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 산 수 지

(아웅 산 수 치에서 넘어옴)
<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1990 - 미하일 고르바초프아웅 산 수 지1992 - 리고베르타 멘추
이름Aung San Suu Kyi [1]
출생일1945년 6월 19일
출생지영국버마 랑군
경력민족민주동맹 지도자(1988. 9. 24~현재)
정당민족민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NLD
종교불교

1 개요

100px-Aung_San_Suu_Kyi_%28Burmese%29.svg.png

1945년 6월 19일 ~

아웅 산 수 지는 미얀마[2]민주화 운동가, 정치인이다.

2013년 기준 미얀마정당인 민족민주연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의 의장 겸 사무총장이다.

2 생애

2.1 초기

버마[3]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국부인 보조 아웅 산[4]의 딸로 15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유학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으며 이때 대학에서 남편인 마이클 에어리스를 만났다.

1985년부터 1986년까지 일본 교토대학의 동남아시아 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서 자신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과 관련 역사에 대해서 연구를 하였다. 그 후로 27년 만인 2013년에야 교토대학으로 돌아와 특별 강연을 하게 된다.

수 지 여사는 결혼 후엔 아들 둘을 낳고 교수 일을 하는 남편을 열심히 내조하며 영국 옥스포드에서 철저히 가정주부로 살았었다. 옥스퍼드 대 출신으로 세계 어디에서도 무시당할 학벌이 아니었음에도 정말 아무 일도 안했던 완전 전업주부였기에 그러한 생활에 질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을 쯤엔 대학원 진학이나 취업 등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고 한다.

2.2 민주화 운동

그러나 1988년에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버마로 귀국한 후 군사 통치에 반대하는 집회(통칭 8888 항쟁)에 참여하면서 영국의 가정주부에서 갑자기 버마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다.[5] 그러던 중 8888항쟁 중에 갑자기 나타나 뛰어난 연설로 대중을 감동시킨 수 지 여사가 갑자기 버마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안중근 의사, 홍범도 장군, 백범 김구 주석의 자녀가 전두환 군부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격 인물로 나선 것과 비슷한 셈.

영국에서 돌아온 수 지 여사는 버마를 일당 통치하던 사회주의계획 당에 다원적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버마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야당 세력을 망라한 민주주의민족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을 창설하고 그 의장이 되었다.

수 지 여사가 주도한 민주화 운동은 네 윈 장군을 권좌에서 물러나도록 만들었으나 결국 군사정부에 의한 대량학살의 비극으로 끝났으며 수 지 여사는 1989년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1990년 5월 미얀마[6]의 군사정부는 서방의 압력에 의해 총선을 실시하였다. 총선 당시 수 지 여사는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상태였으나 여사의 인기에 힘입어 총선 결과는 수 지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82%의 지지를 얻어 압승했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오히려 지도부 등 당원 수백 명이 투옥시켰고 2010년에 이르기까지 정권 이양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탄압을 가해왔다.

1991년 수 지 여사는 민주화 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평화상 수상식이 열렸을 때 그녀는 미얀마의 군부독재 세력에 의해 여전히 연금 상태에 있어 두 아들과 남편이 그녀의 전면 사진을 들고 대신 참석했다.

Suu-Kyis-husband-Michael-Aris-with-their-sons-Alexander-and-Kim.jpg
노벨상 수상식에 대리 참석한 그녀의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와 두 아들.

이후 1995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수 지 여사는 가택연금에서 6년만에 풀려났지만 1999년 남편이 영국에서 으로 사망할 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해 출국을 포기했었다. 그리고 2000년 9월 2차 연금 조치로 양곤 밖으로의 여행을 금지 당했다.

2000년 9월부터 유엔특사 라잘리 이스마일의 중재 아래 수 지 여사는 군사정부와 정국 타개를 위한 비밀 협상을 벌여왔다. 그 결과 2002년 5월 미얀마 군사정부를 이끄는 국가평화발전협의회(SPDC)는 수 지 여사를 가택연금에서 해제했다.

하지만 2003년 5월 미얀마 군정은 수 지 여사가 이끄는 NLD 지지자와 친 군정 지지자들 사이에 유혈 충돌이 발생해 수 지 여사를 다시 구금했다.

2.3 그녀의 영향력

2010년 11월 13일, 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은 미얀마 군정은 수 지 여사의 가택 연금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야당의 손발을 묶어 야당이 보이콧을 선언한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여당은 25%의 자동의석을 더하여 75%의 의석을 차지했다. 여당이 사회주의 경제를 풀고 경제개발 정책 시늉을 한 것도 있고...

