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촨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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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제1급 행정구역 [행정 약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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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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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四川省
영어: Sichuan Province 시추안[2]

1 개요

쓰촨 성은 중국 중남부에 위치한 성급 행정구역이다. 사천 성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서쪽에 위치한다. 중국 내에서 쓰이는 약칭은 천(川) 혹은 옛부터 이 일대를 가리키던 명칭인 촉(蜀). 쓰촨(四川)이라는 이름은 성 내에 창강, 민강, 타강, 자링강 이 4개의 강이 흐른다고 해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 인구는 81,100,000명[3]으로 한반도 인구를 넘고, 면적은 485,000 km2로 한반도의 2배가 넘는다. 농업공업이 매우 번성한 성 중 하나이다. 중국 전토를 보았을 때 이 성은 중국의 딱 중남부에 위치해 있다.

2 역사

원래 이곳은 황허 문명의 발흥지인 황허 유역과는 진링산맥, 다바 산맥 등의 험한 산맥 지형으로 따로 떨어져 있던 곳인데다가 황허 문명을 세운 한족과는 다른 이민족들이 주 거주민이었기에 황허 문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의 거대하면서도 장강을 비롯한 4개의 강을 끼고 있는 비옥한 분지 지형으로 인해 높은 농업생산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삼성퇴 청동기 유적으로 대표되는 황허 문명과는 다른 독특한 문명이 쓰촨 분지 내에서 생겨났다.

주가 천하를 제패하고 춘추전국시대로 진행되면서 황하문명으로 대표되는 한족 문화가 주변의 이민족 영역으로 퍼져나가는 과정 속에서 쓰촨 또한 이 흐름을 피할 순 없었다. 그결과 쓰촨 문명 또한 중원의 한족 문화에 흡수되고 쓰촨 분지에도 중원 일대처럼 책봉을 받은 파, 촉 등의 소규모 제후국들이 등장했다.

비록 중원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던 이민족이 우글거리는 변방 이미지였지만 쓰촨 분지의 높은 경제력 그리고 침공하기 어려운 험난한 지형으로 이 일대의 제후국들은 평화로우면서도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자 천하 제패를 노리는 주변의 강대국들, 특히 관중의 진이 이 곳을 노리기 시작했다. 험난한 지형을 바탕으로 한 파촉 일대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정복 자체에 크나큰 애를 먹은 진이었으나 어찌어찌 파촉을 정복한 이후부터는 180도 달라져 진나라는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6국을 국력으로 압도하기 시작한 것도 파촉 일대를 정복하여 관중의 경제력에 파촉의 경제력이 합쳐진 시기였으니 말이다.

아무튼 파촉을 위시로 한 쓰촨 분지의 경제력은 관중과 더불어 진이 최초로 천하를 통일할 수 있게끔 한 원동력이 되었다. 진이 항우에 의해 멸망한 이후 파촉은 이 일대를 분봉 받은 한왕 유방의 세력권이 되었다. 이후 유방이 관중을 정복할 때 이 일대는 관중 정복을 위한 후방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동진하여 천하를 재통일하고 한을 세울 때까지 관중과 더불어

이후 전한과 후한 시대에는 이 곳에 익주자사부가 설치되었고 황건적의 난 이후 군웅할거 시대가 펼쳐지면서 익주는 유장의 세력권이 되었다가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에 따라 형주를 지배하던 유비가 유장을 축출하고 익주 일대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유비는 이 곳에 삼국지 팬들에게 익숙한 바로 그 나라, 촉한을 세운다.[4] 이곳의 성도(省都)가 바로 삼국지 팬들에게 성도(成都)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청두'. 제갈공명의 무덤인 무후사가 있으며, 그 옆에 조그만하게(…) 유비의 무덤도 만들어져 있다.

촉한이 산악인 등애와 종회의 맹활약으로 위에게 멸망하고 다시 위가 서진에게 멸망하고 서진이 천하를 재통일하나 팔왕의 난 이후 주변의 이민족들이 중원으로 밀고 들어와 각자 나라를 세우는 오호십육국 시대의 대혼란이 펼쳐진다. 익주 또한 그 영향을 피해가지 못했는데 저족의 족장 이특이 익주 일대를 점거하여 성한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하지만 얼마 못가 서진 황실이 강남으로 도망가 다시 세운 동진에 의해 멸망하고 이민족들이 날뛰던 중원 일대가 하나의 왕조로 재편되고 천하가 남북으로 갈린 남북조 시대 속에서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이 북주에게 빼앗길 때까지 이곳은 줄곧 남조의 영역에 속했다.

