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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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여자
강우규김구김규식김좌진
김창숙민영환서재필손병희
신익희쑨원쑹메이링안중근
안창호여운형오동진윤봉길
이강년이승만이승훈이시영
이준임병직장제스조만식
조병세조소앙천궈푸천치메이
최익현한용운허위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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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複章) 수훈자
강기동구춘선권동진권병덕김경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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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규김익상김지섭김하락나석주
나용환나인협남상덕남자현노백린
린썬문창범문태수민긍호민종식
박동환박열박승환박용만박은식
박준승백용성신규식신돌석신석구
신채호신홍식쑨커쑹자오런안재홍
양기탁양전백양한묵E. 배설언더우드
여운형여지이연기우오세창오화영
유동열유여대유인석윤기섭위빈
이갑성이동녕이동휘이명룡이범석
이범윤이봉창이상설이상재이승희
이위종이은찬이인영이재명이종일
이종훈이필주임예환장건상장인환
전명운전해산정환직조성환조완구
주자화주시경지청천채상덕천청
최석순최성모탕지야오편강렬홍기조
홍범도홍병기황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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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동위원회 자리에서 소련측 대표와 악수하는 여운형)

呂運亨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

1 개요

"노동자 농민 일반대중을 위하는 것이 공산주의냐. 만일 그렇다면 나는 공산주의자로 되겠다. 노동대중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 만일 우익이 반동적 탄압을 한다면 오히려 공산주의 혁명을 촉진시킬 뿐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를 겁내지 않는다. 그러나 급진적 좌익이론을 나는 정당하다고 보지 않는다."[2]
"조국... 조선..."[3]

중도 좌익 노선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 해방 이후 최후의 순간까지 화합을 꿈꾼 당대의 휴머니스트

대한민국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언론인, 체육인, 정치인. 경기도 양평군 신원리 묘골 출생.[4] 호는 몽양(夢陽).

한국근현대사 교과에서 조선건국동맹건국준비위원회 활동, 임시정부의 위원으로 활동, 금성교과서에서는 김규식과의 좌우합작운동 정도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지만, 사실 그는 조선 말부터 꾸준히 활동해 온 지식인으로, 좌우합작은 그의 활동의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일단 개인적으로는 엄친아급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는 잘생겼고, 키 크고 체격이 훤칠했고, 스포츠 만능이었고, 패션 감각이 뛰어났고, 성격이 착했고, 외국어로 영어중국어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친구도 잘 사귀었고, 스펙 또한 뛰어났다. 분별없는 찬양조로 들릴 수 있는데 심지어 여운형을 싫어하는 우파 사람들도 그렇게 증언하고 있으니 할 말 다 했다.

3.1 운동을 계획한 청년 지식인 중 한 명이었으며, 일제강점기 언론 활동과 민족 문화 사업, 체육 활동 등 다채로운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다. 국내 독립운동이 사실상 사멸한 1940년대에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건국동맹을 구성하여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계를 시도하였으며, 해방 직후 조선건국동맹의 조직을 확대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혼란 정국을 예방하였으나, 건국준비위원회가 박헌영 등의 활동으로 좌경화되고 미군정이 이들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자 여운형은 미군정기 한 명의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미군정의 한반도 문제 개입을 반대하고 조선 민족이 자력으로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친일파를 제외한 좌우 세력 모두가 공평하게 참여한 연대를 통해 통일 국가를 이룩하자고 주장하였다. 정치 성향은 중도 좌파로, 김규식, 안재홍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강력히 주장한 김구나 중도 세력에 비우호적이었던 박헌영[5], 이승만, 한민당 등의 세력과는 거리를 두었다. 오래 전부터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한 지식인이었기에 민중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매우 높았으나,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에는 좌우 대립이 격해지면서 중도 세력의 입지는 점차 좁아져 갔다. 결국 그가 1947년 7월 19일 극우파로 추정되는 한지근이라는 청년에게 암살당하면서 좌우합작 운동은 사실상 붕괴하게 된다.

김구, 이승만 등 현대에도 잘 알려진 인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의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본래 좌파로 활동했다는 이유 또한 그의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대였고 그 때서야 교과서에서 그의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그의 비중이 낮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다른 독립운동가도 그렇고, 개인의 분량을 무작정 늘릴 수는 없다. 꾸준히 활동해온 독립운동가 및 정치인 중에 교과서에 한 사람의 활동이 쭉 실린 인물은 기껏해야 김구 정도밖에 없지 싶다. 그의 활동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드라마는 노무현 정권 기간에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였는데, 거기에서 여운형은 본격적으로 Vs 이승만으로 등장하였다.

김구가 이승만의 라이벌로 인식된 것은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생기면서 비로소 형성된 것이고, 사실 드라마에서 나와 있듯이 해방 직후에서 단정 수립 전까지 이승만의 라이벌은 여운형이었다. 당시 객관적인 설문조사 지표에서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 설문의 1위는 여운형이었고 2위가 이승만이었으며 3위가 김구였다. 여운형이 암살되고 이승만이 단정수립에 박차를 가하자 그때부터 이승만과 김구는 협력자에서 라이벌 관계로 바뀌게 되었다.

해방 이후 정국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국내의 지지를 널리 받았고 좌우의 연대, 통일 한국을 주창하며 활동한 그에 대한 재평가 또한 속속 등장하였다. 특히 '중도 좌익'을 주장하는 현대의 여러 인물들이 그의 재평가에 앞장서고 있는데, 가끔 이러한 논의가 색깔론으로 변질되는 것은 아쉬울 따름이다. 여운형이 막으려고 기를 썼던 것이 좌우 색깔론이 아니었던가... 지금껏 그를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이유 또한 이것이니.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이었던 윌리엄 랭던은 그를 일컬어 인도 공화국마하트마 간디와 비견할 만한 인물이라고 했다.

2008년 2월 21일 노무현 퇴임 직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급이 수여되었다. #

2 그의 생애

2.1 성장과 방황

조선 말기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서인 소론 여씨 양반 집안[6]에서 태어났다. 어머니태양을 치마폭에 품는 을 태몽으로 꾸었다고 하여 아호를 몽양(夢陽)이라 하였다.

몽양 이전에 3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다 죽어버려서 아버지는 입양도 생각했으나, 어머니가 극구 반대했다. 그러다 어머니가 33세가 되어서 여운형을 낳았고, 여운형은 집안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총명하게 생겨서, 할아버지는 그를 보고 왕재(王材 : 왕이 될 인재)라고 했다 한다.

집안 분위기로 말하자면 할아버지는 동학의 북방 포교를 위해 2대 교주 최시형을 만나는가 하면, 작은 할아버지는 특히 열렬한 동학 신자이자 동학조직의 고위급 간부였고, 작은 아버지 또한 동학 도사로 집안 대부분 사람들이 동학신도가 되어 동학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단양의 산골지역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서인 집안이어서 그런지 할아버지는 청나라 조정으로부터 한족을 해방시키자며 북벌을 모의한 죄로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7] 사실 같이 모의했던 사람들 중에 처형당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관청에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유배형으로 감면되었다고. 어렸을 적 여운형은 할아버지로부터 "오랑캐들이 불합리한 요구를 자꾸 하므로 중국을 쳐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며, 이는 후에 여운형이 중국 유학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에 비해 아버지는 성질이 불같아서 버선이 발에 안 맞으면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고, 모험을 하기 보다는 소극적으로 집안에 안주하는 성격이었으며 양반의식으로 똘똘 뭉쳐서 상민을 대놓고 무시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를 반면교사로 삼았는데, 아버지의 성질이 어땠는지 예를 들자면 이러하다. 몽양이 어렸을 적 상민 집에서 몰래 앵두를 따먹다가 들켜서 개구멍으로 튀어나오다가 얼굴이 좀 긁혔더니 아버지가 사실을 알고 자식을 꾸짖기는커녕 그 집 앵두나무를 몽땅 찍어버려 상민에게 너무 미안했다거나, 자기 집이 부자는 아니어서 일반 평민들처럼 보리밥을 먹었는데 자신을 귀여워했던 여종이 장사하는 남편의 돈으로 을 사서 그에게 흰 쌀밥을 지어 먹였더니 아버지는 노비가 양반집 자제한테 흰 쌀밥을 먹인다고 나무라서 화가 났다거나, 노비가 여운형한테 농담을 걸었는데 그걸 안 아버지가 노비에 몰매를 때려서 화가 났다는 일화가 있다.

한편 어머니는 힘이 세고 체격이 우람하였으며 남자들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여장부 성격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이 이웃집 닭이랑 싸워서 지면 그 닭을 삶아 먹고 더 힘센 닭을 사서 이기게 했다거나, 자신의 종이 남의 집에서 얻어맞고 오면 더 힘센 종을 불러와서 보복하게 했다 한다. 그래서 별명이 '호랑마님'.[8] 단양 산골로 피난하고 나서 아버지가 여기서 계속 살자고 하자 어머니는 어떻게 자식들을 외진 곳에서 교육시키느냐고 그렇게는 못하겠다 하여 자기 혼자서 자식들과 종들을 이끌고 양평으로 가버렸고,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결국 어머니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할 정도로 드셌다고 한다.

기가 센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끼어서 자란 몽양은 부부싸움을 자주 지켜보았는데, 자신도 성격이 불 같았고 반골 기질이 있었지만 장남이니까 집안을 위해 화가 나도 억지로 참고 성질을 죽이는 것을 습관으로 했다고 한다. 성격은 친구랑 놀러다니고 운동하고 사람 만나러 다니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는데, 공부보다는 뛰어놀기를 좋아해서 옷이 성한 날이 없었고 창호지는 늘 구멍이 뚫려있었다고 한다. 또한 남한테 주기를 좋아해서 용돈을 받고 며칠 지나면 동생은 그대로 있는데 몽양의 주머니에는 이 남아나질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그냥 평범한 어린 아이였고, 그가 격동의 세월을 보내기 시작하게 된 것은 과거제도가 폐지되어 더 이상 성리학을 공부할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고 출세를 위해 신학문을 공부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부터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친척 여병현[9]의 권유로 서울(한성)로 올라가 최초의 신식학교 배재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배재학당은 월요일에 일요일 예배 빠진 사람을 조사하곤 했다. 한 번은 친구들이랑 남산으로 놀러갔는데, 다음날 자기 자신만 솔직하게 손을 들었더니 1시간 남아서 자습하는 벌을 받자 빡쳐서 1년 만에 그만 다니고 17세 무렵 흥화학교로 전학하게 된다.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는 1년 정도 다녔다. 우등생이 되어 상까지 받았으나, 아내가 죽고 할아버지도 돌아가셔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직업을 갖기 위해서 학교를 그만두고 통신기술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우무학당에 입학했다. 이는 당시 우무학당 졸업은 상당한 고임금 전문직종이라는 우무국 기술관[10]으로 채용되는 것이 보장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러일전쟁이 발발했는데, 여운형은 안팎으로 무능했던 황실이 무너지는 게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고 러일전쟁을 동양과 서양의 대결구도로 여겨 일본과 조선이 동맹을 맺고 러시아에 선전포고해야한다고 정부에 진정서를 냈다. 미래에 있는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당시만 해도 조선인들은 일본이 조선에게 합병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내리리라곤 상상도 못했고, 해주는 게 없는 무능한 조선 왕실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당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서양 국가들에게 신나게 갈라먹히는 것을 본 조선인들 사이에 서양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극에 달했다.

그 상황에서 일본은 아시아 대표를 자처하고 동양을 서양으로부터 보호하는 성전(聖戰)을 치룬 다고 선전하였고, 대부분 조선인들이 이를 믿고 있었다. 독립협회가 친일적 성향을 띤 것 또한 이러한 믿음 때문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를 열거했을 때도 이런 내용이 나왔으며, 그의 동양 평화론 또한 당대 조선 지식인이 믿어왔던 한중일 연대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후에 나라가 일본에게 먹힐 것이라는 게 기정사실화 되자, 여운형은 "이리 무서운 줄은 알고 여우 무서운 줄 몰랐다!!"며 국제 질서의 냉혹함을 뼈저리게 느낀 뒤 자신의 우둔함을 뉘우치고 항일운동을 시작했다. 그 무렵 도산 안창호의 시국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은 뒤 국채 보상운동에 앞장서서 술 담배를 딱 끊고[11] 시국연설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 무렵 당시 자신이 모시던 스승이었던 민영환이 자결하고 1달 후에 모친상을 당하여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우무국 통신원이 일본에 넘어갈 위기에 놓이자 여운형은 우무학당을 졸업 1개월 전에 그만두고 동창들을 모아, 이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일본 측에서 채용하겠다고 통지가 날아왔으나 이를 거절한다. 아버지는 채용을 받아들이라 했으나 몽양은 "나더러 일제에 협력하라고 하는 거냐"고 길길이 날뛰고 어머니 무덤가에 가서 "어머니가 계셨으면 내 얘길 들어 주셨을 텐데!!" 하고 통곡하는 소동을 피웠다고한다.

