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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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한국프로농구 최고의 수비력을 자랑하는 무록자 꽃미남 스타이자 국가대표 스몰포워드.

안양 KGC인삼공사 No. 11
양희종(梁熙鍾 / Hee-Jong Yang)
생년월일1984년 5월 11일
국적대한민국
출신학교삼일상고 - 연세대학교
신체194cm, 96kg [1]
포지션스몰포워드
프로입단2007년 드래프트 전체 3번 (안양 KT&G 카이츠)
소속팀안양 KGC인삼공사(2007~ )
2010 농구대잔치 MVP
유병재(상 무)양희종(상 무)함지훈(상 무)
2013~2014 한국프로농구 최우수 수비상
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양희종(안양 KGC인삼공사)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

1 소개

안양 KGC인삼공사 농구단스몰포워드이자 아마추어 시절부터 상무 복무, 제대 후인 지금까지 한 타임도 빠짐없이 국가대표로 발탁된 선수. 뛰어난 수비력으로 KBL을 대표하는 블루워커[2] 플레이어 중 하나. 또한, 프로농구의 인기가 하한가인 지금에도 많은 여성팬을 보유한 몇 안되는 KBL의 대표미남스타. 우지원, 이상민 시절에 정점을 찍었던 연세대 오빠부대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평. 흔히 외모가 부각되면 실력은 저평가되기 쉬운 프로스포츠 세계에서 양희종은 외모와 실력, 여성팬과 남성팬의 수가 비례하는 선수였다.[3]

별명은 무록자, 양무록인데, 어떤 경기에서 풀타임을 뛰고 득점, 리바, 어시 등 기록한 스탯이 하나도 없어 붙은 별명.[4] 특히 상무 제대 후, 11-12시즌에는 바닥을 친 슛감 덕에 반쪽짜리 선수란 이야기까지 들었다.

거의 모든 포지션의 수비가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수비력을 인정받아 2008-2009 시즌에는 수비 5걸로 선정, 수비력과 공에 대한 집착, 허슬플레이는 KBL에서도 정평이 난 선수다. 리바운드에 적극 가담하고, 몸싸움과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팀의 살림꾼 역할을 하는 선수로 감독이나 코치들이 가장 선호하는 스타일의 선수다. 그러나 허슬플레이로 인해 잦은 부상이 많아 풀타임 출전에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 받는다.

2 커리어

1999 제29회 추계연맹전 남중부 미기상 수상
2001 종별농구선수권대회 MVP
2001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남자농구팀 청소년 국가대표
2002 제27회 협회장기 최우수 선수상
2003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남자농구팀 청소년 국가대표
2004 제22회 동아시아선수권대회 남자농구팀 국가대표
2005 제23회 하계유니버시아드 남자농구팀 국가대표
2005 제4회 동아시아경기대회 남자농구팀 국가대표
2006 제15회 도하 아시안게임 남자농구팀 국가대표
2006 월드바스켓볼챌린지 국가대표
2007 제24회 동아시아 남자농구 선수권대회 국가대표
2008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남자농구 국가대표
2008 2007-2008 스포츠토토 한국농구대상 신인상
2009 2008-2009 동부프로미 프로농구 수비 5걸
2010 2009-2010 농구대잔치 남자부 MVP
2010 제16회 광저우 아시안 게임 남자농구 국가대표
2010 제16회 광저우 아시안게임 남자농구 은메달
2011 제26회 동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2011 제32회 윌리엄 존스컵 국가대표
2011 제26회 FIBA 아시아선수권대회 국가대표
2012 제30회 런던올림픽 남자농구 국가대표
2014 2013-2014 한국프로농구 최우수수비수상
2014 제17회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농구 금메달

2.1 아마추어 시절

수원 출신으로 어릴때는 태권도를 했다고 한다.[5] 그러던 중 농구부 감독이 '체격이 허재를 닮았다'는 말로 양희종의 부모님을 낚아 설득해서 그때부터 농구를 시작했다. 대개 프로에서 성공한 선수들이 그렇듯 양희종 역시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또래선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실력을 갖춘 에이스로 평가받았다. 특히 삼일상고 시절에는 센터 하승진을 필두로 박구영, 정승원 등과 함께 무적삼일을 이끄는 주축선수였다. 이후, 연세대에 입학한 후, 농구대잔치 3연패를 이끌며 연대 전성기를 구가할 때 김태술, 이광재와 함께 그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래서 대학생 때 부터 성인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도 출전하며 대표팀의 세대 교체의 주역이자, 차세대 국가대표 포워드로 일찌감치 선정되었다.

신촌 오빠부대의 재건

대학교 2학년 때 사실상 대학리그 최고의 선수로 일찌감치 평가되었고, 팀 역시 연승을 이어가며 수차례 우승을 이뤘다. 3학년 무렵 부터는 김재환과 함께 리바운드만 전담하는 롤을 맡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공격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팀과 개인의 목표 모두 너무 일찍 이루었기에 그에 따라 슬럼프도 찾아왔다. 거기에 플레이 특성상 계속되는 잔부상도 대학시절 양희종의 성장을 더디게 했다고 아마농구 전문가들은 평한다. 졸업 1년을 남겨둔 3학년 시절 김태술, 이광재와 함께 얼리엔트리로 참가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당시 연세대 박건연 이뭐병 감독이 이를 만류했다고 알려졌다.[6]

내가 3순위 픽이라니..