이후 남북조 시대가 끝나고 수, 당 대에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수 대에는 량주, 당 대에는 검남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당 대 중엽 안사의 난으로 중원이 혼란에 빠지자 당 조정이 이 곳으로 옮겨가 10년 가까이 숨어 살던 적도 있었고 당 대 말엽 황소의 난으로 수도 장안이 함락되자 또다시 당 조정이 이곳으로 옮겨간 적도 있었다.

당이 멸망한 이후 중원은 다시 오대십국 시대라는 혼란에 빠지는데 이 일대에는 십국에 속하는 전촉, 후촉이라는 지방 정권이 잠시 들어선다. 하지만 얼마 못가 더 강대한 세력에게 멸망하는 지방 정권 특성상 곧 중원 통일에 나선 조광윤의 송(북송)에게 멸망하고 송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북송 대에는 이주로, 성도부로 등의 행정 구역이 설치되어 운영되다 정강의 변 때 금이 화북 전역을 점령한 이후 강남으로 도망간 송 황실이 재건한 송(남송)을 완전히 멸망시키려 강남으로 침공할 때 이 지역도 금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하나 남송 관군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금이 철수하면서 이 지역은 송의 지배 하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몽골 제국이 중국 전역을 정복하기 위해 오고타이 칸 때 금을 멸망시키고 뭉케 칸 때 남송으로 밀고 내려올 당시 이 지역은 뭉케 칸이 직접 지휘하는 몽골군 정예부대가 침공해 왔다. 하지만 뭉케 칸의 몽골군은 이 곳의 조어성[5]에서 6개월 째 가로막혀 정복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뭉케 칸 본인도 조어성 공략 도중 병을 얻어 병사한다. 하지만 후임인 쿠빌라이 칸은 기어이 남송을 멸망시켜 이 지역을 정복하는데 성공했고 중국의 몽골 울루스가 재편되어 세워진 왕조 원은 이 일대에 사천행중서성이라는 행정 구역을 설치하는데 바로 이 사천행중서성이라는 이름이 오늘날 이 일대의 행정구역인 쓰촨이라는 이름의 기원 되시겠다.

원이 명에게 멸망해 몽골족이 중원에서 고비 사막 너머로 쫒겨난 이후 쓰촨은 명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어 지금의 쓰촨 성이라는 행정구역이 설치되었다. 명나라 말 북방에서 만주족이 세운 청이 내려오고 각지에서 농민 군이 일어나 명 사회가 혼란해질 무렵 농민군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장헌충이 쓰촨을 정복하고 지방 정권인 서를 세우나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의 대순을 격파하고 중원으로 내려온 청에 의해 간단히 멸망한다.

중원을 정복한 청은 이전 왕조인 명의 행정 구역 제도를 그대로 존속시켜 쓰촨 성이라는 행정 구역은 그대로 이어갈 수 있게 되었고 삼번의 난 당시엔 오삼계가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정복당한 적도 있으나 곧 탈환되었고 건륭제 통치 시엔 티베트 정복을 위한 후방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가경제 통치 시엔 비밀결사인 백련교도들이 일으킨 백련교도들의 난으로 인해 혼란이 빠졌었고 태평천국 운동 당시엔 강남의 태평천국에 호응해 쓰촨에서도 태평천국군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의 사건 또한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중국에도 근대화의 바람이 불어닥쳐 충칭, 청두 등의 도시가 개항되어 근대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1911년 우창 봉기로 인해 촉발된 신해혁명 발발 당시 강남의 여러 성들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때 쓰촨 또한 독립을 선언해 중화민국에 가담했으며 중화민국 편을 들어 청에 대항하는 '보로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터진 곳 역시 이 곳, 쓰촨 성이었다.