굳이 여기까지 안 보더라도 수 지 여사가 그야말로 미얀마 군정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고 가택연금 조치에 그친 것은 물론 국제사회의 눈초리가 매서운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미얀마의 국부라고 할 수 있는 아웅 산 장군의 딸이라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라 할 수 있다.만일 수 지 여사를 죽일 경우 미얀마 군부는 그날로 국부인 아웅 산 장군의 얼굴에 먹칠할뿐더러 되레 정권이 더 빨리 망하는 셈이 되기도 하고...[7][8]

2012년 4월 1일에 치러진 미얀마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 8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야말로 몰표 또한 NLD는 45개 선거구 중 43곳에서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 # 다만 아직까지는 친군부계 통합단결발전 당(USDP)나 정부군 소속 땃마도(Tatmadaw)가 다수 석을 차지하고 있는지라 어떠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20120616.202523_nobel.jpg

2012년 6월 16일, 노벨평화상 수상 21년 만에 노르웨이에서 수상 연설을 했다.

또한 2012년에 첫 해외 순방을 했다.

2013년 1월 28일부터 2월 1일까지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관련 기사. 2013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 세계대회 개막식에서 연설한 후 광주광역시를 방문해 지난 2004년에 5.18 재단에서 수상자로 결정했으나 그동안 받지 못했던 광주인권 상을 받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또한 강운태 광주광역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고 5.18 국립묘지에 참배해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추념식수를 했다. 이 외에 전남대학교서울대학교에서 강연도 가졌다.

2.4 보궐선거

현실정치에 참여한 2년 동안 미얀마 시민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있다.. 아웅 산 수 지가 반(反)군부 민주화 투쟁만이 아닌 현실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하면서 수 지 또한 절대적인 성녀가 아닌 이상 단점이나 실수는 있기 마련이므로 지나치게 그녀에 대한 이상을 품었던 시민들이 현실과의 괴리감으로 인해 회의감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는 레흐 바웬사, 넬슨 만델라에게서도 확인되었던 현상으로, 민주화 투사 시절의 지지율이야 이루 말할 것도 없었지만 현실 정치인으로써의 정책 지지율은 영 그랬던 것. 다만 기자의 시점이 다소 편향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기자가 아웅 산 수 지의 중도주의 노선에 대해서 매우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여럿 있기 때문.

2.5 총선 승리와 우려

suu-kyi.jpg

대한민국 시각 2015년 11월 10일 오전 기준, 총선에서 수 지 여사가 이끄는 야당의 압승이 확정됐다고 한다. 선거 의석(전체 의석의 75%. 나머지 25%는 군부 몫의 직능 비례대표) 중에 88%를 쓸어담으며 단독 정부 수립(전체 의석 중에 67% 이상)에 성공한 것이다. 53년간 이어져온 미얀마의 군부 독재가 종식 될 가능성이 열렸다. 하지만 1990년 총선 때처럼 군부가 또 불복을 선언할 가능성도 있고, 미얀마의 현행 헌법은 외국인 배우자 혹은 자녀를 둔 국민이 대통령 후보로써 입후보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에 영국 국적의 자녀가 있는 수 지 여사는 대통령을 출마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일각에서는 수 지 여사가 이제껏 정국을 운영해 온 경험이 없기에 독재를 종식한 이후, 그녀가 과연 독재의 허울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미얀마의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국제 여론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녀가 미얀마의 정국을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2015년 11월 11일, 미얀마의 야당인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이끄는 수 지 여사가 차기 정권이 수립되면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겠다잠깐!! 이거 누군가 떠오른다.는 발언을 해 논란이 일게 되었다.# 또 대통령은 축하 의전만 하게 될것이라고 한다.# 미얀마에서는 앞서 적었다시피 외국인 배우자, 혹은 자녀를 둔 국민이 대통령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녀는 대통령은 될 수 없고 총리에 오르는 것이 한계다.[9] 그녀가 미얀마의 헌법상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아닌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겠다.'라는 발언을 한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권위주의와 헌법의 위반이라는 우려를 지적하고 있다. 그녀가 미얀마의 민주화 투쟁을 한 것은 실로 대단한 공이라 할 수 있고 최근의 성과도 매우 대단한 일이나 이러한 발언은 그간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 수도 있는 발언이라 주의가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군부 주도로 국민의 뜻을 묻지않고 수정된 헌법이기에 후일 개정될수도 있다.