농구대잔치 세대와 유일하게 비견되고 있는 03학번 '황금세대'[7]의 멤버 중 하나. KBL전설의 진행형이라 불리는 2007년 드래프트 신인들은 2라운드 픽 선수들이 다른 시즌의 드래프트에 참가했다면 모두 1라운드 픽 감이라 KBL에서 공인할 정도로 대어들이 즐비한 드래프트였다. 2007년 신인드래프트에 지명된 선수들 중 화제가 되었던 선수들만 살펴보자면, 김태술, 이동준, 양희종, 정영삼, 박상오, 신명호, 이광재, 김영환, 함지훈, 박구영, 신제록, 김봉수, 유병재, 허효진, 송창무 등이 있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선수들도 숱하게 많은 다른 시즌의 드래프트와 비교했을 때, 현역선수들, 그것도 주전선수들이 가장 많은 넘사벽급 엔트리라 볼 수 있다. 양희종은 드래프트 전체 3번으로 지명 되었는데, 내심 전체 1번까지도 기대했지만 밀려서 그런지 드래프트 장에서 표정은 좀 떨떠름했다.[8] 하지만 당시 KT&G에 막 취임했던 유도훈 감독은 1순위가 있었어도 양희종을 뽑았을 것이라면서 그를 격려했다.[9]

2.2 프로 데뷔 이후

2.2.1 2007-2008

시즌소속경기득점어시스트리바운드스틸블락슛야투(%)3점슛(%)자유투 (%)
2007/08KT&G547.71.83.50.90.644.729.375.0

데뷔 시즌인 2007-2008 시즌 성적은 평균 7.7득점에 3.5리바운드. 외국인 선수 위주로 공격이 돌아가던 것을 감안하면, 주희정과의 뛰어난 호흡으로 팀 디펜스에 일조했다. 또한 루키다운 허슬플레이를 보여주며 자기 역할을 다 했단 평가를 받았고, 대학시절의 명성을 이어 수비력에서 탁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즌 후, 김태술과 함께 유력한 신인왕 후보로 경쟁했다. KBL 시상식에서는 김태술이 수상했으나, 한국농구대상에서는 양희종이 신인상을 받았다.

2.2.2 2008-2009

시즌소속경기득점어시스트리바운드스틸블락슛야투(%)3점슛(%)자유투 (%)
2008/09KT&G409.71.94.41.61.147.336.470.0

2008-2009 소포모어 시즌에는 별다른 징크스 없이 평균 9.7득점 4.4리바운드로 데뷔시즌보다 향상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뛴 시간은 많은데 어쩐지 스탯은 없는 '무록자'의 조짐이 보였다. 2009 프로농구 시상식에서 수비 5걸에 선정되었다.

2.2.3 상무시즌

2009 시즌을 마치고 리빌딩이 목표인 팀 사정 상, 권유에 의해 상무로 가게 되었다. 수비형 플레이어로 손꼽히던 양희종은 소속팀에서보다 다양한 롤을 부여받아, 상무의 에이스로 활약한다. 일병 무렵부터 아마시절 전성기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한 득점력으로 팀의 연승을 이끌었다. 제대무렵에는 상무를의 농구대잔치 우승에서 MVP를 수상한다.[10] 또, 군 복무 중에도 아시안게임, 동아시아 선수권 등 대표팀에 차출되었다.

2009 동아시안 게임에 이등병 신분으로 출전해, 일본전 23점, 필리핀전 14점, 쿠웨이트전 16점으로 경기당 평균 15.4득점으로, 팀 내 득점 1위를 기록하고 김주성을 제치고 공격옵션에서 에이스역할을 했다. 상무팀 내에서도, 국대팀에서도 자유로운 공격롤을 보여주며 '수비만 강한 선수' 라는 이미지를 상쇄시켰다.

2.2.4 2010-2011

시즌소속경기득점어시스트리바운드스틸블락슛야투(%)3점슛(%)자유투 (%)
2010/11인삼공사88.82.55.50.81.333.317.265.2

시즌 막판에 상무를 제대한 후, 원 소속팀의 코트로 복귀. 몇 경기 뛰지 않았지만 양희종, 김태술, 박찬희, 이정현, 김일두. 이들이 모두 한 팀에 모이게 되는 다음 시즌을 기대케했다. 거기에 이어 리빌딩의 마지막 유산인 오세근의 안양행이 결정되고 11-12시즌을 앞둔 시점 부터 올스타 드림팀이란 평가를 받았다.

