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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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에 결혼해 51세에 남편과 사별한 이 여인은….이후 50년을 더 살아서 101세 할머니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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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문장

1 개요

Elizabeth Angela Marguerite Bowes-Lyon

조지 6세의 아내이자 현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어머니. 일반적으로 이름보다는 '퀸 마더(Queen Mother)', 즉 왕대비로 잘 알려져 있다. 남편인 조지 6세의 서거 후 선왕의 왕비인 그녀에게 올려질 칭호는 Queen Dowager였으나 본인은 이 칭호가 너무 격식에 얽매여 있다면서 보다 친숙한 명칭인 Queen Mother를 스스로 선택했다.

대영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최후의 왕실 인물로 영국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보여준, 폭격 속에서도 버킹엄 궁전을 떠나지 않고 국민과 함께 하며 강하게 독려한 모습으로 영국인의 귀감이 되었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인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하지만 그녀가 대영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영국이 제국을 칭할 수 있게 한 인도 제국의 마지막 황후였던 점도 한몫을 거든 것으로 보인다.

2013년 기준, 역대 영국 왕족 중 두 번째로 장수한 인물. 연도상으로만 따져도 3세대를 살고 세상을 떠났다.

2 출생의 비밀?

1900년 8월 4일 14대 스트래스모어 킹호른 백작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1855.3.14~1944.11.7)과 스트래스모어 킹호른 백작부인 세실리아 니나 캐번디시-밴틱(1862.9.11~1938.6.23)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그런데 출생지에 대해 엘리자베스는 런던을, 부친은 영지 인근의 히친이라고 상반된 증언을 하는 바람에 그녀가 백작의 친딸이 아니라는 소문[1]이 한 때 퍼져 영국 왕실의 가십거리를 쫓는 호사가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백작의 친딸이 맞는 것으로 보고 있다.

3 가족관계

3.1 결혼

어엿한 귀족 가문의 영애로 성장한 엘리자베스는 1921년 조지 5세의 둘째 아들인 요크 공작 앨버트(훗날의 조지 6세)에게 첫 프로포즈를 받았다. 그런데 여느 왕자들의 청혼과는 달리 그녀는 이를 거절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우선 요크 공작이 병약하고 조용하며 소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 말더듬이 증세까지 있어서 당대의 매력남으로 인기를 독차지하던 왕세자(훗날의 에드워드 8세)와 비교되어 남자로서의 매력이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다음으로, 당시에는 왕자들이 외국 왕실 출신의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 관례[2]여서 비록 엘리자베스가 귀족이긴 했어도 요크 공작에게 걸맞는 신부감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첫 번째 청혼 거절 이후에도 두 번째 청혼까지 거절했으나 요크 공작은 포기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소심한 성격이라 자기 주장 한번 제대로 말 못하던 그가 가족 앞에서 "엘리자베스 이외의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도대체 어떤 처자이길래 버티[3]가 저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나'라며 조지 5세와 메리 왕비가 관심을 보였고, 조지 5세는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으며 그녀를 만난 메리 왕비는 "버티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처녀"라며 적극 지지하기에 이른다.

아버지 클로드, 어머니 세실리아, 엘리자베스, 남편 조지 6세, 시어머니 메리, 시아버지 조지 5세

왕실에서 이렇게까지 나오자 결국 그녀도 요크 공작의 세 번째 청혼을 승낙해 1923년 4월 2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결혼식 후 부부는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서 군중들을 향해 발코니 키스를 선보였는데 이것이 영국 왕실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매김해 엘리자베스 2세필립 공, 찰스 왕세자다이애나비, 윌리엄 왕세손과 캐서린 미들턴 등 주요 왕실 인물들의 로열웨딩 때마다 빠지지 않는 이벤트가 되었다.

3.2 자녀

엘리자베스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았는데 첫째는 1926년에 낳은, '릴리벳'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엘리자베스 공주였고 둘째는 1930년에 낳은 마가렛 로즈 공주였다. 조지 5세는 손녀딸 중에서도 특히 엘리자베스를 귀여워 해 '큰아들놈이 평생 결혼하지 않는다면 버티릴리벳이 왕이 될텐데'라고 말하곤 했는데 뒷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요크 공작과 두 딸을 데리고 화목하게 생활하는 그녀의 모습은 영국인의 호감을 샀으며, 당시의 왕세자가 미혼인 점을 감안해 언젠가 남편에게 왕위가 넘어올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것을 예상하면서 여러 공식석상에 활발하게 드나들어 시민들이 '미소짓는 공작부인(Smiling Duchess)'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산업 현장을 시찰하며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남편 요크 공작이 '산업 공작'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과도 상통한다.