2.2 개신교 입교

이건 좀 황당한 소리지만 당시 명성황후 민씨가 아꼈던 무당관우의 영혼이 깃들었는데 여씨 집안을 관우를 죽인 여몽과 같은 성씨 쓰는 집안이라고 저주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안 그래도 정계에서 멀어진 여씨 집안은 출세 길이 아주 막혀버려 정치 문제에 신경이 크게 곤두서버리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구습을 타파하는 일에 주력하였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여운형은 어려서부터 미신을 믿지 않는 성격이라, 여씨 성을 가진 사람이 관우 사당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미신이 퍼져있었는데도 예전부터 관우를 모시는 사당에 들락날락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당시 기독교는 종교 차원을 넘어서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에, 예배 빠지고 놀러 다녀서 배재학당을 자퇴했던 그가 신학문 수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기독교 중 개신교파의 장로교에 입교한다. 이 무렵 아버지까지 열병에 걸려 돌아가시자 나이 20세에 아내를 비롯해 집안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어버리고, 이때부터 일련의 방황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부친상 기간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개신교에 입문하고 신문물을 받아들인다.

당시 그는 이러한 개혁을 몸소 실천하여 상투를 자르고 노비 문서를 불태워버리고 신주라거나 미신을 상징하는 터주 인형을 모두 묻고 태워버렸으며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주변에 살던 양반들이 그를 야단치고 백안시 하였다고 한다. 노비들이 해방되고 나서 나중에 여운형한테 반말하면서 대들었는데 그는 도리어 허허 웃으며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들이 받았구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엄청 열성적인 크리스천이었는데, 새벽기도나 수요일 예배는 기본이고 우선 묘꼴 마을에 교회를 세웠으며, 가족들을 교인으로 만들었고, 백정들이 주요 신자여서 '백정교회'라고 불리었던 민중교회인 승동교회에서 7년간 사역하면서 최고 전도사가 되었다. 그의 설교와 전도 실력은 뛰어나서 신자가 4,000명이나 더 들어와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개최한 100만인부흥회[12]에서 찬송가를 부른 사람 중 하나였다.[13] 질레트가 설립한 황성 YMCA 야구단[14]의 운동부장이 되어 11명 일원 중 한 명이 되었고, 도쿄에서 열리는 야구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신앙 활동은 당시 조선의 개신교 중심지였던 평양의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으로도 이어진다. 심지어 중국 금릉대학 유학시절에도 YMCA건물을 빌려 기도모임을 열었는데 당시 그 지역에 살았던 조선인은 거의 모두를 참여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그의 신앙 활동은 종교를 단지 개인구원 차원이 아닌 사회적 구원 차원으로 여긴 여운형의 신앙관과 관련이 있다. 여운형은 조선민족을 일제로부터 하나님이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조선을 기독교적인 낙원으로 만들 생각 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서양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신학을 강요하는 태도에 반발하였고,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일제가 종교를 탄압[15]하여 기독교가 친일 보수 성향으로 가게 되자 이에 실망하고 조선의 기독교계에서 물러나서 해외에서 신학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측면을 볼 때 이승만도 이와 같은 입장이었는데 앞으로 둘은 상당한 노선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는 여운형과 이승만의 활동무대 차이에서 기인하였는데, 여운형은 제국주의에 대항한 민중혁명이 일어난 중국이 주요무대였고, 이승만은 자본주의의 정점에 있었던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이 주요무대였으며, 그들은 각자 그곳에서 경험한 것들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 나아갔기 때문이다.

2.3 중국 유학

여운형은 조선 내부에서 기독교를 통한 구원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해외유학을 결심한다. 이렇게 하여 동생 여운홍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고, 자신도 해외유학의 길을 모색한다. 그러던 중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발발하여 이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언더우드의 추천으로 중국 난징의 금릉대학으로 유학하여 영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영문학을 공부한 것은, 금릉대학의 학부가 통합되면서 신학부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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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릉대학 재학 당시 그의 성적표. 내용이 궁금하면 여기로 #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난징상하이 지역의 조선인들을 사귀었고, 중국으로 유학 오려는 조선인 학생들의 중국 입국을 도와주면서 신망을 얻어[16] 그 지역 조선인 거류민 담당자가 된다. 한편 그는 외국인이 경영하였던 서점이었던 협화서국에서 일하였는데, 영어를 상당히 잘했기 때문에 월급을 배로 받았다고 한다.[17]

그런데 그는 남을 도와주길 너무 좋아해서, 당시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유학생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그들의 학자금에 월급을 다 퍼주어서 자신 돈이 남아나질 않았다. 어땠느냐하면 오전에 협화서국에서 일한 뒤 오후에는 발품 팔아서 담배나 양말을 팔아 용돈을 마련했는데, 그와 함께 유학생활을 한 적 있는 한 사람은 여운형이 남 주느라 귀가할 차비조차 없어서 걸어 다니자 그 모습이 너무 불쌍해보여서 최소한 차비는 남기고 퍼주라고 말했다고 회고록에 적어둔 적이 있다.

2.4 항일 독립운동

2.4.1 신한청년당 당수

비록 대인배적 측면은 있었지만 그는 보통 평범한 유학생에 지나질 않았는데, 그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로서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면서부터다.

이 소식을 듣고 나서 주중 미국대사와 같이 면담을 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조선독립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얻은 여운형은 신한청년당이라는 정당을 문서상으로 조직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측 대표로 영어를 잘하는 친구인 김규식을 파견했고, 조선쪽에는 장덕수를 파견한다. 김규식은 동시에 사명에 보탬이 되도록 조선 내부의 사람들이 움직여달라 부탁하였고 장덕수도 조선 지식인들이 규합하는데 노력하였다. 이러한 청년들의 활발한 활동은 3.1 운동으로 결실을 맺었다.

2.4.2 임시정부 의정원의원 및 외무부 차장

3.1 운동 실패 후 독립운동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독립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그 때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안건이 나왔는데, 여운형은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복잡한 일이어서 많은 정력이 소모되고 권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동지들끼리 세력다툼의 소지가 있어 독립운동에 쏟을 힘을 정부내치에 쏟는 비효율적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하여 반대하였으며, 정부가 아닌 당의 형태로 독립운동을 해도 충분히 효율적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사람들 대다수가 정부 수립에 손을 들어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정부 수립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후 그의 생각대로 운동 및 사상 방향과 임정 재건의 방법론에 대한 의견차로 분열이 거듭되었으며 이광수, 윤치호와 같은 회의적 지식인이 등장하는 데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 외에도 대한이라는 국호가 망한 나라의 국호이므로 사용을 반대했고, 나라를 망쳐놓은 원인인 조선황실에 대한 우대도 반대했지만 반대의견 쪽의 사람들이 더 많아서 무산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비록 임정 설립 시에 여러가지를 반대했지만 여운형은 임시정부에서 의정원, 외무부차장으로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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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촬영. 앞줄 오른쪽부터 이유필, 신익희, 윤현진, 안창호, 손정도, 정인과 한 사람 건너 황진남, 둘째 줄 왼쪽 김구, 다섯째 줄 오른쪽 첫 번째가 여운형이다.)

특히 외교부분에서 여운형은 자신의 저력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3.1 운동을 혹독하게 진압한 것이 드러나면서 일본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이 극히 안 좋아지게 되자, 일본의 코가 장관은 여운형을 도쿄에 초대하여 국빈으로 예우하고 그가 조선합방을 수긍하도록 끈질기게 설득한다. 이는 임정 중심 세력인 여운형을 일본 편으로 만들어 임정을 분열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이 때 임정 사람들이 '가면 죽을지도 몰라, 가면 변절할지도 몰라'라면서 막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안창호는 대인배스럽게 "몽양은 그럴 리 없다"며 여비로 30원을 들려보냈다고 한다. 이에 여운형은 코가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고 도리어 '일본이 만용을 부리고 3.1 운동을 진압한 것은 흡사 타이타닉이 작은 빙산을 무시하고 지나가다가 가라앉는 것과 같은 것'이라며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코가 장관을 설득시킨다. 코가 장관은 대화를 하면서 여운형의 기개와 인품에 감탄하여 여운형이 떠날 때 "여운형 만세!"를 외쳐서 여운형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곧이어 여운형이 도쿄 호텔의 연사로 초대되어 조선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게 되었을 때 합방에 대한 친교적 발언은커녕 수많은 기자들이 모인 앞에서 대놓고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폭탄발언을 한다. 이 때문에 여운형을 초대한 일본 의원들로 구성된 하라 내각이 불령선인 1호 인물을 일본 땅에 불러들이고 독립을 외치게 만들었다는 책임을 지라는 압력에 의해 하라 타카시 내각이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내각을 일컬어 여운형 국회 혹은 여운형 내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2.4.3 고려공산당 활동

또한 그는 조선독립을 지원하는 세력이라면 그 대상이 어느 누구든 간에 편을 가리지 않고 접근하였는데, 그 무렵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는 약소민족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였다. 여운형은 고려공산당에 가입,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되는 공산당 주최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도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기차를 타고 가면 밀정의 감시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동차 + 마차 + 썰매를 타고 야숙과 얻어 자기를 병행하면서 몽골의 고비사막을 횡단했다. 당시 몽골은 미치광이 남작 운게른 슈테른베르크와 볼셰비키군, 몽골군이 피터지게 싸우고 전황이 정리된 지 2달 정도 밖에 안 되어 도적떼와 야수가 들끓는 곳인데 치안 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아 위험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야숙을 하는데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품속에 권총을 끼고 잤다.

여행 중에 여운형은 몽골 횡단과 러시아 방문에 대한 여행기를 남겼고 이를 후에 조선중앙일보에 기고하였는데, 당시 몽골, 중앙아시아, 러시아의 민중들의 안습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어 귀중한 사료로 평가 되고 있다. 안습의 검은 빵과 도끼 일화

이르쿠츠크에 도착하고 모스크바로 회의장소가 변경된 후에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에 도착, 대회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대담을 나누고 볼셰비키의 입장을 확인했다.

그런데 임시 정부는 얼마 안 가 연통제, 교통 국이 발각되어 국내와의 연락이 끊기면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고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로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 터져 고려공산당 멤버인 김립이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임정 내부의 공산당원들의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국민대표회의가 열리면서 좌익 세력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들이 임시 정부에서 대거 이탈, 임시 정부는 백범일지에 나와 있듯 '방세도 제대로 못내는' 단체로 축소되어 버리고 만다. 이는 김구가 좌익 세력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을 가지게 되는데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해방 이후 정국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공산당은 크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분열되었다.

여운형은 개혁적 성향을 지닌 임정 2세대 창조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던 데다가 이러한 정치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임정 활동보다는 다른 쪽에서 더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특히 상하이에서 창당된 중국 공산당 초기 멤버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여 쑨원, 모택동, 호치민을 만나는 한편 국민당 좌파의 지도자로 중국 공산당에 우호적이었던 왕조명과 교류하기도 했다. 그는 중국 공산당의 혁명 성공이 조선 독립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보고 자신이 근무하였던 신문사(타스 통신사)를 통해 혁명을 독려하는 기고문을 여러 차례 내기도 하였고, 장개석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여 신변에 위협을 받기도 했다. 새벽에 집에 와서 밥을 먹다가 중국군이 들이닥치자 담을 넘어 도망가는 등.

2.4.4 체포와 국내 압송, 수감생활

그 와중에 자신과 교류하고 있었던 왕조명이 체포되고 공산당 자금사건 등의 일련의 사건으로 독립운동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중국 복단대학교 체육교사로 취직하였고, 수학여행 차 학생들을 데리고 동남아로 건너가 싱가포르, 필리핀 일대에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 민족해방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 때문에 영국 경찰들의 눈 밖에 나서 여권을 빼앗기거나 억류당하거나 쫓겨나기도 했다.(여운형이 억류당했던 필리핀 중화기독청년회관)

그리고 동남아 순회를 마친 뒤 상하이로 돌아가서 공동조계에 있는 경마장에서 야구경기를 관람하다가 영국 경찰의 협력을 얻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고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여운형은 일본 경찰이 공동조계에서 자신을 체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경기를 관람한 것인데, 일본 경찰들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첩첩이 포위했다. 그 과정에서 심한 몸싸움이 벌어져서 여운형의 한쪽 고막이 상해버려 한쪽 귀가 안 들리게 되었다.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이 소식의 진위를 의심했다. 이는 이 전에도 여운형 체포설이 심심할 때 마다 신문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체포가 사실로 확인되자 조선독립운동의 거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여운형의 이름이 조선에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조선에 도착할 무렵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서울역으로 몰려들었는데, 사실 서울역에서 내릴 예정이었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리자 경찰이 만일의 사태를 우려하여 용산역에서 미리 내리게 했다.[18] 당시 신문사들은 이를 '여운형 사건'이라 하여 관련 보도들을 지속적으로 보도하였고, 공판 과정을 관람하기 위해 새벽부터 수백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섰을 정도로 그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한편 여운형은 본국에 송환되던 날 오랜 여정의 피로로 신경이 약해졌고 유난히 더운 날씨에 찬물을 많이 마셔서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의 형량은 3년 징역으로 최종 확정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여 독방생활을 하게 되자 평소 활발하게 돌아다녔던 몸이 적응을 못하여 신경통에 시달리더니 그 결과 털이 허옇게 드문드문 쉬어버렸고 이전에 몸무게가 80kg대에서 60kg대로 줄었다. 특히 수감생활 중에 수인들이 가장 많이 걸리는 질병 중 하나인 치질 때문에 엄청 고생했다고 한다. 밥 먹다가 돌을 잘못 씹어서 이도 상했다고 한다.