2.2.5 2011-2012

인삼신기

시즌소속경기득점어시스트리바운드스틸블락슛야투(%)3점슛(%)자유투 (%)
2011/12KGC496.331.74.21.10.535.026.569.2

박찬희, 이정현, 오세근 87년생 1라운드 트리오, 공익에서 복귀하는 김태술, 김일두와 함께 리그 최강 전력이라는 평을 들으며 시작한 시즌. 그러나 상무에서의 활약으로 팀 내외부에서 모두 양희종의 활약을 기대했으나..망했어요. 함께 리그에 복귀한 동기 김태술이 빠른 적응으로 맹활약을 하는데 비해 양희종은 공격쪽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해 시즌 초반부터 비난의 대상이었다. 거기에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이자, 양희종보다 한 수 아래란 평을 들었던 동부의 포워드 윤호영이 공격면에서 완전히 각성하여 리그 최고의 선수가 되었고, 양희종은 팀 안팎으로 활약하는 동기들과 비교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최고의 수비력을 가졌지만 공격이 되지 않는 선수. 그렇기에 주전 3번으로 쓰기에는 부적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희종의 쓰임새와 가치에 대해 많은 논쟁이 오고갔다. 하지만 정규시즌이 끝나갈 쯤에도 양희종의 슛감은 되살아나지 못했고[11], 강점인 수비 때문에 많은 시간을 뜀에도 불구하고 기록된 스탯은 미미하여 '양무록'이란 별명이 완전히 굳어졌다. 정규시즌의 실망스러운 모습들은 양희종에게 많은 굴욕을 안겼는데, "양희종이 10점 이상 넣으면, KGC가 이긴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고 급기야 시합중에 상대팀 모 감독이 작전타임에서 양희종은 그냥 수비하지 말고 놔두라는 지시를 내리기 까지 했다. 포스트시즌이 되어서도 상대팀 감독 또한 양희종을 자극하는 듯한 발언[12]을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제갈상범이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라면..?

2.2.5.1 2011-2012 포스트시즌

2.2.5.1.1 2011~2012 프로농구 4강 플레이오프
라운드상대득점리바운드어시스트블럭슛스틸
4강PO-1vs KT04422
4강PO-2vs KT103000
4강PO-3vs KT76121
4강PO-4vs KT182412

2011-2012 정규시즌을 2위로 마친 안양 KGC는 대진을 통해 6강 PO의 승자이자 인천 전자랜드와 5차전까지 마치고 올라온 부산KT와 맞붙게 되었다. 4강 PO 2차전부터 공격감을 되찾기 시작한 양희종은 정규시즌의 무록자의 모습을 버리고 이름값에 걸맞는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마치 쌓아뒀던 분이라도 풀듯이 특유의 허슬플레이를 보이며찰스로드에게 밟힐 뻔 하며 4차전 18득점을 하며 팀 창단 첫 챔피언 결정전 진출에 공헌을 했다.

2.2.5.1.2 2011~2012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라운드상대득점리바운드어시스트블럭슛스틸
Final-1vs 동부103101
Final-2vs 동부99212
Final-3vs 동부76121
Final-4vs 동부173521
Final-5vs 동부152302
Final-6vs 동부63111

실사판 왼손은 거들 뿐

이미 리그 정상급으로 평가되는 수비였지만, 챔피언 결정전 2,3,4차전에서 동부의 윤호영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전담봉쇄는 압권이었다. 김주성, 윤호영, 로드벤슨 동부산성이라 불리는 트리플 타워를 막으며, 공격에서도 정규시즌 찾지 못했던 슛감을 되찾았다. 4차전, 5차전에는 수비뿐 아니라 외곽슛이 기가막히게 성공하며 두 자리 수 득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승리의 직전까지 갔었던 6차전에서는 3쿼터까지도 득점이 4점에 그치며 다소 부진하였다. 동부의 기세에 약간은 움츠러든 듯한 KGC의 선수들은 4쿼터 막판 체력이 떨어진 동부를 몰아부쳐 17점차까지 벌어졌던 점수차를 단번에 좁혔다. 그리고 64-64 동점이던 종료 9초 전, 김태술에게 패스받은 후 라이벌 윤호영을 속이며 미들슛을 성공시켜 KGC의 대역전 드라마의 결정적 주인공이 된다.오오, 강백호 66-64 승리. 부진에 빠져있던 선수가 상대의 계속되는 견제에 자극받아 결승골을 넣는다는 만화 공식의 주인공이 되었다. 플레이오프 MVP 후보로까지 거론되었으나 풀타임 전방위 활약의 압도적 신인 오세근의 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의 임팩트로 그는 양유록, 무록신[13]으로 거듭난다.[14] 양희종은 PO내내, '어차피 바닥이라 편하게 던졌다', '온갖 수모가 다 약이됐다' 라며 부진했던 시즌에 대해 쿨하게 자평하는 인터뷰를 했다. 거기다 양희종은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로 챔피언 결정전을 치뤘다. 오오 멘탈마저 무록신

2.2.6 2012-2013

시즌소속경기득점어시스트리바운드스틸블락슛야투(%)3점슛(%)자유투 (%)
2012/13KGC497.81.84.71.30.639.533.961.2

지난 시즌의 챔피언결정전의 맹활약으로 양희종의 활약을 기대했다. 시즌 초반부에는 좋은 공격력과 수비력과 리바운드 가담을 보이며 오세근의 공백으로 약화된 KGC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후 시즌이 막판으로 가면 갈수록 공격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다시 양무록으로 격하됐다. 하지만 부상병동에 시달리는 안양 KGC 인삼공사가 팀원들이 부상으로 이탈한 상황에서 막판까지 4강으로 이끄는데 공헌한 부분은 무시할수 없다.