중화민국 총통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 중화민국국 각지에서 군벌들이 난립, 각 지방이 사실상의 독립 정권으로 전락할 때 쓰촨에서도 여러 군벌들이 세운 독립 정권들니 난립했었다. 그러다 장제스의 북벌로 군벌에 의해 갈라졌던 중화민국이 형식상 재통일되어 모든 지역이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 아래로 들어오자 쓰촨의 군벌들 또한 형식상 국민정부 아래로 들어왔다. 그러다 장제스에 대항해 군벌 연합세력이 중원대전을 일으키자 쓰촨 또한 군벌 연합에 가담했으며 중원대전이 국민정부의 승리로 끝나자 쓰촨은 다시 국민정부에 충성하기로 한다. 하지만 국민정부 아래로 다시 들어왔음에도 여전히 쓰촨을 실제로 다스리고 있던 자는 국민정부가 아닌 토착 군벌 세력들이었다.

1937년 7월 일본이 중화민국을 전면 침공하면서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동년 12월 수도 난징이 함락되자 장제스는 수도를 한커우로 옮기고 이듬해 8월 한커우마저 함락되자 장제스는 수도를 충칭으로 옮겨 일본군에 대해 결사항전한다. 이후 일본이 항복하는 1945년 8월까지 쓰촨의 대도시 충칭은 중화민국의 임시수도로서 기능했으며 쓰촨은 아직 일본에게 함락되지 않은 중화민국 서남부, 이른바 '대후방'의 핵심 지역으로서 전쟁 기간 내내 항일 전선의 후방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충칭대공습과 같은 참혹한 전쟁범죄도 있었다.

중일 전쟁은 일본의 항복으로 중화민국의 승리로 종결되나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일전쟁 이전부터 지겹도록 싸워댄 두 세력, 장제스의 중국국민당과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 간에 국공내전이 발발한다. 국공내전 말엽 중국국민당의 패색이 짙어져 1949년 4월 수도 난징이 공산군 손에 떨어지고 임시수도 광저우마저 동년 10월 공산군이 화남을 석권하면서 함락되자 장제스는 중일 전쟁 당시처럼 정부를 쓰촨으로 옮겨 계속 저항할 생각이었으나 쓰촨 내부의 토착 군벌들이 장제스를 배신하고 공산군 측에 붙자 쓰촨마저 포기하고 결국 타이완으로 떠났다. 11월 충칭, 12월 청두가 공산군에게 넘어가고 1950년 4월 쓰촨 성 시창의 국부군 잔존 세력마저 완전 소탕된 뒤 쓰촨은 중국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 통제 하에 든다.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엔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의 피해가 가장 큰 지역 중 하나였으며 1980년대부터 중국공산당이 개혁개방 정책을 펴면서 동남임해지역은 크게 발전한다. 하지만 서부 내륙 지역이던 쓰촨은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딜 수 밖에 없었는데 동서 간의 경제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0년대부터 서부 대개발 정책이 시작, 1996년 성 동부가 충칭 시라는 이름으로 독립한다.

2008년에는 여기서 쓰촨성 대지진이 일어났다.

중국 한시계의 2대 네임드인 이백, 두보와도 연관이 깊은 고장이다. 이백은 쓰촨 성에서 나고 자라다시피 했고[6] 여러 대표작 중 하나인 '촉도난'도 촉 지방으로 넘어가는 길을 소재로 쓴 시이다. 두보는 청두에 산 적이 있으며 이때 살았던 곳이 완화초당(두보초당).[7] 지금도 청두 시에서는 두보초당을 관광자원으로 잘 써먹고 있다.

3 지리와 기후

대체로 서쪽이 해발고도가 높고 동쪽이 낮은 편인데, 서부는 티베트 고원의 동부에 해당되고 중부, 동부는 분지 지형이며, 동북쪽으로는 산시성(陕西省, 섬서성)[8]과 접해 있는데 산시성과의 경계를 또 산맥이 가로지르는 형태라서 쓰촨성 밖에서 쓰촨성 안의 동부 분지로 들어오려면 서쪽과 북쪽의 산맥, 산지를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남쪽에는 윈난성과 이웃해 있는데 쓰촨성 대부분의 분지 지역보다 윈난성 중북부가 해발고도가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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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동그란 모양의 분지가 바로 삼국지에서 ""으로 불리는 지역. 현재의 충칭시와 청두시 인근을 포함하는 부근이다. 한국에서는 함경도쯤에서나 볼 수 있는 해발 1500~2500m대의 험준한 산맥이 동그란 모양으로 감싸고 있는 가운데 양쯔강(장강)이 관통하며 넓은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초한전쟁기나 삼국지에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세력'으로 묘사되기에 첩첩산중에 있는 조그마한 촌구석인 이미지지만 현실은 남한 면적에 근접한다(…). 연의에서 서촉을 정복하겠다고 온 주유가 돌아가자 제갈량이 보낸 편지에서 '그곳 사람들은 굳세고 요새는 바위와 같은데 어찌 정벌하시려 하시겠습니까?' 라고 했는데 실제로 유비는 이곳을 정복하는데 애를 많이 먹어야 했다.

