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아타튀르크에서 넘어옴)

Mustafa Kemal Atatürk


아타튀르크 서명의 변천사. 초기에는 직함과 그의 이름인 '무스타파'의 m(밈)과 '케말'의 k(카프)를 따온 아랍문자를 서명으로 쓰다가 문자개혁 이후 변형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최종적으로 정착한 서명은 K. Atatürk라고 쓰여있다.

1 개요

터키를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구하고 재건해낸 현대 터키 공화국국부이자 술레이만 대제이래 터키 최고의 먼치킨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이슬람 학자들이 철천지 원수로 인식하는 대상 중 하나.[1]

이 사람이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튀르크 민족의 나라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부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인물인데, 그것은 아타튀르크 라는 이름의 뜻(튀르크 민족의 아버지)에서부터 엿볼 수 있다. 이 이름이 생기게 된 자세한 경위에 대해서는 아래에 서술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 분이 현대의 터키의 모든 근간을 세웠다고 보면된다.

1881년 5월 19일 셀라닉 빌라예트[2] 테살로니키[3] 출생, 1938년 11월 10일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사망. 오스만 제국 육군장군이자 갈리폴리 전투터키 독립전쟁의 영웅.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1923년부터 1938년 사망할 때까지 15년간 재직했다. 암울한 상황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정치인으로써 사회 체계와 문화를 정비하여 현대 국가인 터키 공화국의 기틀을 다진 인물. 그리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인물.

특히 정치인으로써 식견이 뛰어났는데, 구태적이었던 이슬람 문화권 출신의 인물임에도 정교분리를 추구했으며, 당시 앞서나가던 유럽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 서구화를 단행하였다. 문자를 정비하여 문맹률을 크게 낮추고 여성 인권을 높였다. 외교에 있어서도 국제정세를 잘 이해한 유능한 지도자였다. 다만 쿠르드인 학살 및 탄압,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도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다. 밑에 비판 항목을 참고할 것.

당시 오스만 제국령이던 그리스의 테살로니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알리 르자 에펜디(Ali Rıza efendi)는 세무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쥐베이데 하늠(Zübeyde hanım)이라는 여성이었다.[4] 조상에 대하여 여러 말이 많은데 뉴스위크 지는 그의 아버지가 알바니아계로 추정된다고 보도한 적도 있다. 그의 어머니는 조상이 터키 출신이다. 또는 그리스에선 그리스계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그리스나 터키에선 헛소리로 무시한다. 어쨌든 그의 부모 모두 터키어를 썼고 이슬람을 믿었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은 본래 별명으로 '완전무결'을 뜻하는 아랍어 '카말(كمال‌‎)'에서 유래한 말인데, 그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 수학 선생님이 그의 뛰어난 수학실력에 감탄하여 이런 별명을 붙여줬다는 일화가 전한다. 터키 공화국 수립 후 모든 사람에게 성을 쓰게 하면서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쓰게 되었다. 터키에서 고위 관료에게 쓰는 경칭인 '파샤'를 붙여서 케말 파샤(Kemal paşa)라고도 부른다. 1990년대 이전의 한국 세계사 교과서나 언론 매체에서 이 이름으로 표기되곤 했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케말 파샤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가지(Gazi)라는 호칭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터키 독립전쟁당시 대국민의회가 준 칭호로 '신앙의 수호자'를 의미한다.[5] 때문에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쓰기 전에는 그를 '가지 무스타파 케말 파샤(Gazi Mustafa Kemal Paşa)'라고 불렀었다.

'아타튀르크(Atatürk)'는 '튀르크인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원래는 터키 국민 의회에서 받은 성씨이지만 끝내 이 성씨를 물려받을 사람을 남기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결국 이 사람을 뜻하는 고유어로 정착된 것[6]. 자칭이 아니다. 뒤에 투르크메니스탄 독재자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도 '튀르크멘바시으(Türkmenbaşı)'라는 명칭을 스스로 붙였는데 바로 아타튀르크와 비슷한 의미[7]이기에 이를 두고 터키에선 엄청 비웃었다. 소문으로는 원래는 아타튀르크라고 붙이려고 하다가 터키에서 협박하니까 튀르크멘바시으로 붙였다는 말도 있다. 현재는 이 성씨를 쓰지 못하게 법으로 제한이 되어있다고 한다.(...) 참고.

2 생애

2.1 장교 시절

7살때 아버지인 알리 르자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라그프 베이(Ragıp bey)라는 무역상과 재혼했다. 라그프는 무스타파와 누이동생인 마크불레에게 잘 대해줬지만 그는 자신이 일하는 무역업체에서 후계자처럼 따르길 바랬고 군인이 되려던 무스타파와 충돌을 빚었다. 결국 부모에게 아무 말없이 1893년 육군유년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하자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3년 뒤에 육군군사고등학교로 들어가서(여기서 수학선생이 케말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줬다.) 공부했고 육군사관학교를 거쳤다.

육군 소위로 임관된 것이 1905년 일이었다. 꽤 늦게 장교로 임관했던 이유는 1902년에 소위로 임관될 것을 마다하고 다시 왕립육군사관학교에서 전문사관학교를 재학하면서 더 배우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소위 임관은 늦었지만 재학생 및 성적 우수 특혜로 곧 중위로 진급했다. 참고로 그가 공부했던 왕립육군사관학교(Mekteb-i Harbiye-i Şahane)는 현재 무진장 화려하고 다채로운 컬랙션을 자랑하는 터키 군사박물관이 되어 있으며 아타튀르크가 수업했던 교실도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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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육군사관학교에서 아타튀르크가 수업했던 교실의 모습. 맨 앞에 홀로 앉은 아타튀르크의 상 옆에 앉아서 기념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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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튀르크의 소위임관 당시 기념으로 찍은 사진, 샌드아트 왼쪽부터 아타튀르크의 여동생 마크불레, 어머니 쥐베이데 하늠, 오른쪽이 청년 아타튀르크이다.

시리아 주둔 부대로 들어갔던 아타튀르크는 진보적인 태도를 보여서 보수적인 상관들에게 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조국과 자유(Vatan ve Hürriyet)'라는 비밀 단체에 가입했다. 이 단체는 술탄 압뒬하미드 2세의 보수정책에 반대하는 젊은 군인들이 대거 가입했는데 동기인 이스마일 엔베르도 여기 가입하여 알게 된다. 1908년에 대위로 진급하였으며 당시 오스만 제국령인 리비아 주둔 부대로 전속되었고 1910년에 리비아로 쳐들어온 이탈리아군과 오스만 제국군의 전쟁에도 참여했다. 소령으로 진급된 그는 1911년 리비아 투브루크 전투에서 2백명의 오스만 군을 거느리고 2천명이 넘는 이탈리아군을 물리치면서 훈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리비아를 넘겨주고 이탈리아와 전쟁을 끝내자 그는 분노했다. 곧이어 터진 발칸 전쟁에 참전하여 1913년 불가리아군을 물리쳤고 이 공로로 중령까지 진급했다. 그는 1914년 불가리아 주둔 주재무관으로 임명되어 불가리아에서 지내게 되었다.

리비아 주둔 시절에 현지인 코스프레차림을 한 모습 (1911년)소피아 주재무관 시절에 예니체리 복장을 하고 파티에 나갔을 때 찍은 사진 (1914년) 이건 진짜 코스프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오스만 제국은 전쟁에 참전하고 그도 어쩔 수 없이 전선에 나선다. 대령으로 진급된 그는 영국군이 상륙해서 오스만 제국을 점령하려고 하자 이를 갈리폴리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전공을 세우고 군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이 공로로 장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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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폴리 전투에서 전선을 시찰하는 모습 (1915년)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 제국 본국이 무너지고, 우리가 이젠 노예가 되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제군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살아남기 위하여 싸워라가 아닌 죽기 위하여 오늘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는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을 지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들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있으리라."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준장이 된 그는 에디르네 방어전에서 연합군을 막아내면서 소장으로 진급했고 캅카스 전역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치면서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겨우 3년에 쾌속진급으로 36살 나이로 오스만 제국 육군 7군단장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다른 전선에서 오스만 제국군은 계속 밀려났고 결국 1차대전은 패배로 끝나게 된다.

2.2 터키 독립전쟁

1차 대전이 끝나고, 연합국은 독일편에 섰던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려는 시도를 했다. 연합국은 세브르 조약을 맺어서 수도 이스탄불과 그 주변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는 것이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외치는 그리스가 소아시아로 진군해왔기 때문에 터키는 멸망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당시 야사로 영국 육군 장교들과의 에피소드가 있다. 이스탄불을 점령한 영국 육군 장교들이 한 호텔에서 술을 마시는데, 무스타파 케말을 보고 자신들의 테이블로 와서 한 잔 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자 케말은 "이 곳(이스탄불)은 우리 땅이오. 그러니 당신들이 내 테이블로 와야지."라고 말했다고.