그러나 이 시즌에 거친 플레이가 연속으로 논란에 올랐다. 김시래에게 가한 발차기나 문태영에게 팔걸기, 차바위에게 한 거친 플레이등 비매너 플레이들이 구설수에 올랐으며, 2012년 12월 29일 창원 LG 세이커스전에서 관중석으로 김태술과 관중석으로 루즈볼을 던진것등이 부각되면서 동업자 정신이 부족하다는 비판까지 받았다.

2.2.7 2013-2014

시즌소속경기득점어시스트리바운드스틸블락슛야투(%)3점슛(%)자유투 (%)
2013/14KGC457.91.93.50.60.538.632.964.3

시즌이후 FA였지만 2014년 5월 13일 기사에 따르면 5년동안 보수총액 6억(연봉 4억 2000만, 인센티브 1억 8000만)에 구단과 재계약을 체결했다.

2.2.8 2014-2015

시즌소속경기득점어시스트리바운드스틸블락슛야투(%)3점슛(%)자유투 (%)
2014/15KGC466.92.64.31.00.534.333.764.8

2.2.9 2015-2016

시즌소속경기득점어시스트리바운드스틸블락슛야투(%)3점슛(%)자유투 (%)
2015/16KGC443.31.84.51.20.430.224.146.8

무록자를 넘어 최악의 공격수로

평균 3.3득점을 기록하면서 최악의 공격수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다. 수비 5걸에 들정도의 수비력은 있지만 5억 7천이라는 연봉값을 전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플레이오프에서 이정현을 포함해서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여줘 팀사기를 떨어트리고 있다.그러면서 성적도 잘 안나온다.

2.3 신경전

국내 가장 인기 있는 프로스포츠인 프로야구의 시즌 시작과 맞물림에도 2011-12시즌 KBL 챔피언 결정전은 몇년간 열린 프로농구 PO 중, 최고의 흥행시리즈로 손꼽혔다. KGC는 상대팀 동부에 비해 젊고 패기있는 선수들이 있었지만 리그의 역사를 다시 쓴 역대 최강 레벨의 팀인 동부[15]를 이길 수 없다는 평을 들었다. 실제로 정규리그 중 동부에 역대최소득점(41점)의 굴욕을 당하며 5승 1패라는 상대전적 열세의 입장이었던 KGC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언론과 농구팬 모두가 하나마나한 경기라며, 압도적인 동부의 승으로 끝날 시리즈라고 입을 모았다. 이에 자존심이 많이 상한 KGC 선수들은 더욱 이를 악물고 게임에 임했고, 그 과정에서 양희종의 인터뷰 겐세이 가 연일 화제가 되었다. 이는 NBA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프로선수의 올바른 언행과 품성에 엄격한 한국리그에서는 드문 일이었기에 더욱 주목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연세대 시절부터 양희종과 친한 동기였던 동부의 이광재가 모비스와의 4강 PO에서 승리한 후, "어느 팀과 챔프전을 해도 자신있다" 는 평범한 각오를 밝혔다. 이에 양희종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광재가 인터뷰에서 '챔프전에 아무나 올라와도 좋다'라고 말한 걸 봤다. 웃기지 마, 이광재. 보고 있나" 라고 받아쳤고 1차전 동부의 승리 이후, 이광재가 다시 한번 "잘 봤지 양희종" 이란 인터뷰를 했고, 그러자 KGC가 승리한 2차전 인터뷰에서 이광재의 에어볼 실책을 지적하며 "오늘 광재 때문에 이겼습니다. 아까 레이업 상황에서 공중으로 던진 볼, 옆으로 날아가는 포물선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의리를 배신하지 않은 광재한테 잘 해줬다고 말 해주고 싶습니다. 이말 꼭 써주세요" 라고 말한 것이 그대로 기사로 나가게 되며 슬슬 양 팀 팬들간의 신경전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광재-양희종으로 시작되었던 신경전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양희종-윤호영으로 번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프로농구팬 전체를 흥미롭게 하는 사건이 되었다.