기후는 습하고 더운 편이며, 일조량이 중국에서 가장 적은 지방이다. 청두의 일조시간은 연간 1,000시간 정도로 런던은 물론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보다도 적은 수준이다. 서울과 비교했을때 우기인 7~8월에는 일조시간이 비슷하지만 가을에서 봄까지는 거의 서울의 1/3일 수준이다. 분지라는 지리조건 때문에 이 지역에는 구름과 안개가 많이 끼는데 더운 공기들이 사천성쪽으로 올라오거나 내려올때 차가운 산맥을 거치면서 쉽게 구름이 되어 버리는 것.

4 음식

예로부터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쓰촨성은 농업이 발전한 곳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1999년에는 을 포함한 곡물의 생산량이 중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 사탕수수, 고구마, 복숭아, 포도 등도 풍부하게 생산되고 있다. 또 중국에서 돼지고기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이다. 이러다보니 음식이 자연스럽게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천요리가 꽤나 유명하다. 요리왕 비룡의 주인공인 비룡도 이곳 출신. 사천요리는 호남요리와 더불어 매운 것으로 유명한데, 원래 중국은 더워도 비교적 건조한 편이지만 사천은 습하게 더운 편이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먹는 매운 요리가 발달했다. 마파두부도 사천에서 기원한 음식. 그래서인지 쓰촨 성 20대 이상 성인 70%가 대장염 초기증세를 보인다는 통계도 있다(...) 다만 중국집에서 '사천 XXX' 라고 이름을 붙여 파는 음식들을 대부분 사천요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고(...), 그저 약간 맵게 했을 뿐인 요리들이다.

사천요리가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는다는 속설이 퍼져있으나, 후난성 지역 음식 요리가 한국인이 알고 있는 칼칼하고 얼큰한 매운 맛이고(라,辣), 사천요리의 매운 맛은 산초를 비롯한 향신료를 사용하여 박하처럼 퍼지는 얼얼한 매운 맛이기 때문에(마,麻) 오히려 다른 지방의 중국 요리들보다도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한국에도 비교적 잘 알려진 중국 요리인 마라탕(麻辣烫)에서 이 두가지 맛을 동시에 느껴볼 수 있다.

전통음식 중에 파오차이라는 김치와 유사한 발효음식이 있다. 사실 김치가 중국에 수출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파오차이는 중국 전체에서 보면 거의 듣보잡에 가까운 향토음식이었는데, 사쓰 이후 김치를 수출하면서 우리나라가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하자, 사천에서는 그 돈이 탐이 났는지 김치는 파오차이를 베낀 것이라며 파오차이가 원조이며 더 우수하다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주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어떠한 사료에서도 심지어 중국의 사서에서조차도, 김치가 중국에서 넘어간 요리, 혹은 영향을 받은 요리라는 서술은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파오차이=김치란 주장은 무리수였지만, 누가 우기기 아니랄까봐 중국은 금새 파오차이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위생법을 제정, 적용하면서 김치를 비위생적인(?) 식품으로 규정하여 수출이 막히고, 파오차이가 김치가 개척했던 시장을 천천히 잠식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근래들어 중국-일본의 관계악화로 인해 반사적으로 한중간의 관계가 급진전하면서 김치를 포함한 한국으로터 수입하는 물품들에 대한 견제가 크게 완화되어 곧 다시 수출이 가능해질 예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파오차이(泡菜)는 특정한 음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어 말 그대로 절인 채소라는 뜻으로, 채소를 염장해 보관하는 것들을 통칭하는 김치라는 용어와 기본적인 의미상으로는 같은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위와 같은 딴지가 가능했던 것.

중국인들은 김치를 항궈파오차이라고 따로 부른다.

쓰촨성의 술 역시 구이저우 성과 함께 유명한 편인데 백주 우량예(五粮液), 수이징방(수정방, 水井坊)등의 술이 유명하다.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좋은 술들이 나오는 이유는 중국에서도 수질이 좋은 편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윈난 성의 보이차만큼 알려지진 않았지만 차도 유명한 편이다.

