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리 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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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3년 북미 비디오 게임 위기
North American Video game crash of 1983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일어난 북미 비디오 게임 산업계의 대규모 경기침체 사건을 일컫는 말로, 1982년에 30억 달러까지 간 시장 규모가 1985년에 거의 3% 수준인 1억 달러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 사건이다.

2 상세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었으나 시장의 과포화(saturation)를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 보통 아타리 쇼크를 거론할 때는 '저질게임의 범람으로 화가 난 소비자가 게임 시장을 외면해서 벌어진 일' 정도로 사용하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또한 미국에서는 'Atari Shock'라 부르지 않는다. 아타리 쇼크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생겨난 것으로, 미국의 달러화 관련 정책으로 전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닉슨 쇼크'에 빗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85년에 뉴욕에서 런칭하여 87년에 전미에 선풍적으로 히트한 닌텐도NES 덕분에 북미 비디오 게임 시장은 다시 크게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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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요약 영상

크래쉬: 비디오 게임이 죽은 해
[겜프] 게임업계 최악의 사건, "아타리 쇼크" 이야기
제로 펑츄에이션E.T. 리뷰(자막 있음)
와빌의 그재무지: 게임이 죽은 날...'아타리 쇼크'

3 배경

1983년의 상황은 뭐랄까... 마치 건물이 무너지기 전 비상구로 달려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아타리에서 덤핑 경쟁에 뛰어들면서 모든 것의 종말이 오기 시작했죠. 이때부터 게임산업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 짐 레비, 액티비전 회장 -

정말이지 게임 업계에 지독한 세월이었습니다. 너무나 끔찍했죠. 애플 II 게임을 내놓더라도 1만 5,000개를 팔기 힘들었습니다. 일렉트로닉 아츠를 시작했을 때는 카트리지 게임이나 플로피 디스크 게임을 만드는 회사가 130여 곳이나 되었지만, 그 중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회사는 불과 6곳뿐입니다.(1983년 아타리의 몰락 이후 상황)

- 트립 호킨스 -

3.1 아타리의 탄생과 성공

놀런 부슈널은 1972년 6월에 아타리라는 회사를 만들었고, 같은 해 11월에 을 내놓았다. 그는 퐁을 통해 비디오 게임 비즈니스라는 영역을 개척하여 게임의 아버지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1976년부터는 게임기 개발에 착수했다. 같은 해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에 2800만 달러 이상의 막대한 자금을 받고 회사를 매각했고, 1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투입한 끝에 77년 아타리 2600을 9개의 런칭 게임과 함께 발매했다.

놀런은 공격적인 경영을 위해 회사를 워너에 매각했으나, 워너와의 불화로 1978년에 5년 동안 동종업계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회사를 떠났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아타리 2600은 그 기기 수명을 3년으로 보고 있었고, 메모리 가격이 저렴해지면 새로운 고성능 기기를 발매하길 바랐지만, 1억 달러 이상이나 쓴 제품이 겨우 팔리기 시작한 때에 그 제품을 버리자는 것도 황당한 소리이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놀런은 비디오 게임을 할 수 있는 피자 체인을 시작으로 이것저것 사업을 늘려나갔지만 아타리 같은 새로운 비디오 게임 회사를 만들지는 않았다.

아타리 2600의 성적은 그저 그랬다. 기계가 너무도 조악하고 불량이 많아 반품되기 일쑤였다. 1978년에 워너는 놀런을 해고했고, 섬유 업계에서 활약하던 레이 카사르(Raymond Edward Kassar)를 아타리의 CEO 자리에 올려놓았다. 레이는 아무 것도 없던 개판 오분전의 아타리를 재정비하고 크게 성장시켜 놓기에 일조했다. 아타리의 판매량은 매년 두 배씩 증가하여 79년 크리스마스에는 1백만대가 팔렸고, 타이토의 대히트 아케이드 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아타리용으로 이식하여 1980년 1월에 발매했다. 이때부터 아타리는 여전히 재고로 쌓여 있던 하드웨어의 매출이 두배 이상으로 늘면서 80년도 한 해에만 2억 달러 이상 성장했다.

