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 신사

여기는 실제로 사건이 곳곳에 많이 발생하므로 일본 여행 갈때 가급적 출입을 자제하기 바란다.

靖国神社/靖國神社(やすくにじんじゃ)[1] (일본어)
Yasukuni shrine (영어)

1 개요

한국인이 알아야 할 역사이야기 #4 야스쿠니 신사 ver.2


야스쿠니 신사 일본인이 동아시아의 어그로를 가장 쉽고 빠르게 끌 수 있는 곳
천황을위해 싸우다죽으면 신이되어 안치된다믿는곳

전범들을 신격으로 모시는 건 물론, 정말 무고한 분들[2]의 영혼까지 가두어 놓고 있는 일본 군국주의의 만마전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야스쿠니 신사보다 더 악질적인 추모 시설이 있다. 순국7사묘 참조.

다신국가인 일본은 이외에도 전범을 기리는 개인이나 재단 소유의 신사가 전국에 정말 많다! [3]

일본 도쿄에 위치한 시설. 일단 명목상으로는 일본 최대 규모의 신사라고는 하지만, 그 실상은 메이지 유신 이래 근대 이후 일본이 관여한 전쟁 범죄자들을 미화하고 숭상하는 시설이다.[4] 2차대전동아시아태평양 연안 국가들을 상대로 침략 전쟁을 벌인 전쟁 범죄자들을 신으로 추모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과거 반성 문제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설립 이래로 오늘날까지 일본 군국주의를 정당화·미화한다고 평가하고 있음에도 현재 일본만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다.

흔히 한국 학생들이 야스쿠니 신사의 <신사>를 <紳士[5]>라고 부르는데 <紳士>가 아니라 <神社>라는 것을 기억하자.

2 역사

원래는 메이지 유신 이후 막부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1869년(메이지 2년)에 세운 시설이다. 본디 이름은 '쇼콘사(招魂社)', 즉 혼을 불러[6] 진정케 하는 절이다. 신불분리령 이후 1879년(메이지 12년) 6월, 국가신토의 상징답게 신사로 개편하면서 이름도 야스쿠니(靖國), 즉 나라를 평화롭게 한다는 뜻으로 바꾸었다.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피해자들에겐 상당히 신경 거슬리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이 전쟁에서 죽었고 또 그로 인해 야스쿠니에 합장된 인물들 중 일부는 정한론을 필두로 한 제국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야스쿠니(靖国)는 춘추좌씨전에서 유래한 단어로,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같은 뜻의 야스쿠니(安国)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安国이 사찰 이름로 자주 쓰이는 등 불교적 느낌이 강하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좌씨전에서 나온 야스쿠니(靖国)란 말을 사용한 것이다. 굽시니스트는 야키니쿠 신사라고 카더라

3 대상

A급 전범[7]

자세한 것은 전범 항목을 참조할 것. 도쿄 전범 재판에 따르면 국제조약을 위반하여 침략전쟁을 기획, 시작, 수행한 사람들(평화에 대한 죄)이다. 스가모 형무소에서 수감되었으며 8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표시는 순국7사묘와 중복 합사된 전범이다.

  1. 도조 히데키(1884.12.30.~1948.12.23.) : 일본 제40대 총리이자 결정적으로 진주만을 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인간 쓰레기다. 쓰레기가 불쌍하다.
  2. 이타가키 세이시로(1885.1.21.~1948.12.23.) : 만주사변을 기획하였으며 일제의 중국 침략에 관여하였다.
  3. 도이하라 겐지(1883.8.8.~1948.12.23.) : 관동군 사령관(1938~1940). 중국의 화북 분리 공작 관여하였으며 포로 및 피억류자들에 대하여 야만적으로 대우하였다.
  4. 마츠이 이와네(1878.7.27.~1948.12.30.) : 1937년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당시 난징대학살을 자행했다고 하는데, 이쪽은 억울할 수도 있다. 왜냐면 그 당시에는 폐결핵으로 누워 지냈으며, 오히려 난징대학살 당시 충격받고 자기 부하들을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5. 기무라 헤이타로(1888.9.28.~1948.12.30.) : 왜 야스쿠니 신사가 그토록 심각한 문제인지 알 수 있는 항목. 그나마 다른 전범들은 그래도 제노사이드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지만, 이 자는 제노사이드를 직접 주도했다. 관동군 참모장(1940~1941), 육군대신(1941~1943), 육군최고고문(1943), 버마 파견군 사령관(1944~1945). 그냥 사람이 아니다.이 놈이 저지른 학살은 난징대학살, 싱가포르 학살, 바탄의 행진, 산다칸 행진, 마닐라 대학살을 다 더해도 모자를 지경. 오죽하면 같은 A급 전범들한테도 사람 취급을 못 받았다. 참고로 이 자의 별칭이 '버마의 도살자'다.
  6. 무토 아키라(1892.12.15.~1948.12.30.) : 중국파견군 참모장(1937), 육군성 국무국장(1939~1942), 수마트라의 일본군 사단장(1942~1943), 필리핀 방면군 참모장(1944~1945). 광범위한 지역의 침략과 난징대학살을 포함한 중국의 일련 사건들까지 폭 넒은 책임을 물었다. 다만 좀 억울할 수도 있는 게 침략전쟁에 앞장선 죄는 있으나 마츠이 이와네와 마찬가지로 학살 혐의와는 관련이 없다.
  7. 우메즈 요시지로(1882.1.4.~1949.1.8.) : 관동군 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등을 지냈고, 전후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의 미주리호 선상에서 시게미츠 마모루와 함께 항복 문서에 서명한 인물이다.
  8. 마츠오카 요스케(1880.3.3.~1946.6.26.) : 일본 제국의 전 외무대신(1940~1941). 국제연맹의 탈퇴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1937년 남만주철도 총재,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와의 삼국동맹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1941년 소련-일본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지만 대 소련 개전을 주장하였다. 대미정책에서도 강경론을 주장하였으며 도쿄 전범 재판 진행 중 병사하였다.
  9. 히라누마 기이치로(1867.9.28.~1952.8.22.) : 추밀원 의장(1936, 1945), 수상(1938.1~8), 내무대신(1940.12.~1941.7.)을 지내며 히로히토의 고문 역할을 담당하였다. 국가신토를 장려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국가주의 우익 단체 국본사를 조직하였다. 복역 중 1952년 초 석방되었으나 그 해 병사하였다.

