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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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上士/申常鉉

1932~

명동황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조폭으로 본명은 신상현.

1952년 대구 헌병대 사령부에서 상사로 진급하여 일하다가 1953년에 전역하였으며, 이후 평양 출신의 씨름꾼인 최시헌을 꺾고 정팔의 눈에 들어서 명동파의 행동대장이 되었다. 그동안 명동황제 이화룡의 직계로 알려져왔으나,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형님으로 모시긴 했지만 느슨한 연합관계였다고 한다. 사실상 홍영철처럼 중립으로 지낸 셈이다.

명동파와 동대문 사단 사이에 전쟁이 터지자 일선에서 싸우다가 이후 1958년에 충정로 도끼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965년에 명동으로 와서 신상사파를 만들어 활동하였으며, 이 시기 사실상 서울 주먹계를 일통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정재의 동대문 사단은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대부분의 세력이 와해되어 정종원과 유지광의 세력으로 분열되버렸고 충정로 도끼사건으로 구속되었던 명동파가 풀려나와 전화위복으로 사실상 무주공산인 서울을 접수했다.

그러다가 무교동과 강남을 거점으로 성장하는 지방 세력과 충돌을 빚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1974년 명동 사보이 호텔 사건으로 조창조,오종철,조양은등에게 기습을 당했다. 부하들이 피해를 입긴 했으나 당시 신상사는 자리에 없어 화를 면했다. 그리고나서 맹렬한 보복과 반격으로 오종철을 김태촌을 시켜 칼로 난자해 은퇴시키고[1] 결국엔 조창조의 항복을 받아내기도 하였다.최근엔 중앙일보와 그때 당시의 일을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와전되어 조양은에게 칼부림을 당해 신상사가 패배하거나 은퇴했다 라는 말이 꾸준히 잘못 알려저왔다.

재일 야쿠자인 서순종[2]과 권투사업 및 여러가지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1978년에 강남센터를 하고 1980년 말에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갔으나 손을 써서 몇개월만에 풀려나오기도 했다. 이후 이태원 8군 사령부 근처의 크라운 호텔을 활동 무대로 삼다가 1990년에 범죄와의 전쟁의 선포로 손을 씻었다고 하는데 다른 조직들이 큰 피해를 본 것과는 달리 신상사파는 정권 인맥을 잘 이용해 별 피해가 없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이후 판매점,자동차 대리업 등의 사업을 하다가 수도권 일대에서 투견장을 만들어서 도박판을 열고 금품을 갈취한 혐의로 경기지방경찰청에 불구속 입건 되었으며, 폭력교사, 불법도박 등의 혐의를 받았다. 왕년의 주먹 ‘신상사’의 말로, 그러나 이 사건은 관련자들이 신상사는 관련이 없다 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무혐의 처리되어버렸다. 과연 관련이 없었는지는...

2013년경 월간중앙과 인터뷰를 하고 회고록을 출판하기도 하였다.주먹으로 꽃을 꺾으랴

대한민국 조직폭력배 세계에서 지역을 막론하고 전국구의 대우를 받는다. 야인시대에서는 오상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1. 조창조는 이때 오종철과 조직내부의 알력다툼 때문에 오종철을 보호하지 못했다고 회고 했다.
  2. 일본 3대 야쿠자인 이나가와카이의 간부로 니시야마 미노루란 이름으로 알려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