2.4 윤호영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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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왕 정우성 VS 북산 강백호[16]

11-12 시즌 챔피언 결정전은 국내 NO.1 센터의 왕위를 놓고 싸우는 자리라 불렸다. 국내 최고의 센터 김주성과 신인으로 그 왕위를 넘보는 오세근의 대결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두 사람이 워낙 플레이 자체가 다르고, 중앙대학교의 돈독한 선후배 지간이라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리 화제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4강PO에서 완전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양희종 덕분에 오랜 떡밥이었던 윤호영-양희종의 매치가 성사될 수 있었고 둘은 시리즈를 관통하는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윤호영과 양희종은 같은 포지션, 다른 대학, 같은 나이, 다른 학번, 같은 드래프트 순번, 미필과 군필, 미혼과 기혼, 극도로 내성적인 성격과 언론에 친화적인 성격.. 등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많은 선수로 아마시절부터 라이벌구도를 형성해왔다. 함께 청소년대표팀을 한 적도 있어, 친분이 없지는 않지만 윤호영이 유급을 하여 한 학번 아래이고, 두 사람이 당시 대학 최강자 자리를 놓고 싸우던 연세대와 중앙대의 선수였기에 대학시절부터 서로에 대한 보이지 않는 미묘한 심리전이 있었을거라 추정된다.

그러나 양희종의 입장에서는 윤호영[17] 보다 일찍 농구를 시작해 초,중,고교 시절 늘 에이스였고 고교시절은 물론이고 윤호영의 기량이 성장 대학시절에도, 윤호영-함지훈-강병현의 중대를 몇번이고 제압한 전력이 있었다. 양희종의 아마시절은 윤호영과 비교하기엔 레벨의 차이가 다른 선수였고, 본인 또한 그 잔상이 강했을 것이다. 강동희가 부임한 이후 동부의 트리플 타워를 구축한 윤호영이 리그 최강의 포워드가 되었던 2011-12 시즌. 하필 양희종이 제대 직후, 자신의 커리어 최악의 부진을 맞게 되며 비교가 불가피해졌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라이벌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시즌 중 부터 이미 각종 언론 매체와 채널에서 둘을 라이벌 구도로 띄우며 리그 흥행의 한 요소로 만든 부분도 있었기에 팬들도 둘의 장단을 비교하며 오세근-최진수와 함께 오랜만에 형성된 리그 라이벌 매치업을 즐길 수 있었다.

이광재와 가벼운 신경전을 벌였던 양희종은 KGC가 파이널에 진출한 후, 동부와의 매치업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윤호영이 대학 때는 많이 넣어야 한 두 골이었다. 실력이 많이 좋아졌다" 라고 인터뷰를 했다. 이후 강동희 감독이 양희종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뉘앙스의 말을 던졌고, 1차전 동부의 승리 이후 이상범 감독이 이에 계속해서 양희종에게 1:1로 윤호영 수비를 맡기겠다고 했다. 그리고 2차전에 앞서, 윤호영은 이상범 감독의 발언에 대해 "그러면 저야 땡큐죠" 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듣고 잠을 못 잤다던 양희종은 2차전 승리 이후 "윤호영이 동부에 있어서 윤호영이라고 생각한다. 동부에 특화된 선수다" 라는 살짝 수위를 넘은 듯 보이는 어그로 인터뷰를 시전했다.[18]

사실 이는 다소 기자들에 의해서 공격적으로 왜곡된 부분이 많은데, 양희종이 윤호영이 대학때보다 좋아졌다는 발언은 사실이기 때문에 반박의 여지가 없고, 다소 거만한듯 들리지만 그만큼 양희종의 기량이 대학 때는 월등했기에 윤호영의 괄목상대를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거기다, 큰 경기를 앞두고 정규시즌에 윤호영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을 내며 부진을 면치 못했던 양희종이 기자들의 의도된 질문에 자존심을 잃지 않고 대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루트이기도 했다. 실제로 윤호영의 '땡큐'발언 역시 모비스전에서 자신을 도움수비까지 들어와서 마크하던 데서 벗어나 1:1로 수비한다면 더 수월해질 것 이라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확실히 뼈가 있는 말들이 오가며 이미 두 선수의 신경전은 극에 달했다.

이후, 이광재가 저 둘 사이에 끼어서 "계속 이겨서 희종이가 인터뷰를 못하게 만들도록 하겠다" 라고 중재적인 성격의 발언을 했지만, 뜬금없이 동부 구단 측에서 나서서 양희종의 윤호영 저격 발언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냈다. 인삼공사 또한 '선수 끼리의 신경전을 구단에서 나서서 중재하는 것은 어린애 싸움에 어른이 끼어드는 꼴' 이라며 강하게 비판했고 결국 재밌자고 먼저 시작한 양희종이 "이제 그만 하겠다" 는 GG마무리 선언을 하며 코트 밖 언쟁을 끝냈다.