4 위치

땅값 쩔어주는 도쿄에서 비싸디 비싼 치요다구에 위치하고 있다. 그도 그럴만한게 야스쿠니 신사의 원래 목적을 다시 보면 왜 거기 있는지 이해가 간다. 황거(고쿄)[8]도 코앞이고. 야스쿠니 신사 건너편에는 그 유명한 일본 부도칸이 있다. 또한 근처에는 꽤 유명한 가톨릭계 명문 여학교인 도쿄 시라유리(白百合) 여학원이 있다.

교통편을 적어보자면 쿠단시타역에서 가장 가깝고 JR 노선에서는 이다바시역, 이치가야역에서 가깝다. 사실 JR노선 역에서 걸어가기엔 애매하게 멀다. 도보로는 대략 15~20분 정도.

5 주의

최근 들어 야스쿠니 신사를 노린 방화나 폭발사건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이 근방 지역을 여행할 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일본에서 날고 기는 극우 세력들이 종종 결집하는 장소가 바로 이곳인데다가 본 신사를 참배하는 극우 일본인들이 늘어나면서 그만큼 봉변 당할 위험성도 매우 커졌다. 특히 이 근처를 지나는 한국인중국인들을 비롯한 외국인에게 달려들어 항의하는 일도 꽤 잦아져 신변 안전이 걱정인 위키러들은 되도록 이 신사에 접근하는 것을 삼가는 게 좋다.

설령 방문할 일이 있으면 최대한 한국어를 꺼내지 말고 한국인 신분을 나타내는 물품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도록 하자. 섣불리 극우를 자극할 경우 이곳 경찰도 일본인인지라 외국인의 권리 보장이 미약하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외국인 편에 잘 안 서 준다. 외교통상부에서도 "일본 지역에 거주하시는 우리 국민들, 일본 지역을 방문할 예정인 우리 국민들께서는 야스쿠니 신사 및 일본 우익들의 시위 현장에의 접근 자제, 불필요한 대응 자제 등 신변 안전에 최대한 유의하여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라는 문구로 해당 신사에 접근하는 걸 자제토록 권고하고 있다. 주의. 이곳은 여행자제 국가·지역입니다.

바로 아래 나오는 사진에도 잘보면 참배하는 곳 바로 옆에 경찰이 지키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신사를 노린 일련의 범죄 행위를 막는 것이 목적이긴 하나, 실상은 참배하는 참배객들이나 관광객들의 시시콜콜한 행위를 제지하는게 주 업무인 듯 하다. 보통 신사 안쪽을 정면으로 사진 찍거나 도리이 안쪽에서 물 마시고 취식하는 행위를 제지하고 있다. 특히 신사 주위에 산책할 수 있는 산책로가 있는데 2인조 경찰이 항시 돌고 있다. 일부 시간대를 제외하면 워낙 인적도 드물고 핵심 시설 주변이라 그런지 꽤나 보안에 신경쓰는 듯한 인상을 받으니 이곳을 돌 때 주의하자. 의심받는 행위를 하다가는 불심검문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6 논란