1919년 5월 19일 무스타파 케말 에펜디 중장은 술탄의 명령으로 삼순(Samsun)항으로 오게 된다. 그가 맡은 임무는 술탄에게 거역하며 소규모적인 저항을 벌이던 군대 진압 및 민족주의 단체 해산이었다. 그러나 삼순에 도착한 그는 되려 휘하 병력을 이끌고 토벌하려던 군대와 합류하게 된다. 이 와중에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는 이스메트 이뇌뉘 대령(İsmet İnönü, 1884~1973)[8]을 만나게 되면서 그도 합류하게 된다. 이래서인지 삼순 시는 아예 도시 상징물이 말을 탄 아타튀르크 모습이며 연고지 축구팀인 삼순스포르 심벌도 이걸 따르고 있으며 삼순은 아타튀르크 지지자에겐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한편 술탄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Altıncı Mehmet Vahidettin)은 경악했다. 궐석재판을 열어서 케말 장군에게 사형을 선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기울어진 제국군 상부의 힘은 그를 잡을 힘도 없었고 여론과 많은 군대들은 너도나도 할 거 없이 앞다퉈 그에게 합류하기에 바뻤다. 7월 8일 그는 이제 나는 오스만 제국군인이 아닌 터키 민주공화국의 군인임을 선언하며 스스로 제국군인이 아님을 선언했고 에르주룸(Erzurum)에서 공화국 대표자 회의를 가졌으며 8월에는 시바스(Sİvas)에서 항전결의를 한다.

1920년 4월 23일(이 날은 터키 공화국 건국기념일이다.) 케말 장군은 군사 요충지인 앙카라[9]에서 국민회의를 주최하고, 자신의 명성과 국민 정부의 명분을 바탕으로 군의 지지를 확보했다. 케말 장군은 우선 산발적인 전투로 소아시아 해안의 그리스군을 괴롭혔고, 이에 시달린 그리스군은 케말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소아시아 내륙으로 진공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군의 역량 한도를 벗어나는 무리한 작전이었다.

당시 그리스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는 승리만을 추구하고자 무리한 작전을 고집했고 13만에 달하는 그리스군이 파병됐으나 무리하게 전선을 넓히면서 제대로 보급을 받을 수가 없었다. 터키인들은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며 그리스군을 괴롭혔고 그의 뜻에 맞춰 많은 군대와 민병대가 손을 잡고 아르메니아프랑스 같은 다른 점령군들과 전투를 벌였다. 한편 터키 동남부의 도시인 아이은탑(Ayıntab)에선 프랑스 육군이 1년이나 압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샤힌 베이(Şahin bey, 1877~1920)가 이끄는 300여 민병대가 11개월에 걸친 항쟁 끝에 자신들보다 12배가 많은 프랑스 육군을 물리치면서 많은 피해를 입고 보급책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프랑스 육군이 물러서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 육군은 다시 장비와 병력을 새로 보강하여 여길 재공격했고 결국 압도적으로 밀린 상황(병력 수도 그렇고 무기와 총알도 부족했다)에서 샤힌 베이와 부하들은 모두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원 장렬하게 전사했다. 참고로 그는 군인이 아닌(젊은 시절 징병되어 사병으로 복무하긴 했다) 민간인임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신 활약이라고 할 수 있겠다. 뒤에 케말은 아이은탑(이 동네 사투리로는 안텝이라고 불렸다)을 찬양하면서 수호자라는 뜻을 가진 가지(Gazi)를 붙여서 지금의 가지안텝 시가 된다.

아르메니아군도 유수프 베야즈오울루(Yusuf Beyazoğlu, 1880~1956)가 이끄는 민병. 군부대에게 숫적 우세임에도 크게 밀려서 되려 아르메니아군이 민병대의 공격을 받고 후퇴해야했고 차례로 점령지를 다시 빼앗기고 물러나야 했다. 옛 아르메니아 수도 아니를 탈환하려던 아르메니아군은 베야즈오울루가 이끄는 부대에게 역습당해 2천명이 넘는 아르메니아군이 죽었는데 당시 아르메니아군 군이 1만 6천명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 피해는 엄청났다. 결국 아르메니아와 프랑스는 연전연패 속에 물러나야 했고 서쪽 카르스 지방을 지배하던 러시아군도 무사 캬즘 카라베키르(Musa Kâzım Karabekir, 1882~1948)가 이끄는 민병대와 군인들에게 고전하면서 오스만에서 물러서고 있었다. 결국 홀로 남아서 끈질기게 싸우던 게 바로 그리스군이었다. 이렇게 다른 부대가 맹활약한 가운데 케말은 그리스군과 총력을 다한 전투를 벌인다.

1921년 8월 23일부터 9월 13일까지 무려 3주일 동안 밤낮없이 양군이 계속 전투를 벌인 사카리아 전투(Sakarya savaşı)에서 총사령관으로 참전한 케말은 그리스군을 물리쳤으며 이 패배로 많은 전사자[10]를 내고 사기도 떨어진 그리스는 차례로 점령지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런 연전연패 속에 연합군은 케말에게 전령을 보내 세브르 조약을 재수정할테니 군대를 물러나게 하라고 했으나 당연히 케말은 씹었다. 그는 전령에게 세브르 조약 전면 무효가 아니라면 제의같은 건 집어치우라고 일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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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루프나르 전투 이후 이스메트 이뇌뉘와 기념촬영 (1922년)

1922년 8월 30일 퀴타히아(Kütahya) 근처의 둠루프나르(Dumlupınar)에서 그리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다. 니콜라오스 트리쿠피스(Νικόλαος Τρικούπης, 1869~1956) 중장이 이끄는 그리스군 19만 6천명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18만 군 및 민병대가 맞붙은 이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2300여명이 전사한 반면에 그리스군은 1만명이 넘는 전사자와 2천명이 넘는 실종자를 내고 압도적으로 패한다. 이 날은 터키에서 '승리의 날(Zafer bayramı)'이라 불리며 한국의 광복절과 비슷한 위상을 갖는 국경일[11]이다. 이후 국민회의군은 퇴각하는 그리스군을 추격한 끝에 그리스군의 본거지인 이즈미르 근처까지 진격한다. 9월 이즈미르에서 거주하던 오스만 인들이 대거 저항하면서 그리스계와 오스만계의 충돌이 벌어졌고 그리스군의 학살로 많은 오스만이 학살당하자 케말 장규과 이뇌뉘는 이걸 세계에 알린다. 이 학살로 그리스의 아나톨리아 점령은 정당성을 잃게 되었고 역습으로 오스만 전역에서 그리스계들이 보복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22년 11월 21일 스위스 로잔에서 새로운 회의가 열렸고 이젠 케말 장군과 국민회의 측은 정당한 정부로서 이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얻게되었다. 더불어 케말 장군은 술탄을 추방했으며 오스만 제국을 무혈로 멸망시켰다.

로잔 회의가 열리면서 전투는 일시 휴전되었다. 세브르 조약 완전 무효를 요구하는 케말과 국민회의 측 주장에 그리스는 반발했으나 프랑스와 아르메니아는 받아들이면서 물러서려고 했고 영국과 러시아을 비롯한 다른 연합군도 전쟁을 지겨워하면서 오스만 내에서 물러날 기회만 보고 있었다. 그리스는 트라브존을 비롯한 일부 지역으로 점령지를 줄인다고 물러났으나 케말은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1923년 2월 다시 전투를 재개한다. 이미 그리스군은 사기를 잃고 점령지를 겨우 지키거나 아니면 물러서는 소극적 자세로 나섰고 반대로 사기가 충천한 국민희의군은 계속 그리스군의 점령지를 하나둘 탈환했다. 결국 그리스도 아나톨리아 반도의 모든 땅을 포기한다고 물러나면서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을 새롭게 맺으며 전쟁은 끝났다.

이 전쟁의 승리로 터키는 1차대전 당시 아군이던 오스트리아-헝가리(여긴 영토 92%를 잃었다.), 불가리아와 대조적으로 많은 땅을 지켜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나라를 구한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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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3월 24일에 발간된 타임지에 화제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12]

2.3 엔베르와의 갈등

터키 공화국 건국 직전, 케말은 동갑내기 장교학교 동기인 이스마일 엔베르와 갈등을 빚은 적이 있다. 엔베르는 튀르크인의 제국을 다시 부활시키자는 야심에 젖어있었고, 케말은 이걸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지금은 너무 위험하고 이르다고 반대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나톨리아에서 다시 힘을 찾으면서 여기서 시작하자고 되려 엔베르에게 나를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이번에는 엔베르가 거부하고 떠난다. 결국 오스만 제국이 케말에 의하여 멸망하자, 엔베르는 유라시아로 건너가 튀르크계 나라를 통합하려는 원대한 꿈을 꾸지만, 오래가지 않아 그곳에 살던 튀르크인들과 갈등 속에 빚어진 내전에 휘말려 죽게 된다. 엔베르가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관여했던지라 아르메니아인이 저지른 암살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전쟁 와중에서 자세한 건 밝혀지지 않았다.

