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세 타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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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やなせたかし
1919년 2월 6일 ~ 2013년 10월 13일, 도쿄 출신.

일본만화가이자 그림책 작가로, 날아라 호빵맨의 원작자로 유명하다.

2 생애

아버지는 도쿄의 아사히 신문에서 근무한 뒤, 1923년 특파원으로 상하이에 파견되기도 했고 아모이로 전근을 가면서 가족들 또한 이사 생활을 겪었다. 이듬해 아버지가 근무지에서 객사하여 남겨진 가족은 또다시 집을 옮겨야만 했고 본인은 큰아버지에게 거두어져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를 졸업했을 무렵 '소년 클럽'에 관심이 생겨 자주 읽으면서 자연스레 그림에 관심을 가져 관립 구제 도쿄 고등 공예 학교 도안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엔 한 제약 회사의 선전부에 취직하였으며, 1941년 야전 중포병으로 징병되어 중일전쟁에 참전하였다. 이 시기 을종 간부 후보생 시험에 합격해 육군 중사로 임명되었고 주로 암호를 해독하는 임무를 맡음과 동시에 선무 공작에도 임하였다.[1] 야나세 타카시는 전투가 드문 지역에 근무했는지 자신은 1번도 적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은 없었으나 군량 부족을 자주 겪었고, 남동생의 전사 소식을 접하면서 전쟁에 대해 반대하는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종전 후 1946년엔 고치 신문에 입사해 기자로 일할 때 자신의 부인이 되는 여성을 만났고, 이듬해에 그 동료와 같이 도쿄로 이동해 미쓰코시로 입사해 선전부의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동시에, 부업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만화가 그룹 '독립 만화파'에 가입했지만 곧 '만화 집단'으로 옮겼고, 1953년 3월 미쓰코시에서 은퇴해 전업 만화가가 되었다. 야나세 타카시 본인은 만화에서 얻는 수입이 미쓰코시의 월급보다 3배 가량 웃돌 것이라 예상해서 독립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무렵에 데즈카 오사무 등이 발표한 스토리 만화가 일본에서 인기를 얻어, 야나세 본인이 소속된 '만화 집단'이 연재하던 성인만화, 넌센스 만화들의 발표 빈도는 줄어들고 있었다. 야나세 타카시는 1964년 NHK의 '만화 학교'에 강사로 고정 출연하여, 이듬해 만화 입문서를 집필하는등 성인 만화와 넌센스 만화를 부흥시키려는데 노력을 다했으며, 3년 후엔 '보오상'에서 주간 아사히 만화상을 수상받았다. 이때 무대 미술 제작과 방송 작가 등 다른 업무를 맡아 만화가로서의 활동은 줄어들었지만, 가난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업계 내에선 困ったときのやなせさん으로 불리기도 했다.[2] 동시에 그의 원작 작품이 2번이나 히트를 치기도 했다.

1960년대 중기, 만화 집단이 개최한 전시회에서 인지도가 부족했던 산리오의 사장 츠지 신타로가 구경하면서부터 이후 산리오와의 교류를 넓히게 된다. 당초엔 과자 패키지의 만화를 그리고 있었지만, 1966년 시집 "사랑 노래"를 출판사로부터 출간하려고 했을때, 산리오가 이 시집을 출판하면서 "사랑 노래"는 대히트를 쳤다. 이 무렵부터 야나세 타카시는 그림책 만화를 그리기 시작해 1969년엔 처음으로 호빵맨을 그렸으나, 이 호빵맨은 지금의 호빵맨과는 무척 다른 노선이었고 일본에서 유행하던 히어로물에 대한 안티테제로 만들어진 성인용 노선의 만화였다. 1973년 잡지 '시와 동화'의 편집장을 맡는 동시에 '만화가의 그림책 모임'을 시작하면서 시인 · 그림책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해 호빵맨을 어린이용으로 각색시켜 발표했으나, 평론가 & 학부모 & 교육 관계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호빵맨은 1988년 날아라 호빵맨으로 애니메이션화되어 닛테레 계열 방송국에서 방영을 시작했으며, 당시 텔레비전 산업 문제로 스폰서가 붙지 않은 에피소드와 관동 지역 한정으로 방송을 시작한 에피소드도 있었으나, 호빵맨은 인기 프로그램이 되었고 캐릭터 상품 등도 폭발적으로 팔려 야나세 타카시의 인지도를 전국적으로 높여주었다. 1990년대 들어선 시상식들에서 초청받아 수상받기도 했으며, 1996년 7월엔 고향에 야나세 타카시 기념관 '호빵맨 박물관'이 개관하는 등 관청이나 지방자치단체, 공공 및 산업 단체 등에서도 인지도가 널리 알려져 마스코트로 캐릭터 디자인을 요구받기도 했다.

