국 인터넷 여론이라는 한계 속에 "복수해줄게"라는 표현이 너무 극단적이고 과하다는 인상도 주었다. 의료과실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옳은' 일이고,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엄밀히 말해 복수와 다른 개념이다. 즉, 페북의 뜻을 우호적으로 해석해도 '복수'라는 표현은 '틀렸다'. SNS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형식과 내용 그리고 행동의 합치인데, 이에서 부족함을 보인 것.

신해철의 사망이 비극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가해자로 알려져있는 의사가 의도를 가지고 저지른 범죄가 아닌이상(살인이 아니라 잘 해야 업무상 과실치사 정도일 테니) "복수"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물론 해당 의사가 이름만 바꿔 재개업을 하는 등 의료인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쌩까고 있는 상황과 함께 저 따위로 의료 행위를 하는 의사조차도 의사면허를 박탈당하지 않는구나 싶기는 하지만 이는 신해철의 사망에 대한 복수와는 거리가 있다. 신대철은 해당 의사의 처벌여부와는 상관없이 동태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사회 밑바닥으로 숨어서 다시 몰래 활동하는 것을 막을 것이라고 한다.

5 바른음원협동조합

페이스북에서 한창 활동하는 중 조용필, 사랑과 평화 등 선배 뮤지션들의 저작권 문제를 제기한 이후, 이에 대한 연속선상으로 현재의 음원 유통 방식에 대한 쓴소리를 남겼다.# 그리고 말 한마디에 그치지 않고 '바른음원유통협동조합'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음원 유통조합을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관심있는 사람은 바른음원유통조합 추진위원회 페이스북을 참고하자.

2014년 11월 현재 홈페이지가 열렸다. 조합원 가입신청을 받고있으며 출자금 5만원을 납부하면 정식 조합원이 된다. 창립하면서 '바른음원유통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이 길었는지 '바른음원협동조합'으로 다소 짧아졌다. 그렇지만 유통을 안 하는 것은 아닌듯, 홈페이지에 따르면 음원 MP3 서비스 사업과 음악의 유통사업, 그리고 공연 사업을 '다른 회사보다 이윤을 적게 남기면서'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정말 돈 없는 인디 음악인들에겐 단비 같은 말이다. 2015년 10월 현재 유통사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1. 평산 신씨 34세손 '澈'자 항렬이다.
  2. 라고는 하지만 과거엔 앞에 대한민국이라는 단서는 안붙었다. 최근들어 어느정도는 과장된 듯한 면이 있다. 80년대 당시 헤비메탈 씬에서의 3대 기타리스트라고 하는 편이 좀 더 어울린다.
  3. 기타에 손을 대지 않고 소리를 낼 수 있다는 황당한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4. 대신 이름이 비슷해서 서로 의형제를 맺으면서 지낸다고 한다.
  5. 사실 이 둘은 평산 신씨 34세손 '澈'자 항렬을 쓰고 있어서 과거처럼 족보와 문중을 엄격하게 따진다면 보면 종형제뻘이라 할 수도 있겠다.
  6.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한 대마초 표적수사가 시작되자, 부자가 모두 감방에 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아버지 신중현의 권유로 몇 달 간 지방 여관방을 전전하다가 집에 돌아가보니. 신해철이 신중현에게 '아버님' 이라고 부르고 있었다고.........
  7. 까딱 흥분하면 꼰대로 진화하기도 하는데 스스로도 젊을 때 그런 기질이 매우 심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나이 먹으면서 조금씩 유순해져서 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고. 다 죽은 건 아니라는 게 함정이지만
  8. 서태지시나위(밴드)에서 탈퇴할 때 정식으로 선언하고 탈퇴한 게 아니라, 담배 심부름하러 나갔다가 그대로 돌아가지 않고서 탈퇴해 버렸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9. 밴드좀 한다 하면 참으로 많이들 부르는 명곡이다. 임재범과 공동작곡
  10. 일반인으로는 남다르게 라플라스의 악마와 불확정성 정리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고 썼다. 교양을 지향해도 나이 먹을수록 과학에 대한 관심은 어려워서 기피하는 경향이 있음에도 훌륭한 수준이다. 몇 개는 틀렸다
  11. 근데 저 말은 나중에 신곡 가사가 된다.
  12. 신해철의 지인이자 그 자신도 저명성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정보의 소스가 되어 여론을 형성한 것이다. 만약 의료사고에 대한 논의가 내부적으로만 오갔다면 의료사고에 대해 접근성과 전문성이 떨어지는 기자들을 쉽게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 자신이 쓴 기사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S병원은 의료사고 여론이 일자 고인이 관리를 잘못했을 거라는 책임전가와 함께 법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 경고했었다. 그러던 차에 신대철의 페북글로 자신을 향해 주의를 끌게 하며 의료사고 자체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킨 것이다. 거창해보이지 않을 지 몰라도 명예훼손 등의 주체가 되어 총대를 멘 것.
  13. 실제로 검시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유족을 설득한 것은 이승철남궁연 등으로 알려져 있다.
  14. 더 정확히는 언론인 이상호 기자가 소속사 대표를 설득하여 음악인들이 동의하고 다시 유가족을 설득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