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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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년대를 살았다면 모를 수가 없는, 한 시대를 풍미한 노래

1971년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대표적인 민중가요. 김민기의 1971년 1집 앨범에 수록되었으며, 같은 해 동일한 곡을 김민기가 편곡하여 양희은이 부른 아침 이슬이 대중들에게 더 유명하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1975년 유신 정부의 긴급 조치 9호에 의해 금지곡에 선정된 것으로 유명하다. 긴급 조치 9호는 약 2천여 곡의 노래들을 사회 통념 위반, 근로 풍토 저하 따위의 이유로 금지곡에 선정했는데, 유일하게 아침 이슬만큼은 금지곡 선정 근거가 없었다. 이후 세간에 알려진 아침 이슬의 금지곡 선정 이유는 '태양이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른다'는 가사가 불순하다라는 이유이다. 그럼 태양이 붉게 떠오르지 퍼렇게 공중제비라도 돈다냐? 그런데 이 노래가 처음 발표된 1971년에는 아름다운 노랫말로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다는 것이 함정.

물론 해석하기에 따라서 '묘지는 당시 민주 항쟁으로 죽어간 이들을 뜻하고 그 위에 떠오르는 태양은 일출의 이미지, 즉 새로운 아침, 새 시대, 새 희망을 뜻한다'거나, 보다 과격하게는 '위대한 인민 지도자(태양)이 혁명파 인민들의 시체(묘지)들을 넘고 공산주의 락원(붉게)을 세운다(떠오른다)'고[1] 굳이 억지스럽게 말을 엮을 수는 있겠으나, 도둑이 제발 저린 격이며 레드 콤플렉스에 찌든 억지나 다름없다.

전두환의 호가 일해(日海)이기에 '태양=땡전'이라고 받아들여서 금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원작자인 김민기는 음악평론가 강헌과의 인터뷰에서 아침 이슬의 작사 배경을 밝힌 바 있다. 가난한 미대생 김민기가 고된 하루 일과 끝에 긴 밤을 지새워 술을 마시다가 필름이 끊기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잠들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돈암동 야산의 공동묘지 위에서 잠을 깨었다라는 것이 그 작사 배경이다. 풀잎에 알알이 맺힌 아침 이슬 위로 태양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보고, 밤늦도록 술을 퍼마시다 공동묘지에서 잠들어 해가 중천에 떠서야 눈을 뜬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더불어 자신이 다시 거친 광야의 현실(박정희 독재 치하의 가난하고 무기력한 대학생 신분)로 돌아가야 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즉, 김민기는 독재 시대의 나약한 청년 지식인의 자기 반성과 신세 한탄을 주제로 이 곡을 썼을 뿐이지, 혁명에 대한 의지를 노래 가사로 표현한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1971년 김민기 앨범의 원곡은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듯한 창법으로 노래되며, 이는 같은 해 양희은이 노래한 직설적이고 곧은 발성의 아침 이슬과 사뭇 다르다. 이 앨범에 참여한 정성조 쿼텟이 클래식 풍의 편곡을 선보였 때문에 이 버전은 보다 세련된 면이 있다. [2]

따라서 '붉은 태양이 김일성의 공산주의 혁명을 의미한다'는 주장은 우익측의 아전인수식 해석에 가깝고, 굳이 좌익적인 해석을 붙인다면 '독재의 탄압 아래 신음하는 민중이 언젠가는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해석이 타당하다. 실제로 집회에 참석한 군중들 사이에서 아침 이슬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정말 뭔가 처연하고 장중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기분이 든다. 아침이슬 시위.

다만 가사의 해석을 떠나 작곡적인 측면에서는 혁명적인 구조를 하고 있는데, 유행을 노리는 전형적인 노래 구조인 A-A'-B-A 구조[3]에서 벗어나 A-A'-B-C 라는 새로운 구조를 하고 있다. 또한 C장조임에도 불구하고 4도인 F음(파)으로 불안정하게 시작하고, 클라이맥스(B) 이후에 메인 테마(A)로 돌아오지 않고 또 다른 새로운 테마(C)로 진전하며 끝나버린다.[4] 이는 메인 테마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킴으로써 앨범 판매를 부추기는 A-A'-B-A의 구조가 아니었기에, 1971년 처음 이 곡이 김민기의 앨범에 발표되었을 때에는 비명도 못 지르고 3천 장의 앨범도 판매하지 못한 채 시장에서 묻혔다.