PO 경기 내내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피가 마를 정도로 블록을 주고 받았는데, 각 라운드마다 누구의 승인지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다. 이에 두 사람이 공을 다투고 있을 때는 다른 선수들이 그냥 넋을 놓아버리는 등... 치열함의 정도가 갈수록 더해졌다. 실제로 두 사람은 '너만큼은 내가 꼭 이기고 만다' 라는 정신으로 임했다고 말했고, 격렬한 몸싸움이 오고가는 게임이라 혹여 신경전이 잘못된 방식으로 터지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사람들에게 진짜 라이벌의 실력싸움이 뭔지를 보여주었다. 이는 경기장 밖에서 부터 소란스러운 해프닝이라 여기기 쉽지만, 결국 프로스포츠의 세계에서 진짜 프로들이 하는 신경전이란 코트 안에서 시작과 끝을 맺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인삼공사가 우승을 차지하고 잠잠해지나 했지만... 시즌 이후 MVP를 수상한 윤호영이 모 주간지와 취중 인터뷰를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다음 인터뷰 대상자로 예정되었던 양희종에게 "나와는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런 말을 했느냐"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19] 이 인터뷰는 공개가 되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결국 담당 기자가 인터뷰 내용을 대폭 수정하고 답변격이었던 양희종 인터뷰에서 민감한 사안을 모두 정리하고 기사 말미에 구구절절한 사과문을 첨부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두 선수가 확실히 친한 사이가 아니란 것을 확인사살하는 역할을 했다.

둘의 관계가 부각되면 리그의 흥행요소로 떠오를 것이라 관계자들과 팬들은 좋아했지만 윤호영이 2012년 상무에 입대하며 그 기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무산되었다. 그러나 2012년 런던 올림픽 예선 국가대표 최종 엔트리에 둘이 함께 차출되며 지난 포스트 시즌을 기억하는 팬들 사이에서는 이 두 사람이 같은 팀에서 뛰었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 인지를 주목하고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전형적인 수비형 선수라 평가받는다. 몸을 아끼지 않는 공격적인 비매너 허슬플레이와 공에 대한 집착이 특징. 데뷔 초반에는 '제 2의 추승균'으로 불리기도 했다. 공수 양면이 모두 강해 대형선수로 성장할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프로 데뷔 후 외국선수 위주의 공격 루트로 인해 리바운드와 블록 위주의 플레이를 할 수 밖에 없었고[20] 인삼공사의 천운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영혼의 드래프트로 젊고 실력있는 선수들을 끌어모으며 양희종이 팀에서 맡을 수 있는 롤 역시 좁아지며 공격에서마저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사실 양희종은 대학 저학년 시절만해도 블루워커 타입이 아니었다. 공격쪽에서 거칠다 못해 폭발적인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던 양희종의 공격력이 약해지게 된 계기는 연세대학교 고학년 무렵 부터다. 그 시기 감독을 맡은 박건연의 전술에서 양희종은 풀타임으로 게임마다 센터포워드와 리딩가드의 역할을 같이 하는 일이 잦았졌다. 자연스레 혹사와 부상이 생기고, 전담수비라는 자신의 롤에 적응하면서 프로 입단 전 부터 수비형 선수라는 이미지가 굳어지게 되었다. 프로입단 후 수비쪽으로 더 각광을 받아오긴 했지만 11-12 시즌처럼 공격이 부진한 적은 없었는데 자신에게 주어지는 공격옵션이 한정되면서 점점 슛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게 아니겠냐는 지적이 많다. 결국은 멘탈의 문제가 가져온 슬럼프. 이에 관련해 양희종이 다른 팀에 간다면 지금보단 훨씬 뛰어난 공격력을 보여줄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수비가 구멍나다못해 너덜너덜한 모 팀모 팀..

'에이스 킬러 남훈', '메타월드희종'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각 팀의 에이스만을 전담 마크하며 그 선수를 무력하게 만드는 수비를 펼친다. 그런 장점을 통해 국가대표에 매년 발탁되었고, 아마시절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비시즌을 국대 경기를 위해 뛰었다. 휴식이 없었기에 발전이 더딘 것이라는 주장 쉴드 도 있다.[21] 본 항목에서는 팬심으로 미화된 부분이 많다. 실상은 수비잘하는 선수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플레이가 거칠고 동업자의식도 적은 모습을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를 싫어하는 농구팬들도 많다. 사실 메타월드피스라 불리던 론 아테스트와도 비교하기 민망한것이 양희종은 한번도 KBL 평균 이상 공격수라고 부를만한 성적을 낸 적이 없는 반면, 론 아테스트는 전성기였던 인디애나시절부터 휴스턴 시절까지는 준수한 공격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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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부터 쌓아왔던 기본기와, 타고난 신체적 능력, 체력, 아마시절 보여주었던 기량으로 꽤 연차가 쌓인 지금에도 아직까지 포텐셜에 대해 기대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양희종의 플레이를 평가하며 만약 양희종이 저 정도 외모를 가지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평가를 받았겠냐는 비판도 존재한다.

장기계약이후 행보를 보면 포텐은 커녕 점점 기록이 퇴보하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수비가 좋다고는 하지만 수비전문 선수로만 남기에는 너무 연봉이 크다는 것이 문제.

4 김태술


아예 항목이 만들어져있다
후..후로..?