3.2 서드파티의 탄생

아타리에 서드파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들이 독점했다. 그러나 개발자들에게는 금전적 보상은커녕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1] 물론 아타리가 크게 성장하기 시작한 해는 1980년부터지만 개발자들은 여러모로 참을 수 없었는지, 1979년 5월에 아타리의 프로그래머 몇명은 레이 카사르에게 자신들을 레코드 레이블 처럼 판매량에 따른 로열티와 게임에 이름을 올릴 수 있기를 요구했다. 이들은 카사르가 자신들을 '타월 디자이너'라고 불렀다거나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다'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회사를 떠나 79년 10월에 액티비전을 창업했다.

80년도 이전의 아타리에는 이렇다 할 히트작이 없었다. 판매량으로도 그렇고, 높은 평가를 받은 명작들을 나열해 봐도 80년대 이전 게임들은 순위권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액티비전에서 만든 게임들은 판매량과 평가 면에서 모두 상위권에 들어가는 아타리 게임들을 진짜로 개발했다. 하드웨어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은 물론이고, 슈퍼 마리오의 선조격으로 불리는 피트폴이 바로 액티비전 작품이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이 서드파티였다. 아타리에서는 서드파티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자신들 밖의 다른 누군가가 아타리로 게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서드파티 개발사들에서는 기기를 분해하고 역어셈블링 같은 리버스 엔지니어링으로 아타리 게임기를 연구하여 허락도 받지 않고 게임을 멋대로 개발했다. 아타리에서 할 수 있던 것은 오로지 소송뿐이었고, 1982년에 아타리가 패소하여 결국 로열티를 받는 조건으로 화해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아타리에서는 다른 개발사에 플랫폼을 개방한 적이 없다. 저질 게임을 양산하는데 아타리에서 독려를 했다는 주장은 당연히 거짓이 된다. 퍼블리셔 'Mystique'에서 나온 일련의 포르노 게임들도 퍼블리싱과 서드파티에 대한 아타리의 통제력이 얼마나 없었는지 잘 보여주는 반증이다.

3.3 멸망의 전조

하지만 아타리라는 금맥을 향한 골드 러시는 이미 한창이었다. 그래도 액티비전은 제대로 된 게임이나 만들어 냈지만 그렇지 않은 곳들의 모습을 잠깐 살펴보자면...

  • 14개의 아타리 2600 게임을 낸 US GAMES는 식품회사 Quaker Oats[2]의 게임 개발 부서였다.
  • 11개의 아타리 2600 게임을 낸 Apollo는 커리어 컨설턴트용 영상음향 교재를 만들던 회사의 자회사였다.
  • Spieder Maze와 Vulture Attack을 퍼블리싱한 K-tel은 컴필레이션 음반 전문 회사이다.

게임에 관심도 없는 회사들에서 게임 사업에 뛰어드는 것이 그렇게 대수는 아니라고 쳐도, 이때는 정도가 해도해도 정말로 너무했다. 게임을 통해 한탕 쳐보려는 족속들이 너무 많았고, 이런 업체들에서 쏟아낸 게임 같지 않은 게임들이 시장에 대혼란을 야기했다. Kool-Aid Man이라는 음료수 캐릭터를 이용한 광고 게임도 그런 주류의 한 축이고, 남의 게임을 뻔뻔하게 베껴 파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한 게임이 4번쯤 복제되는 것은 놀랍지도 않았으며, 그런 똑같은 게임들이 콜레코비전인텔리비전, 그 밖에도 벡트렉스(Vectrex)[3]라든가 페어차일드 채널 F(Fairchild Channel F)[4] 등등 갑자기 쏟아진 경쟁 기종별로 또 똑같이 등장했다.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 북미 게임계는 계속 성장중이었고, 1982년에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막대한 성장이 모두의 눈을 가리게 만들었고, 아타리의 셀 수 없는 미스 사이에서도 중대한 미스를 불러오게 만들었다.

아타리에서는 급성장으로 수요예측을 감당하기 어려워 1981년 10월에 각 도매상에 1982년에 판매할 수량을 미리 주문하도록 만들었다. 그때는 아타리도, 증권가도, 소매상도 모두 성장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다들 미칠 듯한 물량을 써냈고, 그렇게 결정된 것이 팩맨 1200만개라는 주문량이다. 마치 일본의 버블경제 같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1982년 3월에 팩맨이 발매되고, 무려 700만 개가 판매됐다. 하지만 5백만개는 고스란히 남아 크나큰 부담이 되었고, 당연히 조악한 품질로 반품되어 돌아온 것은 덤이다. 그래도 팩맨은 나중에 Ms.Pac-man으로 일부 만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2년 6월까지는 누구도 성장을 의심하지 않았고, 증권가 역시 최대 300% 성장이라는 분석안을 내놓아 장작을 쌓는 데 보태었다.