6.1 국가신토 야스쿠니교

Yasukuni1.jpg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군국주의 성향을 삭제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신토의 상징적인 조직이었기에 폐지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종교법인으로 종교의 자유를 방패 삼아 살아남았다. 문제는 특정 개인을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것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군국주의 자체를 숭배하는 곳이 되었고, 거기에 유력 정치인들이 적극 참배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지금의 야스쿠니 신사는 그냥 사설 종교법인이다. 이 신사는 일본이라는 국가와는 법률적으로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러므로 현재 야스쿠니 신사의 지위는 야스쿠니 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추도하는 것도 딱히 일본에 그런 법이나 조례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니며, 일본 정부에서도 제어할 권한이 달리 없다. 그냥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눈 가리고 아웅 수준인 것도 사실이다. 정치인들이 사적으로 참배하는 것은 물론이요, 일본 후생노동성에서는 자위대 대원 같은 사람들의 명부를 넘겨주는 일을 하면서 대놓고 야스쿠니 신사의 업무를 지원하고 있으며, 일본의 신토신사를 관리하는 신사본청도 야스쿠니 신사와 업무를 제휴하고 있다. 방위대학교 사관생도들도 참배를 하는데, 방대 측에서는 개인 참배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편의를 봐주고 있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지자면, 야스쿠니 신사는 현충원이나 알링턴 묘지와 같은 국가의 공공 추모 시설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없다. 따라서 '현재의 법률상으로는' 일본에는 제대로 된 추모 시설이 없는 것이다.[9]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충원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로서 운영되고 있어 국가의 공식적인 시설이며, 알링턴 묘지는 종교에 대해서 중립적이고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의 예식에 따른 장례도 허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신토의 사설 종교집단'인 야스쿠니 신사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물론 현충원 역시 종교에 대해 중립적이다.

하지만 "일본은 국가에 몸바친 사람을 위한 추도 시설이 없으니 (야스쿠니 신사를 대체할) 시설을 건설하자."라는 주장은, 우익 측에서는 "야스쿠니 신사가 있다."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정상적인 국립묘지가 생긴다면 야스쿠니 신사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시설인지 여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연간 20억에 달하는 운영 자금은 국가에서 분리된 뒤에는 유족회의 봉납금이나 유취관의 입장 수익료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차례차례 사망하면서 재정 위기를 겪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유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야스쿠니 신사는 '음사(淫祀)'이다. 선조의 영혼을 제사 지내는 것은 후손의 정당한 권리이며, 이를 무시하고 관계도 없는 제3자들이 제멋대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이다. 예외적인 사례가 국가가 충신에 대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지만,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기관이 아니므로 제사를 지낼 권리가 없다.[10] 참고로 유교에서는 음사를 지내는 자들에게 복(福)이 없고 자손이 끊어질 것[11]이라고 경고한다.

6.2 야스쿠니 신사를 이해하기 위한 사상적 배경

이미 일본인들 스스로 주장하는 그 신토에서도 멀리 동떨어진지 오래다.

일본에는 온갖 이 있는데, 이중 인귀(人鬼)[12]를 신사에서 모실 때는 주로 원한을 품어 세상에 재앙을 끼치는 영을 진정시키는 목적이었다.[13] 바꾸어 말하면 세상에 재앙을 끼칠 수 없는 인귀, 살아생전 권세를 누리다가 평온히 죽은 사람을 위해서는 신사를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러한 신토 전통을 깨트렸다. 자신이 죽거든 신사를 세워, 승리한 권력자로서 죽는 자신을 신으로 모시라 하였다. 이때부터 인귀를 모시고자 신사를 세우는 데에는 민중 전통과 권력자 전통으로 나누어졌다. 민중 전통은 전통적인 목적대로 세상에 재앙을 끼치는 혼령을 진정시키고자 하였고, 권력자 전통은 권력자들이 죽어서도 자신과 자신의 후예들을 높이고자 하였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했고 이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요토미 히데요시신사를 말 그대로 개발살내버렸다. 그냥 철거한 것이 아니라 폭파시켜버린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신사는 추후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복구시켰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는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인의 종교관에서는 적대한 세력이나 심지어 반역세력조차 죽게 되면 은혜와 원한과는 상관없이 영혼을 구제하고 위로하는 제례를 행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으나, 도쿄 쇼콘샤는 에도 막부를 지지한 측의 전몰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메이지 유신 지지 측 전사자의 영혼만을 위로하는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에도 막부 측 사망자를 모시지 않았으니, 이미 쇼콘사 시절에도 일본의 옛 전통과 비교하면, 이미 반쪽짜리 시설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목적이 바뀌어서 영혼을 위령함이 아니라 충혼, 즉 덴노에게 충성을 다한 군인을 높이 받들어 그 명예를 빛나게 함이 된다. "원한을 품은 영혼을 위로한다"는 목적에서 "충성스런 군인의 영혼을 높이 받들어 공을 기억하고 명예를 빛나게 한다"는 목적으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스쿠니 신사는 원한을 풀게 하는 장소라기보다는 오히려 야스쿠니 신사에 이름을 올림을 죽은 혼령이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에 충성하라는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즉, 야스쿠니 신사는 당시 일본인들에게 국가에 충성하고 덴노를 우러르라는 프로파간다를 위한 장소로 재건축된 것이다. 때문에 메이지 유신에 큰 공로를 세운 에토 신페이와 사이고 다카모리조차 사가의 난과 서남전쟁에서 덴노에게 적대하였다는 이유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 않았다.