그러나 이 메인 테마로 돌아오지 않는 파격적인 구조는 '광야로 떠나는' 가사와 절묘하게 맞물려서 당시 한국 운동권들의 주요 이데올로기였던 혁명적 낭만주의가 가장 수용하기 쉬운 민중가요로써의 아침 이슬을 탄생시켰으며, 여기에는 양희은의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가 큰 요소로 작용하였다. 아침 이슬이 운동권 집회에서 널리 불려지고 유신 정부의 금지곡 병크가 겹치면서, 스트라이샌드 효과 1987년 6월 항쟁 당시에는 신촌 로터리 부근에 운집한 100만 명의 군중들이 유일하게 다 같이 아는 노래가 애국가와 아침 이슬밖에 없었다고 할만큼 대중적인 민중가요가 되었다.[5]

이수만의 경우 다른 무대에서 아침이슬을 불렀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을 뻔한 적도 있다. (1978.4.1 동아일보)

여담으로 북한중학생들과 대학생들이 1990년대에 전국적으로 널리 부르던 곡이라고 한다. # 심지어 탈북자 출신의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의 블로그에 따르면 북한에서 군 생활 당시 훈련받을 때도 이 노래를 합창했다고 하니, 한국에서는 금지곡인 노래였지만 북한에서는 상당히 대중적인 노래였던 것 같다.[6] 하지만 유행했던 시기가 하필 고난의 행군 때여서 이 노래가 전국적으로 유행하자 북한 지도부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바람에 1998년에 금지곡이 되었고, 현재 아침 이슬을 부르다 당국에 걸리면 강제노동형에 처해진다고 한다. 역시 극과 극은 통한다. 인민의 소리 방송[7]에서는 이 노래를 약간 개사해서 내보낸다. 이 노래 부른다고 잡아갈 땐 언제고?(...) 심히 골룸한 건 이 방송은 배경 음악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도 내보낼 때가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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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도 애매한 해석인 것이, 묘지는 부정적인 시어이고, 태양이 떠올라서 한낮이 되었을 때 시련이 찾아오므로 이 가사에서는 태양 역시 부정적인 시어이다. 김일성 개새끼!
  2. 음악평론가 강헌의 평론에 따르면, 대중들에게 아침 이슬을 선동적인 분위기의 민중가요로써 각인시킨 것은 이미자로 대표되는 1960년대 기존 여성 보컬의 우수에 젖은 목소리에서 과감히 탈피해 비브라토를 극도로 절제하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노래한 양희은의 아침 이슬이라고 한다.
  3. 1970년대의 트로트에서부터 오늘날 한국 발라드에도 주로 사용되는 구조인 메인 테마(A)-변형 테마(A')-클라이맥스(B)-메인 테마(A)의 구조이다.
  4. 심지어 2절도 클라이맥스(B)부터 반복하지, 결코 메인 테마(A)로 돌아오지 않는다. 안드로메다행
  5. 당시 군중들의 연령대가 10대 고등학생부터 40대 장년층까지 다양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다 같이 아는 노래가 드물었다고 할 수 있다. 신촌 로터리부터 시청 앞까지 늘어선 100만명의 군중이 동시에 아침 이슬을 합창할 수는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돌림노래가 되었는데, 그 광경이 진히 장관이었다고.
  6. 그러나 남한의 노래라는 사실은 남한에 오고 나서 알았다고 하며, 북한에서는 대남선전용으로 제작한 노래라고 알려졌다고 한다. 오오 유신정부의 선견지명 금지곡 해석 오오 마찬가지로 김광석의 노래이면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삽입곡 중 하나인 '이등병의 편지'도 현재 북한에서 징집을 앞둔 북한 젊은이들과 북한군 사병사이에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7. 자칭 '조선로동자총동맹'이란 북한의 지하 단체가 김일성 정권을 까는 방송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꾸며서 대한민국의 국정원에서 하는 방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