북미 게임계 최고 전성기인 1982년이지만, 비디오 게임 콘솔계는 경쟁자의 범람과 더불어 저가격 홈 컴퓨터와도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는 결국 시장 포화로 이어졌고, 뒤늦게 우후죽순 끼어든 서드파티들은 슬슬 탈락할 준비를 하고말았다.

결국 1982년 연말 시장 붕괴의 신호탄이 쏘아졌다. 12월 8일에 아타리에서는 4분기의 실적 예측을 낮춰 발표했고, 이것이 투자자에게 쇼크로 이어져 모회사인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의 주가 폭락을 촉발했다. 마텔, 콜레코 같은 경쟁사에서는 물론이고, 코모도어 같은 홈 컴퓨터 메이커에, 토이자러스 같은 유통 쪽까지 관련된 주식들은 모조리 곤두박질쳤다.

E.T. Christmas TV Spot - The Shadow - Atari Video Game Commercial - (1982) - Atari 2600/E.T의 크리스마스 TV광고 E.T.가 나에게 똥을 줬어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크리스마스 연말상전을 대비해 만든 비장의 소프트 E.T.#s-3가 화려하게 망하면서 아타리는 또다시 크나큰 손해를 입었다. 이는 당시 워너 회장인 스티브 로스의 탐욕으로 인한 무리한 시도이고, CEO인 레이 카사르 역시 반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7월에 제작이 결정되어 크리스마스까지 맞추기에 남은 시간이 고작 5주밖에 없던 게임이 좋을리가 전혀 없고, 5백만 개를 생산한 게임은 거의 팔리지 않거나 반품되어 돌아왔다.

3.4 북미 게임 시장 붕괴 1983 ~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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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 2013년, 2012년 기준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미국 게임산업의 통계(단위: 10억 달러)[5]

1983년에도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는 여전히 팔렸다. 도표참고 하드웨어도 6백60만대나 팔렸고, 게임 카트리지는 오히려 1500만개가 더 팔렸다. 콜레코비전을 만든 콜레코에서는 자신들의 기기는 별로 팔리지 않았지만 인텔리비전과 아타리에도 소프트를 공급해서 83년 8월에 8백만개의 소프트를 출하했다고 발표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렇게 팔린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먼저 포화상태가 된 시장에서 늦게 뛰어들었던 얼치기들이 도산을 시작했다. 그 다음에 도산한 회사의 게임 카트리지를 반품도 못하고 더 이상 둘 공간도 없게 된 소매상들이 게임 덤핑 판매를 시작했다. 그래서 대체로 30달러였던 가격은 보통 5달러, 심지어는 2달러까지 떨어졌다. 이어서 낮아진 가격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이 제 가격을 주고 게임을 사지 않게 됐다. 마치 번들 CD 경쟁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작년보다 1500만 개나 더 팔렸는데도 게임이 저렴하니까 수익이 오히려 더 감소한 것이다. 그리고 수익이 떨어진 개발사들은 정리해고 등으로 버티다 결국 줄도산으로 이어졌다. 본업이 게임이 아니었던, 인텔리비전을 개발한 마텔에서도 자사의 마텔 일렉트로닉스를 매각했으며, 콜레코비전을 개발한 콜레코에서도 자사의 전자기기 부서를 팔아넘겼고, Imagic은 신규주식모집을 단념하고 도산했다. 액티비전은 컴퓨터 게임으로 옮겨 목숨만은 겨우 부지했으나, 아타리에 참여하던 중소 게임 소프트 메이커가 거의 사라졌다. 83년 하반기부터 적자를 면치 못한 아타리도 84년에 컨슈머 부분을 분할하여 매각했다.

그렇게 2년 동안 게임을 만들 사람도, 게임을 팔아주는 사람도, 또 게임을 제 값에 사주는 사람도 모두 잃게 되었고, 북미 가정용 게임 산업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아케이드 게임도 비슷하게 하락세를 겪었으나 컨슈머 게임처럼 처참하게 몰락하지는 않았다.