여운형은 인내심이 강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어서, 목 뒤쪽에 혹이 나서 수술을 한 적 있었는데, 굳이 마취를 안 하겠다고 하고 팔짱을 끼더니 입을 꾹 다물고 참았고 팔 근육에 힘을 줘서 수술 후에 팔에 일시적으로 마비증세가 왔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한 그가 신경통과 치질로 너무 고통스러워서 밤새 신음할 정도로 병세가 심화되고 겨울이 다가오자 서대문형무소보다는 그나마 대접이 좋고 날씨 좋은 대전 형무소로 이송되었고, 그 때부터 건강이 호전되었다. 책읽기와 그물뜨기로 소일하다가 출옥 4달 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치질 수술을 4번 받아서 증세는 간신히 호전될 수 있었지만 출옥 후에 후유증으로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2.4.5 조선중앙일보 사장

석방 뒤 그는 중앙일보[19]의 사장에 취임하였고, 신문 이름을 '조선중앙일보'로 바꾸었다. 그의 활약으로 망하기 직전이었던 중앙일보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겨루는 3대 일간지가 되었다. 조중동 경쟁, 당시 언론사에서 나돈 유행어로 '3증 경쟁'의 대열에 합류한 조선중앙일보는 사옥을 더 넓은 곳으로 옮기고 지면을 계속 늘려갔으며, 월간 잡지 《중앙》을 창간하는 등 무섭게 성장하였다.

여운형은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자본을 늘리고 사옥을 증축, 윤전기를 늘리고 회사 전용 경비행기를 사서 백두산을 탐방하기도 했다. 당시 중앙일보의 논조는 일본의 조선인 탄압 정책을 비판하는 중도좌파 적 논조를 지닌 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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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농협 건물로 쓰이는 조선중앙일보 사옥.

그리고 그는 사장 시절에 일제강점기 중에 최초로 이순신 장군 묘소를 정돈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가히 용자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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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이 세운 이순신 장군 송덕비.#)

이러한 그의 행적 때문에 다른 유력한 신문사들에 비해 수익구조가 그렇게 좋은 형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사장인데도 걸어서 출근하여 세간에는 이런 말장난이 나돌았다.

조선일보 광산왕은 자가용으로 납시고

동아일보 송진우인력거로 꺼떡꺼떡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걸어서 뚜벅뚜벅

그러나 결국 신문사는 폐간되는데,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휴간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일부 경영진들의 내부알력에 따른 내흥을 수습하지 못하고, 1937년 11월 폐간하고 말았던 것.

일장기 말소사건과 관련하여, 조선중앙일보가 한 발 빨랐다는 주장이 있지만, 당시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3일자 서울 판 기사와 날짜가 동일한 동아일보의 1936년 8월 13일자 지방판 기사가 발굴되면서 이 원조 설은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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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좌), 동앙일보(우)의 지방판 기사다.)

채백 부산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저서 <사라진 일장기의 진실>(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을 통해 조선중앙일보가 가장 먼저 손기정의 우승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널리 알려졌지만 동아일보도 조선중앙일보와 같은 날 이 사진을 보도했다고 말한다. "8월13일자 동아일보 조간 지방판에 조선중앙일보(서울 판)가 게재한 사진과 똑같은 사진을 실었는데 서울 판이 당일 새벽에 인쇄하던 반면 지방판 조간은 그 전날 인쇄하던 관행에 비춰, 손기정의 우승 사진은 동아일보가 먼저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실은?


그리고 조선중앙일보의 폐간의 실상은 조선총독부의 1936년 극비문서와 삼천리 1938년 1월 1일 신년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소화11년(1936년) 8월 13일자 지상에 ‘머리에 빛나는 월계관, 손에 굳게 잡힌 견 묘목, 올림픽 최고 영예의 표창 받은 우리 손 선수’라는 제목 아래 사진을 게재했다. 그러나 전기 동아일보와 같은 모양의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있는 일장기 마크는 물론, 손 선수 자체의 용모조차 잘 판명되지 않는 까닭에 당국으로서는 당초 졸렬한 인쇄 기술에 의한 것이라 판단했으나 일단 관할 경찰 당국을 시켜 조사한 결과 동아일보처럼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일장기 마크를 손으로 공들여 말소시킨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렇지만 동사(同社) 사장 여운형 이하 간부는 전연 그 사실을 부인하다가 사실이 밝혀지자 하는 수 없이 근신의 의미로 같은 달(9월) 4일에 이르러 당국의 처분에 앞서 ‘근신의 뜻을 표하고 당국의 처분이 있을 때까지 휴간 한다’ 운운의 사고(社告)를 게재함과 동시에 휴간 수속을 이행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 과, ‘극비문서 <조선출판경찰개요> 1936년 119~120쪽
소화 11년(1936년) 9월5일, 동업 동아일보가 같은 사건으로 경무국으로부터 발행정지의 처분을 받자, 중앙일보는 자진휴간의 거조(擧措)에 출(出)하야 1개년간이나 경무 당국의 속간 내락을 얻기에 진력을 하였으나 사태 불순하야 한갓 헛되이 일자를 끌어오다가, 만 1년을 지나 또 제 9조에 의한 2개월간의 기한까지 지나자 11월5일에 저절로 낙명(落命)하게 된 것이다. 같은 사건으로 처분을 받았던 동아일보는 그래도 그 제명(題名)을 살려 다시 속간함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야 당국의 정간 처분도 아니오 자진 휴간한 말하자면 경미한 중앙일보만 낙명하게 되었느냐 함에는 여기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잠재하여 있었던 것이다. (중략) 휴간 중에 현 사장(呂運亨) 지지파와 신 사장(成元慶) 지립파(持立派)의 알력이 있어 호상 대립이 되어 중역회에서나, 주주총회에서나 분쟁이 늘 끊이지 않아(不絶)왔으며 거기다가 8만원 공(空) 불입 같은 것이 튀어나와 주식회사 결성 중에 큰 의혹을 남긴 오점까지 끼쳐놓았음이 후계 간부가 사무국을 이해시킬만 한 공작을 1년 내내 끌어오면서도 이루지 못한 등 여러 가지의 실수가 원인이 되어 파란 많은 역사를 남기고 끝내 무성무취(無聲無臭)하게 마지막 운명을 짓고 말았다. -『오호, 중앙일보 逐 폐간, 이십여년의 언론활약사를 남기고』, 삼천리, 1938년 1월 1일 신년호}}

2.5 해방 전후 치안유지 활동

중앙일보가 폐간되고 할 일이 없어진 여운형은 결혼식 주례사로, 각종 행사 연사로 소일하다가 돌연 일본으로 떠났다. 이에 대해 자신의 아들이 일본 호세이대학에 입학하는 관계로 일본행을 결정했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중일전쟁이 터진 뒤 일본이 조선에서의 독립운동 활동에 대해 탄압을 강화하여 활동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었고, 중일전쟁과 관련해 일본 고위급 관료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일본으로 건너간 여운형은 일본유학 중인 조선인 유학생들을 만나 조국독립의 필연성을 역설하여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면서 그들의 유학생활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한편 일본 고위급 관료들과도 만나 중국에서 일본군을 서둘러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고 일본의 극우 지식인 오카와 슈메이와 시국을 논하기도 하였다.

오가와 슈메이는 일본의 극우 이론가인데, 이 시기 오가와는 일본 정부가 중일전쟁을 계속하는 것에 매우 비판이 많았었다. 이 점 때문에 오가와는 당시 중일전쟁에서 일본군 철수하라고 주장하는 여운형과 의견이 수렴된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은 오가와 슈메이와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 반대, 중국과의 친선'을 주장하면서도 정치적 입장에서는 서로 거리를 두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적으로 매우 친했다. 대표적인 예로 오가와 슈메이가 당시 보호관찰 하에 있던 무직의 여운형을 '사회적으로 자리 잡도록 하겠다.'며 추천으로 만철(滿鐵)의 다른 단체인 '동아회' 고문에 취임시킨 것을 들을 수 있다. 일각에서는 근거로 '여운형이 친일단체에 협력했다'고 앞뒤 다 잘라버리고 그냥 결정짓는데, '동아회'라는 것은 만철의 동아경제조사국이 1928년 조직한 단체로,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실태에 대해 분석하고 논책하고 제언하는 잡지 <동아>를 발행하고 있었던 단체다. 이 단체 집필자는 외부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애당초 그 목적이 '중국 관련'에 대한 학술적 색채가 짙은 논고가 많았었다. 즉, 다시 말해 '동아회'라는 단체는 '내선일체'를 주창하는 친일단체와 거리가 전혀 멀다(출처 - 몽양여운형전집3, 강덕상 저 - 대중국화평공작 '아시아연맹'구상과 여운형, p302 ~ p304). 하지만 군부 인사들은 이미 시작한 일이니 물러설 수 없다면 듣지 않아 성과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고 미군기가 도쿄 시내를 공습하고 폭탄을 쳐갈기는 모습을 본 여운형은 중일전쟁 때부터 예견했던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게 되었고, 군부 쪽 고위 관료들의 요청으로 회담을 하였다. 특히 고노에 후미마로는 중일전쟁 초기에 여운형의 제안을 거절한 바가 있었는데 국공합작이 전개되고 일본 전황이 막장으로 치닫게 되자 여운형에게 중국 측 인사들을 설득하여 휴전협상을 도와달라고 하지만 여운형은 이미 늦었다며 거절하였다.

1942년 4월 18일 일본 도쿄에서 '두리틀 대원 공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온 여운형은 도쿄에서 목격한 미군기의 공습상황을 자신의 친구들에게 설명하였고, 일본 패망을 예언하는 말을 주변인들에게 흘렸다가 일본 헌병대에까지 귀에 들리게 되었다. 1942년 12월 21일, 일본 총독(고이소 구니아키)로부터의 회담을 마치고 귀국하려는 길에 시모노세키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또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당시 일제는 여운형을 다치게 하면 파장이 클 걸 염려하여 90시간 동안 잠을 못 자게 깨우는 고문을 했다. 그 때문에 한동안 신경쇠약에 걸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옥살이 중 기력이 많이 떨어지고 머리가 하얗게 셌으며 일제의 징병 부분에서 협력을 하지 않은 대가로 늘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했다. 그리고 1943년 7월 2일 석방되었다.

석방 후, 극도로 신경쇠약에 시달려 경성요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7월 5일 일본인 검사 2명이 전향서 쓸 것을 협박, 여운형은 재차 거절했지만 경성지방법원 판사 백윤화가 '전향하지 않으면 집행유예를 취소하고 다시 형을 집행한다.'고 협박한다. 그러자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 여운형은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던 가족들이 자기 대신 전향문에 도장 찍는 것을 그대로 묵인하고 말았고, 결국 협박 분위기 속에서 가족들에 의해 전향문이 날인당하게 된다. 이 강제 전향문으로 인해 여운형은 훗날 해방 후 수많은 정적들로부터 비판의 명분을 받게 되어 명예적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 전향문 날인 이후에도 가택연금을 당하고 총독부로부터 지속적인 감시를 당하게 되었고, 일본 고위급 정치인들이 계속 협력을 요구하면서 공갈협박을 했기 때문에 살과 뼈가 마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여운형은 그 와중에도 해방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해방 후 조선민족의 자력에 의해 세워진 조직을 구상하여 자기 측근들, 조국 건설에 뜻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건국동맹이라는 지하조직을 만들었다. 사실 '건국동맹'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만들어진 이름이고, 당시 조직이름은 없었다. 이는 건국준비위원회도 마찬가지여서 나중에 단체를 명명하기 위해 이름이 붙은 것이지 당시에는 이름이 없었다. 이는 이름이 있으면 임원 1명이라도 체포되었을 시에 죄다 까발려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조직의 원칙은 삼불(三不)이었는데, 즉 말하지 않는다(不言), 문서로 남기지 않는다(不文),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不名)였다.

1944년 10월, 인근 용문산에서 13명의 청년들이 여운형을 찾아 만나서 경기북부지역을 대표하는 청년들이 모여 비밀결사단체인 '농민동맹'을 결성한다. 농민동맹은 용문산을 거점으로 일제의 강제징병을 피해 도피한 청년들을 보호하는 역할과 일제(日帝)의 공출로 인한 농민들의 피해를 막으려 노력했었다. 이후에는 보광당, 조선민족해방협동단, 산악대 등 여러 조직과 직간접 접촉을 통해 건국동맹의 기반을 다져나아가게 된다.