미얀마에서 수 지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단독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자 현재의 '미얀마'라는 국호가 1989년 이전의 '버마'로 회귀할지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버마는 본래 '브라만'이라는 어원에서 유래된 나라 이름인데 19세기, 영국이 버마를 식민 통치하면서[10]영국인들이 '버마'라고 발음하고, 현지인들은 '미얀마'라고 발음하는데서 각각의 표기가 굳어졌다. 당시 군부는 국호를 '미얀마'로 바꾸며 이를 두고 "식민지 시절의 서구적인 색채에서 탈피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비슷한 이유에서 수도 '랑군'을 '양곤'으로 개명했다. 이는 유엔도 승인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이를 두고 수 지 여사를 비롯한 민주화 운동 세력들은 이러한 개명 조치에 대해 "총칼로 권력을 탈취한 뒤 집권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둘러댄 허울 좋은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며 '버마'와 '랑군'이라는 이름을 고수해왔고,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일부 서방 세력 또한 미얀마 군부의 집권 과정에 대한 정통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버마'와 '랑군'의 표기를 사용해왔다.[11]

그러나 민주주의민족동맹(NLD)가 단독 집권하더라도 버마로의 국호 환원은 당장 일어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김성원 부산 외국어대 아시아 대학 학장은 "1988년, 정치 입문 때의 혈기 넘치던 시절과 달리 지금의 아웅산 수 지는 자신을 끊임없이 견제해 온 군부의 힘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노회한 정치인이 되었다. 순조로운 집권을 이루기 위해 군부를 자극하는 일을 최대한 삼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본래 미얀마에는 주류인 버마족[12]을 제외하고 샨족[13], 카렌족[14], 중국계와 인도계[15], 그리고 몬족[16] 등이 같이 살고 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과연 주류인 버마족의 이름만을 내세운 국명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2.6 대통령 배출 이후 행보

2016년 3월 15일 수지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의 대통령 후보로 나온 틴초 대통령이 드디어 당선되었다. 그러자 수 지 여사는 외교부장관과 대통령 대변인을 겸직하게 된다. 맡은 직책이 막중하고 틴초가 이전까지는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이며, 수지의 측근인 것을 보면 수지가 사실상 대통령의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수 지는 중국 외교장관 왕이와 제일 먼저 회담해 미얀마에 급격한 외교 노선의 변화가 없을 것임을 보였다.

수 지는 수감된 학생운동가들의 수감을 선도했고, 차별이 우려되었던 소수민족에 자리를 나눠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만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야 족을 상대로 하는 불교 국민들의 차별을 막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한편 한겨레 등 일부 국내 진보 언론들은 수 지가 군부와의 애매한 공존을 유지하려 한다거나 너무 권력집중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미얀마는 이제 막 군부정치를 청산하려는 중이고, 과거와 급격히 단절하는 것은 군부의 현재 위상을 볼때 위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가인 김영삼과 김대중도 3김시대 특유의 과도기적인 민주정치를 펼치며 당 총재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보였듯 미얀마에서 과거 군부독재와의 급격한 단절을 시도하는 것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려는 아기(미얀마)에게 전력질주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기타