3.5 일본의 세계 게임시장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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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 2013년, 2012년 기준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일본 게임산업의 통계(단위: 10억 달러)[6]
17 Best Old Nintendo Commercials

1985년에 닌텐도가 북미에 진출했다. 게임 시장 붕괴를 겪으며 게임이라면 넌더리가 나는 소매상의 눈치를 본 닌텐도에서는 '콘솔'이라는 단어 대신 Entertainment System, '게임 팩'이나 '컨트롤 덱'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장난감처럼 보이도록 로봇인 R.O.B.를 추가하는 등 어디까지나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이며 게임은 부가적인 요소라는 점을 강조하는 마케팅을 했다. 닌텐도는 이 사태로부터 아타리에서 서드파티 관리에 실패한 점을 반면교사로 삼아 북미판 패미컴에는 하드웨어적으로 락아웃칩을 도입하는 것부터 서드파티 라이선스 관리와 카트리지 제조를 직접 관리함은 물론이고, 각종 법적 제도적 장치까지 보완한 다음 북미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 Tengen이나 EA[7] 같은 업체들로부터 제멋대로 하겠다는 도전을 받았지만 모조리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닌텐도에서의 이런 일련의 작전이 성공하여 미국에서 '닌텐도를 하다'는 말 그대로 '게임을 하다'는 의미가 되었으며, 기존의 퍼스트파티들이 떠나간 탓에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엑스박스(게임기)가 나오기 전까지 미국의 가정용 게임기 시장은 한동안 닌텐도세가를 비롯한 일본 회사들이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아타리에서는 5200, 7800, 링스, 재규어 등을 내놓으며 연명하려 했지만 닌텐도가 75% 이상을 이미 독점했기에 결국 프랑스의 인포그램스에 매각되었고,[8] 이후 여러번의 떠돌이 생활을 하다 반다이 남코 게임스에게 사지가 다 뜯겨나갔다.

이후 미국의 게임 시장 환경은 콘솔보다 PC를 위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질 좋은 게임을 낸 서드파티 제작사는 많이 남아 있었고, 이들이 PC 환경으로 게임을 내놓으면서 미국의 자국산 게임 시장은 콘솔에서 PC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그리고 미국 게임 시장은 XBOX가 나온 2000년대 초중반까지 PC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성장을 하였고, 콘솔 못지 않은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켰다.

4 결론

  • 아타리에서 77년에 VCS를 발매했지만 잘 팔리지 않았다.
  • 아타리는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기점으로 1980년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 이윽고 수많은 회사에서 게임기와 소프트웨어를 발매하여 시장은 금방 포화상태가 되었다.
  • 아타리에서는 서드파티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통제 또한 할 수 없었다.
  • 메이커, 소매상, 주식시장의 낙관 속에 경영 미스가 남발되었다.
  • 공급 과잉으로 게임 가격이 폭락하여 소비자들은 게임에 제값을 치르지 않게 되었고, 이로써 많은 제작사가 도산했다.

5 제 2의 아타리 쇼크는 올 것인가?

아타리 쇼크는 게임이 범람하는 현 시대에 다시 한 번 조명받고 있다. 소셜 게임, 카카오 게임, 가챠와 DLC 등으로 게임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으며, 머지않아 소비자들이 이런 저질 게임에 질려 게임을 외면하고 게임 시장이 망할지도 모르니 제작사들에서는 정신을 차리라는 경고를 하며 아타리 쇼크를 인용하고 있다.

2010년대에 많은 게임 회사들이 수익만을 우선시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요 근래 거의 대부분의 게임 회사는 멀쩡한 게임을 여러개로 조각내 DLC로 비싼 값을 받고 판매하는 행각을 보여 비판받고 있고, 게임을 발매하기도 이전에 유료 DLC를 발표하거나 게임 발매와 동시에 유료 DLC를 함께 발표하는 등의 만행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으로 악명높은 기업이 캡콤. 이쪽은 진엔딩을 아예 DLC로 팔았다!

국내 게임 회사라고 크게 다른 것은 없다. 번들 CD 경쟁시대로 비틀거리던 패키지 업계가 와레즈의 직격타를 얻어맞으며 완벽한 침체기에 빠졌고, 마그나카르타 눈사태의 망령으로 업계 자체가 시원하게 망한 것이 그 시초. 이후 온라인 게임, 모바일 게임이 비중이 커지며 어느 정도 신뢰도를 되찾나 싶었더니 사행성 짙은 랜덤박스를 내놓기 시작하며 도로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랜덤박스를 돈 주고 사서 까도 아무런 아이템도 나오지 않거나 쓰레기와 다를바 없는 아이템을 내는 등의 말도 안되는 짓을 하다가 철퇴[9]를 두들겨 맞았고, 요 근래에는 있으면 좋지만 굳이 돈 주고 살 메리트는 없는 아이템들을 랜덤박스에 끼워서 팔아먹고 있다. 더군다나 모바일 시장은 더욱 심각한데, 중국산 양산형 RPG로 대표되는 비슷한 컨셉의 비슷한 게임을 대충 만드는 게임이 매우 늘어났다. 2015년 이후의 추세는 작중배경이라면 삼국지 아니면 판타지요, 장르라 하면 RPG 아니면 AOS라는 농담도 나올 정도니... 몇몇 사람들은 게임을 할 때 For kakao만 봐도 진저리가 난다고.