1945년 3월에는 건국동맹의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군의 후방교란과 노농군 편성을 계획하면서 경기도 주안 조병창의 채병덕 중좌와 접촉하고자 당시 은행원으로 지내던 손기정을 보내 채병덕 중좌에게 전갈을 보냈고, 채병덕 중좌와 두 차례 접촉해 유사시에 무기 공급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1945년 4월에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회담과 관련해 조선 독립동맹(중국 화북 지역에서 활동한, 조선의용군을 산하에 둔 독립운동 단체)과 구체적인 연계를 위해 이영선을 파견하고, 5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접촉하기 위해 최근우를 베이징에 파견하여 연락을 시도했다. 그리고 8월초에는 부민관 사건등 여파로 총독부 경찰에 의해 그 존재가 드러나게 되어 건국동맹의 간부 이걸소, 황운, 이석구, 조동호등이 검거되었고, 이에 따라 최근우, 김세용, 이여성, 이상백, 김기용, 이만규 등을 중앙위원으로 선출했다.

그런데 당시 총독부 기록 보면 정말 여운형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기록이 보인다. 총독부의 서열 2위인 경무총감과 3위인 정무총감의 회담기록인데. 경무총감은 여운형은 조선을 지배하는데 제일 방해되는 자니 당장 잡아 죽여야 한다[20]고 했는데 정무총감은 "지금 여운형을 건드렸다가는 조선 전체에서 폭동이 날 수 있다. 그는 고종이나 순종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지금 상황에서 여운형 체포는 무리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의 항복이 기정사실이 되자 총독부는 항복 사흘 전 무렵부터 자신들을 포함해 조선에 거류중인 일본인들을 안전하게 빠져나오도록 하는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는데, 여운형[21]을 교섭의 파트너로 정했다. 그런데 훗날, 한국민주당에서 총독부가 여운형과 만나기 전에 송진우에게 찾아가 치안권을 교섭했다는 등 주장을 펼쳐 이를 사실인 것 마냥 주장했는데, 1957년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가 인터뷰에서 '송진우로부터 치안권 교섭 그딴 거 없었다!'라는 투로 분명하게 입장을 밝혔다. 여운형은 안전하게 빠져나가게 해줄 테니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치안유지 행위를 막지 말 것, 형무소 죄수들을 석방할 것[22], 서울에 3달치 식량을 준비하여 민심을 달랠 것을 요구하고 지속적으로 설득한 끝에 이를 관철시켰고, 그동안 몰래 운영해왔던 지하조직 건국동맹을 구체화하여 해방 이틀 만에 건국준비위원회를 설립하고 전국 각지에 건준 지부를 건설하여 치안을 통솔하도록 함으로써 일본이 패퇴한 후 보복성 범죄 밑 사회 혼란이 일어날 여지를 미연에 방지하여 사회를 안정화 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8.15 광복을 참조.)

그가 총독부와 교섭을 한 것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단 긍정적으로 보는 측은 일본군이 철수하기 전에 조선인들을 마구 학살하고 떠난다거나 해방 직후에 민중 내에서 친일파를 처단한다는 이름으로 사적인 감정에 기인한 마구잡이식 보복성 살인으로 사회 분열이 일어나고 혼란이 일어나 힘없는 사람들이 거기에 말려 억울한 피해를 입을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로 중국 및 동남아 등지에서 그런 사건들이 있었다. 그리고 후에 4.3 사건이나 한국전쟁같이 사회가 혼란할 때의 피해자들은 결국 힘없는 민간인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정작 여운형은 이 결정에 대해서 자기 변호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반면 비판하는 이들은 일본군 및 행정 관료들이 동남아, 중국 등지에서 항복하여 포로 대우를 받았던 점을 지적하며, 부적절한 처신이었다고 이야기한다.

한민당과 그들의 대표지 동아일보, 친일 거두 방응모의 조선일보는 여운형이 총독부와 교섭했다는 것을 구실로 여운형을 일본으로부터 돈 받아먹은 친일파라고 깠지만 여운형 본인은 일제에 의해 인생 전반에 걸쳐 생사를 넘나든 최대 피해자였고 해방직전 총독부로부터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았으며 해방 이후에도 역시 가난하게 살았다 여운형이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얘기를 한국민주당(한민당)으로부터 들었던 미군은 그 진위가 궁금해서 일본 총독부 인사들에게 이를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도리어 그런 헛소문도 있냐면서 놀랐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일단 보복부터 하고 볼 테지만, 여운형은 조선인들의 안위를 걱정해 비폭력주의에 입각해 일본을 용서하고 보내줬다. 이는 진정 대인이 아니고서야 시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2.6 그의 정세 판단력

그는 1927년 경 초기 공산당 멤버들과 교류할 때 모택동을 만나고 나서 모택동이 중국의 패권을 잡을 것이라고 말한 적 있다. 당시가 국공내전 초기라 중국 공산당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아서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여운형은 지인에게 말하길 약삭빠른 장제스는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고 우직한 농부같은 모택동이 최종적으로 중국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 적 있다. 그런데 모택동이 패권을 잡은 것은 여운형이 사망하고 2년 뒤인 1949년... 예지력 상승.

그가 장제스를 어떻게 보았는지는 1933년 1월호 《신동아》의 인터뷰에도 나와 있다.

질문: (중국에서) 장개석 독재가 실현될까?
답: 장개석 독재는 한마디로 불가능이라고 말합니다. 독재정권이 현하 중국 정세에 적절치 않을 뿐 아니라, 장씨의 세력이 미치는 지방이 강소성, 절강성의 2성과 기타 안휘성, 호북성, 강서성 등, 성의 일부분씩 합하여 전국의 6분의 1에 지나지 못하고, 반(反)장개석 운동이 전국에 편만하였는데 어찌 현실성이 있겠습니까? 만일 장씨가 그 독재정책을 고집한다면 자기와 가까운 동지와 부하까지 떠나버릴 위험성이 있음으로 장씨가 지혜로운 자라면 그 독재의 몽상을 버릴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실패하고 말 것임으로 그 정책은 실현되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1931년 10월에 만주사변이 신문기사에 뜨자 이를 보고 '이제 일본은 틀림없이 패망하고 조선은 독립할 것'이라고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이 중국을 도발하면 자원도 없고 인구도 없는 좁은 섬나라가 중국의 넓은 땅과 많은 인구를 상대하는 것이므로 분산된 군인들이 곳곳에서 장기전을 치르는 소모적인 전투를 하게 될 것이고, 그 와중에 중국 인구 시장을 노리고 있는 서양, 특히 미국이 일본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측근 이만규에게 먼저 그렇게 말했고 일본의 군사부장관에게 전쟁을 그만두고 조선을 독립시키라고 설득했을 때도 이러한 논리를 펼쳤다.

미래인 지금 와서 보면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만주사변이 일어나자마자 이런 예견을 했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상당한 외교적 식견이다. 당시 일본이 워낙 승승장구 하고 있었고 일본 쪽에서도 그렇게 언론플레이를 해대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내에서 일본이 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러니 임정 참여했다가 변절하여 학도병권유 기고문을 뿌린 이광수 같은 인물이 생겼던 것이고...

2.7 인기 많은 호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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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중반, 서상천 체육관 앞에서 찍은 사진.(48세)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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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영상 실록에 등장한 여운형. 챙 넓은 모자에 원형 선글라스를 착용하였다. 해방 직후니까 당시 나이가 60세였다.

무엇보다 그는 잘 생겼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였고 기골이 장대하여 풍채가 우람한데다가 운동을 좋아해서 근육이 장난 아니었다. 유학하던 시절에 80kg의 거구였고 카이젤 수염까지 멋지게 길렀기 때문에 별명이 '터키 청년'이었다고 한다.(그의 카이젤 수염) 만국부인 잡지에서도 여운형의 수염이 호남아의 조건으로 선정된 걸 보면 그의 수염은 유명했던 모양이다.#
수염 관련 일화도 있다. 난징 금릉대학 시절에 카이저 수염을 기르고 학교를 다녔는데 그 때 학생과 교수들이 붙여준 별명이 콧수염 씨(Mr. Moustache). 나중에 운동경기를 하면서 다른 학교에 그가 알려져서 편지가 왔는데 이름을 모르므로 Moustache라는 이름으로 편지가 왔고, 사람들은 그 편지가 여운형에게 오는 줄 알고 편지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외모가 받쳐주는데다가 옷차림에도 매우 신경을 썼는데,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고위급 외교관들이 옷을 맞춘다는 양장점에서 옷을 빼입었고[23] 패션 센스도 뛰어나서 어느 곳이든지(그곳이 일본이라도) 길을 지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가 양복을 빼입고 모자 쓰고 지팡이를 돌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은 흡사 할리우드 중년 배우를 연상하게 했다고 한다. 대화하는 태도에서도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대화를 경청하는 자세가 갖춰 져있고 타인 입장에 서서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능력을 지녀서 심지어 그를 욕하던 사람들도 그와 대화하고 나면 내가 왜 그를 욕하고 다녔을까 하는 후회를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대표적인 사례가 강원룡 목사) 말하자면 한국 근현대사의 몇 안 되는 미중년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와 목욕을 함께한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던 강원룡 목사의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비록 몽양의 노선은 내가 따를 수 없는 다른 길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그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우선 그는 로맨틱한 사람이었고, 한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신언서판(身言書判)에서 모두 뛰어난 남자였다. 나는 그의 외모에도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나 하나만은 아니었던지 그는 정치인으로는 예외적으로 광고모델로도 가끔 등장했다. 어처구니없지만,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렇게 잘 생긴 사람도 썩을까?"하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이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던 만큼, 내가 떠올린 생각도 그런 것이었다. 하도 잘생긴 사람이라 언젠가 한번 그와 얘기를 나누다 어디 못생긴 데가 없나하고 그의 얼굴을 곰곰이 뜯어본 적이 있는데, 자세히 살펴봐도 역시 흠잡을 데 없는 수려한 용모였다. 그의 외모에 대한 나의 열등감이었는지, 나는 결국 작은 흠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은 약간 들어간 콧구멍이었다."

우가키 총독의 사위 야노는 이러한 여운형에게 아주 반해버려서 이런 말을 했었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몽양 여운형 선생과 꼭 결혼했을 것이다. 어떤 수단을 써서든지 여운형 선생과 결혼할 텐데 불행하게도 남자로 태어났다."[24]

남자들이 이렇게 인정했을 정도였으니 그에게 반해버린 여자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미군정사령관 하지의 참모는 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여운형은 한국 정치인 중 타인이 따르지 못할 정치인으로서의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는 누구보다 잘 생겼다. 둘째로, 그는 뛰어난 웅변가다. 셋째로, 그는 강한 감화력과 설득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말과 글 실력도 탁월하였다. 언변에서 당시 신문 환담 코너에서도 말 잘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늘 꼽혔다. 무엇보다 그는 연설하기를 좋아했고 유명인사의 연설사례를 벤치마킹하여 직접 시현하는 데에 능력이 있어서, 흡입력 있고 호소력 있는 언변으로 많은 명언들을 만들었다. (목차에서 '그의 어록'을 참고.) 그의 연설을 모은 연설집까지 출판되었을 정도. 외모가 출중하고 목소리가 우렁차며 활발한 제스처를 사용하여 청중을 빨려들게 하는 능력이 있어서 그가 연설하면 사람들이 왁자하게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의 선동능력은 가히 신기에 가까워서, 기록상으로 그의 선동은 청년시절 한일합방 무렵 이를 비판하는 연설을 한 것이 처음이었지만 일진회 소속 군수를 울게 만들었다... 흠좀무. 스스로 연설에 대한 강박이 있었는지 어느 날에는 꿈속에서 연설하다가 손으로 책상을 탕탕 치고 발을 구르며 "여러분! 여러분은..."을 외쳤더니 침상을 두드리면서 잠꼬대로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글씨도 잘 써서 일제강점기 잡지에서 유명인사의 글씨체를 비교하며 설명하는 코너에 따르면 "그의 글씨체는 창달하며 영어는 더욱 잘 쓰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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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고마신사 방명록에 남긴 친필 "혈농어수(血濃於水:피는 물보다 진하다)")

활발하고 능동적인 성격을 반영하듯 악수에서도 그 기운이(?) 느껴졌는지 동시대 인물인 소설가 이태준악수의 효과를 거론하는 글에서는 '맹인이라도 몽양 선생의 악수는 악수만으로도 몽양일 줄 알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의 영어실력을 말하자면, 필리핀 지역에서 민족과 계급 해방에 대해 역설하면서 1시간 내내 영어로 열변을 토하며 연설했으며, 심지어 하와이언 잉글리시 쪽이었던 이승만보다 영어 발음과 문법이 더 정확했다고 한다. 아니, 영어 말고도 중국어는 당연히 할 줄 알았고 일본어도 할 줄 알았다. 여운형이 일본어를 말하지 않고 통역을 대동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가 일본어를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해방 다음날에 밝혀졌다. 여운형 측근 중 한명의 회고인데, 그날 여운형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죄수들을 풀어주러 갔는데 일본인 간수가 일본이 패망한 줄 알고 울자 여운형은 일본어로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あまり悲しまないで下さい)"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현대 한국인의 눈으로 봐도 파격적일 정도로 개방적이어서 당시 청소년들의 우상이었다. 강원룡 목사는 여운형을 첫째로 자유주의자, 둘째로 민족주의자, 셋째로 사회주의자로 평가한 적이 있는데 스스로 이것이 가장 정확한 평가라고 한 적이 있다. 어쩌면 암울하고 극단적인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너무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행동을 한 것이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갔기 때문에 말년에 불행해졌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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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25년 중국 상하이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앞줄 맨 오른쪽)이 코치로 있던 야구팀이 단체 기념 촬영하는 모습.