4 왕자비에서 왕비로

4.1 한 해에 세 왕

결혼 이후 그녀의 호칭은 '요크 공작 부인 전하(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York)'가 되었다. 남편이 왕위 계승 서열 2위였기 때문에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그녀도 보통의 왕자비들처럼 무난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지만 1936년 1월 20일 에드워드 8세가 즉위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당시 에드워드 8세는 왕이 될 때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다가 미국인 이혼녀 월리스 심슨과 열렬한 사랑에 빠져 그녀를 왕비로 세우려고 했지만 왕실과 내각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동생 조지 6세가 영국 출신 귀족 여성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할 때도 상당한 파격이라는 평판을 들었지만 당시 조지 6세는 왕자, 그것도 에드워드 8세가 자식을 갖게되면 왕위와는 완전히 멀어질 왕자였고 또한 엘리자베스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는 고위 귀족인데다가 무엇보다 영국인이었기에 내각과 의회, 국민들이 놀라기는 했어도 두 사람의 결혼을 받아들이고 축복해주었다. 반면 국왕인 에드워드 8세가 영국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왕족이나 귀족도 아닌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은 영국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결국 내각 수상인 스탠리 볼드윈이 "2번이나 이혼한 이혼녀랑 결혼하면서 왕위를 지킬 수는 없다. 왕위에서 물러나든가 아니면 심슨 부인과 연을 끊든지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며 최후통첩을 보내자 에드워드 8세는 "사랑하는 여인 없이는 왕관을 지탱할 수 없다"며 왕위를 포기했다.

요크 공작은 형의 왕위 포기 소식을 접한 날, 어머니 메리 왕대비에게 매달려 엉엉 울 정도로 즉위하기를 주저했다. 엘리자베스 역시 이 소식에 놀랐으나, 남편 곁에서 '분명히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응원했다. 통통한 외모 때문에 순진할 거라는 주위의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그녀의 야심이 상당히 컸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대관식에 사용된 엘리자베스의 왕관은 백금으로 골조를 만들고 다이아몬드로 장식했는데, 왕관의 정면 가운데에 박힌 다이아몬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코이누르였다.

영국의 왕비가 되려던 심슨 부인은 에드워드 8세의 양위 때문에 엘리자베스에게 왕비 자리를 뺏기게 되자 이를 매우 분하게 여겨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고, 엘리자베스 역시 이혼녀 주제에 왕비 자리를 넘본 심슨 부인을 싫어했다. 에드워드 8세는 양위 후에 윈저 공의 직함을 받으면서 '전하'라는 경칭을 받았지만 심슨 부인은 '전하(Her Royal Highness)'의 경칭을 받지 못했는데, 이것도 엘리자베스가 극력 반대한 결과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감정싸움은 남편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되어 엘리자베스는 심슨 부인을 '그 여자(that woman)'라고만 불렀고 심슨 부인도 엘리자베스를 '쿠키(cookie)[4]'라고 불렀다.

4.2 제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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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너 루스벨트, 조지 6세, 사라 루스벨트[5], 엘리자베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엄마 이러지마

에드워드 8세가 무책임하게 떠넘긴 왕위를 이어받은 조지 6세가 고군분투하고 모후인 메리 왕대비와 아내인 엘리자베스가 곁에서 내조하는 동안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독일군이 유럽 전역을 침공하는 가운데 윈스턴 처칠 수상의 영도 아래 있던 영국이 끝까지 히틀러에게 굴복하지 않자 독일군은 영국을 향해 대공습을 시작했다. 이 때 런던이 집중 포화를 맞았고, 각료들은 왕실이 교외로 피신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그녀와 조지 6세는 단호하게 거부, 버킹엄 궁전에 체재하는 목숨을 건 모범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녀는 겁을 먹기는 커녕 공습 와중에 궁전의 담장이 무너지자 "이제야 런던 시내가 잘 보이게 되었다"고 말하는 등 강인한 의지를 보이며 영국인을 독려해 히틀러로 하여금 그녀를 가리켜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인"이라고 부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와는 별 관계도 없다 그녀는 조지 6세와 함께 공습으로 파괴된 런던 시내를 시찰하며 시민들을 위문해 정신적 지주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국민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이후 주변국의 동참을 촉구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해외를 국빈방문하는데 이때 왕실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캐나다를 방문하기도 했다.