이러한 목적은 명백하게 의도한 것이다. 도쿄 쇼콘샤 시절부터 1880년대까지 야스쿠니 신사 주변은 시장거리였던 까닭에 항상 소란스러웠으나, 대대적인 주변정리를 통해서 경건한 분위기를 지니도록 주변을 조성하였고, 1898년 9월 이전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병으로 죽은 군인은 설령 전쟁터에서 죽었다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생각하기에 가히 명예롭게 죽은 군인들만 받아들였다.[14] 하지만 이러한 기준으로는 청일전쟁 전사자들 대부분이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갈 수 없기에, 덴노의 특별한 허가와 배려로 말미암아 그러한 구분 없이 야스쿠니 신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즉, 야스쿠니 신사의 성격이 처음부터 덴노에 대한 프로파간다를 겸한 군국주의 성향 강화였지만, 이때를 기점으로해서 보다 노골적으로 바뀐 셈. 그리고 이때부터 배향된 신위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15] 메이지 덴노, 다이쇼 덴노, 쇼와 덴노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적에 육군 대원수 군복을 입은 데서도 야스쿠니 신사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6.3 야스쿠니 신사의 문제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 도중에 죽은 황군(덴노의 군대)을 미화하는 장소였다. 실제 사망 원인에 대한 평가가 없이 전사자면 무조건 야스쿠니 신사에 모시는데,[16] 무엇보다 지금까지도 도조 히데키를 포함하여 여러 전범 또한 위령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본질은 '전쟁의 희생자들을 통해 과거의 전쟁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웅적인 행위로 미화하는 것인 셈. 특히나 도조 히데키 같은 경우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전범 재판을 했을 경우에도 사형을 면키 어려웠으리란 말이 나올 정도로, 군인 겸 수상으로서 막장으로 정부를 운영했다. 순수하게 일본인의 입장에서만 보더라도 도조 히데키는 욕을 먹으면 먹었지 칭송받을 인물이 아니다. 자기 나라를 말아먹은 이런 인물마저 야스쿠니 신사에 배향함은 문제가 심각하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일반 전몰자들도 있으니 전범들만 합사한 것이 아니며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의도는 더더욱 아니다'라는 해명을 하고 있다.

거기다가 야스쿠니 신사 내에 있는 전쟁박물관인 유슈칸(遊就館)이라는 박물관은 더욱 가관. 가이텐 같은 군수품을 전시하거나 '대동아 전쟁은 아시아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 따위의 전시물들을 대놓고 전시하고 있다.[17] 심지어는 한국인이나 대만인들도 자발적으로 참전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따로 전시물이 있을 정도.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여기서 장교용 일본도도 만들었다. 성능은 고철보다 좀 나은 수준이었다고.

일본 신사에서 도리이(鳥居)[18]를 높게 세우는 것도 야스쿠니 신사에서 시작한 유행이다.

다른 신사와는 달리 야스쿠니 신사는 패전 전까지 해군육군이 공동으로 관할했는데 일본군 군부는 야스쿠니 신사에 청동그 청동이 아니다으로 당시 일본에는 없던 큼지막한 도리이를 세웠다. 이후 일본 각지에서 경쟁적으로 도리이를 크게 세우기 시작했다. '도키노 사쿠라'(동기의 벚꽃)라는 전쟁 시절 노래에도 노래 가사 중에 '전쟁 중에 각지에서 흩어져 죽은 전우들이 야스쿠니 신사 앞마당 벚꽃으로 다시 만나자' 하는 가사가 있을 정도로 군국주의국가신토의 상징이었다. 다만 처음부터 이런 상징물이 되지는 못해서, 한동안은 일본 정부가 유족들을 상대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게 유도하느라 꽤나 애를 썼다.

상당히 널리 알려진 잘못된 상식으로, 야스쿠니 신사가 전사자들의 '위패'를 모셔두고 있다는 것이 있다.

위패를 모심은 유교 전통으로 동북아시아 불교가 그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 불교 역시 이를 사용한다. 신토에서는 본디 위패가 없었지만, 근대에 신토식 조상의례를 만드는 과정에서 유교와 일본불교의 형식을 참고하여 위패를 받아들이되, 영새(靈璽)라고 하였다. 신토의 영새가 불교나 유쿄의 위패와 눈에 띄게 다른 점은 영새를 담는 함에 거울을 설치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만약 모셔야 할 신위가 한둘이 아닌데 공간이 부족하다면? 일본 신토에서는 그럴 때에는 영새부(靈璽簿)라 하여 문서에 죽은 이의 이름과 간단한 사항을 적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영새부는 본디 영새(위패)를 대신하여 만든 것이므로 그 또한 영새함과 비슷한 함을 만들어 그 안에 넣고신단에 안치한다.

야스쿠니 신사 역시 영새부를 사용한다.

6.4 한국, 대만, 오키나와인 합사 취하 운동과 소송

야스쿠니 신사 관련 뜨거운 감자 중 하나는 대만, 오키나와, 한국 출신자 합사[19][20] 문제이다. 일제에게 강제로 징집되어 전쟁에 나가서 사망한 외국인들의 신위까지 야스쿠니 신사에 모셨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징집되어 전사한 부친이나 다른 가족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 많은 유족들이 합사취하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의친왕의 둘째 아들인 이우 왕자도 강제로 합사되었다. 친일 행적이 없으며, 오히려 반일적인 인물이었는데 '사망 시점에 일본인이었다'는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21]

야스쿠니 신사가 전사자들을 모시는 방식은 영새부(靈璽簿)에 이름을 기록하는 것. 이곳에서 이름을 제거해 달라는 소송이 많았지만, 야스쿠니 신사 내에서는 종교적 해석을 이유로(아무리 생각해도 끼워맞추기지만)[22] 거부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말로는, 야스쿠니 신사의 신의 몸체는, 모셔져 있는 신위들이 각각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라, 한 분의 신위만 뺄 수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무슨 합체 로봇도 아니고 이 때문에 유족들이 "누구 맘대로 아버지를 이 따위 시설에 놓느냐? 당장 치워라!"라면서 항의하고, 야스쿠니 신사 합사취하 소송을 하고 있지만 야스쿠니 신사 측은 여전히 요지부동.