5 트리비아

'사천성'이라고 하면 중국의 지명보다 마작패를 일정한 룰 이내에서 짝맞춰 지우는 이른바 '상하이'류 마작 솔리테어 게임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다. 한때 이런 마작 솔리테어를 기반으로 한 비디오 게임들중 90년대초 PC로 나온 이런류 게임중 잘 알려진게 '사천성'이라는 제목을 달고나온 한 대만산 마작 솔리테어 게임이었기 때문(물론 스테이지를 깨면 므흣한 사진이 나오기도 한다(...)이었고 이후 개발된 이 게임의 룰을 차용한 건전한 마작 솔리테어류 게임도 '사천성'이라는 제목을 쓰는 경우가 있어서(ex. 한게임 사천성) 은근히 대명사화되었다.

그 밖에도 동네 여기저기에 삼국지 관련 관광지가 있다. 방통이 최후를 맞은 낙봉파 같은 정사하고는 상관 없는 유적지도 있는데 당연히 관광용이다.

그리고 겉모습이 귀여운 판다의 주 서식지이기도 하다. 판다의 서식지라는데서 알 수 있듯이 대나무 숲이 많은데 촉남죽해(蜀南竹海)라고 해서 영화 와호장룡의 촬영지로 유명한 아름다운 대나무 숲이 있다. 또 흥문석해(興文石海)라고 하여 웅장한 암석과 동굴 그리고 카르스트 지형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관광지도 있다. 촉금이라고 불리는 비단이 예로부터 유명한 곳이었으며 지금도 누에고치가 활발하게 생산되어 비단을 직조하고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현시창 희곡 '사천의 착한 사람(Der gute Mensch von Sezuan; 번역에 따라 '사천의 선인', '사천 사는 착한 사람')'에서는 신들조차 GG치는 헬게이트 지역으로 나온다. gg친 신들이 '그래도 아직 착한 사람이 있도다'이라며 정신 승리를 하려 사천에 와서 천사표 윤락녀 셴테를 만나게 된다는 스토리로 시작된다.

중국의 티베트 문제가 불거질 때 서쪽의 티베트 자치구, 칭하이 성과 더불어 자주 등장하는 지역인데, 쓰촨 성 서부가 전통적인 티베트의 세 영역[9] 중 하나라서 티베트계 주민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태국인들과 라오스인, 미얀마인들도 원래는 쓰촨성 일대에서 살았다는 얘기도 있다. 타이족과 라오족, 버마족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정착한게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이들이 북쪽에서 이주해온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명의 도시로 대한민국 경상남도 사천시가 있다. 다만 한자는 '泗川'으로 다르다. 종종 "사천에서 왔다"고 하면 "중국?"이라고 하는 개그를 들을 수 있다.

중국미녀를 뽑을때 장쑤 성 쑤저우, 저장 성 항저우에도 미인이 많다(杭出美女)고 하지만 중국 사람들이나 여행객들이 꼽는 미녀가 많은 지역엔 쓰촨 성과 충칭 시도 포함된다. 쓰촨성 미인들은 피부가 깨끗하고 하얗다고 하는데 햇빛에 노출되기 어려운 기후조건과 좋은 물이 영향을 주어서라는 얘기도 있다.
  1. 중남 지방을 허난 성, 후베이 성, 후난 성의 화중 지방(华中地方)과 광둥 성, 하이난 성, 광시 좡족 자치구, 홍콩 특별행정구, 마카오 특별행정구의 화난 지방(华南地方)으로 나누는 분류도 많다.
  2. 한어병음 표기가 저래서 영어에서는 정말로 쓰촨이 아닌 시추안으로 발음한다.
  3. 순위로는 광둥, 허난, 산둥에 이은 4위이며 1997년 성 동부가 충칭 시로 독립하기 이전까진 유일하게 성 인구가 1억을 넘긴 압도적인 1위였다.
  4. 작중 옥야천리(沃野千里),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평가된다.
  5. 지금의 충칭.
  6.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정확히는 3세쯤에 집안이 촉 지방으로 이사한 것으로 보인다.
  7. 이때 240여 수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8. 이곳의 중심도시는 시안이다.
  9. 캄, 우창, 암도. 이중 캄지방의 동부가 쓰촨 성 서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