비록 케말도 민족주의자이기는 했지만, 케말과 엔베르는 방향성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케말의 정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터키를 근대적인 민족국가로서 만드는 것에서 한 발짝도 어긋난 적이 없다.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을 포함하는 식의 다양한 문화의 집단을 아우르는 제국은 내재적 동질성을 지닌 근대적 민족국가와는 상충하는 것이었으므로 터키인들의 국가라는 케말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가히 이슬람주의자들의 원수 또한 케말의 외교정책은 1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하고 2차 세계대전의 참전도 거부하는 등 터키가 전쟁이나 외부의 간섭으로 국가 형성에 방해받는 사태를 방지하는 것을 지향했으므로 중앙아시아 지역에 분쟁을 야기하고 러시아 등의 반발로 열강의 간섭을 불러올 수 있는 정책에 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2.4 터키의 초대 대통령 / 서구화 개혁

1923년 10월 29일 터키 공화국 수립과 같이 초대 대통령이 된다. 새로 성립된 터키 공화국에서 케말은 공화인민당을 창당하고[13], 강력한 정교분리, 세속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1300여년간 지속된 칼리파 제도를 없앴고, 미국인 교육개혁자인 존 듀이를 초빙해 자문을 얻고 여성교육 및 근대교육 정착에 힘쓴다.[14] 1926년에는 샤리아를 금지했고, 1928년 11월 3일에는 복잡한 아랍 문자 대신에 알파벳을 쓰는 라틴 문자를 채택하는 언어개혁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서구식 정부 제도를 받아들였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가 살던 B612 소행성을 발견한 터키인 천문학자 이야기는 당연히 아타튀르크 개혁 제도를 모델로 쓴 것이다. 터키 옷차림으로 나와 소행성 발견을 국제 천문학자 회의에 나가 말하던 걸 무시당한 그 학자가 11년 뒤 양복을 강요하는 터키 독재자 때문에 서구풍 양복을 입고 같은 자리에 나와 이야기하자 다들 믿어주었다는 이야기인데, 어린 왕자에서는 옷차림 따위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풍자하는 내용이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케말이 서구화 개혁을 밀어붙인 이유 중 하나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셈이기도 하다.

그 결과 케말의 서구화 정책은 터키를 이슬람권에서 가장 개방적인 나라로 만들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공화파와 이슬람 세력 간에 충돌이 있었고 그 와중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터키의 노벨문학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저서 ''이 이 갈등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

이러한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와 민족주의 정책에 반발한 이슬람 학자들도 (몰래) 아타튀르크를 욕하고 다녔다. 이런 진영에서 아타튀르크는 그야말로 이슬람을 파괴하고 서구의 무신론적 세속주의를 받아들이고, 터키의 이교도적 문화를 부흥시키려 한 악마 취급을 당한다..

러시아로부터 카르스, 아르다한, 베숨 주를 돌려받았고 1930년에는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더불어 여군 사관학교를 인정하였고 미군이 선정한 20세기 세계의 명 조종사 100인에서 유일한 여군으로 들어간 사비하 괵첸(Sabiha Gökçen) 공군대령이 바로 아타튀르크가 여군사관학교 공군부 수석으로 높게 인정하고 양녀로 받아들였던 인물이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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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biha Gökçen 1913.03.22~2001.03.22 정확하게 딱 88년 살았다. 그녀의 이름을 딴 국제공항이 이스탄불의 아시아 지역에 있다.

그 외에 이슬람 전통모자(페스)도 금지시켰다. 이집트 방문시 그 모자를 쓴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것에 화를 냈을 정도.

2.5 터키문자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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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터키문자를 시연하는 아타튀르크 (1928년)

라틴 문자를 도입한 것은 터키어를 표기하는 합리적인 문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랍 문자라서 문제이고, 라틴 문자가 좋다는 문제가 아니다.

알타이어 계통에서 시작한 터키어는 고대에는 초기 돌궐 문자로, 중세에는 위구르 문자로 기록되었는데, 13세기부터는 몽골어 어휘와 페르시아어 어휘가 터키어에 유입되었다. 여기에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아랍어가 정식 언어가 되어서 어랍어의 영향을 많이 받아들였고 표기 문자 역시 아랍 문자로 갈아탔다. 하지만 아랍 문자는 자음 문자에 비해 모음 표기 문자가 적었기 때문에 터키어 표기에는 적절치 않았고 그 결과 불필요한 자음 표기는 너무 많고, 터키어에 필수적인 모음 표기는 터무니 없이 부족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1927년 조사에 의하면 당시 터키인중에서 아랍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7%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케말 파샤는 아랍 문자 29자, 페르시아 문자 4자를 폐기하고 라틴 문자를 도입하는 언어개혁을 벌인 것이다. 여기에 만들고 땡이 아니라, 입말에서도 아랍어와 페르시아식 표현 대신에 터키어의 고어와 방언을 살리고 서구식 어휘를 차용해서 새로운 터키어의 기본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문자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초등학교를 만들었고, 성인에게도 4개월간 강습을 받게 하였으며, 학교가 없는 마을에는 순회학교까지 개설했다. 그리고 케말 자신이 순회학교에 나가서 순회학교 일일교사가 되어 문자 교육까지 하는 노력도 보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 1935년의 조사에서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200만명이 넘게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케말은 알파벳 행진곡이란 노래까지 직접 작사, 작곡을 하고, 이걸 초등학교 교과과정에 그대로 넣으려고 했지만, 불과 하루만에 "내가 만들었지만 진짜 별로다"라는 평가를 내려 그대로 폐기시켰다.(....) 아타튀르크의 흑역사중 하나.궁금하면 직접 들어보자.

여기에 대해서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데 이 문자개혁 직전에 터키어 학자, 다른 국가 어학자들[16]이나 정부에서는 정착까지 약 2~3년 걸릴꺼라고 봤고 그때까지는 혼란방지와 터키국민들이 익숙해질때까지 터키 새 문자-아랍 문자 병행표기를 해야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케말은 "몇개월 정도 해보고 아니면 말든지"(....)란 태도로 혼용없이 바로 새 문자체제로 들어갔는데 의외로 혼란은 그렇게 크지 않고 아주 빠른 속도로 터키 사회에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국민들이 "존경하는 가지[17]께서 우리를 위해 문자를 만들고 개혁한다는데 당연히 따라야지"란 생각으로 이 문자를 배우려는 열의가 너무 커서 가능한거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아타튀르크를 비롯한 터키 교육부, 공무원들의 쎄빠지는 노력은 말할것도 없고(......)

2.6 국제정세 식견

국제정세를 바탕으로 한 식견도 대단해서 제2차 세계대전에도 추축국 편에 서지 말 것을 당부했고, 당시 국제적으로도 평이 나쁘지 않았던 히틀러에 대해서도 제 정신이 아닌 인물이라고 평해서 그 본성을 꿰뚫어 보았으며 무솔리니에 대해서도 "자기 국민의 손에 목이 매달릴 놈이지."라고 평했다.[18][19]이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죽기 전에 머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급의 전쟁이 발발할 것이며 그 전쟁에 미국이 필연적으로 참전하게 될 것이고 미국의 손에 종결될 것이라 예상했다. 어째 이리 다 맞추냐 터키는 애초부터 독일과 가까이 지냈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동맹을 맺다가 전범국/패전국으로 낙인찍혀 그것이 영토 상실 및 오스만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었다. 히틀러는 과거 동맹이던 터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했고, 나치 간부들이 계속 터키를 꼬드겼으나, 독일과 엮어서 좋은 꼴 못 본 경험도 있던 터키는 미국에 줄을 서서 연합국 쪽에 들어간다. 아타튀르크 사후, 2차대전 당시엔 터키는 소련을 좀더 경계하고 있었고, 터키가 한국 전쟁에 파병한 것 역시 당시 터키가 공산주의 및 소련을 적대시했었던 게 이유이기도 했다.

2.7 조국을 위해 자손을 남기지 않음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 직계 자손도 남기지 않았다.[20] 공화국 수립 이후 라티페 우샤키(Latife Uşşaki, 1898~1975)라는 여성과 1923년 결혼했지만 자신이 자손을 남기게 될 경우, 이미 터키 국내에서 영웅시되고 있는 자신으로 인해 자신의 자손들이 대대로 대통령을 해먹고 독재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끝에 2년만에 이혼하였다.

사실은 부부간의 문제도 있었다. 케말 아타튀르크는 카리스마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매력도 상당했던지라 그에게 목숨을 건 여자가 몇 있었다. 케말 아타튀르크의 오랜 애인이었던 한 여자는 의붓아버지의 친척이었는데 케말 파샤에게 버림받자 정신이상을 일으켜 그의 집에서 자해해서 피흘리는 것을 경호원들이 발견해서 옮겼을 정도다. 한편, 이혼했어도 우샤키는 아타튀르크를 사랑했다면서 27살 젊은 나이임에도 다시는 재혼하지 않고 50년 동안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늘그막에 찾아온 기자가 "소문으로 당신이 숨어 산 게 아타튀르크에 대한 가정사를 털어놓을까봐 협박당해서였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라고 하자 버럭거리면서 "냉큼 나가라! 그분께서는 그런 적도 없었고, 내 스스로가 괜히 나 때문에 그분이 곤란해할까봐 알아서 조용한 곳에서 산 것뿐이다!"라고 분노했다고 한다.

대신 양자와 양녀를 합해 8명을 들였다. 애초에 케말 아타튀르크는 결혼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 결혼에 대한 이 사람의 태도는 그냥 될대로 되라, 하면 하는 거고 말면 마는 거고, 그게 뭔 상관이야 이런 태도였고, 이런 태도는 그가 살아 있었을 때에 이미 주위에서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 위에 언급한 결혼도 공화국 수립 이후에 주위에서 하도 닦달하고 지지고 볶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주위에서 맺어준 여인이랑 한 것이다. 참고로 아타튀르크와 달리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나라를 세운 '창립자'들의 상당수는 괜찮은 업적을 남기고도 세습독재와 철권통치를 일삼는 경우가 보통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짐바브웨의 '독립투사 겸 독재 전문가' 로버트 무가베다.

2.8 죽음

파일:Kemal ataturk.jpg
아타튀르크의 말년모습. 참고로 터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타튀르크 사진 중 하나이자 터키 리라의 7차도안 중 10만, 25만, 50만, 100만리라, 500만리라, 1000만리라, 2000만리라권과 새 터키리라권에서 1,5,10,20리라권에 들어가있다.