백번 양보해서 거기 합사시키는 건 좋다고 쳐도, 그럼 합사된 한국인의 유족이 야스쿠니에 방문하면 받아들여주느냐? 희한하게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일본 처녀 아끼꼬의 진실 찾기' 에피소드에서 이 어처구니 없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심지어 살아 있는 한국인까지 강제로 합사되어 있다. 당사자가 항의해도 무시한다. 자세히 알고 싶다면 안녕, 사요나라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도록 하자.

그런데 사실 합사되어 있는 한국인들 중에서도 전범이 많다. A급은 없으나 B, C급 전범으로 148명이 있으며 이들 중 23명은 처형당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한국인 출신 군인 중 가장 높은 직위까지 올라간 홍사익. 그 때문에 대한민국이 출범하자마자 외무부나 장택상도 전범 재심사를 요구했고##, 한국인 전범들도 한국 정부에 사정했다. 강제징병된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외교문제로도 번졌다.###,## 전쟁 중에도 한국 정부는 한국인 전범 석방에 노력하는 등 야스쿠니 신사와 한국인 전범은 뗄 수 없는 문제다.

2011년 7월 21일, 일본 법원은 살아있는 사람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해서 제사를 지내는 건 인권 침해가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아무래도 일본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을 시체 취급해도 괜찮은 모양이다.이 무슨 팽형의 조선시대 판도 아니고....

사실 이런 강제 합사 문제는 일본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종교나 유족 의향도 무시하고 막 집어넣어서 일본그리스도교 신자 유족들이 소송을 낸 적이 있고, 해결을 위해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NCC) 아스쿠니 신사 문제위원회를 만들어 법정투쟁까지 나섰지만, 친절하신 일본 사법부는 '종교적 인격권은 법적 보호 대상외'라면서 기꺼이 무시해 주셨다. 이 정도면 고인드립이자 부관참시의 최종판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 ###

즉, 본질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는 신위를 배향함에 있어서 (대상이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대만인이든) 본인 혹은 유족의 의사를 전혀 상관하지 않고 철저하게 일방적으로 결정한다. 패전 전에도 그러했고 패전 후에도 그러하다. 영광스러이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주는데 다른 사람(그게 유족이라 할지라도)이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의 야스쿠니 신사의 방식은 메이지 덴노가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고 하여, 과연 민주주의 국가에서 나올 입장인가 싶다.

참고로 아소 다로가 비유의 예로 자신있게 입에 올린 알링턴 국립묘지는 종교는 물론 매장 여부에 있어서도 유족의 의향에 따르고 있다.

2013년 10월 23일 한국인 합사 문제 소송이 일본 법원에서 또 한 번 기각됐다.[23]

6.5 총리 참배와 전범 분사 문제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리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주변국과 외교 문제를 빚었다. 의외로 최초의 참배자는 진보적 성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미키 다케오 총리. 다만 그는 사적 참배라며 선을 그었고, 공물 역시 그의 사비에서 충당되었다.

그 이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패전 40주년인 1985년 8월 15일 최초의 공식 참배를 했고(다만 2배2박이 아닌 1배 등 비 신토 양식으로),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가 1992년 11월 일본 유족회의 압력으로 일정을 알리지 않고 후다닥 참배했다. 1996년 7월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사촌이 합사되었다는 이유로 다시 사적 참배. 이렇게 전후 공식, 비공식 참배는 4번 정도 있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한국에 가장 유명하게 알려진 사람은 역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前 총리. 그는 한국중국의 반대도 무시하고 결국 취임 직후인 2001년 8월 13일 야스쿠니 신사를 직접 방문하여 참배하였다.[24] 그나마 패전 60주년인 2005년 8월 15일에는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 "고이즈미 담화"를 하면서 좀 안 하나 했는데, 결국 다음 해인 2006년 8월 15일에는 총리 퇴임을 앞두고 기어이 야스쿠니 신사를 직접 방문하여 참배하였고, 주변국의 반대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반대 세력'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노골적인 불쾌감까지 드러냈다.

자민당 창당 이후 최초로 선거로 정권 교체를 이룬 민주당 정권의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야스쿠니 참배를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햐토야마 정권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A급 전범들을 모두 분리하는 방안 혹은 국립추도시설 건립을 검토하였으나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근 몇 년 동안 총리 자리가 바늘방석인지라 재임기간이 짧았던 탓. 실현 가능성도 적었겠지만, 그의 퇴임과 함께 이 해결은 물 건너 갔다.