그의 개방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가 스포츠인데, YMCA야구단 활동에서부터 시작하여 나이를 먹어서도 스포츠를 매우 좋아했고 다방면의 운동경기에 능하였으며, 스포츠를 적극 장려하는 연설을 하였고 기고문을 냈다. 각종 스포츠 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여 조선 체육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다. 덴마크식 체조를 국내에 처음으로 보급했고, 청년들과 투포환 던지는 경기를 했는데 1등을 했는가 하면, 경기를 나갈까 망설였던 손기정 선수의 출전을 장려하였고, 각종 스포츠 경기의 심판을 했다. 특히 수영을 잘해서 물놀이 하다 물에 빠진 세 사람을 모두 구출한 적도 있다. 그렇게 스포츠계에서 워낙 유명해져서 광복 후 초대 조선체육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25]

40대 후반에 각종 화려하고 무거운 직함을 달고 있어 체면 차릴 법도 한데 철봉운동을 보급한다고 웃통을 벗고 현대철봉운동법이라는 책의 모델이 되어 철봉운동으로 다져진 튼튼한 근육을 보여주었다.관련자료

또한 해방 후 처음으로 맞는 어린이날에 환갑의 나이로 어린이들에게 조선의 미래이므로 잘 자라달라면서 연설단상에서 최경례의 절을 올려 구경하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미소 양측 대표와 함께 참여하는 행사에서 외국 대표들이 어린 아이한테 꽃다발을 받고 관례적으로 인사를 하였으나 그 혼자 꽃다발을 받지 않고 어린아이를 번쩍 들어 안아 청중들에게로 걸어갔고, 청중들은 이를 열렬히 환호하여 남산이 울릴 정도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자유분방함 때문에 유쾌하고 장난기 어린 행동도 많이 했다고 한다. 높은 직함이 있음에도 야구 경기를 관람하면서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고 있으면 양손을 번쩍 들고 왁자하게 응원하거나, 업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을 등에 업고 말 흉내를 내어 말 타기 놀이를 하거나, 새벽 중에 오랜 친구인 야자(也自) 이만규를 만나러 만규 집에 들렀는데 귀신 소리를 내서 만규를 놀라게 하거나, "까꿍 나 여기 있다"# 등등.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숨기는 성격이 아니고 초면인 사람들에게도 너무나 솔직해서, 말하기 좀 민망할 법한 얘기도 그냥 다 털어놓았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 총독부 관련자들이 자신과 면담하기 위해 찾아왔는데 겉으론 태연한 척 했으나 언제 날 죽일지 모르는 상황이라 너무 긴장해서 땀을 많이 흘렸는데 면담 끝나고 소변을 봤더니 오줌이 싯누렇더라는 얘기를 본인이 했고, 생전 처음 보는 기자와 인터뷰하는데 아내를 옆에 두고서 아무것도 모르고 구식결혼 한 것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 이만규라거나 이란 같이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의 사이는 볼 거 못 볼 거 다 보여주는 사이였다. 강원룡 목사가 이만규에게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는데 다 벗은 것도 봤느냐?"고 물었더니 "남자인 내가 봐도 정말 잘생겼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객관적인 지표 측면의 인기로 보자면, 조선에 거주하는 대다수 민중들 입장에서 타지에 멀리 떨어져 있는 독립운동가보다 국내에서 독립운동 및 사회정비운동을 추진했던 여운형에 더 호감이 가는 것이 당연했다. 실로 그의 인기는 높았는데, 해방된 지 얼마 안 되어 발간된 우익 언론지 선구에서 실시한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설문에서 여운형이 33%(1위)를 차지하였다. 2위는 이승만(21%), 3위는 김구(18%). 참고로 당시의 언론지 설문조사 결과가 그렇듯이 일반 민중이라기보다는 글을 읽을 수 있고, 실생활과 무관한 잡지류를 사서 구독할 여건이 되는 이들의 의견이었다. 뭐 그렇다 치더라도 언론지를 읽을 수 있던 지식인들에게 이 정도 지지를 받은 건 흠좀무.

2.8 가족 관계와 가정생활

가정생활은 심히 막장이다. 영웅은 색을 좋아하고 영웅호걸의 아내는 불행하다는 옛 어르신들의 말이 그냥 있는 게 아닌 듯하다. 이하에서는 간략히 나오지만, 여운형의 사생아 문제는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는 떡밥덩어리며, 양파껍질처럼 끝이 없다고 한다. 비판자들 입장에서는 도덕성 문제로 커지지만, 옹호자 측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고, 사생활보다는 공적인 기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실드치기도 한다. 이하의 내용에 대한 판단은 개인이 알아서.

먼저 14살에 집안의 권고에 따라 결혼(조혼)하지만 17세 무렵 아내가 임신 6개월 만에 사망한다. 그 뒤로 일시적으로 어린 기생을 가까이 한 적 있었는데 재미있게 놀고 나니 기분이 찜찜하고 죄책감이 들어서 아버지한테 다 털어놓고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한편 위독한 병중이었던 어머니는 죽기 전에 며느리를 빨리 보고 싶다며 혼사를 정해버렸고 몽양은 19세에 자기보다 1살 많은, 학력이 없는 평범한 여자(진상하氏)와 재혼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뻥이 아니고, 삼천리 제7권 제11호(1935.12.01)에 실린 인터뷰 기사[26]와 여운형 측근의 아들이고 실제 그를 알고 지냈던 이란씨의 회고에 근거해 적어놓은 것이다.

조선 말기에는 여운형도 그렇고 거의 다 집 안에서 혼사를 정해서 멋모르고 구식 결혼을 했는데 애정 없는 결혼생활은 잘 될 턱이 없었다. 인터뷰 내용을 볼 때 여운형은 아무리 당시 시대가 시대였다고 하지만 스스로 연애결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과 앙금이 쌓였던 모양이다. 집을 다녀간 박헌영에게 돈으로 쓰라고 은수저 몰래 준 걸 알아채지 못하고 은수저 어디 갔나, 한참 찾아다니는 아내가 미련하다고 한 얘기에서도 그랬고 내조해주는 아내에게 고맙다 할망정 아내가 순순한 곰같이 행동한 게 미련해보인다고 싫어한 듯하다.

결국 제대로 사고를 쳐 버렸다. 결혼 2년차 21세의 나이에 홀연히 강원도 강릉으로 떠나서 초당의숙의 교사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고, 시국이 안 되니 소학교 교사 때려 치고 평양에 있는 예수회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한 뒤 중국 금릉대학에 입학하고 해서 수년간 아내, 자식 간 사실상 별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하지만 시부모를 모시고 있었던 아내는 자식부양 문제 때문에 더 이상 못 참겠어서 맏아들을 데리고 남편이 있는 상하이로 떠버렸다. 이렇게 해서 몽양이 중국으로 건너 간지 8년 만에 가족이 상봉하게 되었다.

그 후 몽양이 체포되어 조선으로 송환되기 이전까지 상하이에서 2~3년 정도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 여운형은 인터뷰에서 "부부간의 참사랑이란 것도 그때부터야 비로소 알게 되었구려. 또 그곳에서 지금 있는 아이들 넷을 또 낳았지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깨달음이 그렇게 깊지 못했던 모양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가장으로서는 형편없었다. 사방팔방 분주하게 돌아다녔고 적들에게 쫓기다보니 몇날 며칠 집을 안 들어오는 게 일상이었고 아내 진씨는 걱정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이하 인터뷰 중 진씨의 회상.

"...가슴이 타고 하로밤에 검은머리 다 희여지는 듯 속을 썩인 적도 여러 번이지만 상해 있슬 적에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생각은 늘 잊혀 아니집데다. 「바깥어른」이 한창 몸을 피해서 다니시든 철인데 장개석을 반대하는 운동이라든지요. 그런 운동에 주야 불분하고 돌아다니실 때 일인데요. 그래서 며칠에 한 번씩 잠깐 잠깐씩 번개같이 집에 다녀오시고 가시고 하던 철인데 하루는 며칠을 어데 나가시어 집에 라곤 소식조차 알 수 없더니 새벽녘에 들어오셨지요. 매우 초조하고 긴장한 얼굴빛을 지으시면서 "밥을 좀 달라"고 말씀하기에 얼른 진지 상을 차려드렸더니 황겁하게 마구 잡수실 적에 불시에 어디서 나왔는지 총과 칼을 한 무장한 중국 군대들이 휙-몰려와서 포위를 하려들지요. 그때 주인은 얼는 눈치채이고 밥 숟가락을 그냥 던지고선 그냥 날 새게 뒷 담장을 뛰어너머 어대로인지 종적을 감추셨는데 그 뒤 사오일이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으셧구려. 내 마음이 얼마나 탓겠어요. 그럴 때면 나는 밤마다 이슬을 마저 가며 뒷문박에 서서 행여나 오시는 가고 긴긴밤을 서서 새엇지요."

여운형은 이걸 듣고 옆에서 "그런 일도 있었나?"하면서 허허허 웃었고 부인은 "그것뿐이겠어요?"라고 쏘아붙였다.

게다가 여운형은 밥돌이였다. 그가 야자 이만규씨의 집에 오랫동안 기거한 적이 있었는데 만규씨 집에서 그의 별명은 밥 많이 먹는 손님이었다고 한다. 어떤 책에서는 이만규가 소식가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운형이 많이 먹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별명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고 썼으나... 먹성에 대해서는 본인도 인정하였다.

(중략)... 나는 실로 그 때 내 건강이 남부럽잖게 상당했더니 만치, 그리고, 기운이 세여서 중국인 2, 3인을 넘어뜨리고 남을 만했기 때문에 밥 잘 먹기로 또 유명했지요. 한 끼에 여섯 공기, 일곱 공기씩 밥을 먹고도 아무렇지 않았으며, 그 밥 분량이 중국 학생이 먹는 분량의 2배, 3배였으니 유명하지 않을 리가 있나요. - 敎授로 大學生으로 支那 諸大學 時代의 回想, 南京金陵大學 留學時代(呂運亨)

...과장이 아니라면 그저 충공깽.

애초에 체격이 장대하고[27] 쉴 틈 없이 돌아다니는 게 습관인데다가 연설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독립운동이고 뭐고 사실상 밥만 축내고 벌어오는 돈은 형편없는데 애는 계속 만드는 최악의 남편이었다...

몽양이 체포되어 조선으로 송환되고서는 상하이 유학 중인 장남 빼고 온 가족이 거처를 조선의 계동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장남 봉구가 33년에 상하이 복단대학에 재학 중 장티푸스에 걸려 19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했을 당시 여운형은 가출옥 된지 몇 달 안 되어 형기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로 갈 수도 없었고 아버지로서 아무 조처도 할 수 없었다. 차남 홍구는 40년에 일본의 법정대학 예과 2년에 유학중 파상풍으로 사망, 이렇게 해서 장남, 차남을 먼저 떠나보냈다. 먼저 떠난 장남과 차남까지 합하면 진씨 아래로 딸 다섯과 아들 셋이다. 딸 여순구가 42년생 늦둥이로 가족 중 가장 막내고, 본처 외의 여자 사이에서 낳은 자식 둘까지 합하면 실제로 키운 자식만 총 10명이다.

그의 개방적인 성향 때문인지 당시 조선 평균 남자들과 비교해볼 때 여자들과 어울리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던 편이다. 그의 여성관이나 그가 여자를 후렸을 때 사용했을 법한 미사여구를 볼 수 있는 글은 당시 조선 내의 유명 인사들 글을 모은 학해(學海)라는 책에 기고한 《신춘(新春)을 맞이하는 젊은 여성들》이라는 글보러가기(17쪽부터)인데, 이 글은 기본적으로 고등보통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하여 사회에 진출할 여학생들을 상대로 계몽적인 의도로 쓴 글이다. 하지만 아무리 당시 문어체의 수준을 고려한다고 해도 '나의 사랑하는 어린 새들', '귀여운 조선의 어린 새들', '학교의 나무 아래에서 높고 먼 이상에 가슴을 태우며 배회하던 젊은 여인의 맑은 눈동자' 같은 표현에서 그의 성향을 다분히 알 수 있다.