아타튀르크가 사망한 돌마바흐체 궁전의 방에서 열리는 추도식.

격무에 시달리던 아타튀르크는 주치의의 만류에도 장기간 지방 시찰을 떠났고, 이로 인해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 결국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운명했다. 때문에 터키에서는 매년 11월 10일 오전 9시가 되면 5분간 묵념을 한다.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돌마바흐체 궁전이라든지 여러 문화유적지에서도 시계는 항상 이 시간에 멈춰져 있다. 또한 아타튀르크를 열렬히 사랑하는 가정에서는 시계를 이 시간에 맞추어 놓기도 한다고 한다. 죽은 후에는 자신의 재산의 극히 일부를 자신의 여동생에게 물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국가에 기부했다.

3 비판

하지만 위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터키만의 이야기. 자국에서 우대받는 윈스턴 처칠이나 샤를 드 골이 과거 식민지 나라들에서 저지른 짓을 보면 학살자, 억압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듯이 아르메니아인이나 쿠르드 민족주의자들 눈으로 봤을 때 그는 니네 나라에서만 영웅인 학살자인 셈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참고로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종종 배낭여행자들이 이 항목의 비판점들을 근거로 터키에서 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비췄다 곤욕을 치루기도 한다니 주의하자. 배낭여행자가 토론할 정도로 터키어가 유창한 경우가 많을진 의문이지만 물론 당장 폭력을 당하거나 경찰이 출동해 체포해가는 건 아니겠지만, 여러 사람한테 둘러싸여 욕을 먹거나 멱살 잡혀 쫓겨나는 봉변을 겪을 수는 있다고.(...) 재수없으면 경찰서 정모를 할 수도 있다. 후술된 모독죄를 보면...

3.1 전쟁범죄

대표적인 아타튀르크의 전쟁범죄로 지목되는 사건은 1937년 데르심 반란의 수습과정이다. 데르심 반란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진 사건으로, 1차는 1937년 3월 20일부터 11월 말까지. 2차는 1938년 1월 2일부터 12월 말까지 지속되었다. 이 반란의 원인은 터키 공화국의 중앙집권화에 반발한 데르심(Dersim, 현 지명은 툰젤리 Tunceli) 도의 토착 부족장들이 부족민들을 모아 저항한데에서 비롯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기까지 지방행정은 도시에는 행정관이 파견되었지만, 향촌은 대체로 현지 부족장 혹은 공동체들의 자치가 이루어졌다. 데르심 지역의 경우 알레비파 자자족과 순니파 쿠르드족, 1915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때 생존한 아르메니아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는데, 반란이 일어나자 터키정부는 공개처형과 공중폭격까지 동원해가며 이를 진압했다.[21] 당시 터키 공화국은 지방자치세력이 공화국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중대한 위협으로 보았고, 실제로 1925년 남동부 터키에서 오스만 복고운동이 터져 곤란에 처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반발세력을 힘으로 깡그리 누르려 했다. 이때 희생된 숫자는 반란군 6000여명을 포함해 민간인 13806명(터키국회 공식추산)에서 40000여명(데이비드 맥도웰 추산)에 달한다. 당시 반란을 일으킨 쿠르드 부족에 속한 민간인 11,818명은 이후 터키 전국에 분산이주 조치되었고, 도 이름도 툰젤리(Tunceli)로 바꾸었다.

아르메니아에선 근대 이후 5번째로 규모가 큰 학살인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도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타튀르크는 튀르크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였으며, 이 운동은 아르메니아인 300만 중 100만 ~ 200만을 학살(아르메니아 주장)한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주축이라는 것.[22] 가령 1921년, 터키 독립군은 마라쉬(Maraş)에 주둔해있던 프랑스군 5000명을 3만으로 공격한 다음 아르메니아인이 대부분이었던 마라쉬 시민 1만명을 학살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돈과 프랑스에 협조한 병사 200명을 넘겨줬는데도 반란 위험이 있단 이유만으로 학살을 한 것이다. 하지만 1919년에 마라쉬가 프랑스군에 붙어 반란을 일으켰을때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무슬림 주민들을 학살했던 것도 있다.

그리고 독가스를 이용한 학살을 승인하기도 했고 장티푸스나 스페인 독감으로 죽어가는 걸 방치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치세 중에 활성중지되지 않은 티푸스 백신을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뿌렸다고 고백한 의사도 있다. 생물학을 좀 배웠으면 알겠지만, 이건 그냥 티푸스를 뿌린 학살이다. 그 밖에도 발칸과 아나톨리아 내의 아르메니아인 및 그리스인 명사들을 암살사주한 의혹도 받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변호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관한 것 중 상당수가 아르메니아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것과 마라쉬 학살 역시 그 당시 상황으론 불가피한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 인들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프랑스측에 붙어 자신들의 옛날에 영토였던 역사적 영토를 되찾고 그곳의 튀르크인을 몰아낼려고 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에 붙을 경우 당장 국가존재 자체가 위협이 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시궁창이었는지는 터키 독립전쟁 문서를 볼것. 당연히 그렇다고 해서 한 종족을 대상으로 한 제노사이드가 정당화될수는 없다.

게다가 터키측에서 반론으로 나오는 의견에는 1910년대에 아타튀르크는 튀르크 민족주의 운동 세력에 있어서도 끗발조차도 날리지 못하는 실정이라는 점이다. 그 당시에는 청년튀르크당과 엔베르 파샤가 집권하고 있었고, 아타튀르크가 본격적으로 민족주의 운동을 시작한건 1920년 4월 23일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 등을 만나고 술탄정부에 반란을 선언한 이후의 일이다. 아타튀르크가 반란을 시작하기 전에, 오스만 제국의 감독관 자격으로 1919년 11월 9일에 카이세리를 방문하고 한 연설을 참고해보면, 당시까지만 해도 아타튀르크의 성향은 민족주의보다는 이슬람을 바탕으로 외세를 배격하려는 생각이 강하게 묻어나온다. 이러한 생각들을 완전히 부순건 1920년 초 이스탄불을 방문한 이후부터라는 반론도 있기에 아르메니아에서 책임을 아타튀르크에게 더 크게 강조하려고 죄다 덮어씌웠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결정적으로 아타튀르크는 아르메니아 학살 당시, 시리아-이라크에서 종군하고 있었으며 그가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 알게 된건 1920년 이후의 일이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항목에 그의 일기를 볼 수 있는데, 당시에 그는 '관찰자'일 뿐이었다. 즉,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선 논란이 있는 사항이다. 때문에 국제적으로 그가 아르메니아 학살에 관여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분석하고 있으며 터키에서도 아르메니아의 왜곡으로 증거도 없이 그렇다고 비아냥거리고 있다.[23]

쿠르드족 학살과 탄압도, 아타튀르크 시대가 아닌 1980년 케난 에브렌 시절에 본격화된 문제이다. 물론 원인제공은 그가 주창한 터키 민족주의긴 하지만... 쿠르드족[24]에겐 독가스로 학살을 지시한 처칠과 더불어 히틀러급 증오를 받고 있는게 당연하다. 그리고,쿠르드인들이 세운 아라라트 공화국을 뭉개버린 것도 아타튀르크 치세 때 일이다.

여담으로 데르심 학살에 대해선 2011년 11월 23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당시 터키총리[25]가 데르심에서 사망한 13806명의 민간인에게 "만약 국가의 이름으로 사과를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사건이라면 나는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다."(Eğer devlet adına özür dilenecekse, böyle bir literatür varsa ben özür dilerim, diliyorum)라고 사과를 언급한 적이 있다. 하지만 2011년 터키 대법원에서는 데르심 학살을 인종을 구별하여 학살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범죄의 기소에 대한 판결은 무죄라고 판결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해선 아르메니아 측 주장이 과장된 면이 있고 투르크족이 아닌 다른 세력이 한 것도 포함하고 있으며 또는 반대되는 사료나 아르메니아 측에서 한 학살에 대한 증거를 들어가며 반론하고 있고 그 당시 상황으론 불가피했다(어디까지나 터키 측에선)라고 정당방어로 생각할 명분마저 있으니 대격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인정할 생각이 추호도 없나보다.

3.2 그외에

아타튀르크는 터키가 외세의 지배나 간섭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터키 밖의 서아시아에 신경을 껐다. 다시 말해 서아시아의 아랍인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와 간섭을 받는 것에도 무관심했다. 아타튀르크는 집권초에는 무슬림들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후로는 반기지 않았다. 또한 터키만이 독립할 가치가 있다고 보았으며 독립하고 싶으면 스스로 무슬림 국가들이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터키인의 통합이란 명목하에 터키 내에 아르메니아인들이나 쿠르드족들같은 소수민족들의 문화탄압및 그들의 언어와 생활양식을 파괴시키기도 하였다. 심지어 쿠르드족의 경우 아타튀르크는 쿠르드족의 존재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살던 시대상이나 개국한지 얼마 안된 불안정한 나라라는 점을 고려하면 어느정도 정상참작은 될수있지만 절대 정당화될수없는 비인도적인 행동이다.

터키 민족주의를 과도하게 추구하여 태양어론 같은 유사역사학에 어느 정도 경도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독립했거나 세워진지 얼마안된나라에서 사학계에 민족주의 열풍이 부는건 필연적인 부분이다. 당장 우리나라도 일본에 독립한 뒤 사학계에 민족주의 열풍이 불어 환빠들의 출현에 단초를 제공한적이 있다.