1992년부터 개최하던 1컷 만화대회 '만화 코시엔'에서 야나세 타카시는 말년까지 심사 위원장을 맡았으며, 2005년엔 재정난을 이유로 만화 고시엔이 입상하는 학교에 주는 상금의 절반을 내세운 고치 현에 대해 200만 엔의 자금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난다 난다 니얀다[3]가 애니화되던 2000년에는 일본 만화가 협회의 이사장에 취임해 자신이 지목했던 문제점인 '스토리 만화 이전의 만화가와 이후 만화가의 수입 격차를 어떻게 해소하느냐'에 관심을 가졌고, 자신이 경영한 회사의 빌딩에 일본 만화가 협회를 임대 공짜로 입주시켰다. 이 무렵부터 '만화가라면 행동이나 언동도 만화로 재미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코러스에 선글라스, 카우보이 부츠란 옷차림으로 행사에 나타나 일본 만화가 협회 회의 등에서 노래와 춤을 더한 연설을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호빵맨이 대성공을 거둘 시기부터 야나세의 컨디션은 악화되기 시작했고, 60대 말기엔 신장 결석, 70대엔 백내장과 심장질환, 80대엔 췌장염, 탈장, 녹내장, 장폐색, 신장암, 방광암, 90대엔 장폐색 (재발), 폐렴, 심장 질환 (재발)이 발병하는등 수많은 질병에 시달렸다. 2011년 봄 시야가 흐릿해진 것을 이유로 만화가 은퇴를 생각하고 마지막 무대로 생전에 장례식을 기획했으며, 친구들에게 작별식의 문장을 써달라고 부탁해 위패들도 마련했으나 개최 직전에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해 계획은 무산되었다. 직후에 '호빵맨 행진곡'이 부흥의 테마송으로 취급되고, 웃음을 잃은 아이들이 호빵맨을 보고 미소를 되찾았단 소식들이 들려오자 야나세 본인은 은퇴 계획을 철회했고, 피해 지역을 찾아가 호빵맨 포스터를 제작해 전달해주거나, 기적의 一本松를 테마로 한 CD를 자체 제작하기도 했다.

2012년 6월 진행된 일본 만화가 협회상 시상식에선 회장에 취임했으며,[4] 명랑한 성격을 계속 유지해 TV 인터뷰와 애니메이션 무대 인사에서 노래하면서 건강한 느낌으로 "곧 나는 죽을 것이다"라고 웃으면서 말하기도 했다. 이듬해 7월 6일 개봉한 호빵맨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첫날 무대 인사에서 "어떻게든 지금은 죽지 않고 있는데 곧 죽는구나. 병원에서 이후 2~ 3주밖에 살수 없단 말을 들었으며, '죽을때 죽을거야. 웃으면서 죽을거야. 죽을 때까지 열심히 할꺼에요"라고 웃음지으며 말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한달 뒤 병원에 입원해 그해 10월 13일 오전 3시 8분에 심부전으로 도쿄도 분쿄구의 쥰텐도 대학 의학부 부속 쥰텐도 의원에서 세상을 떠났다.[5] 사망 소식은 다음날인 15일에 본격적으로 알려졌으며, 고치 신문은 호외 기사를 Web에서 공개했다. 뉴스에선 2013년 6월, 「호빵맨」 애니메이션 스태프들에게 "내년까지 나는 죽을거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조금씩 몸이 쇠약 해지는 것을 알았거든요. (드디어 애니메이션이) 재미있는 곳으로 왔는데, 나는 왜 죽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라고 말한 모습이 방송되었다.