외간 여자와 바람난 적이 있는데, 일단 공식적으로 몽양이 데려온 아들만 따져서 2번이라고 말한다. 첫 번째는 해방될 때까지 주변 사람들끼리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유부남의 몸으로 일본 여자[28]를 만나 36년에 막내아들(붕구)을 낳은 것이다. 그 때문에 해방 이후 좌우 갈등으로 여운형이 대차게 까일 때 저명한 독립운동가가 처자식을 놔두고 일본 여자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다는 얘기가 거대떡밥이 되어 반대편 언론에 두고두고 씹히게 되었다.

2번째는 40년대에 도쿄를 들락날락 했을 적에 일본에서 조선미인이라고 소문난 재일여대생 진옥출과 연애를 한 사건. 차남이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29], 그것도 너무 열애를 한 나머지 임신시켜버려서 옥출이 딸(효기)을 낳자 자신이 책임지고 맡아 키우겠다며 조선에 데리고 가서 애를 아내한테 맡겨버렸다. 그 증언으로 아버지가 여운형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이란씨의 회고에 의하면, 여운형이 재일유학생을 감독한다는 명분으로 도쿄를 수시로 오갈 때 아는 학생들 학비가 필요하다고 광산업을 하는 아버지께 수시로 돈을 부쳐달라고 했다고 한다. 나중에 아버지가 광산이 잘 안되자 광산을 팔고 도쿄로 가려고 여권을 신청했더니 때마침 도쿄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이란씨의 누나가 편지로 밀고하길 선생님께 돈 드려봤자 연애자금 드리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했다고... 여운형 신봉자였던 아버지는 이 글을 읽고 "이것이 무슨 말이냐. 이 위대한 지도자가 연애를 하다니!"하면서 펄쩍 뛰었다고 한다.

여운형은 연애 한 번 못해보고 결혼한 것에 대해 아쉬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성격이 체면 차리는 걸 싫어하는데다가 몸을 가만히 두는 걸 절대 못 견뎌했다. (못 움직이게 가둬놓으면 신경통에 걸렸다.) 그리고 40년대 초 도쿄를 오갔을 때는 여운형 인생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공무 적으로 할 일이 없었던 기간이었다, 이는 일본 정치인, 특히 군부 쪽 생각은 대중국 전쟁으로 확고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여운형의 말을 듣지도 않았기 때문. 말하자면 일본에 체류했던 이 기간은 여운형 인생 처음으로 온, 가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유일한 자유 시간이었고 동료가 광산업을 해서 돈까지 대줬다. 예쁜 여대생도 있다. 설명이 더 必要韓紙?

하지만 여기에서 더 놀라운 건 진옥출과 연애했을 때 여운형은 유부남에 50대 후반이었는데 진옥출은 미혼의 20대 초반 여대생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 사나이들에게 불었던 연애열풍 탓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앞서 이란씨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위대한 지도자가 연애를 한다.'는 사실은 후에 유학생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당시 재일유학생들이 진옥출의 임신 소식을 듣자 그녀가 들락날락한 곳이 여경구(여운형의 오촌조카)의 집이었으므로 여경구를 의심했는데 애 아빠가 여운형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노인한테 아까운 미인을 빼앗겼다며 내심 부러워하면서 투덜거렸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여운형의 이러한 행보는 한국 근대의 연애사와 일맥상통한다, 연애의 사건으로 돌아본 한국 근대사를 조명한 책#을 참조하면 구한말 남성들은 대개 가정의 권유로 바라지 않는 조혼을 한 뒤 성욕에 눈 뜨면 보다 화끈한 연애 대상(좀 더 진전되면 첩으로 들이기도 했지만)으로 기생을 찾았으며, 사회가 근대화 되면서 기생들은 매춘부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면서 수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연애를 권장하는 풍조가 급격히 깔리자 너도 나도(남자라면 신분 고하, 연령을 막론하고 심지어 결혼 여부를 막론하고) 연애에 뛰어 들었다고 한다. 당시 연애 대상은 연애에 개방적인 고보 졸, 대재, 대졸의 신여성(속칭 모던걸)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도 청소년들을 계도하는 성격을 지닌 글에서 "히야까시(ひやかし : '놀리다'라는 뜻의 일본어로 여성에게 수작을 걸거나 하는 것으로 일종의 희롱이라고 볼 수 있다)"행위를 유난히 불건전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행보는 본처인 진씨 입장에서 놓고 본다면 천하에 둘도 없는 웬수이며 당시의 모던 걸 열풍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일반적인 성도덕과는 엇갈리는 것이었다. 그나마 진씨가 이른바 '구식 여인'으로서 자신은 무식쟁이니 잘난 남편의 활동에 대해 그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용히 내조하는 걸 미덕으로 삼아서 그나마 여운형이 무사했지, 그녀가 여운형 어머니같이 드센 여자였으면 집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화려한 편력 때문에 사생활이 비교적 깨끗한 이승만과 비교당하는 식으로 열심히 까이게 되었다.[30]

이렇게 해서 장남 차남이 먼저 떠나버리고 자식농사가 늦어졌는데 교육비를 댈 형편이 못되었다. 게다가 후에는 지속적인 테러위협에 까지 시달리자, 자식들이 죽거나 납치 당할까봐 몇몇 딸들과 막내아들을 북한김일성한테 보냈다. 여운형이 북한에 건너가서 김일성과 대담을 나눌 때 김일성이 자식들을 자신에게 맡기면 다 해결해주겠다고 했다는데 김일성 머리가 보통내기가 아닌 것은 틀림없다.(...) 김일성은 여운형 자식들을 잘 돌봐주었고 모스크바로 유학까지 보내줘서 그들은 고위급 정치인이 되었다. 덕분에 자신들도 권력투쟁에 패배 시 관대한 처분을 받을 거라고 생각한 북한의 다른 권력자들은, 6.25 이후의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처절하게 집안이 멸족 당한다. 어찌 보면 이것도 남한에서 여운형이 평가가 절하된 이유 중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운형 입장에서 자식을 살리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 그런 위협은 이승만 정권 성립하고 6.25 이후의 일이라서, 당시만 해도 지지도 1위를 달리던 여운형이 그런 문제를 걱정할리는 없다.

남동생은 여운홍, 여운일 2명 있었다. 여운홍은 형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국회의원 활동을 했으나 일제 강점기 후반 독립운동에 희망을 잃고 서서히 친일활동으로 선회했다. 때문에 친일인명사전 전쟁협력자 72인 중 한명으로 선정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동생도 있었다고 한다.

자식이 9명으로, 4남 5녀다. 다만 장남과 차남은 병으로 일찍 떠나보냈고, 여운형이 죽을 때까지 7명의 자식이 살아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의 자녀들의 이름은 다 九자 돌림인데, 앞 글자는 모두 새(鳥)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장남 봉구(鳳九 : 봉황), 차남 홍구(鴻九 : 기러기), 3남 영구(鸋九 : 부엉이), 4남 붕구(鵬九 : ), 장녀 난구(鸞九 : 난새-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 차녀 연구(鷰九 : 제비), 3녀 원구(鴛九 : 원앙), 4녀 형구(鶑九 : 꾀꼬리), 5녀 순구(鶉九 : 메추라기)인데 여기에서도 어린이와 청년들을 어린 새들로 생각했던 그 분의 사상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측근들이 진옥출과의 관계로 낳은 아이의 이름은 '효기'라고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출생년도로 볼 때 효기는 여순구인 듯하다.

장녀 난구와 차녀 연구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다닌 걸 보면 공부를 잘 한 듯하다. 난구의 경우 심장병으로 다니던 이화여전을 중퇴했다고 한다. 월북한 난구, 연구는 북한 고위 정치인이 되었고 순구, 붕구도 나름대로 직위가 있는 자리에 있다고 한다. 차녀 연구는 <나의 아버지 여운형>(김영사 출간)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으며, 차녀와 3녀는 남한을 방문하여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고 간 적 있다. 북한에는 약 30여명의 유족이 있다고 추정된다.

2.9 해방 이후

여운형은 해방 되자마자 건국동맹에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발족시키고 보안대를 통해 자체 치안을 유지하는 활약을 하였다. 하지만 8월 말에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리고 경성 지역 내의 송진우 같은 우파가 건준을 불참하였다. 한편 박헌영과 의견이 맞지 않았던 안재홍 등의 민족주의 우파세력이 건준을 이탈하여, 박헌영 계열의 사회주의 세력이 조직을 장악해 건준을 좌경화시켰다. 또한 박헌영은 미군 진주에 앞서 미군들에게 내세울 정부를 만들자며 건준을 정부화한다고 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였다. 따라서 건준을 지도하던 여운형은 사회주의 계열로 인식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이끌었던 조직이 그런 식으로 좌경화되는 것은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여운형 쪽에서는 인공의 탄생에 대해 자궁외 임신이라고 표현했을 정도. 여운형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여운형을 박헌영과 같은 과격한 사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이라기보다는 사회민주주의쪽에 가까웠다고 평하고 있다. 《인민당의 신념》에서 그러한 그의 정치노선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운형은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고 유물론을 신봉할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 마르크스주의를 인정하면서도, 마르크스가 말하는 이상적인 노동자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마르크스주의을 국가에 통용되는 이념으로 내세우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 적 있다. 단 좌익이었던 것은 현대인의 관점에서도 맞다. 근로자와 인민대중의 이해를 대변해야한다고 본인이 말했고 그건 건준 때부터 강령에 써놨으니까. 다만 몽양은 박헌영도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고,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 들은 사상이야 어떻든 정부를 조직하는 데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사회주의 사상가 박헌영을 안고 간 것이었다. 물론 이는 결과적으로 안재홍을 비롯한 우파 측의 이탈을 나아 어떻게 보면 악수로 남았다.

9월에 미군정이 실시되고 나서 상황은 여운형에게 더 불리하게 돌아갔는데,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은 조선인의 정치활동을 인정하지 않고 미군정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선언하였다. 이 때문에 인민공화국은 정부로 인정되지 않은 채 해산되었으며,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다.

또한 미군정 인사들(존 하지도 물론) 한반도 사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우익세력이 결집하여 만든 한민당의 말을 듣고 인민위원회를 사회주의 단체로 인식하여 모두 해체하도록 지시하였고[31], 건준과 인민위원회가 자체적으로 치안을 맡았던 그 자리에 일제강점기 때 경찰들을 80%이상 복귀시켰다. 이 문제로 시행착오를 겪은 미국은 베트남이라크에서 기존 조직을 활용하는가(베트남), 없애는가(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의 2가지를 모두 시험해보지만, 어느 쪽을 선택해도 되레 까였다는 이상한 후일담이 있다. 이는 여운형의 정치적 입지에 큰 타격을 입혔고, 후에 여운형이 수차례 테러를 당하고도 보호받지 못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한편 미군정에서는 비록 사회주의 단체의 수장이라는 직함이 꺼림칙했지만 화려한 전적을 지녔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지닌 여운형을 어떻게든 이용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여운형은 몇몇 부분에서는 미군정에 의존하지 않겠노라고 확실히 선을 그었기 때문에 미군정에게도 외면을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미군정에서는 여운형을 미군정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라고 깠다. 그래서 별명이 'Silver Axe(은도끼)'였는데, 이는 겉으로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이용하려니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쓸모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몽양평전에서는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은으로 만든 도끼로 장작을 패면 은이 물러서 쓸모가 없으니, 언뜻 보기에는 대화가 통하고 영향력이 있으며, 은이라고 할 만한 실력자이기 때문에 미군정이 활용하기 좋아보여도, 실제로는 완고하고 미군정에 비협조적이라서 활용가치가 없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의미였다.

한편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이기도 했는데 조선공산당은 임시정부 추대를 반대하였고 한국독립당의 김구는 임정만이 법통 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며 공산당을 적으로 돌려 여운형과 대립하였다. 그래서 여운형은 건준 부위장이자 온건우파인 안재홍이 떠난 얼마 뒤 건준을 탈퇴했고, 사회주의 계열을 통합한 남조선노동당 대표로 추대된 것에 대해서도 저들이 날 곤란하게 한다고 언짢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에 따로 떨어져서 좌우합작을 위해 근로인민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두 달 뒤에 암살당했다.

하지만 이 까지만 해도 그는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은 정치인이었고 좌우 갈등이 그렇게 표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여운형은 노력만 한다면 미소 양군은 한반도에서 물러나고 38도선이라는 지리적 분단은 해소되어 통일된 정부가 수립될 것이라고 보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2.9.1 신탁통치 오보관련

그 해 12월, 모스크바3상 회의 결과가 동아일보조선일보를 통해 사전오보 되는 초특급 병크가 터졌다. 임시정부 법통 봉대론을 주장하던 김구는 신탁통치 결정 보도를 접하고 격노하여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외치며 반탁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소련에서 돌아온 극좌 정치인 박헌영은 모스크바3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선언을 하여 각자 독선적인 노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조선은 우익반탁 좌익찬탁으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하게 되었으며, 이는 남한의 좌우갈등의 근본이 되었다.