그 짓거리를 하다 또 확률형 아이템 규제 법안이라는 철퇴를 두들겨 맞아 이번에는 랜덤박스의 아이템별 확률이 공개됐는데, 그 확률이 심히 막장스러워 유저들의 비난을 사고 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어도 게임사들이 지나친 사행성을 개선하려는 생각이 별로 없어 제 2의 아타리 쇼크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한 예시가 역사는 반복된다 문서에 기재될지도 모른다.

다만 아타리 쇼크를 그대로 답습하기는 어려운 것이, 스타크래프트 때부터 그랬듯 질의 해외 게임들이 이탈하는 수요를 흡수하면서 게임 시장을 장기적으로 잠식하고 있다. 이 때문에 현재 한국의 게임 시장은 아타리 쇼크라기보다는 잃어버린 10년에 가깝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ESD 활성화, 개발 도구 개선 등으로 이전에는 나오기 어려웠던 양질의 인디 게임이 쏟아지고 있고, 실제로 일부는 아예 장르 하나를 개척하기도 했다.

2016년 7월 6일에 서든어택 2가 출시되면서 한국 게임 업계에 대한 다양한 기사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찌꼭 시기도 5월 13일에 출시된 둠(2016), 5월 24일에 출시된 오버워치 이후라서 무엇보다도 같은 장르인 FPS 게임이라는 점에서 논란이 점화됐다.[10][11] 그리고 서든어택 2는 결국 멸망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양판소, MMORPG 그리고 카카오게임 등으로 자칫 아타리 쇼크가 재현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실제로 서든어택 2가 끝내 자폭 스위치를 건드린 탓에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실제로 현재 게임 시장은 랜덤박스를 중심으로 한 사행성 논란이 끊이지 않으면서 이 거품이 소멸하거나 정부에서 건드리는 즉시 붕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에 국내에서 아타리 쇼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국산 게임의 문제점들을 아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문제시하고 있는지가 오래다. 애국 마케팅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2010년대 현재는 해외산 대체 게임들이 때문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국산 게임들만 시원하게 망하고 유저들은 그냥 해외 게임으로 갈아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것은 대체제가 많지 않아 게임 시장 전체가 급격히 침체되는 아타리 쇼크와는 완전히 다른 경우로, 사실 국내 게임의 유저 이탈은 쇼크라 할 것도 없이 이미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다.[12]

나무위키의 서술만 보면 제2의 아타리 쇼크는 이미 여러 번 일어났어야 한다

6 다큐멘터리 팀의 E.T 팩 발굴

아타리에서 사막에 묻은 게임팩들은 주변에 사람들이 가져가려 하고 굳어버린 시멘트를 뚫어 파내기도 하였다. 이 E.T.가 묻어진 곳을 찾으러 가는 영상도 있다.[13]

Wintergreen "When I Wake Up" Dir: Keith Schofield (업로드된 날짜: 2006. 3. 9.)

아이러니하게도 이 생매장에서 살아난 E.T. 게임은 상당히 고가에 거래된다고.[14] 그러나 아무도 실제로 묻혀 있는 것을 보거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도시전설화되어 가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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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avating the Atari E.T. Video Game Burial Site-Game|Life-WIRED

2014년 4월에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지원하는 다큐멘터리 팀에서 뉴멕시코에서 30년 동안 묻혀있던 E.T.와 팩맨 카트리지를 발굴해 냈다. 영상의 압권은 1분 20초 즈음에 나오는 E.T. 제작자. '여기 카트리지가 있을 리 없다'라고 하다가 정말 나오자 경악하는 장면이 인상적.# 링크 기사에 좀 더 많은 발견 당시의 사진이 있다. 한국 넷플릭스에 "아타리: 게임오버"라는 제목으로 검색하면 위의 다큐멘터리를 시청 가능하다.[15]

사실 E.T. 제작자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고 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곳은 제작자가 알는 곳이 아니며, 텍사스 주에 있던 아타리의 제조공장을 이전하면서 남은 잉여물품들을 버린 곳이다. 한마디로 팩맨과 E.T.가 잉여물품에 섞여 있던 것. (관련영상) 뉴멕시코에서 파낸 카트리지들에서 E.T.는 10% 정도를 차지하고, 아타리 게임팩들이 이것저것 잔뜩 나왔다고 한다. 단순히 악성 재고를 한꺼번에 폐기한 것으로 보인다.

