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일

이 문서는 강신성일로도 들어올 수 있다.
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전 · 현직 정치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치적 · 이념적으로 민감한 내용을 포함할 수 있어 문서를 열람할 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한 문서의 악의적 서술 · 편집은 민사 · 형사 상 소송이 발생할 여지가 있습니다.


21595_42806_502.jpg

1 기본 정보

본명강신영[1]
출생1937년 5월 8일, 대구광역시
신체174cm, 68kg
가족배우자 엄앵란, 슬하 1남 2녀
종교불교

2 소개

60~70년대 충무로의 아이콘.
안성기, 한석규와 함께 한국영화계 원탑을 경험해 본 배우.

한국의 알랭 들롱[2].
대한민국연예인. 한 시대를 풍미한 영화배우로 활동했으며 1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37년 5월 8일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 졸업. 키는 20대 당시 기준으로 174cm이었다고 한다.[3] 본명강신영이었으나, 데뷔할 때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신성일'이라는 예명을 썼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면서 본명 자체를 강신성일로 고쳤다. 선거에서 본명을 써야 하는데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본명 강신영으로 나섰다가 유권자들이 신성일인줄 몰라서 표 손해를 많이 봤다는 게 개명의 동기.

2009년부터 계명대학교 연극예술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다.

아들 강석현이 한 때 배우로 활동하였다.
새누리당 국회의원 강석호의 작은 아버지이다. 그리고 클래지콰이 멤버 알렉스의 고모부가 강석호라서 알렉스와 사돈지간이다.

3 연예인 활동


1960 - 70년대를 대표하는 미남 배우로 한국영화의 상징 그 자체였다. 데뷔초, 중년신사같은 분위기였던 당시의 다른 스타들과는 다르게 시원시원한 외모와 긴 기럭지, 강렬한 눈빛으로 대표되는 반항아 이미지에서 나오는 젊은 청년 이미지로 독보적인 스타가 되었다.[4]당시는 하루에도 영화를 몇편씩 겹치기로 찍던 시절이라 그가 도대체 몇 편의 영화에 나왔는지 정확하게 모를 정도였다. 유명세나 인지도 출연작으로 본다면 21세기 기준으로도 한국배우 중 TOP에 들 정도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출연료도 단연 탑급으로 당시 배우 출연료 1위를 차지 했으며 2위와는 무려 7배나 차이가 날 정도였다. 다만 연기력으로 본다면 평론가들도 썩 좋은 점수를 주지 못한다. 비교적 최근에 개봉한 <야관문: 욕망의 꽃>을 본 관객들이 '이런 전설급 원로배우의 연기가 이다지도 발연기였다니'라고 한결같이 혹평한 데서 알 수 있듯, 발성도, 억양도 좋은 편이 아니다. 후시녹음의 최대 수혜자.[5]

사투리가 무척 심해서, 대부분 성우 더빙으로 처리했다. 신성일의 목소리 전담은 1960년대에는 성우 이창환이 맡았다가, 1970~80년대에는 성우 이강식이 맡았다.[6] 참고로 이창환은 원래 라디오 드라마 등에서 인기를 끌던 성우로, 신성일 성우 전담이 되고부턴 신성일이 엄청난 다작을 하다보니 자연히 이 분도 엄청나게 바빴다고 한다. 전성기 이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드물게 신성일의 본 목소리로 나온건 코리언 커넥션의 형사와 증발의 중정부장, 레테의 연가, 길소뜸, 달빛 사냥꾼, 야관문: 욕망의 꽃 정도.

2012년 3월 10일 세바퀴에 출연했다! 예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참으로 생소한 광경. 종편인 TV조선토크쇼 노코멘트란 프로에서도 나왔다.

4 정치 활동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정치에 뜻을 두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지만 유권자가 신성일인줄 몰라서 민주정의당 봉두완 후보와 민주한국당 김재영 후보에 밀려 3위 이하 득표로 낙선. 결국 1990년대에 강신성일로 개명하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16대 국회의원(대구광역시 동구)이 되었다. 하지만 국회의원 활동을 하던 중에 뇌물수수를 하였고 임기가 만료된 후 실형을 선고받았다.