하지만 신탁통치 오보사건은 해당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말 그대로 오보였고, 그 조문만으로도 많은 정치인들이 내용을 오인하였다. 사실 신탁통치의 본질은 통일임시정부 수립에 있었다. 실제로는 이 합의에 대해 미군과 소련이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으므로, 미군 측의 생각이 신탁통치의 방향이라고 보면 까는 게 맞고, 소련 측이라면 두고 보는 게 나은 정도였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송진우는 경교장에서 김구를 만났을 때 아직 3상회의에 대한 보도가 확실히 나오지 않았으므로 반탁운동에 신중을 기해야한다고 자신 소신대로 발언을 했는데, 그 날 한현우한테 암살당했다.



송진우 암살 이후로 좌우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은 박헌영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기 시작했고, 3상회의 정보를 입수한 김규식은 반탁 노선에 반대했다가 지속적으로 테러를 당하게 되었으며, 김구는 지속적으로 반탁 궐기대회를 열었다. 한편 박헌영 또한 여운형에게 협력하지 않고 극단적인 공산주의 혁명을 내세웠다. 여운형은 이렇게 비타협적인 정치인들의 태도에 실망하여 "우리 같은 지도자들이 없었던들 통일은 벌써 되었을 것이다. 조선 지도자들은 1차 시험에서 모두 낙제다."라고 실망이 역력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발언은 2016년 현대까지 결코 깨지지 않는 징크스가 되고 말았다.



한편 미군정은 처음에 한민당의 의견을 듣고 여운형을 멀리 했으나, 대화해보니 의외로 말이 통했고[32][33] 신탁통치에 협조적이어서 미군정의 신뢰를 얻게 된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은도끼 별명에서 보듯이, 금방 신뢰를 잃었지만. 반면 미군정은 반탁을 주장하는 김구에게는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승만은 미군정 입장에서 볼 때도 너무 고집이 센데다가 '부르봉'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귀족주의적인 정치인이었으며, 요구사항이 너무 많아서 써서 점점 미군정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반탁운동을 하는 이승만을 가택연금 시키기도 했다. 하지 중장이 수필 문에서 "싱먼리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하고 싶다."고 서술했을 정도다.

그러나 미군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승만의 의견을 존중했고, 결과적으로는 놀아났다. 뒤늦게 깨달은 시기는 반공포로 석방사건 즈음이니, 한참 후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 국무성의 요구로 실시된 것이 미군정과 찬탁에 협조적인 자세를 취한 여운형, 김규식이 주도했던 좌우합작운동이다. 이 좌우합작운동을 누가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는가는 학자에 따라 의견이 조금씩 갈린다. 이 문서에서는 거의 모든 것을 여운형이 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주로 우익 측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 아래에서 쓰인 칼럼이나 논문에서는 여운형에 대한 언급은 교묘하게 빼고 김규식이 합작운동을 주도한 것처럼 묘사된다.


KBS 미디어 포커스는 2003년 12월 방송에서 동아일보가 모스크바 3상 회의에 관련 국내 언론 중에서 유일하게 이 외신기사를 대서특필한 것처럼 보도하면서 외신 인용 보도가 반탁운동을 격화시켜 결국 남북 분단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주장하였고 일부 학자도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기사가 단독 보도했다고 주장하거나, 심지어 조작해 보도하는 바람에 반탁운동이 거세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 워싱턴에 특파원을 두고 있지 않던 국내 언론들은 외신기사를 전재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실제로 동아일보뿐만 아닌 조선일보도 같은 날 1면 머리에 '신탁통치 설을 배격함'이라는 사설을 싣고 바로 옆에 합동통신 기사를 4단으로 전재했다. 당시 좌익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던 서울신문도 1면에 합동통신의 기사를 받아 2단으로 보도했다. 좌우익 계열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신문에 이 기사가 실린 것이다.

문제가 된 최초로 보도된 기사는 미국의 통신사인 AP와 UP로 알려졌으나 당시 기사 원문은 남아 있지 않다. 동아일보에서 UP의 후신인 UPI 측에 문의한 결과 미국 현지 신문도 당시 UP 기사를 전재해 국내 언론과 같은 내용을 보도한 것으로 확인됐다. 워싱턴 타임스 헤럴드는 1945년 12월 26일자 7면에 UP 기사를 전재한 'May Grant Korea Freedom'이라는 기사를 통해 "미국의 번스 국무장관이 소련의 신탁통치 안을 반대하고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하라는 훈령을 받고 러시아로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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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기관지인 성조 태평양판(일본 도쿄발행)도 1945년 12월 27일 AP, UP 기사를 종합한 기사를 1면에 싣고 문제의 UP 기사와 해당 기자 이름을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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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통치에 대한 반응은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주당의 주도로 광범한 반탁운동이 전개되었고, 공산주의자들도 반탁의 뜻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삼상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는 세력은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찬탁(贊託)으로 나서게 되었다.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련 민정책임자는 조만식을 반동주의자이며 반인민적인 인물이라고 비난하였다.KBS특별기획 한국전쟁 10부작 제2편 전쟁의 시그널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해방공간에서 언론계는 좌익이 기선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일보의 보도가 반탁운동을 격화시켰고, 이 반탁운동이 남북 분단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비논리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2.9.2 좌우합작운동

하지만 좌우합작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운형이 좌우합작 운동을 추진하자 박헌영 계열에서는 여운형을 친미부르주아, 미 제국주의의 허수아비라고 비판하였고, 우파 쪽에선 좌우합작이 조선을 적화시키려는 음모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도 이를 여운형의 실책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물론 양자 모두 근거는 있는데, 박헌영 계열은 자본주의 국가와 손잡는 여운형이 아니꼬운 것이고, 김구, 이승만 계열은 반탁을 주장했으니,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자리의 여운형이 최대의 파벌 모두에게 집중포화를 받은 건 당연지사.

이후 내놓은 좌우합작 7원칙 또한 친일파 처단 문제에서 즉시 처단을 주장했던 박헌영과 뒤로 미룰 것을 주장한 우파 계열에게 공격당했고, 토지 배분 문제에서도 당연히 무상 몰수 무상 분배로 할 것을 주장한 박헌영과 유상 매수 유상 분배를 주장한 우파 계열에게 비판받았다. 분명 유조건 매수 무상 분배라는 안이 그대로 시행되었다면 재정 문제가 심했을 것임은 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즈음 미군정이 이승만에게 멀어지고 여운형을 싸고도는 기색을 보이는 중에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정읍발언을 하면서 한반도 내에 긴장을 고조시켰다. 여운형은 단정 수립을 반대했는데, 미 국무부 또한 분단정부 수립으로 소련이나 중국을 자극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의 정읍발언에 당황하여 여운형으로 하여금 좌우대립 해소를 위한 좌우 합작 운동을 추진하도록 도와주었다. 참고로 미국과 소련 중 어느 쪽이 분단을 원했는지는 영원한 떡밥거리다.

그리고 여운형은 좌우합작에 더해 남북합작을 하기 위해 김구보다 먼저 북에 있는 김일성과 조만식을 만나러 위험을 무릅쓰고 농부로 변장하여 5번이나 북한을 방문하는 등 갖은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김일성과 회담하면서 박헌영이 소련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 것 때문에 그랬다는 사실을 알고 소련 및 남로당과 결별하기로 결심, 남한에 내려와 남로당을 비판하고 미소공위 참여를 위해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여 미군정과 교섭하기로 한다. 그러나 창당 2달 뒤, 여운형은 암살당했다.

다만 여운형 본인이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소속되어 있었고, 1946년 12월 미국이 남조선 과도 입법의회를 창설하고 1947년 남조선 과도 정부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생기자 여운형은 이에 대해 비우호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2.9.3 테러 일지와 암살

여운형이 당한 테러는 정치사에서 전무후무할 정도로 최다 기록 수준이었다.

사실 해방 이전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에도 임정의 본분을 벗어나 개인적인 명예를 추구하고 다닌다는 비판을 받아 괴한의 습격으로 가족들과 함께 구타를 당한 적이 있었다.(그것이 1925년 12월에 일어난 여운형 구타사건)


그리고 해방 이후, 여운형은 우익진영의 테러 1순위가 되었다. 지지자들은 우익이 지지기반이 약했다고 하고, 비판자들은 그저 임정과 대립하면서 사회주의에 지나치게 관대했기 때문에, 다른 운동가들처럼 공격대상이 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인간관계가 좋았고 몸이 건장하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강원룡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송진우를 죽인 암살범인 한현우도 처음에는 여운형을 죽이려고 했다 한다. 만약 이것이 시행되었더라면 송진우보다 여운형이 먼저 죽었겠지만, 탑골공원에서 죽이려고 다가가는데 여운형이 한현우를 알아보고 "어이, 현우군! 오랜만일세."라고 어깨를 툭툭 쳐주며 인사했기 때문에 도저히 죽일 수 없어서 송진우를 먼저 죽였다고 한다.

아래 예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 길 가던 중에 괴한들에게 급격당하여 동생과 함께 구타를 당했다.
  • 괴한들이 신당동에서 납치하여 차에 태워 인근 야산으로 끌고 가서 재갈을 물리고 묶은 다음에 정치활동 그만둔다는 문서에 서명하면 살려주겠다는 협박 했으나 그동안 갈고 닦던 운동 실력(...)으로 괴한들을 때려눕히고 구조요청을 하며 산을 굴러 내려왔다.[34]
  • 벽돌이 날아와 머리를 맞아 기절했다.
  • 괴한들이 그를 집 앞 소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묶었다.
  • 불발 수류탄이 날아왔다.
  • 계동 고택에서 아궁이에 설치되었던 폭탄이 터져서 집 반쪽이 날아갔다. 다행이 출타중이어서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 혜화동 로터리를 차타고 지나가던 중 총격이 빗나갔다. (피살 1달 전에 똑같은 일이 있었다는 뜻이다.)

정확히는 2년간 총 12차례 테러를 당했다. 이런 직접적인 테러뿐만 아니라 협박전화와 편지, 비방 벽보, 심지어 살인을 교사하는 신문 기사(이종형의 대동신문)까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여운형은 5번째 테러를 당했을 적에 "나는 죽어도 이 길을 가겠다."고 말하였고, 아버지를 걱정하는 자식들에게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앞날을 예견하는 듯 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결국 1947년 7월 19일 IOC가입 축하기념으로 동대문운동장에서 한국과 영국의 친선축구경기가 열린 날, 당시 체육부장관이었던 여운형은 경기 참관 전에 옷을 갈아입겠다고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에서 배후를 알 수 없는 청년 한지근에게 두 발의 총탄을 맞아 병원으로 호송 중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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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이 피격절명한 곳)
자료 출처

당시 옆에 앉았던 측근 고경흠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죽기 전에 최후로 내뱉었던 말은 "조국..." 그리고 "조선..."이었으며, 미소를 띤 얼굴로 죽었다고 한다. 테러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의 몸이 된 것에 대한 기쁨의 미소인 것 같다. 이전에 쓴 편지 중에서 좌우합작 운동은 계속할 것이지만 공포에서조차 해방될 수는 없다는 요지의 말이 발견된 바 있다. 당시 입었던 옷이 아직 보관되고 있는데, 핏자국이 선명하고 총이 그야말로 정확히 관통한 흔적이 남아있다.

한편 한지근은 개성형무소에서 복역 중 한국전쟁 중에 행방불명되었다. 일설에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하는데, 한겨레에서 접촉한바 일본에서 살아있다던 사람은 한지근이 아닌 송진우를 암살한 한현우였다.

2.9.3.1 암살배후는?

좌익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설이 일부 우익세력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었다. 이정식 교수의 남로당 배후설, 한국논단이 주장하는 '김일성에 의한 암살 배후설' 등. 한국논단에서 제기하는 근거로 이용하는 것이 박헌영의 비서였던 박갑동의 증언인데, 박갑동에 의하면 김일성이 박헌영을 견제하기 위해 여운형과 손을 잡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여운형의 역량이 박헌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자 이에 실망한 김일성이 여운형에게 자금지원을 중단했다고 한다. 이에 여운형이 김일성을 비난하자 모의내용이 탄로 날 것을 우려한 김일성이 여운형을 제거했다 한다는 주장으로 암살범 한지근을 위장 월남시켜 암살지령을 내렸다는 소리다.

반대로 우익세력이 암살했다는 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몽양을 살해한 한지근이 표면적으로는 극우 인사였으며, 동시에 극우 테러단체 백의사의 일원 한현우와 가까운 사이였기에 제기된 설. 이에 따르면 백의사와 긴밀한 관계였던 김구 혹은 신익희가 배후로 추정된다.

서로 다른 정치 진영에 있던 인사에 대한 테러가 빈번하던 시기이니깐 놀라울 것도 없는 설.

여튼 여운형은 경기 참관 후 미군정의 민정관과 만나 안재홍의 뒤를 이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민정장관(국무총리격) 수락을 논의하는 약속을 예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좌우합작운동의 시점에서는 매우 안타까운 시점의 죽음이었던 셈이다.#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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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영상 실록에서 나온 장례식 당시 현장의 모습을 담은 기록영상. 1분 42초쯤에 나오는 슬프게 우는 사람이 손기정이다. 손기정은 당시에 그의 관을 운구하기도 했다.)