  •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버마어 이름이므로 음절 단위로 끊어서 '아웅 산 수 치' 로 표기하는 것이 옳으나 한국 내에서는 '아웅산 수치' 라는 표기가 일반적이다. 과거에는 '아웅산 수지' 라는 표기도 많이 사용되었는데 여사 본인은 이쪽이 본래 발음에 가까운 표기이므로 '아웅 산 수 지'[17] 로 표기해 달라고 2013년 1월에 요청했다. 다만 2013년 3월에는 띄어쓰기 없이 '아웅산수찌' 로 표기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정확히 본인이 원하는 한글 표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한국어 단어에서 '수치'가 의미하는 바를 듣고 수치스러워불쾌해 했으며, 본인 이름의 원래 발음에 일치하지도 않는다는 이유로[18] '수치'라고 표기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한 일화가 있다고 한다. 버마 식 이름은 성씨라는 게 따로 없으며 개인별로 이름만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보통 인생의 전환점이라 생각하는 때 바꾼다고 한다. 아웅 산 수 치의 경우엔 아버지의 이름인 '아웅 산' 에 수 치를 붙여 이름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아웅 산' 을 성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냥 전체가 이름인 것이다. 영국 유학 등으로 인해 성씨가 필요해서 아버지 이름에 자기 이름을 붙여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 앞서 말한 띄어쓰기 없는 대중적 방식의 표기로 인해 아웅산에 오해를 갖게 된다. 국사 시간에 졸지 않았어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을 처음 접하면 "아웅산에 있는 묘소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인가?" 라고 오해를 하게 된다. 그래서 "아웅산 테러 사건" 이라고 들으면 진짜 아웅山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또 오해를 해서 국사를 배우나 마나가 된다. 마찬가지로 아웅산 수 지 여사의 아웅산이 '그 아웅산을 뜻하는 건가?' 라고 또 오해를 한다. 아웅 산에 사는 수 지 여사님 아웅이 아니라 아웅 (Aung San)이다. 절대 산 이름이 아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아웅산 수지 여사라고 해서 아웅산에 사는 수지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사람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띄어쓰기의 중요성
  • 미국의 국무장관 힐러리가 대놓고 친목질을 하고 있다. 힐러리가 공식일정으로 직접 자택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었으며 이후에도 2012년 보궐선거에서 승리하자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뿐만 아니라 뤽 배송의 수 지 여사 전기 영화 미국 시사회 때에도 참가해 배우, 감독과 사진을 찍었다. 일단 힐러리 개인적으로도 여성 지도력을 강조하여 같은 여성 정치인으로써 이미지 개선을 노리는 점도 있겠지만 현재 미얀마는 중국의 자라나는 영향권을 견제하기 위한 요충지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경제 지원 등의 당근으로 미얀마를 자국 쪽으로 끌어들이면 중국 입장에서는 북한 정도를 제외한 주변국이 모두 중국에 적대적인 모양이 나온다. 중국도 이를 경계하여서 아웅산 수 지가 집권한 후 첫 외교 회담을 위해 왕이 외교부장이 미얀마를 방문했다.#
  • 어린 시절 거의 영국에서 자랐고 영국인과 결혼하여 그 사이에서 자식까지 둘이나 두어 거의 영국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점이 약점으로 공격 받고 있다. 개인의 신변을 공격하는 것은 치졸한 짓이지만 독재정권이 그딴 거 신경 쓸 리가 있나 때문에 미얀마 군부가 자꾸 영국인이 아니냐며 공격하는 것에 대해 수 지 여사는 "나는 한 번도 영국 국적을 얻은 적이 없는 완전한 버마인" 이라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 남편인 마이클 에어리스는 티벳 불교의 권위자로 원래부터 동남아 문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른 나이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수로 발탁되기도 했다. 수 지 여사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후부터는 수 지 여사 쪽이 훨씬 더 유명하지만 사실 그 이전엔 남편인 마이클 에어리스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나름 일가를 이뤘었다. 심지어 달라이 라마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 할 정도로 티벳 불교에선 나름 정통했다. 그의 무덤은 영국에 있지만 특이하게도 동남아 불탑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 단 두 아들과는 사이가 굉장히 서먹서먹해졌다. 수 지 여사의 민주화운동을 시작하고 가택 연금을 당할시기는 이 두 아들이 청소년기를 겪을 시절인데, 연금시절에 어머니를 몇년째 만나볼수 없다는것과 그 도중에 아버지마저도 사망하며 사실상 정신적 버팀목이 사라진 아들들의 성장과정이나 개념에 악영향을 미칠수밖에 없다. 현재 맏아들은 수 지 여사와 절연을 한 사이고 그나마 둘째 아들과는 연락을 가끔 하는정도라고..
  •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의 해외순방 일정 중에 미얀마 방문이 있어 수 지 여사를 공식적으로 방문했고 다음날엔 수 지 여사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의 묘지에 참배하였다. 아웅산 묘소 참배와 관련해선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항목을 참조할 것.
  • 군사독재정권이 한창 극성일 때 미얀마에 자연재해가 생기거나 하면 정부의 행정 능력상 어쩔 수 없이 원조를 받아야 하는데 수 지 여사는 오히려 외국 언론들이나 정부에게 "절대 원조해주지도 말고, 오히려 외면해라. 당신들이 버마를 돕겠다고 나서는 건 오히려 군부를 도와주는 꼴이다."라고 자주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버마 여행오려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돈을 뿌리는 건 군부의 배를 채워준다는 이유로 오지말라 라고 한 적도 있다.

3.1 대중 문화에서

  • 아일랜드의 록 밴드 U2가 2000년에 발표한 곡 《Walk On》은 아웅산 수 지 여사에게 헌정된 곡이다.

the-lady-movie-poster-3.jpg
the-lady-michelle-yeoh-e-aung-san-suu-kyi-in-una-significativa-scena-del-film-233752.jpg