약간 애매하지만 탈아입구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있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서구를 굉장히 동경했다. 이는 공화국 성립전에 아타튀르크가 이야기 할때 "터키인들은 항상 서쪽으로 이주해 왔다" "모든 문명국가를 친구로 여기며 독립을 부러워 할뿐"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4 터키인들의 존경

터키에서 아타튀르크에 대한 국민들의 사랑은 그야말로 '종교'에 가까울만큼 열성적이다. 길거리 노점상도 아타튀르크 초상화를 자기 노점에 걸어두는가 하면 대부분의 터키 회사들은 아타튀르크 사진이나 어록을 벽에 걸어두고 있다[26]. 물론 터키의 모든 관공서 건물과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도 아타튀르크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어록중 하나인 "Hâkimiyet kayıtsız şartsız milletindir."(주권은 조건없이, 제한없이 인민의 것이다)라는 어록은 그의 무덤에서부터 시작해 터키 어디에서다 볼 수 있다. 도시에서 가장 큰 대로에는 아타튀르크 대로(Atatürk Caddesi)라는 이름이 붙고[27], 도시의 중심가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심지어 동상을 뜻하는 터키어인 헤이켈(Heykel)은 몇몇 도시에서는 '시내 중심가'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또한 터키에서는 터키의 관문공항이자, 이스탄불 제 1공항의 이름을 아타튀르크의 이름을 따서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Istanbul Atatürk International Airport)' 명명했다. 이곳은 한국으로 치면 인천국제공항과 같은 곳이다. 이런 아타튀르크 사랑은 해외에도 유별나서 터키인이 운영하는 케밥집에선 대부분 아타튀르크 사진이나 터키 국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고향인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남은 그가 태어난 집은 1933년 그리스 테살로니키시에서 터키공화국 10주년을 기념해 그 집에다 '아타튀르크 생가'라는 팻말을 세운 것을 계기로 1937년에 테살로니키시가 집을 구입해 아타튀르크에게 선물했다. 하지만 그는 일이 바뻐서 살아 생전에 이 집을 찾지 못했고, 이후 터키 정부가 박물관으로 만들어서 관리하고 있다. 터키인들이 그리스 오면 여길 반드시 들른다고 한다. 그리고 앙카라에 있는 아타튀르크 농장(Atatürk Çiftlik Ormanı)에 가면 테살로니키의 생가를 완벽하게 복제한 집이 있다. 아타튀르크가 말년에 농사를 지으면서 쉬던 곳으로 지금도 이곳에서는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2014년에르도안 대통령이 이곳 일부를 침범해 방이 1000개가 넘는 거대한 궁전을 지었다. 훌륭한 고인드립


심지어 모든 터키 화폐에는 앞면에 아타튀르크를 도안으로 하고 있을 정도. 위의 사진의 화폐는 0자리 6개를 잘라내는 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이후 탄생한 신 터키리라(Yeni türk lirası)로 2009년 발행된 신권도 앞면은 모두 아타튀르크를 도안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신 터키리라화의 아타튀르크가 지나치게 통통하게 혹은 뚱뚱하게 묘사되었다며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그리고 돈의 크기가 클 수록 점점 웃고 있다!!

yeni_200_lira-yunus-emre.jpg
2009년에 새로 발행된 지폐 시리즈중 최고액권인 200리라짜리 지폐의 모습. 이번 시리즈에는 뒷면도안을 터키의 위인들로 채택했는데, 200리라 지폐 뒷면의 인물은 13~14세기에 살았던 시인 유누스 엠레(Yunus Emre)로 그가 남긴 유명한 시구인 "사랑합시다. 사랑받읍시다.(Sevelim Sevilelim)"가 함께 인쇄되어있다.

다만 그에 대하여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터키에서도 2010년에 아타튀르크가 동성애자라고 주장한 사이트들을 폐쇄하면서 논란이 거세졌다. 그 사이트를 운영하는 이들은 아타튀르크를 욕한 것도 아니고 단지 성별적인 취향이라고 여기면 그만이라면서 이렇게 폐쇄하는 것은 옳지않다고 반발했다. 하지만 터키에서 동성애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생각하면, 아타튀르크를 동성애자라고 주장하는건 욕 이상의 모욕으로 여겨지는 게 보통이다.

4.1 아타튀르크 모독죄

터키 형법에는 아타튀르크 모독에 대한 특별한 조항이 있다.(...) 형법 301조가 그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Madde 301 (제 301조)

(1) Türk Milletini, Türkiye Cumhuriyeti Devletini, 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ni, Türkiye Cumhuriyeti Hükümetini ve Devletin yargı organlarını alenen aşağılayan kişi, altı aydan iki yıla kadar hapis cezası ile cezalandırılır.
터키 민족을, 터키 공화국 국가를, 터키 대국민의회(=국회)를, 터키공화국 정부와 국가 사법조직을 공공장소에서 모욕하는 자는 징역 6개월에서 2년에 처한다.

(2) Devletin askeri veya emniyet teşkilatını alenen aşağılayan kişi 1. fıkra hükmüne göre cezalandırılır.
국가의 병사들 혹은 안보기관을 공공장소에서 모욕하는 이는 1항에 의거한 형벌에 처한다.

(3) Eleştiri amacıyla yapılan düşünce açıklamaları suç oluşturmaz.
비판의 목적으로 하는 사상적 행동은 처벌될 수 없다.

(4) Bu suçtan dolayı soruşturma yapılması, Adalet Bakanının iznine bağlıdır.
이 혐의에 의한 입증판단은, 법무부의 결정에 따른다.

이러한 터키의 국가모독죄 조항은 초기 헌법에서부터 존재했지만, 아타튀르크 사후인 1951년 일단의 극단적 이슬람 복고주의자들이 아타튀르크 동상을 파괴하면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터키 민주당의 주도로 터키 법무부는 아타튀르크 모욕에 대한 특별법을 입건해 1951년 7월 25일에 형법 5816조 이라는 이름으로 승인했다. 이 법으로 아타튀르크를 게이로 묘사한 동영상이 있다는 이유로 2008년부터 2010년 사이에 터키에서 유튜브를 접속하려 하면 이러한 경고문을 볼 수 있었다.


해당 사이트의 접속이 금지되었습니다.

앙카라 제5회 형집행 위원회는 2008년 4월 30일에 2008/599번 결정으로 이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을 정보통신부령으로 금지합니다.

아타튀르크 모독죄에 대한 해당 조항은 다음과 같다.

(1) Atatürk'ün hatırasına alenen hakaret eden veya söven kimse bir yıldan üç yıla kadar hapis cezası ile cezalandırılır.

아타튀르크의 기념에 공공으로 저항운동을 하는 이, 또는 저주하는 이는 누구든 1년에서 3년 사이의 징역으로 처벌한다.

Atatürk'ü temsil eden heykel, büst ve abideleri veyahut Atatürk'ün kabrini tahrip eden, kıran, bozan veya kirleten kimseye bir yıldan beş yıla kadar ağır hapis cezası verilir.
아타튀르크를 대표하는 동상, 흉상 그리고 기념물들을 혹은 아타튀르크의 무덤을 파괴하는, 부수는, 훼손하는, 또는 더럽히는 이는 누구나 1년에서 5년 사이의 중징역으로 처벌한다.

Yukarıdaki fıkralarda yazılı suçları işlemeye başkalarını teşvik eden kimse asıl fail gibi cezalandırılır.
위 열거사항들을 구두로, 글로써, 다른 이들에게 선동하는 이는 누구든 실제 범죄한 이와 마찬가지로 처벌한다.

(2)Birinci maddede yazılı suçlar; iki veya daha fazla kimseler tarafından toplu olarak veya umumî veya umuma açık mahallerde yahut basın vasıtasiyle işlenirse hükmolunulacak ceza yarı nispetinde artırılır.
1항에서 글로 인한 죄들은, 2명 이상의 다수에 의한 집단으로써 혹은 공공으로써 혹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공장소에서 플랜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설 경우, 판결될 형량보다 추가한다.

Birinci maddenin ikinci fikrasında yazılı suçlar zor kullanılarak işlenir veya bu suretle işlenmesine teşebbüs olunursa verilecek ceza bir misli artırılır
1항의 두번째 단락에서, 글로 인한 죄를 적용하기 어려운 일, 혹은 이러한 형태의 일을 계획할 경우, 판결될 형벌은 다소 추가로 적용된다.

(3)Bu Kanunda yazılı suçlardan dolayı Cumhuriyet savcılıklarınca re'sen takibat yapılır.
이 법에서 글로 인한 혐의로 인해 공화국 실정자들일수록 공무원 규정이행의무위반혐의로 기소 가능하다.

(4)Bu Kanun yayımı tarihinde yürürlüğe girer.
이 법의 적용은 날짜를 거슬러 올라가서 적용된다.

(5)Bu Kanunu Adalet Bakanı yürütür.
이 법은 법무부가 집행한다.

자세히 보면, 선동혐의가 실제 범죄보다 가중처벌되고 구두선동보다 글로써 선동하는 혐의가 더욱 더 가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글로써 유인물을 돌리거나 행동원을 모집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데, 아이러니한건 이런 법은 공화인민당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나중에 1960년 군사쿠데타에서 이슬람주의자로 몰려서 처벌된 아드난 멘데레스가 이끄는 민주당 정부시절에 이런 법이 만들어졌다는거(...) 후술할 아타튀르크의 영묘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참고로 이 법은 아직 사문화되지 않았다. 2015년 11월 10일 아타튀르크 사망일에 한 이슬람성향의 민영방송사가 아타튀르크에 대해 다루며 헤드라인으로 "폭정의 끝!"(...) 이라고 달았다가 검찰에게 이 법으로 고소를 당해 현재 재판 진행중이다.