2010년과 2011년 8월 15일, 간 나오토 일본 총리는 "세계대전에서 많은 국가, 특히 아시아 여러 국가에 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며 사죄했으며(2010년 간 나오토 담화), 신사 참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2011년 이 날 52명의 일본 여야 의원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고,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지 않은 간 총리 내각은 일본인이 아니다"라고 발언했으며, 민주당의 차기 총리가 되었던 노다 요시히코 (전) 재무상은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A급 전범들은 전쟁 범죄자가 아니다"라는 발언을 했다.

결국 자민당으로 정권이 갈린 2013년 4월 23일, 일본국회의원들이 대규모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자민당, 민주당 등 168명이나 되는 국회의원들과 부총리 등 각료 3명이 참여했고, 66명의 국회의원이 대리인을 보냈다. 이는 역대 최대 규모로, 아베 신조 총리의 침략 부정 망언과 시너지를 일으켜 외교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심지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는 미국알링턴 국립묘지와 다를 바 없다"고까지 주장했다. 우리 학교 화장실이랑 일본 총리 관저가 동급이라는 정도?

2013년 10월, 미-일 정례 외교-국방장관 회담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존 케리국무장관, 척 헤이글국방장관은 역시 도쿄에 위치한 치도리카후치(千鳥ケ淵) 전몰자 묘원을 참배했다.[25] 두 장관의 참배는 미국 정부가 야스쿠니 신사를 알링턴 국립묘지와 동격으로 주장한 아베 신조 내각의 주장을 반박하는 무언의 메시지라는 평가를 받았다.

애초에 이 A급 전범 합사 문제에 덴노 히로히토조차 상당히 불쾌하였고, 이후 단 한 번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지 않았다.[26] 이 정도면 덴노에게 충성한다는 것은 그저 형식적인 명분이고, 사실은 덴노를 제대로 엿먹이는 시설이다. 현재 덴노인 아키히토 역시 합사 후에는 참배한 적이 절대로 없고, 그 외의 신사 참배 자체도 영 호의적이지 않은 쪽이고.

6.6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안 모셔놨나?

공식적으로 국립묘지로 인정되는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단순히 전몰자들[27]이 모셔졌다는 이유로 대한민국현충원 비슷한 시설로 착각하는 경우가 꽤 있는데, 이것만 본다면 일본 정치인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이 다른 나라에까지 시끄러울 정도인 것이 이해가 안 갈 것이다. 일단 대한민국 국민이나 정치인에게 현충원 참배를 하지 말라는 소리를 하면 이뭐병 따위의 반응이 나올 테니까.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는 국립묘지와 같은 개념으로 보아선 안 된다. 현충원과 같은 국립묘지는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분들께 감사하는 곳이지만, 야스쿠니 신사는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국립묘지와 같이 보편성을 가진 곳이 아니다. 천황에게 충성한 자들은 '(죽어서) 야스쿠니에서 만나자'고 다짐했는데, 이들은 죽어서 신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맹목적인 희생을 강조하는 전체주의를 정당화하는 허울 좋은 말일 뿐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결코 문화상대주의니, 국립묘지라느니 하는 이유로 용인할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A급 전범이나 군인들만 추모하는것만은 아니다. 도쿄 대공습 당시 군수공장의 인부와 국가의 강요 등으로 일하던 학생들, 그 외 민간인들도 함께 합사되어있다. 아마 당시 어떤방식으로든 군관련,사회관련으로 종사하던 사람들을 '군인'으로 뭉뚱그려놓았기 때문에 민간인에 대한 정보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보인다. 다만 공습시 희생된 모든 민간인들이 합사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야스쿠니신사 홈페이지
관련 Q&A
관련 Q&A2

야스쿠니는 결정적으로 국립묘지와 비슷한 개념으로 보기는 힘든 것이 말은 거창하게 '합사'라는 것이지만 유골도 위패도 아닌 책에 이름만 적어놓았다. 게다가 유명한 전범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절대 다수 합사된 이들은 명부가 비공개이기도 하고.[28] 묘비에 이름이 공개되어 있고 시신이 매장되어 있는 국립묘지와, 유골도 위패도 아닌 책에 이름을 적는(그것도 비공개) 것은 경우가 많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다행히 전쟁 범죄자들 말고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을 추도할 만한 대체 시설이 있긴 한데,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이라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무명용사를 추도하는 국립 시설이 그것이다. 게다가 이 묘원은 일본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는 시설이다.[29] 이렇게 대체 추도 시설이 있는데도 일본 극우들은 굳이 전범이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 근래 들어 순국7사묘극우들의 집회 장소로 새로이 떠오르고 있다.[30][31]

7 기타

일본 우익하면 생각나는 검은 트럭에 '천황 폐하 만세' 문구를 새기고 욱일기를 꼽고 달리는 사람들이 입구에 많이 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010년 12월 카미카제(神風)라는 이름의 유물 특별 전시회를 통해 야스쿠니 신사 내 유물 전시관인 유슈칸(遊就館) 1층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갑옷과 투구를 전시했다. 조선시대 갑옷에는 봉황 문양이 새겨져 있고 투구에는 군최고통수권자인 '元帥(원수)'라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고려시대 갑옷에는 용, 기린 등이 새겨져 있어 왕의 갑옷으로 추정된다[32]. 이들 옆에 敵國降伏(적국항복)'이라는 글을 내걸고 있다.