5 구설수

미남으로 소문난 신성일은 맨발의 청춘에서 호흡을 맞춘 엄앵란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많은 여자와 불륜 관계를 맺었으며, 그 과거사를 자서전으로 써내기도 하였다. 2011년 발표된 이 자서전에서 자신의 엄청난 과거사를 여과없이, 그것도 상대 여성의 신상을 숨기지 않고 공개하여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사실 동시대 배우들의 회고록이 90년대 이후 발굴되면서 나름 화려했던 경력들(…)이 공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신상옥 감독의 예[7]처럼 본부인에게 잘못했다는 식의 이야기로 덮거나, 최은희의 예처럼 본인에게는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일이지만 밝히거나[8]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신성일의 경우는 그것을 아주 바보같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전에도 엄앵란은 시사 프로에 나올 때마다 "요즘 여자들은 너무 쉽게 이혼한다. 참고 살아야지. 나라면 5, 6번은 이혼을 해야 했다."는 발언을 수시로 하였는데 그게 사실이었던 것이다.... 신성일의 자서전 공개로 엄앵란은 보살의 영역에 이르렀다.[9] 그래도 현재는 완전히 별거 상태이긴 하다.

그리고 신성일은, 부부는 별개의 인격체라며 자신들처럼 사는 것이 미래 지향적인 부부의 모습이고 불륜 공개에 대해 엄앵란에게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발언을 했다.(…)#

이후 Y-STAR와의 인터뷰에서 그간의 불륜 폭로 발언이 자신의 자서전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욕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며 엄앵란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 이제 와서?!

난데없이 자택에 도둑이 들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2016년 부인 엄앵란이 건강프로그램 촬영 도중 유방암이 발견되어 수술 및 치료의 일련 과정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프로에서 아내의 입,퇴원과 뒷바라지 전부를 손수 맡으며 그 동안의 행보에 대한 논란이 어느정도 사그러진 것과 동시에 중,노년 시청자들의 애증어린 공감을 얻었다는 평을 받았다.

  1. 제 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강신성일로 개명
  2. 당시 별명. 비슷한 시기 미남 배우인 남궁원은 한국의 그레고리 펙으로 불리며 비교되었다.
  3. 당시 기준으로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이 160cm 중반대였으니, 상당히 큰 키라고 할 수 있다. 지금으로 치면 178~179cm 이상으로 쳐줄 정도는 된다. 배구, 농구 선수들 키도 180cm가 안 되던 때. 현재에도 성인 남성 평균키가 170cm 초중반대인 걸 감안할 때, 현재 기준으로도 평균 이상은 된다.
  4. 맨발의 청춘때 했던 스포츠 머리와 자켓, 청바지 차림은 당시 신성일 때문에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했었다고 한다. 스포츠 머리와 청바지 차림을 하고 신성일의 반항적인 눈빛과 힘이 들어간 멋들어진 대사를 흉내내는 청년들이 넘쳐났었다고.
  5. 그러나 이 후시녹음 시대에 그보다 더한 수혜자가 있었으니, 바로 그의 부인 엄앵란이다. 엄앵란 성대모사를 하는 연예인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목소리가 과하게 올라가는 톤. 노년에도 종종 드라마나 영화에 단역으로 나왔으나, 이내 활동을 길게 하지 않고 접었다. 젊었을때 두 사람이 주인공 했던 영화를 원래 목소리로 듣는다면 ㄷㄷ
  6. 그 후엔 이정구가 맡기도 했다.
  7. 신감독은 본부인인 최은희를 놔두고 다른 배우 오모씨와 바람을 피워 아이를 둘 낳았다. 본부인인 최은희와는 북한에 가서 재결합. 오모씨는 신감독이 미국에 있던 기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신상옥의 회고록에는 바람 피운 이야기는 없는 대신 구구절절히 본부인에 대한 사과로 가득하다.
  8. 최은희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윤간당했다는 추문에 한참 휩싸였다. 공개된 자서전에 의하면 북한군은 아니고 한국군의 높으신 분에게 성폭행 당했다고 한다.
  9. 하지만 자기 남편에게는 보살일지 몰라도 저런 식의 '내가 이렇게 당했으니까 요즘 여자들도 그래야 한다'는 식의 억지 논리는, 강자 앞에서는 아무 소리 못하면서 약자 앞에서는 자기가 당한 만큼 풀으려는 전형적인 시어머니같은 논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