5 무덤

아타튀르크의 무덤은 앙카라 한복판에 세워진 거대한 기념물에 마련되어 있다. 터키어로 아느트카비르(Anıtkabir)라고 부르는데 히타이트와 고대 아나톨리아 양식을 바탕으로 건립된 건물로, 사자의 길이라고 부르는 대로를 지나면 남자 셋과 여자 셋이 있는 동상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무덤이 위치한 중앙의 거대한 구조물과 회랑이 있다. 회랑에는 아타튀르크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들과 그의 업적, 독립전쟁 이후의 터키 공화국 역사를 다룬 굉장히 스케일 큰 박물관이 있으니 한번쯤 가볼만 하다. 앙카라 지하철로는 탄도안역(Tandoğan)에서 내리는 게 가장 가까운데 걸어서 5분쯤 걸리며, 길을 잘 모르거나 귀찮으면 돌무쉬를 타면 된다. 엔간해선 다 간다. 아니면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된다. 이 동네에선 아느트카비르 모르면 그리스간첩이나 마찬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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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느트카비르 입구에 세워진 남자 셋, 여자 셋 석상의 모습. 남자들은 터키 공화국의 기반인 선생님, 노동자, 군인들이며 여자들은 아타튀르크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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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튀르크의 기일인 11월 10일이 되면 대통령과 총리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느트카비르를 찾는다. 평소엔 집안이든 식당이든 담배피우는 터키 사람들도 이곳에서만큼은 담배를 피우는 게 금기시되어 있으며, 시끄럽게 떠들지도 않는다. 헌데 아타튀르크는 생전에 자신이 우상시되는 걸 극도로 꺼리는 인물이었고 자신이 죽을 때에도 무덤은 평범한 시민들처럼 공동묘지에 쓰길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아타튀르크의 전우이자 후임자인 이스멧 이뇌뉘가 가볍게 쌩깠고 1953년에 현재의 아늣카비르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안에 들어가면 터키 사람이 아타튀르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28]

6 트리비아

의외로 소탈한 구석이 있어서, 이런저런 일화들이 있다. 특히 아타튀르크가 생전에 애용하던 식당이나 단골가게에는 반드시 "아타튀르크가 좋아하던 가게" 식으로 간판을 꾸미고 그가 주로 시켰던 메뉴를 특별메뉴로 구성해서 팔고있다.

아타튀르크가 이스탄불에 머물때는 주로 돌마바흐체 궁전의 집무실에 머물렀지만 때때로 근처의 어부들이 입는 옷으로 변장을 하고 가까운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고등어구이를 뜯으며 주변의 민심을 살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통신기술이 발전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타튀르크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듣고 아타튀르크가 국정운영에 참고했다고 한다.

또한 페네르바흐체 SK팬이자 서포터였다. 페네르바흐체 홈페이지에 아주 자랑스러운 문체로 쓰여있는데, 이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0 Ağustos 1928 günü, 3-3 berabere biten Gazi Kupası maçından sonra üçü Galatasaraylı ve ikisi Fenerbahçeli olan beş kişinin önünde aynen şunları söyledi: "Burada üçe üçüz... Çünkü ben de Fenerbahçeliyim!"

1928년 8월 10일, 3:3 동점으로 끝난 가지컵 경기후 3명의 갈라타사라이 팬과 2명의 페네르바흐체 팬이 포함된 다섯 명 앞에서 그는 말했다. "여기도 3대 3이군. 나도 페네르바흐체 팬이니까!"

그외에 터키 독립전쟁 시절의 일기에서도 페네르바흐체에 대한 빠심(...)을 여지없이 보여주기도 했으며, 금전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타팀 팬들도 자기들이 케말 아타튀르크의 유지를 이어받았고 케말 아타튀르크가 자기팀을 좋아했다고 자랑질하고있다(...)

흑백사진만 잘 알려져 있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이 하나 있는데 아타튀르크는 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지니고 있었다. 컬러 사진 이 때문에 조상이 알바니아계라는둥 그리스[29] 라는둥, 심지어 테살로니키에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많았던 점을 들어 유대계라는 둥 여러 주장이 나오는 편. 금발 가진 터키인들 조상은 모두 유럽인인가? 본인은 일단 셋 다 아니라고 부정했었지만, 확신하지는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했던 말이 "터키땅에 살고, 터키어를 사용하고, 터키를 자신의 조국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이는 곧 터키인이다."[30] 라는 말이다.

골초란 표현도 모자랄 정도로 담배를 많이 피웠다. 그가 일찍 사망한 원인도 지나친 격무로 인한 과로외에 지나친 흡연도 원인 제공을 한걸로 알려져있다. 아타튀르크 주치의가 지금 피우는양에서 절반만 줄여라라고 했는데 거기서 100갑을 피운다고해서 50갑으로 줄이도록 조치했지만 원래 아타튀르크는 50갑을 피우고있었고 담배양을 말하면 주치의가 줄이라고 할께 뻔했기때문에 일부러 두배 부풀려서 얘기한것(....) 결국 줄이는거 없이 평소 피던대로 피웠다고.. 이렇게 피우고도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 폐암이 아니라 과로인게 황당하다.

7 어록

Memleketin efendisi hakiki müstahsil olan köylüdür.

나라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농민들이다.
 

Doğruyu söylemekten korkmayınız.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
 

Beni görmek demek mutlaka yüzümü görmek demek değildir Benim fikirlerimi, benim duygularımı anlıyorsanız ve hissediyorsanız bu yeterlidir.

나를 본다는 것은 진실로 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마음을, 나의 생각을 여러분들이 이해한다면, 그리고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Türkiye Cumhuriyeti mutlu, zengin ve muzaffer olacaktır.

터키 공화국은 행복, 풍요, 그리고 승리를 얻을 것이다.
 

Sağlam kafa sağlam vücutta bulunur.

건강한 생각은 건강한 신체에 깃든다.
 

Ordular, ilk hedefiniz Akdenizdir. İleri!

군대여, 제군들의 첫 번째 목표는 지중해다. 앞으로! (독립전쟁 당시 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내린 첫 번째 명령)
 

Türkiye Cumhuriyetinin temeli kültürdür.

터키 공화국의 기초는 문화다.
 

Büyük hedefimiz, milletimizi en yüksek medeniyet seviyesine ve refaha ulaştırmaktır.

우리의 위대한 목표는, 우리들의 조국을 가장 높은 수준의 문명과 번영을 이룩하는데에 있다.
 

Öğretmenler: Yeni nesiller sizlerin eseri olacaktır.

선생님들이여, 새로운 세대는 여러분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집니다.
 

Ne mutlu "Türküm" diyene.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는 터키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Yurtta barış, cihanda barış.

가정에서 평화, 세계에서 평화. (현 터키공화국의 모토)
 

Geldikleri gibi giderler.

그들이 왔던 것처럼, 그들은 떠날 것이다.[31]
 

Benim naciz vücudum elbet bir gün toprak olacaktır, ancak Türkiye Cumhuriyeti ilelebet payidar kalacaktır.

나의 미천한 몸은 언젠가는 먼지가 될 것이나, 터키 공화국은 영원히 우뚝 서 있을 것이다.
 

Bu millete çok şey öğretebildim ama onlara uşak olmayı bir türlü öğretemedim.

이 나라에서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왔다, 하지만 그들에게 머슴이 되는 법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Süngülerle, silahlarla ve kanla kazandığımız askeri zaferlerden sonra, kültür, bilim, fen ve ekonomi alanlarında da zaferler kazanmaya devam edeceğiz.

총검으로, 무기로, 그리고 피로써 승리한 우리 군대는 승전 이후에는, 문화, 과학, 철학 그리고 경제의 전장에서도 또한 승리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Zafer, "Zafer benimdir" diyebilenindir Başarı ise, "Başaracağım" diye başlayarak sonunda "Başardım" diyebilenindir.

승리는, "승리는 내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의 것이며 성공의 경우, "나는 성공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끝에는 "나는 성공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의 것이다.
 

Egemenlik verilmez, alınır.

권력은 주어진 것이 아니며, 획득하는 것이다.
 

Egemenlik, kayıtsız şartsız ulusundur.

권력은 조건없이 제한없이 인민의 것이다. (아타튀르크의 무덤에 새겨진 글귀)
 

Milleti kurtaranlar yalnız ve ancak öğretmenlerdir.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이는 홀로, 그리고 오로지 선생님들이다.
 

Hayatta en hakiki mürşit ilimdir.

인생의 가장 진실된 조언자는 과학이다.
 

Türk Milleti bağımsız yaşamış ve bağımsızlığı varolmalarının yegane koşulu olarak kabul etmiş cesur insanların torunlarıdır. Bu millet hiçbir zaman hür olmadan yaşamamıştır, yaşayamaz ve yaşamayacaktır.

터키 민족은 자유롭게 살아왔으며, 그리고 자유로운 상태의 고유한 존재를 인식하며 지켜온 용감한 이들의 손자들이다. 이 민족은 결코 자유 없이 살아가지 않았으며, 살아갈 수 없으며, 또 살아가지 않을것이다.
 

Biz Türkler tarih boyunca hürriyet ve istiklale timsal olmuş bir milletiz.

우리 터키인들은 역사를 통틀어 자유와 독립을 실천해온 민족이다.
 