7 관련 문서

8 관련 내용

  1. 당시에 아타리의 <Adventure>(1979)를 만든 워렌 로비넷은 비밀의 방에 들어가면 자기 이름이 나오는 이스터 에그를 만들었다고 한다. 미로 속 어딘가에 열쇠가 숨어있는데, 작은 회색 점 모양의 열쇠를 찾으면 자신의 이름을 몰래 숨겨둔 비밀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비디오 게임 첫번째 이스터 에그로 알려져있다. 이 에피소드는 어니스트 클라인의 놀라운 소설 <Ready player one>(2011)에도 소개되어 있다.
  2. 간혹 한국 수입식품점이나 미군PX 유출품으로도 볼 수 있는, 퀘이커교도의 얼굴이 새겨진 그 오트밀 만드는 회사. 한때 게토레이도 여기서 생산하였다.
  3. 벡터 그래픽을 기반으로 둔 콘솔.
  4. 아타리 2600보다 1년 앞선 1976년에 출시되었다.
  5. 1982년 이후 급격히 그래프가 내려간 모습. (빨간색 선) 참고자료.
  6. 아타리 쇼크가 터진 1982년 이후 급격히 그래프가 올라간 모습. 이후 게임시장은 한동안 일본이 점령한다. 참고 자료.
  7. 세가를 협박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8. 브랜드 명칭만 산 것이다. 아타리 회사 자체는 일찌감치 공중분해되었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아타리는 1984년에 아타리 게임즈와 아타리 소비자 가전이라는 두 회사로 분리되었고, 이중에서 아타리 게임즈는 폐업했으며, 아타리 소비자 가전은 JTS라는 하드웨어 제조사에 팔려 그 회사의 한 부서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1998년에 완구회사인 해즈브로에서 JTS로부터 아타리라는 브랜드에 대한 권리를 사들여서 아타리라는 이름의 자회사를 설립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2001년에 프랑스의 인포그램스에서 해즈브로를 통째로 사들이면서 아타리 역시 인포그램스의 소유가 된 것.
  9. 랜덤박스에서 나오는 결과물이 랜덤박스를 구매하는 값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물품이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생겨났다.
  10. 다만 오버워치, 둠(2016), 그리고 서든어택 2는 게임성부터가 서로 다르다. 그래도 2007년에 발매된 AVA보다 못한 그래픽과 전작보다 나아지지 않은 게임성은 문제가 크다.
  11. 사실 서든2가 혹평받는 가장 큰 이유는, 오버워치의 출시시기와 겹친 것보다는 괴악한 그래픽과 이상한 데 몰빵시켜 비웃음거리가 된 물리엔진, 넥슨다운 사행성, 캐릭터들의 알 수 없는 설정, 남캐에 비해 지나치게 후한 여캐들의 능력치, 과도한 섹스어필과 그로 인한 게임의 간판급 캐릭터 둘의 삭제라는 넥슨의 무리수 등등 까도까도 계속 나왔을 정도.
  12. 즉, 아타리 쇼크는 게임 시장 전체가 무너지는 것을 말하는데, 한국에서는 한국 게임만 무너지고 있다. 2016년 7월 현재 PC방 점유율에서 해외 게임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을 가볍게 넘긴다. 당장 1, 2위에 위치한 오버워치와 리그 오브 레전드는 전부 해외 게임이며, 이 둘의 합만 따져도 60%를 넘는다.
  13. 영상에 간단한 사전 정보도 나온다.
  14. E.T. 카트리지를 워낙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중고로 구하는 건 의외로 쉽다.
  15. E.T. 제작자 인터뷰가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고 상당히 지루한 편이니 적당히 스킵하면서 보길.
  16. E.T. 프로젝트에 반대했으며, 경영자로서 회사의 성장과 책임감을 다했다고 볼 수 있는 내용이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