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직전쟁

파일:북양군벌.jpg
1905년의 사열식에 모인 북양군벌의 주요 인물들.
앞줄부터 왕시젠, 펑궈장, 위안스카이, 티에량, 차오쿤, 언돈원. 둘째줄에서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돤치루이다.

1 소개

1920년 7월 4일부터 7월 9일까지 차오쿤, 우페이푸의 직계(직예파)와 돤치루이의 환계(안휘파)가 중국 천하의 패권을 잡기 위해 벌인 내전을 말한다. 직예파와 직과 안휘파의 안을 따서 안직전쟁이라 하며 직환전쟁, 환직전쟁이라고도 한다.

2 배경

2.1 봉천군의 관내 진출과 3차 돤치루이 내각의 출범

호법전쟁에서 돤치루이는 호남에서의 패배로 인하여 하야하였고 중국에선 잠시 남북간 화의 열풍이 불었으나 안휘계의 쉬스징 등은 곧 독군단 회의를 열어 남방토벌을 촉구하고 펑궈장 총통을 압박했다. 이 와중에 쉬스징은 봉천군벌과 환계의 동맹을 성사시켜 환계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쉬스징은 장쭤린에게 산해관 이남으로 봉천군을 출병할 것을 요청했고 부총통 자리와 일본제 무기를 가로채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장쭤린은 이를 수락, 1개 여단을 거느리고 남하했으며 1918년 2월 25일 일본제 무기들을 탈취했다. 펑궈장과 돤치루이는 즉각 반환을 요구했으나 장쭤린은 남정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며 이를 거절했다. 이후 직계의 평화공세에 시달리던 쉬스징은 장쭤린에게 신속히 봉군을 출동시키고 돤치루이 내각 회복을 도울 것을 요청하였다.

1918년 3월 6일 장쭤린이 장칭후이에게 선발대를 이끌고 베이징으로 진군하게 하였고 자신도 후속부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펑궈장을 압박했다. 장쭤린은 평화 통전을 돌린 펑위샹을 토벌할 것을 요구하고 돤치루이 내각의 회복과 동삼성순열사 설립을 요구했다. 3월 12일 장쭤린은 남정봉군총사령부를 설립하고 총사령관이 뒤었으며 쉬스징을 부사령관에, 양위팅을 참모장에 정초를 차모부관에 임명, 5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펑궈장을 압박했다. 이에 펑궈장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1918년 3월 29일 양사이 내각이 사퇴하고 돤치루이는 다시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선 호법전쟁 문서의 전개 파트와 번갈아 읽으며 참고하는 것이 좋다.

결국 직계는 2선으로 밀려나고 다시 환계가 베이징 정부의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국회는 환계의 안복구락부가 장악했고 돤치루이는 일본의 지지와 참전군이란 두개의 방망이를 들고 정적인 펑궈장, 장감삼독 등을 모두 짓눌렀다. 돤치루이는 이러한 권세를 바탕으로 다시 적극적으로 무력통일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2.2 돤치루이의 중국 통일 계획과 북양군벌의 분열