  • 日 야스쿠니 신사, 조선시대 갑옷. 투구 소장 확인#
  • 고려 갑옷·투구도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

바다이야기, 장미아파트 공경비의 작가 박병규가 야스쿠니 신사 방명록에 신사참배를 비판하는 내용의 그림을 남기고 온 적이 있다.#

일본에는 '다 같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의 모임'이라는 명랑한 이름의 초정당 단체도 있다(...)#

또한 서브컬쳐 관련해서는 소니애니이것과 관련된 요소를 넣어서 국내 방영사인 애니플러스가 방영중지를 하는 등 논란이 꽤 있었으며, 아이돌 마스터에도 등장하기도 하였다. 당신이 P라면 꼭 여기 참배하자! 프로매국노

위구르 족의 대모로 불리며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된 바가 있던 독립 운동가 레비야 카디르 여사도 2012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가 있다[33][34].

포켓몬 GO가 일본에 출시 되면서 중국인 트레이너가 이 곳과 일본 국회의사당을 2200-2400대 망나뇽으로 점령했다가, 한국인 플레이어가 ABEISASSHOLE이란 이름의 망나뇽으로 탈환.

8 사건사고

야스쿠니 신사/사건사고 항목 참조.
  1. 신사 홈페이지에서는 國을 사용하고, 실제로도 国과 國이 혼용된다.
  2. 후술할 강제 합사자들을 비롯한 무고한 고인들. 특히 일제 치하에서 강제로 전쟁에 참여한 한국인들의 영혼까지 합사시켜놨다!
  3. 게다가 이런 곳에서 참배를 하면서도 누구에게 참배하는 줄 모르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 치치지마의 식인귀를 섬기는 신사도 있다! 에히메현 참고.
  4. 여러 혼들을 함께 모신다는 의미로 합사(合祀)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이 곳의 "합사"라는 개념은 일본 고유의 것도 아니라 야스쿠니 신사가 독자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5. Gentleman
  6. 국어에도 혼을 부른다는 의미로 똑같이 초혼(招魂)이란 말을 사용하며, 김소월의 시 '초혼'이 잘 알려져 있다. 비슷한 단어로 청신(請神)등이 있다.
  7. 평화에 대한 죄. A급 전범이 B, C급 전범보다 나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분류 기준이다. 즉, A급·B급·C급 모두 천하의 개쌍놈들이다.
  8. 고쿄가 치요다구 한가운데 있다. 위치상으로 보면 고쿄의 북서쪽으로 무도관이 있고 도로를 경계로 북서쪽에 야스쿠니가 위치해 있다.
  9. 사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정부 단위에서 설립, 운영하는 추모 시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이 그것. 지금의 일본이 급격히 우경화되고 있기 때문에 야스쿠니가 더 관심을 받는 것이지, 중도정권이면 야스쿠니는 관심받을 일도 없었다.
  10. 여담으로 애초에 쇼와 덴노는 A급 전범들을 제사 지낸다는 것에 불만을 드러냈다. 그의 입장에서는 되지도 않는 전쟁을 일으킨 탓에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자들을 도저히 충성스러운 신하로 볼 수 없었기 때문.
  11. 이런 논리면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기독교의 시각에서 우리나라의 전통 가례는 전부 이단이다. 야스쿠니 신사가 비록 문제가 있는 장소이지만 어쨌든 일본 토속신앙에 기반을 둔 시설이다. 이걸 타 종교의 논리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종교적 시각에서의 접근은 맞지 않다.
  12. 사람이 죽어서 된 영. 중국 전통에서 사용한 용어이다. 중국에서는 신을 셋으로 분류하여 천신(天神)은 하늘과 관련된 신, 즉 상제나 별의 신, 기후의 신 등을 가리키고 지기(地祇)는 땅과 관련된 신, 즉 땅이나 곡식과 관련된 신이며, 인귀(人鬼)는 사람이 죽어서 된 영이라 하였다.
  13. 이런 일본의 종교관을 기본적인 세계관으로 반영한 만화가 바로 블리치이다.
  14. 이는 세계 각국의 국립묘지라면 고인에 대해 평가를 해서 명예로운 이들만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야스쿠니 신사의 기준으로는 훈장을 받을 정도로 공을 세운 인물임에도 오직 전쟁터에서 전사하지 않았다고 거부한다. 그런 반면 온갖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단지 전쟁터에서 전사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받아들인다. 과연 이게 제대로 된 국립묘지의 방식일까?
  15. 야스쿠니 신사 측에서는 "일본을 위해 죽은 사람이면 누구나 받아들인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배향된 명단을 보면 오직 군인-남자인 경우에만 받아들였다. 민간인이거나 여자일 경우는 명백히 배척했다. 일본을 위해 죽은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인다는 말은 야스쿠니 측의 의례적인 말에 불과하다.
  16. 이러한 행동은 모든 전몰장병들이 기꺼이 덴노와 국가를 위해 기쁘게 충심으로 죽었으리란 이미지를 준다. 청일전쟁 때, 기존 기준으로는 명예롭지 못하게 죽은 군인들도 야스쿠니에 모시도록 함은 유족들을 위로하는 의미도 있지만, 모든 장병들이 일심단결로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이미지 조성이 더 큰 목적이었을 것이다.