Milletimiz davranışlarında ve gayretlerinde sarsılmaz bir bütünlük gösterdiği için başarılı olmuştur.

우리 민족은 행동과 노력에서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연대로 인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İki Mustafa Kemal vardır: Biri ben, et ve kemik, geçici Mustafa Kemal İkinci Mustafa Kemal, onu "ben" kelimesiyle ifade edemem; o, ben değil, bizdir! O, memleketin her köşesinde yeni fikir, yeni hayat ve büyük ülkü için uğraşan aydın ve savaşçı bir topluluktur. Ben, onların rüyasını temsil ediyorum Benim teşebbüslerim, onların özlemini çektikleri şeyleri tatmin içindir. O Mustafa Kemal sizsiniz, hepinizsiniz. Geçici olmayan, yaşaması ve başarılı olması gereken Mustafa Kemal odur!

두 명의 무스타파 케말이 있다. 하나는 나이다. 살과 뼈로 이루어진 평범한 무스타파 케말 말이다. 두 번째 무스타파 케말은 '나'라는 단어로 말할 수 없다. 그는 내가 아니라 우리들이다! 그는, 나라의 온 구석구석까지 새로운 신념을, 새로운 인생을, 그리고 위대한 이상을 위하여 노력하는 개화된 그리고 투쟁하는 하나의 군단이다. 나는 그들의 꿈을 대표하고 있다. 나의 계획은, 그들의 갈망하는, 소망하는 것들을 이루어주는 것이다. 그 무스타파 케말은 여러분이요, 우리 모두이다. 평범하지 않고, 생기넘치고, 성공을 이루는 무스타파 케말 말이다!

Saban kılıçtan üstündür.

쟁기는 칼보다 강하다.

Vatanını en çok seven, işini en iyi yapandır.

조국을 가장 사랑하는 이는, 자기 일을 가장 열심히 하는 자이다.

7.1 연설영상

공화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한 연설로 그의 생전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Bugün cumhuriyetimizin onuncu yılını doldurduğu en büyük bayramdır.

오늘은 우리 공화국의 10년째 되는 가장 큰 국경일입니다.

Kutlu olsun!
축하합니다!

Bu anda büyük Türk milletinin bir ferdi olarak bu kutlu güne kavuşmanın en derin sevinci ve heyecanı içindeyim.
또한 저는 위대한 터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경축일을 맞이하며 가장 깊은 기쁨과 흥분속에 있습니다.

Yurttaşlarım!
나의 국민들이여!
Az zamanda çok ve büyük işler yaptık.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많고, 거대한 일들을 해냈습니다.
Bu işlerin en büyüğü, Temeli, Türk kahramanlığı ve yüksek Türk kültürü olan Türkiye Cumhuriyetidir.
이 일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근본적인 것은, 터키인의 영웅심과, 고도의 터키인의 문화를 갖춘 터키 공화국을 세운 것입니다.
Bundaki muvaffakiyeti Türk milletinin ve onun değerli ordusunun bir ve beraber olarak azimkarane yürümesine borçluyuz.
이것의 성공에는 터키 국민들의, 그리고 귀중한 우리 군대의 하나되고 협동된 위대한 발걸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Fakat yaptıklarımızı asla kafi göremeyiz.
하지만 우리가 해낸 것들은 결코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Çünkü daha çok ve daha büyük işler yapmak mecburiyetinde ve azmindeyiz.
왜냐하면 더욱 많은, 그리고 더욱 위대한 일들을 해야하며 이는 또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Yurdumuzu dünyanın en mamur ve en medeni memleketleri seviyesine çıkaracağız.
우리는 우리의 국가를 세계에서 가장 발전하고, 가장 문명화된 조국의 단계로 나아갈 것입니다.
Milletimizi en geniş refah, vasıta ve kaynaklarına sahip kılacağız.
우리 국민들은 가장 풍부한 복지, 자가용, 그리고 부를 소유할 것입니다.
Milli kültürümüzü muasır medeniyet seviyesinin üstüne çıkaracağız.
우리의 민족문화를 현대화되고 문명화된 단계를 넘도록 나아갈 것입니다.

Bunun için, bizce zaman ölçüsü geçmiş asırların gevşetici zihniyetine göre değil, asrımızın sürat ve hareket mefhumuna göre düşünülmelidir.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시간관념은 지난 세기같이 느긋함에 빠져서는 안되고, 현대의 빠르고 활동적인 개념으로 생각해야합니다.
Geçen zamana nispetle, daha çok çalışacağız.
지난 세월에 비해, 우리는 더욱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Daha az zamanda, daha büyük işler başaracağız.
더욱 짧은 시간에, 우리는 더욱 큰 일들을 성취해낼 것입니다.
Bunda da muvaffak olacağımıza şüphem yoktur.
여기에서 또한 성공할 것이라는 의심은 없습니다.
Çünkü, Türk milletinin karakteri yüksektir.
왜냐하면, 터키 민족성은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Türk milleti çalışkandır.
터키 민족은 근면합니다.
Türk milleti zekidir.
터키 민족은 영리합니다.
Çünkü Türk milleti milli birlik ve beraberlikle güçlükleri yenmesini bilmiştir.
왜냐하면, 터키 국민은 민족이 통합하고 협동하여 강하고 패배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Ve çünkü, Türk milletinin yürümekte olduğu terakki ve medeniyet yolunda, elinde ve kafasında tuttuğu meşale, müspet ilimdir.
그리고 또한, 터키 민족이 발걸음을 걸어가는 진보와 문명의 길에서 손으로, 머리로 지식의 불꽃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Şunu da ehemmiyetle tebarüz ettirmeliyim ki, yüksek bir insan cemiyeti olan Türk milletinin tarihi bir vasfı da, güzel sanatları sevmek ve onda yükselmektir.
또한 중요하게 강조 해야 할 것은, 위대한 하나의 인간집단으로서 터키 국가의 역사적인 하나의 성질에서도 아름다운 예술을 사랑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Bunun içindir ki, milletimizin yüksek karakterini, yorulmaz çalışkanlığını, fıtri zekasını, ilme bağlılığını, güzel sanatlara sevgisini, milli birlik duygusunu mütemadiyen ve her türlü vasıta ve tedbirlerle besleyerek inkişaf ettirmek milli ülkümüzdür.
이는 즉, 우리 국민의 위대한 성질을, 피곤해않는 근면성을, 창조적인 두뇌를, 과학에 대한 관심을, 아름다운 예술을 사랑하는 것을, 민족의 단결된 마음을 쉴새없이 나아가며, 모든 종류의 방법과 행동으로 육성하며 발전하는 민족국가입니다.
Türk milletine çok yaraşan bu ülkü, onu, bütün beşeriyete hakiki huzurun temini yolunda, kendine düşen medeni vazifeyi yapmakta, muvaffak kılacaktır.
터키 민족에 매우 어울리는 이 이상은, 온 인류에 진실로 평화롭고 확신찬 길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시민적 의무를 다 하는데에서 성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Büyük Türk Milleti,
위대한 터키 국민이여,

On beş yıldan beri giriştiğimiz işlerde muvaffakiyet vaat eden çok sözlerimi işittin.
여러분들은 15년 전부터 함께 해온 일들에서 성공을 약속하는 많은 저의 말들을 들었습니다.
Bahtiyarım ki, bu sözlerimin hiçbirinde, milletimin hakkımdaki itimadını sarsacak bir isabetsizliğe uğramadım.
행복하게도, 이러한 약속들이 아무데에서도,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는 실패가 되지 않았습니다.
Bugün, aynı iman ve katiyetle söylüyorum ki, milli ülküye, tam bir bütünlükle yürümekte olan Türk milletinin büyük millet olduğunu, bütün medeni alem, az zamanda bir kere daha tanıyacaktır.
오늘, 저는 똑같은 믿음과 확신속에서 말하건대 민족국가에, 완전한 하나의 공동된 발걸음에 임한 터키 국민들이 위대한 민족이 된 데에, 온 문명세계는, 짧은 시간에 한번 더 알게될 것입니다.
Asla şüphem yoktur ki, Türklüğün unutulmuş büyük medeni vasfı ve büyük medeni kabiliyeti, bundan sonraki inkişafıyla, atinin yüksek medeniyet ufkunda yeni bir güneş gibi doğacaktır.
결코 의심할 나위 없이, 터키민족의 잊혀지지 않는 거대한 문명의 성질과 위대한 문명의 능력은 이 이후에도 발전함과 더불어 미래에는 고도 문명의 지평선에서 새로운 태양과 같이 떠오를 것입니다.

Türk Milleti!
터키 민족이여!