수원과 부산이라는 꽤 떨어진 지역을 연고로 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중,고교시절부터 친분을 다져왔다. 둘 모두 전국구 선수라는 평가를 들어왔고, 청소년 시절부터 대표팀을 통해 함께 시합을 뛰었으며 같은 대학에 입학한 후, 연세대가 리그를 석권할 때에 각각 팀의 살림꾼이자 기둥으로 활약했다. 청소년 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대표팀과, 대학팀의 에이스 콤비였기에 둘 모두 1라운더 1픽이 당연한 대형선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프로에서 같은 팀에서 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6년주기 가드설의 주인공이었던 김태술은 SK로 신인중 가장 먼저 지명이 되었고 양희종은 KT&G에 지명되며 둘 모두 루키시즌을 성공으로 치르고 신인상을 두고 다투는 선의의 경쟁자로 자리잡아갔다.

그러나 KT&G의 간판이었던 주희정이 맞트레이드 격으로 SK에 이적하며 김태술이 김종학과 함께 KT&G로 오게 되는 충격적인 상황 농구계의 LG 트윈스인 SK의 병크 중 하나 이 발생했고, 둘은 그렇게 운명적으로 다시 한 팀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적과 동시에 리빌딩에 착수한 팀 사정상 둘 모두 상무와 공익으로 병역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했고, 2011-2012 시즌에서야 정식으로 프로리그에서 함께 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우승이었다.

11-12 시즌 PO에서 바스켓카운트를 성공시키며[22] 함께 코트에 쓰러져 부둥켜 안는 장면은 이후에도 두고두고 회자되었다.크블판 쌍화점 그만큼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각별한 사이라고 알려져있는데 전문가들은 두 사람이 함께 뛸 때 가장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 된다고 생각하여 FA 이후에도 함께 뛰는 것이 서로에게 득이 되지 않겠냐고 평한 바 있었다.

그러나 14-15시즌에 김태술전주 KCC 이지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생이별

5 슬램덩크 실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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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서태웅 시절 하관을 가려서 가능한건 아닐까

국내에서의 슬램덩크의 인기는 세월이 지나도 여전하다. 그래서 농구선수들을 곧잘 슬램덩크의 등장인물과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관습에 의해, 만화같은 외모와 거침없는 플레이 스타일의 양희종은 그에 관해 가장 자주 언급되는 선수다. 대학시절과 루키시즌에는 연세대 서태웅, 안양 서태웅으로 불렸다. 차갑지만 잘생긴 외모, 많은 여성팬, 스몰포워드, 백넘버 11번의 올라운드 플레이어... 실제 언론에서도 그를 서태웅과 자주 비교하며 닉네임을 붙였고, 본인도 직접적으로 인터뷰에서 그 이야기를 많이 들은듯 하다. 그러나 그가 정작 좋아했던 인물은...


역시 머리빨의 완성은 얼굴...

젊은 선수들을 이용한 구단 모기업 인삼공사의 적극적인 스타 마케팅으로 굉장히 신랄한 유니폼을 입으며 그에 맞게 빨간머리로 염색을 한 양희종은 정규시즌 '무록의 전설'을 쓰며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패기만만한 강백호 이미지를 연상시키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강백호에 빙의한듯한 11-12 챔피언 결정전 6차전에서의 '왼 손은 거들 뿐' 슛이 골든슛이 되면서 그 이미지가 더욱 강해졌다. 산왕공고를 연상시키게 하는 초록색 유니폼의 동부와, 북산을 연상시키는 KGC의 붉은색 유니폼으로 산왕-북산 이미지 매치가 된 결정전에서 그런 슛이 나왔기에 더욱 인상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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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지 않는 탄력

사실 강백호의 특기인 파리채 블로킹을 루키시즌에 보여주면서 강백호와 서태웅을 적절히 섞어놓은 선수라는 평도 있었다. 그러나 그간 그 두 캐릭터에 비해 공격적인 측면에서 비교가 불가능했기에 개그소재로 사용되곤 했는데 11-12시즌 플레이오프 때의 모습을 유지하며 다음 시즌을 치룬다면 다시 타이틀 회복이 가능할지도..?[23]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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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문성민 김요한양학하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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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노윤호가 2살 아래 동생이다.

