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쿠라 소데키

朝倉宗滴
(1477 ~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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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者は犬ともいへ、畜生ともいへ、勝つことが本にて候

(무사는 개라고 불리든, 짐승이라고 불리든, 이기는 것이 본분이다) - 아사쿠라 소데키 일기(朝倉宗滴話記)[1]

아사쿠라 다카카게의 8남. 아사쿠라 사다카게, 다카카게, 요시카게 3대에 걸쳐 아사쿠라가를 보좌한 중신이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노리카게였지만 출가한 후 소데키로 개명했다. 일족 필두 가신으로 군봉행을 맡았으며 아사쿠라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소데키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1503년 츠루가의 성주였던 아사쿠라 카게토요의 모반으로부터이다. 부인이 카게토요의 여동생이었던 소데키에게 모반에 가담하도록 하는 요구가 있었지만 이를 뿌리치고 당주 사다카게에게 밀고를 한다. 이로 인해 카게토요는 할복을 명 받았고 소데키는 츠루가 군사가 되어 이후 아사쿠라가의 군무를 관리하게 된다.

당시 가가는 잇코슈 세력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는데(잇코잇키) 이들은 에치젠으로 끊임없이 침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것의 배후에는 중앙 권력싸움이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관령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혼간지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마사모토의 요청에 따라 반호소카와파인 아사쿠라씨를 포함한 호쿠리쿠 전역의 다이묘를 공격하였다.

1506년 3월 엣츄의 나가오씨와 노토의 하타케야마씨에 대하여 일제히 잇코잇키가 봉기한다. 그리고 그해 6월이 되자 이 소란이 에치젠에까지 이르게 된다. 에치젠에서 일어난 잇키에 가세하기 위해 엣츄와 노토의 잇키세력이 에치젠에 들어와 에치젠의 잇키세력과 합류하였다. 이를 토벌하기 위해 소데키를 총대장으로 하여 아사쿠랐와 타문도 간의 연합군이 쿠즈류강 일대에 파견된다. 이 당시 잇키세력은 30만을 헤아렸고, 아사쿠라군은 1만 천 여명에 불과하였다. 쿠즈류강 유역 각지에서 격전이 전개되어 8월 6일 나가노코우 전투에서 아사쿠라군이 완승함으로써 잇키세력은 격퇴되었다.

1517년 막부의 명에 따라 와카사 수호인 다케다씨의 원군으로 와카사와 단고에 출진하여 와카사 헨미씨와 단고 수호대 노부나가씨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1525년엔 미노의 내란에 개입한 북오미의 아자이 스케마사를 견제하기 위해 롯카쿠씨와 협력하여 오다니 성에 출진하였다. 5개월에 걸쳐 오다니 성 앞에 진을 침으로써 결국 아자이씨와 롯카쿠씨의 조정역을 하였다. 1527년 오미에 피해있던 장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와 관령 호소카와 타카쿠니의 요청으로 상경하여 미요시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이런 일련의 활동으로 아사쿠라씨의 기나이 지역 내에서의 발언력은 상당히 강해졌다.

1527년 양자 아사쿠라 카게토시에서 츠루가 군사 자리를 잇게하고 자신은 군봉행으로서의 지위만 유지한다.

1531년 가가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노토의 하타케야마씨와 함께 가가에서 출진하여 테도리 강까지 진격하였지만 도중에 철수한다. 1555년 에치고의 우에스기씨와 함께 가가에서 출진하지만 도중에 향년 79세에 나이로 병사하게 된다.

전국시대 초기의 인물들 중에서도 각종 매체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지 않는 아사쿠라 가문 출신이라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지만, 당대의 평가나 실력으로 보아 전국 최고의 명장 중 하나이다. 부귀영화로 유명한 아사쿠라 가문에 무력에 의한 억저력을 달아준 인물로, 소데키의 군사적 재능으로 인해 아사쿠라 가문은 사이토 도산오다 노부히데라는 걸출한 신흥 다이묘가 일어난 미노와 오와리를 통제할수 있었으며, 특히 노부히데는 세력을 확장하려는 시도가 소데키의 개입으로 인해 번번히 좌절되었다.

신장의 야망

파일:朝倉宗滴.jpg

신장의 야망에서는 아사쿠라 가의 에이스이다. 별개지만 천도에서 회춘한 일러스트로 등장한다.
  1. 전국시대 무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