Ebediyete akıp giden her on senede, bu büyük millet bayramını daha büyük şereflerle, saadetlerle huzur ve refah içinde kutlamanı gönülden dilerim.
영원히 흘러가는 매 10년 마다, 이 위대한 국경일을 더욱 큰 자긍심과 행복으로 평화와 번영으로 축하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Ne mutlu Türküm diyene!
나는 터키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Ankara, 29 Ekim 1933
앙카라, 1933년 10월 29일

  1.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이슬람 학자들(그 중에서 한발리 학파 계열과 그 학파에서 파생된 와하브파와 살라프파)이 부정적으로 보는 대상은 이슬람이 아닌 것과 이슬람에 맞지 않다고 인식되는 것들이며 특히 서구, 기독교, 유대인, 세속주의, 민주주의가 그 대상이 된다.
  2. Vilayet-i Selânik, 옛 오스만 제국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현재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불가리아로 편입.
  3. 그리스 제 2의 도시인 그 테살로니키가 맞다. 터키어로는 셀랴닉(Selânik).
  4. 오스만제국 시절 터키인들은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스만 시절 사람들의 이름은 오늘날 아랍인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 누구네 아들 뭐시기라고 부르거나, 출신지나 별칭, 관직이 있을 경우 관직이나 호칭을 붙여서 썼다. 이를테면 아타튀르크의 이름은 알리 르자의 아들 무스타파(Ali Rıza oğlu Mustafa, 좀 더 옛날식으로 표기하면 Mustafa bin Ali Rıza라고 불렀었다.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인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Köprülü Mehmet Paşa)의 경우, 앞에 붙은 쾨프륄뤼는 가문이름이나 성이 아니라, 출신지를 의미하며(오늘날 마케도니아의 벨레사), 뒤에 붙은 파샤는 고관에 대한 칭호이다.
  5. 이교도인 그리스군을 상대로 분전했기 때문에 붙여진 호칭으로, 오스만 제국의 건국자인 오스만과 그 아들인 오르한도 가지 호칭을 사용했었다. 조금 부정확하긴 하지만, '가지 = 이슬람 세계의 십자군' 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지도.
  6. 그리고 의회는 아타튀르크 본인에게만 저 성씨를 허가했기 때문에 아래에 나오는 양녀들과 여동생을 포함한 가족들과 아타튀르크는 성이 다르다. 원래는 저 성을 쓸 당시 만약 아타튀르크에게서 자손이 태어나면 "아타단(Atadan)"이라는 성을 붙일 예정이었지만, 아타튀르크가 자손없이 죽는바람에 그럴일도 없게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타튀르크의 여동생인 막불레가 아타단 성을 받았지만 막불레에게도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는 아무도 쓰지 않는 성이되었다.
  7. 튀르크멘바시으는 튀르크멘인의 지도자란 의미.
  8. 이뇌뉘는 터키 독립전쟁당시 그가 분전했던 전장을 흐르는 이뇌뉘강에서 딴 성씨이다.
  9. 앙카라는 오스만 제국 역사 초기에 티무르 제국과 결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덧붙여 이전 항목에서는 앙카라가 오스만 제국의 첫번째 수도라고 되어 있었지만, 첫번째 수도는 앙카라가 아니라 쇠위트(Söğüt)였다. 또한 앙카라는 오스만 제국 창건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도 아니었고, 오스만 제국이 앙카라를 점령한 것은 2대 군주 오르한 때인 1356년.
  10. 사실 전사자 수론 오스만 군이 5713명으로 3677명이 죽은 그리스군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오스만군은 전병력이 9만 6천여명인데 그리스군은 13만에 달했고 대포와 기관총 수도 그리스군이 오스만군 2배에 달했으며 심지어 그리스군은 18대 전투기를 이끌고 대응 사격까지 하여 고작 2대 정찰기를 보유한 오스만군보다 장비와 병력면으로 압도적이었다. 이랬음에도 그리스군은 전선에서 밀려났고 전사자는 오스만군보다 적어도 반대로 부상병은 오스만군의 2배가 넘었으며(부상병이 많아도 문제가 되는 게, 놔두면 죄다 죽을 게 뻔하고 의료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들을 돌보기 위하여 전투병 일부를 차출해야 하기 때문) 나중에는 탈영병까지 속출하면서 더 이상 길게 전투해봐야 그리스군 전사자가 계속 늘게 뻔했다.
  11. 당연하지만 그리스에선 굴욕적인 날이다. 이 대패로 트리쿠피스 중장과 부사령관 키몬 디예니스(Κίμων Διγενής) 소장, 참모장 페트로스 수밀라스(Πέτρος Σουμίλας) 소장 같이 이 전투를 지휘한 그리스군 장군들은 죄다 모가지당하고 군대에서 불명예 퇴역당했다.
  12.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을 뽑기 시작한 건 1927년부터로 그 이전에는 매회마다 화제의 인물을 선정했었다.
  13. 재미있는건 현재 이 정당은 케말리즘(아타튀르크주의: 공화주의(Cumhuriyetçilik), 민족주의(Milliyetçilik), 인민주의(Halkçılık), 국가주의(Devletçilik), 세속주의(Laiklik), 혁명주의(İnkılapçılık))과 사회민주주의를 정강으로 추구하고 있는 정당이라는 점이다.
  14. 터키의 여성 투표권, 참정권은 1930년에 허용되는데 이는 당연히 이슬람권에서는 최초고 다른 서방권 국가들과 비교해봐도 비슷하거나 조금 더 앞서있다.
  15. 여사는 훗날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도 참전하게 된다. [1]
  16. 문자개혁에서 자문위원으로 초대된 학자들이다. 아타튀르크는 서구의 학자들을 초청해서 개혁을 자문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교육 철학으로 유명한 존 듀이가 있다.
  17. 신앙의 수호자라는 터키식 칭호. 케말은 터키 독립전쟁과 1차대전, 특히 갈리폴리 전투의 활약으로 이 칭호를 얻었다.이 가지 칭호로 아타튀르크는 이슬람 세력의 지지가 있었고 심지어 세속개혁으로 이슬람 세력의 비판을 받을때도 아타튀르크의 독립전쟁은 이슬람 세력도 까지 못할정도로 아타튀르크의 업적은 빛이 많다. 하지만 그 어둠도 상당하다.
  18. 무솔리니 항목에서 볼 수 있지만, 훗날 그는 처형당한 뒤에 분노한 국민들의 손에 의해 밀라노 시내의 주유소에 매달리게 된다! 아타튀르크는 아마 비유삼아 한 말일테지만 그 비유가 글자 그대로 이루어진 셈. 틀린 점이라면 사후에 목이 아니라 발이 메달렸다는 점 정도 밖에 없다.(...)
  19. 아타튀르크가 무솔리니를 별로 적대시하지 않았단 말도 있지만 저 무솔리니의 대한 평은 패트릭 킨로스판 아타튀르크 전기에서 나오고 또 앤드류 망고의 전기에서도 무솔리니를 "전장에서 한 번도 승리한 적 없는 주제에 군인인 척 거들먹거린다" 고 경멸한 것을 보면 적극적으로 적대하지 않았을 뿐 상당히 싫어한 듯 하다.
  20. 사실 자손을 안 남긴 것이 아니라 고자라서 못 남겼을 가능성도 있지만 터키에서 죽기 싫으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다.
  21. PKK측에서는 당시 학살로 쿠르드인 8만명이 죽었다고 주장하고, 이전에도 이렇게 쓰여있었지만 툰젤리 도의 행정자료를 보면 이 반란이 일어나기 전인 1935년에 시행된 인구주택총조사에서 툰젤리 도 전체 인구수가 101,099명, 1940년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전체 인구수는 94,639명으로 집계되어있다. 아타튀르크 시절의 인구조사는 매우 철저해서 인구조사 기간 동안에는 지방의 경우 외출조차도 철저하게 통제해서 조사했다.
  22. 물론 튀르크인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오스만 제국이 있던 1890년대부터 꾸준히 이어져왔기 때문에 온전히 아타튀르크의 책임으로 돌리긴 애매하며, 1912년 프랑스 고문관과 협동으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 전역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 인구는 150만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수치가 안맞는다는 것.
  23.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주장이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세브르 조약에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가해자들을 전범 재판에 회부해 처벌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지만 아타튀르크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가해자들을 단 한명도 처벌하지 않았으며 엔베르 같이 해외로 망명한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살자들을 중용했다. 게다가 아르메니아에 사죄하기는 커녕 아르메아인 대학살을 부정하는데 앞장섰으니 아르메니아 입장에서 보면 무관하다고 보는게 더 이상하다.
  24. 정확하게 말하면 PKK와 의견을 같이하는 쿠르드 분리주의자들. 다수의 쿠르드인들은 터키에 속하며 PKK에 동조하지 않고 살고 있다. 오히려 PKK 때문에 자신들까지 잠재적인 반란자로 몰린다며 불쾌해하는 쿠르드들도 있다. 일제시대의 우리나라를 떠올려보자. 1930년대엔 한반도 내부의 다수는 그냥 살고 있었다.
  25. 2014년 터키 대통령이 되었다. 재미있는건 이 사람의 소속이 이슬람주의 정당인 정의개발당이라는거. 아니나다를까 집권하고 반세속(케말)주의 정책으로 시끌벅적하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
  26. 터키 학교 교실에 들어가보면 터키 국기와 아타튀르크 사진이 걸려있다
  27. 그리고 아타튀르크대로를 교차하는 그 다음 큰 대로는 거의 언제나 이뇌뉘 대로(İnönü Caddesi)가 된다.
  28. 똑같이 후임자가 국부의 유훈을 쌩까고 궁전을 만든 경우로 동남아 어느 나라그분이 있다. 김씨조선도 마찬가지. 같은 방법 전혀 다른 느낌
  29. 하지만 알바니아나 그리스인들 역시 터키인과 마찬가지로 금발이 별로 없는 편이다.
  30. 이는 일부 쿠르드족 제외 현대 터키인의 정의로 굳어진다.
  31. 이 말에 대해선 터키 독립전쟁 당시 그리스군을 지칭한다는 설과, 1차세계대전 종결후 이스탄불로 귀환한 아타튀르크가 보스포로스해에 떠있는 연합군 군함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는 설 두가지가 있다. 아타튀르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Veda와 그 시기를 배경으로한 액션영화 Son Osmanlı는 두번째 설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