  • 2011년 프랑스의 뤽 배송 감독이 수 지 여사의 전기 영화인 'The Lady' 를 제작했다. 수 지 여사 역할은 양자경이 맡았는데 실제 수 지 여사와 상당히 비슷해 보인다는 의견이 많다. 실제로 양자경은 수 지 여사를 연기하기 위해 5kg을 감량하는 등 상당히 노력했다고. 영화 후반부쯤 가면 남편과 여사의 장거리 연애가 부각되는 느낌도 있지만 전체적으론 미얀마 군부정부의 패악이 잘 드러나 있다.
  • 이보다 앞선 1995년 존 부어맨 감독의 영화 <비욘드 랭군>에서도 초반 단역으로 등장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웅산 수 지 여사가 처음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1988년 8월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총을 겨누는 계엄군 병사들을 향해 걸어가면서 군중들에게 연설하는 장면이 인상적. 한스 짐머가 작곡한 배경 음악까지 더해져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전해준다.
  • 위에 언급된 영화 The Lady의 미국 시사회에선 힐러리와 함께 한국의 기획자 이수만도 참석해서 둘이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 유명한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이 맞다. 이 기묘한 인연은 이수만이 한국에서 출국하는 힐러리에게 영화 'The Lady' 의 DVD를 구해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그리고 미얀마에서 한류는 금지[19]
  1. 이름의 버마어 표기를 그대로 쓰면 "아웅 산 쑤 끄라인"(aung hcan: cu. krany) 정도가 되지만, 버마어의 경우 영어처럼 철자와 발음간 괴리가 있는 편이라 발음은 아웅 산 수 지가 된다.
  2. 수 지 여사는 미얀마는 독재정권이 바꾼 이름이기에 버마라고 불러주길 원한다고 한다.
  3. 1989년 이전의 미얀마의 국명
  4. 이름 자체가 "아웅 산" 이다. 보조는 "장군" 이라는 뜻의 존칭.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설명이 있다.
  5. 본래 수 지 여사에겐 오빠(동시에 아웅 산 장군의 아들)도 있었지만 그녀의 오빠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할 만한 정치적 역량은 없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6. 1989년 이후 군부는 버마의 국명을 미얀마로 변경했다.
  7. 영화 더 레이디를 보면 민주화 운동 중인 수지 여사에게 총을 겨누고 죽이기 직전까지 갔던 병사를 독재자가 친히 쏴죽이면서 수지 여사를 순교자로 만들면 좆 된다고 막 화를 내는 장면이 있다.
  8. 수 지 여사가 가택연금 당하던 당시 미얀마에 입국하여 (몰래) 인터뷰했던 미국의 언론인 안나 후살스키가 자신의 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인터뷰 이후 자신이 국외추방 당할 때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던 여성 경찰도 그녀가 추방당한 이유가 정부의 명령을 어기고 수 지 여사를 인터뷰했기 때문임을 알게 되자 여사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즉, 독재정권의 지탱에 가장 중요한 기반 중 하나인 군이나 경찰 내에도 아무렇지 않게 수 지 여사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광범위한 국민적 존경을 받고 있었다는 이야기.
  9. 다만 현재의 군부가 과거 네윈 장군 시절에 비하면 비교적 유연한 편이기 때문에 NLD와 군부간의 개헌 합의가 극적으로 이뤄져 수 지 여사의 대통령 등극이 이뤄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이렇게 되면 군사정권 시절 만행에 대한 사법처리가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될 지도.....
  10. 19세기의 버마를 이끌고 있었던 꼰바웅 왕조는 영국과 3차례의 전쟁 끝에 1853년,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8년에 이르러 독립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미얀마/역사 참고.
  11. 현재 한국에 망명온 미얀마 민주화운동권 인사나 미얀마에서 한국으로 일하러온 사람들은 전부 '버마'로 불러주길 원하고있다.
  12. 전체 인구의 68%, 이하 인구의 출처 [1]
  13. 전체 인구의 9%
  14. 전체 인구의 7%
  15. 각각 전체 인구의 3%와 2%
  16. 전체 인구의 2%
  17. 버마어 표기법에 따라 음절별로 띄어 쓰는 것이 맞다. 아웅산 수지라는 표현은 임의적인 띄어쓰기이므로 지양해야 한다.
  18. 버마어 발음을 IPA로 적으면 (àʊɴ sʰáɴ sṵ tɕì)이다. 버마어 자음은 유기음-무성음-유성음 3개로 구분되는데 이를 비슷하게 자음을 구분하는 태국어나 베트남어의 외래어 표기법 식으로 구분해서 적으면 "아웅 상 쑤 찌" 정도가 된다.
  19. 사실 미얀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한류의 인기가 대단히 높은 편이며 한국에 대한 국가 이미지도 매우매우 높다. <<동남아의 한국에 대한 인식>> 참고. 한국 문화, 한국 국가에 대한 미얀마인들의 선호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