위안스카이 이래로 북양정부는 무력으로 중국을 다시 통일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고 지방분권 세력은 이러한 북양정부의 방침에 반발, 1913년과 1916년 두 차례의 내전을 통해 충돌한 바가 있었다.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로 권좌를 차지한 돤치루이는 무력통일의 신봉자로 일본의 차관을 얻어 그것으로 군사력을 강화한 다음에 중국을 통일할 생각이었다. 이러한 계획을 위하여 돤치루이는 대독절교안과 대독선전포고를 주도했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는 빌미로 참전군이란 군대를 만들어 자신의 사병으로 삼았는데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이를 해산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은 남방의 호법정부와 북방의 북양정부과 대립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남방의 독립적인 상태를 방치하는 것은 북양정부를 흔드는 일이었다. 돤치루이는 '남북분열은 지방군인들로 하여금 투기적인 방법으로 이익을 얻게 만들고 독립을 선포하여 국정을 좌우하도록 만들었다'라고 주장했다. 즉 군벌들이 할거하고 군인들이 정치에 간섭하는 당시 중국의 상황은 남방과 북방이 통일되지 않고 따로 놀아서 그런 것이며 이러한 상황을 종식시키고 중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선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돤치루이의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선 당연히 군대와 돈이 필요했으므로 돤치루이는 일본과 매우 친하게 지냈으며 안복구락부를 이용해 국회를 장악했다. 하지만 중국 통일을 위해선 돤치루이의 군세만으로는 부족했고 이 때문에 돤치루이는 만주를 지배하고 있던 장쭤린을 끌어들여 동맹을 맺었다. 북양정부는 신해혁명으로 수립된 정부라는 정통성과 당시 중국에서 가장 풍족한 재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북양정부가 남방을 쳐서 중국을 통일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북양정부는 안휘파, 직예파, 봉천파 등의 파벌로 나뉘어져 있었으므로 중국을 통일하였을때 그 과실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가 오히려 문제였기 때문에 1917년 12월 2일 1차 천진회의가 열려 정권과 재정권을 어떻게 분할할 것인지를 논의하였다. 그 순간 형주와 양양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이때 북양군벌들은 남방에 대한 무력사용에 대해서 모두 동의했고 1918년 4월 24일의 한구회의에서도 방침이 통일된 것으로 보였으나 중국 통일을 위해선 호남, 강서, 강소의 공격이 필수적이었는데 이 지역을 기반으로 했던 장강삼독이라 불리던 북양군벌 세력들이 반발하기 시작함으로 북양군벌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돤치루이가 봉천파에게 일본에서 지원받은 무기를 나누어주자 장강삼독 세력은 차별감을 느끼고 더욱 반발하며 봉천군의 활동에 반발했다.

한편 직예파에 대해서 돤치루이는 차오쿤을 이용하여 견제하려 했는데 차오쿤으로 전투에 능한 우페이푸를 견제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돤치루이는 차오쿤을 양호순열사에 임명하고 쉬스징을 직예독군으로 삼았다. 하지만 호북과 호남은 북양군벌 통치 하에 있지 않아서 이는 명예직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차오쿤은 오히려 분노하여 분열은 가속화되었다. 결국 한구회의는 주요 참석인물들이 칭병하여 빠지고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입장을 선회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돤치루이는 차오쿤과의 관계를 호전시켜 북양군벌을 단결하려 했는데 이를 위해 차오쿤에게 사천, 광동, 호남, 강서 4개 성의 군정을 통괄하는 자리를 주었는데 이 중에서 강서성을 제외하곤 전부 다 북양군벌 통제 바깥이었으로 역시나 의미없는 자리였다. 어쨌거나 차오쿤은 1918년 6월의 2차 천진회의에서 대남작전에 대한 조건을 제시했다.

1. 정부가 모든 군비를 부담하고 무기를 중앙에서 공급할 것.
2. 상하이, 덕주, 한양의 병공창의 관리권을 줄 것.
3. 부총통의 자리를 줄 것.

이 시기에 남방에서 안휘파의 세력이 급격히 축소하고 있던 시점이라서 돤치루이는 차오쿤에게 어느 정도 양보를 할수밖에 없었고 차오쿤에게 부총통의 자리를 주었다. 돤치루이는 그가 구상하는 남방공격에 차오쿤도 동참시키는 한편 차오쿤을 이용하여 장강삼독도 포섭하려 했다. 돤치루이가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차오쿤의 요구도 거세져서 그에게 4개 성의 군사업무를 맡길 것이며 2개 혼성여단, 헌병대, 경찰대를 확충해주고 이를 위한 매달 130만 위안의 경비를 요구했다. 이 와중에 쉬스징이 봉천군에게 할당된 300만 위안 중 180만 위안만 지급해주고 일본이 제공해줬던 차관에서 자기 자신은 1천만 위안이나 차지했으면서 장쭤린에겐 200만 위안만 주자 장쭤린이 분노함으로 봉천파와 안휘파의 사이도 나빠졌다. 게다가 쉬스징은 멋대로 동북에서 군대를 편성하여 봉천의 치안을 어지럽혔고 이 때문에 봉천군의 중하급 장교들이 반발했다. 돤치루이는 쉬스징이 주지 않은 120만 위안의 경비와 빌렸던 무기를 돌려주었으나 장쭤린은 쉬스징에게 큰 원한을 품게 되었다.