  17. 그리고 그 안에서 우익들이 자발적으로 그네들 시각의 '불순분자'들을 감시하고 있다.
  18. 일본 전통의 문. 문이라고 해서 여닫는 개념은 없다. 만화에서 간혹 절의 입구가 나올 때 나오는 큰 문. 바로 그것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B%8F%84%EB%A6%AC%EC%9D%B4
  19. 合祀: 망자 둘 이상의 혼령을 한데 모아 제사함.
  20.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것이 확인된 한국인은 1만 9,650명, 대만인은 2만 7,000명이고 추정범위까지 늘리면 한국인은 2만 1,000명, 대만인은 2만 8,000명일 것이라고 한다.
  21. 물론 일본이 당시 조선(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고(경술국치) 대한제국 황실을 이왕가로 격하시켜 일본 귀족의 일원으로 삼았기에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입장에선 매우 불쾌한 논리이다.
  22. 야스쿠니 신사의 배경사상인 국가신토 자체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전통종교인 신토덴노를 명분으로 삼아, 실제로는 중앙정부에 충성하도록 이것저것 짬뽕해서 만들어낸 물건이다.
  23. 이거 군국주의 시절부터 내려온 일본의 전통이다. 당장 안중근 의사 재판 과정에서도 행정부가 사법부에 실질적인 사형 명령을 내렸다. 2014년 3월 15일자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방영되었다.
  24. 원래 8월 15일 참배하기로 했지만 주변국의 반대를 의식하여 2일 앞당겨 참배하였다고 한다.
  25. 치도리카후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명 일본군 병사들의 유골을 안치하며, 사설 종교기관 야스쿠니 신사와는 달리 엄연한 국가시설이다. 때문에 일본이 진정으로 자국 전몰자들을 위한 추모시설을 원한다면 야스쿠니 신사보다는 차라리 치도리카후치가 더 적합하다는 평가가 제기되어 왔다.
  26. 히로히토는 사실상 2차 세계대전의 명백한 전범으로 나중에 중국의 의지로 전범재판에서 처벌받아 사형당했을 뻔 했지만 미국의 의지로 다행히 사면받아 전범재판에 기소되어 처벌받아 사형당하지 않고 목숨을 간신히 건졌을 뿐이니 참배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자기 목이 덜렁덜렁 했을 테니까. 물론 여기 묻힌 놈들이 고운 놈들도 아니고, 전쟁을 벌인 결과 참패하여 히로히토의 목을 간당간당하게 만든 놈들이므로 개인적으로는 싫어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A급 전범 합사 이전에는 8번 정도 참배했다.)
  27. 그게 전범이건 아니건
  28. 한마디로 유족 관계자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누구 이름이 종이에 적혔는지 알 도리도 없다.
  29. 사실 이것까지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반 사병이 항명하고 자기 소신을 지켜 제국주의에 가담하지 않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며, 어쨌든 군인은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극렬 반전주의자들은 이것도 뭐라 하기도 한다.
  30. 우리나라의 진보/보수들의 끝없는 논쟁인 건국절/광복절, 김구와 이승만의 경우와 같다. 야스쿠니 신사는 어쨌든 명목상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지 않는 사설 종교법인이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가 추구하는 방향과 이념은 일본 극우진영과 부합하기 때문에 일본 극우진영의 정치인들이 이곳을 가는 것 뿐이다. 다시말해 이념에 따른 선택의 문제이지 대체시설의 유무에 따른 선택이 아니다.
  31. 사실, 일본에는 전몰자나, 의사자, 순직 공무원들과 같은 국가유공자들을 기리는 국립묘원같은 게 치도리가후치말고는 없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전몰자들을 야스쿠니같은 곳에서 추모하는 면도 없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백한 전쟁범죄자들을 모셔놓은 게 잘한 건 절대로 아니며, 애초에 전몰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제대로 된 장소 하나 만들지 않은 일본 정부 역시 분명히 문제가 있다. 이런 속사정이 있다고 해서 이런 곳을 옹호해 줄 건덕지는 전혀 없다.
  32. 고려 갑옷으로 보는 것에 이견이 제기되기도 한다. 밑의 기사 참조.
  33. 그러나 1980년대에 달라이 라마도 이곳을 참배한 전적이 있는 걸 보면, 단지 전몰자들이 모셔져 있다는 것 때문에 이곳의 진상을 모르고 참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34. 참고로 저스틴 비버도 이곳을 참배한 적이 있다(...). 비버도 이곳이 극우들의 성지인 걸 모르고 평범한 신사로 생각해 참배한 것이지만, 똑같은 사정이 있는 레비야 카디르 여사나 달라이 라마와는 달리 이쪽은 스스로의 무식때문에 벌어진 거라서 쉴드도 못 받고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역시 저스틴 비버까야 제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