이후 장례식은 고인의 뜻에 따라 친척들만으로 끝마치고 후일 추모 모임을 열기로 해 2014년 2월 6일 도쿄도 신주쿠 구에서 '감사합니다! 야나세 타카시 선생 95세 축하합니다!'로 타이틀을 확정해 진행되었다. 이 자리엔 치바 테츠야를 비롯한 일본 만화가 협회 소속 만화가 60명이 참석했으며, 미야기 마리코, 토다 케이코후루카와 토시오를 비롯한 몇몇 성우 등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였다. 2013년 11월 발매된 「호빵맨과 사과 아기」가 야나세 타카시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이후 야나세 타카시 대전이 출간되었는데, 출간 시기는 야나세 본인이 세상을 떠난 뒤였지만 제작 자체는 몇년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유산으론 호빵맨 박물관과 호빵맨 스튜디오를 남겼고, 무덤은 고향인 고치현에 있는 '야나세 타카시 공원'에 마련되어 있다. 이 무덤 옆에 호빵맨과 세균맨의 석상도 세워져 있다.

3 여담

  • 만화가이기도 하였으나, 작사가, 편집자, 무대 미술가, 연출자, 사회자, 카피라이터,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기도 하였다.
  • 혈액형은 AB형으로, 사망 다음날 도쿄신문의 추모 기사에서 야나세 타카시를 기독교도였다고 보도했지만, 같은해 11월 20일자 신문에서 정정 기사가 나왔다.
  • 아침 식사는 빵을 주로 섭취하는등 다이어트에 철저했는데, 본인 왈론 "밥은 배가 더부룩하기 때문에 반드시 빵을 먹고 있다"고 한다. 점심은 거의 면류를 먹었고, 저녁은 반찬을 많이 소비하여 밥은 소량밖에 먹지 않았다고.
  • 만화가 레이몽 페네를 마음의 스승으로 에세이에서 말하고 있어, 페네 미술관이 개관했을 때 일러스트와 코멘트를 보내기도 했다.
  • 데즈카 오사무와는 영화 제작에서 친분이 깊어 말년까지 친분을 유지했으며, 2009년 에도 - 도쿄 박물관에서 개최 된 데즈카 오사무 전에서 "내가 배운 것은 데즈카 오사무의 삶에 대한 성실함이다. 재능은 노력으로도 무척 이길 수 없지만 성실하다는 것은 다소 그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 물론 한참 뒤떨어져도 약간은 접근한다. 데즈카 오사무 씨는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의 스승이다." 란 코멘트를 남겼다.

4 작품 목록

4.1 작사

  • 1969년판 노라쿠로 오프닝, 엔딩
  • 곤충 이야기 신 하치의 모험 엔딩
  • 우주 에이스 오프닝

4.2 캐릭터 디자인

5 수상 경력

  • 1967년 주간 아사히 만화상
  • 1969년 다이토 노부오상
  • 1989년 제19회 일본 동요상 특별상
  • 1990년 일본 만화가 협회상 대상
  • 1991년 이사오 사 등 서 보장
  • 1994년 고치현 가미 카운티 香北마치 명예 읍민
  • 1995년 일본 만화가 협회 문교부 대신상
  • 2000년 일본 동요 협회 공로상
  • 2000년 일본 아동 문학 작가 협회 아동 문화 공로상
  • 2001년 제31회 일본 동요
  • 2002년 고치현 특별 권성 공로자
  • 2003년 제50회 교통 문화상 국토 교통 대신 표창
  • 2004년 신주쿠 구 명예 구민
  • 2008년 도쿄 국제 애니메이션 페어 2008 제4회 공로상
  1. 이때 그림 연극을 만들어 현지 주민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2. 야나세 본인은 '그 시절의 나를 아는 사람은 나를 만화가라면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상당히 있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3. 야나세 타카시의 작품 중에서는 호빵맨 다음으로 유명하다. 2004년 재능방송에서 방영. 항목 참조.
  4. 후임 이사장은 치바 테츠야가 맡았다.
  5. 공교롭게도 5년 전 아카츠카 후지오가 사망한 장소와 동일한 장소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