5 왕비에서 왕대비로

5.1 퀸메이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7년 8월 14일부로 인도 제국이 해체됨에 따라 조지 6세는 증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 이래로 영국 국왕이 겸임하던 인도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녀 역시 인도 황후의 직함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대영제국의 위상이 날이 갈수록 쇠락하는 가운데 전후 재건 등 각종 현안들을 돌보느라 과로에 시달리고 심신이 쇠약해진 조지 6세는 국정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시가를 줄담배로 피웠는데 이로 인해 폐암에 걸려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다가 1952년 2월 6일 5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엘리자베스는 이 때문에 왕위를 포기하고 동생에게 떠넘긴 에드워드 8세와 그 원인을 제공한 심슨 부인을 더욱 더 싫어하게 되었다고 한다. 덧붙여서 에드워드 8세의 장례식날 심슨 부인이 슬퍼하는 것을 봤을 때는 남편이 막 죽었을 무렵의 자신을 떠올린 건지 그녀를 위로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왕대비가 되어 시어머니인 메리 대왕대비와 함께 왕실의 어른으로서 맏딸 엘리자베스 2세가 다음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는데 메리 대왕대비마저 1년 뒤인 1953년 3월 24일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그녀가 최고 어른으로 남아 왕실의 버팀목이 되었다. 참고로 그녀의 경칭은 'Her Majesty Queen Elizabeth The Queen Mother'인데, 딸이 국왕으로서의 존호를 엘리자베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왕대비의 경칭을 따라 'Queen Elizabeth'로 정하면 딸의 존호와 너무나 유사해져서 대중에게 혼동을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5.2 이혼녀에 대한 반감

왕대비, 다이애나, 윌리엄다이애나의 장례식에 참석한 왕대비와 여왕

남편 사후 50년간 왕대비로 지내면서 왕실이 과거 대영제국 시절의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엘리자베스는 그 일환으로 쳇바퀴 돌듯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복잡다단한 각종 의전과 의례, 엄격한 왕실 생활을 고령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이게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1997년 손자며느리인 다이애나 스펜서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다음날 당시 왕실 휴양지에서 함께 머무르던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자가 어머니의 죽음을 알면 큰 충격을 받을 테니 알리지 말고 그날 아침도 계획된 일정대로 진행할 것을 의전관에게 명령할 정도였다.

물론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다이애나에게 동정적이었던 여론으로부터 '너무나 냉정하다'고 비난받았다. 여기엔 평소에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다이애나를 좋게 보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이혼녀 심슨 부인과의 험악했던 관계 탓에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 후의 다이애나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인 듯.

엘리자베스 왕대비는 딸인 엘리자베스 2세에게 왕족이 다이애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라고 명령할 것을 요구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왕실을 향한 여론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찰스 부자가 반발한데다[6] 블레어 총리까지 여론을 위해서라도 참석해야 한다는 요청을 하자 엘리자베스 2세는 결정을 번복해 장례식에 참석함으로써 모후의 뜻을 어쩔 수 없이 거슬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왕대비는 이혼녀였던 카밀라 파커 보울스를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찰스 왕세자는 할머니가 죽고 나서야 카밀라와 재혼.

6 사망


엘리자베스 왕대비는 결단력 있는 의지, 강인한 정신, 그리고 대영제국 그 자체를 상징하는 마지막 인물로서 영국인에게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인기를 누렸으며 그녀의 100번째 생일은 국가적인 행사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하지만 막내딸 마가렛 공주가 2002년 2월 9일 71세를 일기로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자 크게 충격을 받아 쇠약해지더니 넉달 동안 앓던 감기가 악화되어 같은해 3월 30일 오후 3시 15분 엘리자베스 2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관은 영국 국회의사당 웨스트민스터 홀에 사흘간 안치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20만명이 넘는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영국인의 애도 속에 장례는 4월 9일 국장으로 엄수되었고 유해는 남편 조지 6세와 딸 마가렛이 잠든 윈저 성 내부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향년 101세로 영국 왕실 역사상 최장수 기록을 세웠으나, 2004년 10월 29일 여왕의 숙모인 글로스터 공작부인 앨리스가 102세를 일기로 타계하면서 깨졌다. 참고로 그녀의 딸인 엘리자베스 2세 역시 2016년 기준 90세로 영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군주이자 두 번째로 재위기간이 긴 군주이며 현재까지 여왕으로 정정하게 살아있다. 여왕의 장수 비결은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듯...

7 트리비아

  •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무지개를 풀며》에 따르면, 부모를 잃은 미아에게 "부모님을 찾아 줄 테니 따라 오너라."라고 했더니 그 어린이 왈, "엄마가 모르는 사람한테 따라가지 말랬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긴 한데
  1. 백작이 가정부와 관계해서 낳았다거나, 입양했다는 주장.
  2. 영국은 관례 수준으로 끝났지만 타국 왕실은 신분이 낮은 귀족과 결혼하면 귀천상혼이라는 규칙에 의해 아예 계승권을 박탈했었다.
  3. 조지 6세의 어릴적 별명.
  4. 엘리자베스의 외모가 통통한데다가 먹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5.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어머니이다.
  6. 자신들만이라도 참석하겠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