  • 연예인 동방신기의 유노윤호, 슈퍼주니어 시원, 환희, 축구선수 조재진 등과 사적인 친분이 있다고 알려져있다.
  • 2009년 <우리 결혼했어요> 환희-박화요비 커플 편에 출연했다.
  • 잘생긴 외모로 일찍부터 많은 여자 사람팬들이 많았으나 상무 제대 후, 세월의 흐름과, 군대의 혹독함을 정통으로 맞으며 역변아닌 역변을 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 모델들과 함께 청바지 브랜드인 버커루, 다른 종목 선수들[24] 및 SK 김효범과 정장 화보를 찍기도 했다.
  • 저 합동 정장 화보는 출시 이후, 인터넷에서 꽤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직찍이 공개되며 문성민김요한에게 나머지 선수들이 이용당했다는 굴욕의 평가를 들어야만 했다...양희종은 고원준 덕분에 선방했다
  • 배우 정일우와 닮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농갤에서는 그냥 '말상' 이라며 외모마저 거품 까이기도 한다.
  • 젊고 잘생겼으며 실력 또한 출중한 1라운드 선수들이 주전인 인삼공사의 '인삼신기'[25]의 멤버다.
  • 야구선수 양현종, 양희승과 이름이 비슷하여 기사에서도 자주 오타를 발견할 수 있다.
[[분류:스몰 포워드]
  1. 안양KGC 공식 프로필
  2. 연세대 박건연 감독의 밑에서 대학 고학년 시절을 보내며 이런 이미지가 굳어졌다
  3. 적어도 상무에 입대하기 전까지는
  4. 본인은 이 사실을 11-12 시즌 PO에서 알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데뷔 시즌부터 줄곧 있어왔다. 이전에는 '기록지에 쓸 게 없어 슬픈 남자'로 불렸다.
  5. 초등학교 저학년 때 고학년을 이길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때는 태권왕을 했는데 대개 태권왕 출신들은 태권도 국가대표가 된다.
  6. 지금도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양희종이 정점을 찍고 1년을 허비하지 않은 채 얼리로 프로에 나왔더라면 분명히 지금보다는 더 큰 선수가 되어있을거라는 것에 대한 의견이 존재한다. 농구에 만약이란 없습니다
  7. 03학번 07-08 데뷔신인이 황금 1세대, 오세근,김선형,함누리,최진수 등이 포함된 07학번 11-12 신인이 황금2세대로 불린다.
  8. 전체 1순위는 김태술, 2순위는 이동준이었다. 지명 후, KT&G를 생각했다고 인터뷰 했지만 드래프트 직전까지 오리온스에 좀 더 생각이 있었던 듯 하다. 당시 여론 또한 김태술과 양희종 중 1순위가 누구일지가 최대의 관심사였고, 가드가 필요했던 SK가 김태술을 뽑는다면 오리온스는 당연히 이동준보다 성장면에서 앞선 양희종을 뽑을것이라 생각했다.
  9. 유도훈 감독은 이 드래프트장에서 처음으로 KT&G의 감독으로서 공식석상에 데뷔했다.
  10. 결승 상대는 본인의 모교인 연세대...
  11. 정확히 말하자면 돌파와 슈팅까지는 상대가 막을 새가 없을만큼 대단하지만 손목 부상이 의심..될만큼 지독하게 슛이 안들어갔다.
  12. "희종이는 공격에서 별다른 활약이 없다", "양희종은 달리 수비하지 않아도 될거라 본다"
  13. 이미 무록이 별명이 넘어서 양희종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굳어졌기에; 그냥 무록 뒤에 신을 붙여버렸다. 희종신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면 될듯.
  14. 강동희는 양희종의 크레이지모드에 "양희종을 봉쇄하지 못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양희종이 계속해서 폭발하면 시리즈를 우리 페이스대로 운영하는 게 힘들다. 앞으로 보완해야 할 부분이다." 라고 자평했다.
  15. 개막전 후 최다 연승(8연승), 최단기간 20승(24경기), 최단기간 30승(89일), 최소경기 30승(37경기), 최단기간 40승(123일), 최소경기 40승(47경기), 최단기간 100승 감독(강동희 : 842일), 최단기간 최소경기 정규시즌 우승 확정(123일, 47경기), 2위팀과 최다경기승차 정규시즌 우승(8경기). 이 모든 것이 2011-12 시즌 원주 동부가 쓴 기록이다.
  16. 하지만 실제로는 윤호영 역시 성격적인 측면을 제외하면 플레이 스타일에서는 강백호와 유사하다
  17. 윤호영은 중학교 3학년때 농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1년을 유급할 수 밖에 없었다
  18. 이후 인터뷰에서 양희종은 '동부에 있어서 윤호영이란 말은, 김주성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더 발전할 수 있고 부럽다는 의미'라고 해명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19. 다소 필터링이 없는 인터뷰로 전반적인 내용 자체도 챔피언 결정전을 심판의 탓으로 돌리는 뉘앙스의 대화가 포함되는 등 양희종에게 한 발언을 제외하고도 전반적인 내용 자체가 까일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취중인터뷰라는 성격을 이용해 기자가 인터뷰이와 약속하며 나누었던 선을 제대로 못 지킨 결과란 평과 함께 나중에는 윤호영 본인보다 기자가 더 많이 까였다
  20. 루즈볼, 대인방어에서 완벽에 가까운 수비실력을 갖추었다.
  21. 아닌게 아니라, 주로 공격 포지션으로 뛰었던 상무에서의 활약을 보면 경기당 15점 이상의 득점력을 보었고, 국대로 차출되었던 2009년 대표팀에서는 20득점 이상을 올리며 에이스로 활약했다.
  22. 그러나 이후 심판에 의해 무효처리가 되었다.
  23. 그러나 이제 나이가 서른...
  24. KBO의 황재균, 고원준 KOVO의 문성민, 김요한
  25. 양희종, 김태술, 이정현, 박찬희, 오세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