2.3 1차 대전 참전 파동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앞서 언급한 것처럼 1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이르러 연합국은 중국의 참전을 요구했고 환계의 세력 확대와 무력통일을 위한 군사력 확보를 꾀했던 돤치루이가 여러 반대를 물리치고 이를 강행하면서 중국 정계는 혼란에 빠졌다. 결국 돤치루이는 주변의 압력에 참전군을 변방군으로 개명하였으나 1920년 7월 직계와 환계의 갈등이 폭발하면 안직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3 전개

3.1 우페이푸의 북상과 8성 동맹

여러 이슈를 두고 직계와 환계는 수년간 끝도 없이 으르렁거렸다. 돤치루이는 1918년 10월 국무총리에서 사직하고 근운붕을 후임으로 삼았으며 펑궈장도 사퇴하고 쉬스창이 총통이 되었으나 베이징은 참전독판 자리를 가지고 있던 돤치루이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돤치루이의 비호를 받아 돤치루이의 부하 쉬스징은 내몽골, 신강, 섬서, 감숙의 민정대권과 군대통솔권을 부여받고 군대의 훈련, 군수물자의 구입, 은행 설립, 공채발행 등의 주요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마강한 권한을 얻었다. 쉬스징의 이러한 독주는 직계와 봉계의 어그로를 끌어 북양군벌 내부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돤치루이와 환계는 차차 고립되었다. 또한 직계와 봉계는 환계가 너무 커지면 자신들이 몰락함을 알기 때문에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님에도 결탁하였다.

이때 직계의 우페이푸가 무력통일에 반대하면서 정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군량미가 부족하며 병사들이 고향에 가고싶어한단 이유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돤치루이는 이를 막기 위해 경한철도를 봉쇄하여 우페이푸를 막으려 했고 이를 위해 하남독군 차오티를 축출하고 환계의 오광신을 하남독군에 임명하려 했으나 대총통 쉬스창이 반대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차오티는 차오티대로 자신을 쫓아내려는 돤치루이의 계획을 눈치채고 우페이푸와 협력하면서 우페이푸의 북상을 저지한다는 돤치루이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때맞춰 직예독군 차오쿤을 중심으로 돤치루이를 아니꼽게 여기고 있던 독군들이 대거 모여 직계 4개 성, 봉계 3개 성의 독군들이 모여 돤치루이에 대항하던 7성 동맹을 결성하였고 여기에 차오티가 추가로 가담하여 8성 동맹이 형성되었다.

3.2 장쭤린의 마지막 중재

1920년 3월과 4월, 펑톈과 바오딩에서 돤치루이에 대항하기 위한 8성 동맹의 대표들이 비밀리에 회담을 가졌다. 대외적으론 장쭤린의 생일 축하와 전몰자 추모를 내세운 이들의 회의 이후 우페이푸가 하남과 직예에 자신의 병력을 배치했고 쉬스징이 외몽골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옴으로 직계와 환계 간의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쉬스창은 장쭤린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장쭤린은 대외적으로 중립을 표방하며 양자간의 조정을 시도했다. 1920년 6월 19일 장쭤린이 베이징에 도착, 쉬스징의 영접을 받았다. 장쭤린은 환계의 등쌀에 못 이겨 사퇴하려는 근운봉 총리의 사퇴를 만류하는 한편 돤치루이를 찾아가 근운붕을 복직시키고 쉬스징을 더 이상 비호하지 않음으로 명망을 유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돤치루이는 자신이 쉬스창을 반대하지 않으며 근운봉에겐 복직을 권하겠다고 동의를 표했다.

6월 22일 장쭤린은 왕내빈, 장칭후이 등의 심복을 거느리고 8개 성의 대표와 함께 바오딩에서 차오쿤, 우페이푸와 회담했으며 시국 해결을 위한 5개 방안을 제시했다.

1. 근운봉의 복직
2. 내각의 국부적 개조(즉 안복계가 장악한 재정, 교통, 사법 총장의 교체와 농상, 외교, 교육총장의 교체)
3. 상해화의 대표의 해임과 화평회의 취소
4. 안복계 해산
5. 쉬스징의 병권 박탈, 주변사관제 취소. 변방군은 개편 후 육군부 직할로 둠.

6월 23일 베이징으로 돌아온 장쭤린은 회의 결과를 쉬스창에게 보고하고 쉬스창과 장쭤린은 이를 채택하기로 잠정 결정, 다시 돤치루이와 회담했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2번 안에 대해선 반대했고 개조를 한다 해도 재정과 교통계는 안복계가 맡아야 했다. 동시에 그는 장쭤린에게 부총통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여러모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라 조정은 진전이 없었다. 환계는 거듭 5개 조항의 관철을 요구했고 돤치루이엔 악감정이 없지만 쉬스징만은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돤치루이에게 쉬스징은 수족과도 같은 심복이었기 때문에 돤치루이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6월 29일 쉬스창, 돤치루이, 장쭤린이 모여 회의를 했다. 쉬스창은 안복계 3총장은 사퇴하되 내무와 해군총장은 유지하며 외교,농상,교육총장을 유임시키고 군운봉을 해임시켜 육군총장에 임명하며 주수모를 총리에 임명하는 한편 쉬스징을 면직하고 변방군과 서북군을 돤치루이의 휘하에 두는 대신에 쉬스징의 주변사 직책은 유임시키는 타협안을 도출했다. 이에 차오쿤과 우페이푸는 쉬스징의 병권 박탈과 안복 3총장의 해임을 재차 요구했다. 6월 30일 돤치루이는 환계 회의를 열었으나 쉬스징 등은 직계의 요구에 강력히 반발했다. 장쭤린이 다시 돤치루이를 설득하려 했으나 돤치루이는 일개 사단장에 불과한 우페이푸가 주제 넘게 간섭하는 일 때문에 중앙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며 우페이푸를 비방함으로 강경한 반대의 뜻을 전달했다. 이 시점에서 중재는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셈이었다.

7월 2일 근운봉의 사직안과 주수모의 국무총리 임명안이 중의원에 송부되었다. 하지만 차오쿤과 우페이푸는 안복계 해산과 쉬스징 파면을 줄기차게 요구하였고 서북군의 통솔권도 돤치루이에게 맡길 수 없다고 반발했다. 7월 3일 이들은 공개전보로 쉬스징의 파면을 요청했다. 이에 장쭤린도 호응하여 쉬스징의 여섯가지 죄를 물어 통전을 보냈다. 즉 장쭤린이 직계의 편에 있음이 공식화된 것이다. 이에 고무된 쉬스창은 7월 4일 쉬스징을 면직하였다. 이에 돤치루이는 격노하여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꼈다고 쉬스창에게 항의하며 7월 5일 변방군의 동원을 명령했다. 동시에 7월 7일 쉬스징이 최후의 협상을 하러 온 장쭤린 암살을 기도하면서 모든 화해 시도는 파국으로 돌아갔다.

3.3 전쟁의 시작

7월 8일 새벽 1시에 쉬스징의 암살 시도를 겨우 모면한 장쭤린은 톈진으로 달려가 차오쿤, 우페이푸와 긴급회의를 가졌고 다시 펑톈으로 돌아가 길림성, 흑룡강성, 봉군 총사령부의 병력을 인솔하여 관내출병을 결정하였다. 7월 13일 장쭤린은 출병 동원령을 하달, 7만의 병력을 이끌고 산해관을 넘었다. 한편 돤치루이는 7월 8일 베이징으로 돌아와 군사회의를 열고 차오쿤, 우페이푸의 죄를 물으며 안국군을 조직, 총사령관이 되었다. 쉬스징은 참모장이 되었으며 7월 14일 총공격령을 내렸다.

환계군은 서로의 경한철로 연선을 따라 직계의 방아선을 돌파하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직계는 주요 요충지를 잇달아 상실하고 후퇴했다. 7월 15일 동로의 양촌에서도 환계군이 승리하여 직계군이 후퇴했다. 하지만 7월 16일 봉천군대가 본격적으로 가담하며 전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4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근현대사 2 근대국가의 모색 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직환전쟁과 봉천군벌의 관내진출, 송한용, 전남대학교.
  •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13권 중국 근대편, 김영사

5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