(여운형의 데스마스크)

8월 3일에 열린 여운형 인민 장[35]으로 해방 후 최다 인파가 모였다. 민중들이 슬픔에 동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흰 옷을 입어서 서울 시내가 하얗게 뒤덮였다고 한다.(MBC 뉴스에 나온 영상관련 포스팅) 영상에서 울려퍼진 봉도가(안기영 작곡)는 다음과 같다.

아! 우리의 몽양선생
</br>위대한 지도자 인민의 벗
</br>땅 위에 떨어진 거룩한 피는
</br>여기 인민의 가슴에 뭉쳐있나니
</br>고이 잠드시라 우리의 몽양 선생
</br>우리는 기어코 원수를 갚으오리다[36]

참고로 그날따라 날씨가 굉장히 좋았는데, 관이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갈 무렵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당시 영결식 현장을 전하는 뉴스는 당시 현장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선생은 모든 인민을 버리고 어디로 가셨나이까!
</br>선생께서 흉탄을 맞으시고 쓰러지시는 그 순간,
</br>선생의 최후의 얼굴에는 차마 이 민족을 버리고 가시지 못하시는 영원한 미소와,
</br>그리고 최후의 말씀으로 "조선"
</br>다음 말씀을 더 하시지 못한 채 그만 운명하셨습니다.
</br>그러나 우리는 선생의 다음 말씀을 잘 알 수 있습니다.
</br>나의 최후를 비탄 말고 우리 민족의 명예를 노래하라고.
</br>그리고 어서 행진을 계속 하라, 용감하게 나아가라, 나는 결코 죽지 않았다!
</br>(...) 모두 선생의 영구(靈柩 : 관)앞에 모였습니다. 선생이시여, 필히 안심하시라.

시신 처리과정은 다소 호러인데 여운형이 통일된 조국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남겼으니 통일되면 다시 장사를 지내야할 것이고, 사람들 또한 잘생긴 여운형을 썩히기는 아깝고 계속 보관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시신을 포르말린으로 방부처리하고 철제 관에 넣어 묻었다. 그런데 모 교수님의 얘기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그나마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30년 안에 통일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포르말린 유효기간을 30년 정도로 잡아서 처리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가 죽자 좌우를 연계한 중도 운동, 남북한의 통일 정부 구성 운동은 구심점을 잃었고 그해 12월, 좌우합작위원회는 해체되었다. 김구는 남한 내 단독정부가 거의 기정사실될 무렵에 뒤늦게 통일 운동을 본격화하였고, 여운형의 파트너였던 김규식은 전형적인 학자풍으로 내성적이고 대중적인 정치가가 못되었다. 안재홍은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고 추진력이 그리 강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여운형 이후로는 좌우 및 남북 연대 운동이 이전보다 역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내용을 볼 때는 북한의 통일 의지 문제 또한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중도 세력이 사멸하고 좌파가 크게 탄압받으면서 좌익 측은 소멸 단계에 이르러 무장 게릴라 활동으로까지 전환하였으며, 4.3 사건,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묘소는 현재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4.19 혁명 열사들이 묻힌 국립 4.19민주묘지(강북구 수유동)에서 멀지 않은 솔밭공원 근린에 위치해있다. 몽양 사후 심지어 생가였던 계동 고택도 보존이 되지 못하고 도로확장 계획으로 1980년대에 헐려버렸다.

한 때 5.16 군사정변 직후 우이동 묘소 땅이 어느 군인에게 불하받게 되어 시신이 오갈 데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인 적이 있었는데,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의원이 법적으로 어떻게 해볼 길이 없으니 대통령 박정희한테 직접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그 분 사상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면서 좋게 해결해주었다고 한다. 그가 일제강점기 당시 여운형과 반대 입장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일이다.

사실 이는 박정희와 평소 친분이 있었던 남로당 사람들이 여운형과 가까웠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이 한 몫 했다. 무엇보다 그의 형 박상희는 조선중앙일보 구미 지부에서 활동했고 일제 말 조선건국동맹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시지부를 개설하였으며 민주주의민족전선 활동을 할 정도로 여운형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심지어 박정희도 건국동맹 '비밀요원'으로 활동을 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단 확실한 증거는 없다.) 해방 직후 여운형과 함께 정치활동을 했던 청년들 중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이 많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경상도 출신이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부의 원천은 농지였기 때문에, 안동지역 빼고 농지가 거의 없었던 경상도는 특권층이라 할 수 있는 지주계층이 약했고 사회주의 활동이 굉장히 활발하였다. 심지어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는 별명까지 있었다. 여운형에 대한 경상도의 지지도는 어느 지역보다도 높아서 여운형이 대구 달성공원에서 근로인민당을 선전하는 연설을 했을 때 당시 달성공원이 인파로 꽉 찼고 연설에 반해버린 청년들이 대거 당에 입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창당된 지 몇 달 안 되어 여운형이 암살되어 근민당은 사실상 해체된다. 안습.

이렇게 하여 이승만 정권 때 금지되었던 여운형 추모제가 박정희 정권 때 들어서야 다시 열릴 수 있었다. 단, 박정희가 반공을 정책노선으로 강조하면서부터 추모제가 금지되었고 제5공화국 때인 1983년부터 다시 추모행사를 했다. 재일 작가 정경모는 이를 놓고 정부에서 여운형을 이용하려는 게 아니냐고 비난했다.

이러면서도 군사정권 때는 묻히기도 했다. 1982년 '한민성'이라는 저자가 '추적 여운형'이라는 단행본을 발간했는데, 이 책은 정보당국에 고용된 익명의 필자로 저자가 실존인물인지 자체가 불명이다. 이 책의 구성을 보면 여운형에게 어떤 정치적 이미지를 고정하려는 목적(예를 들어, 그를 '친일파-기회주의자-공산주의자로 강하게 부각, 왜곡)으로 다른 잡다한 언설로 시종일관하고 있어, 사실에 관한 논의를 마녀사냥 식 사상논쟁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가 아주 강한 내용이었다. 오늘날 여운형에 대해 '친일파-공산주의자-기회주의자'로 몰고 가려는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저 책을 출처로 삼고 있다고 보면 된다. 딱 오늘날로 치자면, 조갑제닷컴에서 '김대중의 정체'같은 책을 발간한 거라고 보면 되겠다. 1948년 7월 19일에 여운형 1주기 추모식이 있었는데, 여기서 경찰들이 추도식 현장에 나타나 집회자 90여명 검거하는 등 추모를 못하게 방해공작등 엄청나게 벌였다.# 이는 단독정부 수립 때부터 그에 대해 얼마나 철저히 금기시 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어느 정도 재평가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운형이 본격적으로 복권된 때는 노무현 대통령 집권 시기였다. 노무현은 이전부터 사회주의 계열 인사라도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면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국가보훈처에서 학계의 의견을 참조해서 사회주의/좌익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훈포장을 진행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른게 여운형이었다.[37] 다만 이때도 보수우파 계열 특히 조중동에서 국가정체성을 훼손한다는 식의 비판을 가했다.[38] 이런 과정을 거쳐서 여운형은 200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대통령장은 2급이어서 공적에 비해 너무 낮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노무현은 건국훈장에 등급이 있다는 걸 몰랐고 그냥 보훈처에서 잘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맡겼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 몰랐다며 1급으로 올리도록 노력해보겠다고 했다 한다. 그렇게 해서 노무현 퇴임 직전에 들어서야 간신히 건국훈장 1급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어 정치적으로 완전히 복권되었다.

현재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가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기념사업회 홈페이지

그리고 우연의 일치지만 여운형이 피습 사망한 7월 19일은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사망한 날짜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높으신 분들 중에는 같은 날 국립서울현충원묘지에서 이승만을, 우이동 묘소에서 여운형을 추모하게 되는 일도 생긴다고 한다. 운명의 장난인가.

양평에서는 생가 복원 사업을 추진하여 현재 몽양기념관을 통해 입장 가능하다.

4 친일 떡밥

결론부터 도출하자면 이미 여운형은 친일파가 아니라고 결론 났다.

2009년 후반부에 여운형이 학도병 지원을 권유했다는 주장(이라고 쓰고 떡밥이라고 읽는)이 제기되어 언론들끼리 물고 뜯고 싸운 적이 있다.(#1, #2). '여운형 친일 의혹 론'이 객관적으로 처음 제기되었던 게 1980년대 친일파 연구권위자인 임종국선생이 처음이었다. 당시 임종국 경우, '했다고 하면 지나친 지적이 아닐까?'라면서 '어쨌든 한건 한 거다'이런 식으로 제기한 정도다. 이에 대해 직접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해명에 나섰다.역사비평 출판사, <바로 잡아야할 우리역사 37장면> 위의 기사에 나와 있 이에 대해서 여운형은 명의도용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친일 의혹설과 반론에 대해서는 《몽양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지음, 서울대출판부 출간)책(p465~p482)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정병준 교수가 쓴 단행본(1995년), 위키 백과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러한 사설이 나온 것이 얼마 뒤 나올 친일인명사전을 노린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도 존재한다.

그리고 2009년 11월 초,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자 뉴데일리를 비롯한 일부극우는 목록 안에 박정희는 있고 여운형이 없다는 사실을 빌미로 친일인명사전과 그 편찬위원회를 공격하고 있다.

기사가 나오자, 일부 수꼴 세력들은 '여운형은 친일파' → '여운형은 좌파' 이렇게 몰아가면서 '친일좌빨'이라는 억지스러운 3단 논법을 세우며 일방적으로 몰아가면서 '골수 친일 좌빨 여운형은 건국훈장을 치탈하라'라고 꾸준히 제기하고 있다. 이는 네이버나 다음, 이글루스 등등 여러 블로그에서 금방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여운형이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뒷받침이 되는 증언자들이 어째 대부분 하나 같이 친일파 & 한국민주당 출신들이라는 거... 이들은 여운형이 살아생전에 '악질 친일파'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해방 전이나 이후의 여운형은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많은 지도자였다. 그들은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여운형을 어떻게든 까대는데 혈안이었다. 이들은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뒤집어씌우고 자신들을 '애국자', '반공투사'로 물 타기 식으로 띄우고... 그 외에 일부에서 '공산당 노획문서'를 근거로 들고 있는데, 이 문서는 언제 작성되었는지도 시기불명이다. 딱 잘라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개인을 까대는 글에 불과한 글이다. 참고

일제말기 국내에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1943년부터 계획하던 걸 직접 실천에 옮겨 1944년 8월에 건국동맹 같은 비밀 지하운동 결성하고 활동하면서 독립운동한 지도자는 여운형 밖에 없었다. 국내에서 사실상 마지막 독립운동으로 운위되는 것이 1930년대 말 박헌영이 활동한 경성콤그룹 정도밖에 없었다. 경성콤그룹은 1941년 즈음가면서 와해된다. 국내에 남았던 '우파'세력 가운데 총독부로부터 가장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던 인물은 안재홍정도였다. 일제말기 당시 좌파고 우파고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이 총독부로부터 저항하는 방법이 칩거생활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만큼 일제말기는 엄청 살벌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수구 진영에서는 '순정우파' 노선을 지향한 안재홍 조차도 '빨갱이'로 몰고, 그를 여운형과 같이 친일행위 벌였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런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인 안재홍 조차도 일제 말 지하조직을 결성할 생각조차 하지도 못하고 칩거생활 지내면서 역사서 저술하고 지냈으니... 1944년이면 당시 국내에 독립운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4분 40초부터 볼 것.)

그리고 여운형이 친일파라는 주장에 대해서 의문점이 가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사료가 많다. 예를 들어서, 딱 2가지만 들어보기로 한다.

1945년 미군이 입성했을 때 미군정 고문으로 위촉된 9명의 한국민주당 인사들이 '여운형은 친일좌빨' 드립치면서 1945년 9월 12일, 미군이 한반도 입성하자마자 작성한 보고서에 '여운형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친일파이며 총독부로부터 2천만 엔 금전수수를 했다.'라는 내용의 보고서 내용이 있다. 그러나 1946년 8월 미군정 버치 중위 장교가 '일본에 건너가 前조선총독부 고관들을 심문해서 여운형의 친일혐의를 수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사령관 존 하지에게 제안했었는데, 사령관 하지는 '일리 있는 말이다. 나는 그(여운형)의 약점을 잡고 싶다.'면서 찰스 오리오단 미군정 외무부 소속의 소령을 일본으로 조사단을 보내 과거 총독부 고관출신 인사들 찾아가 '여운형이 친일파냐?' 여부에 대해 조사를 했다. 그 결과 1947년 3월, 미군정 보고서 결과에는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The result of the investigation of Lyuh's Japanese connections in Japan by Charles 0'Riordan was negative. Not a scrap of supporting evidence. Most of the people 0'Riordan interviewed seemed amazed that any question had come up. They considered him one of the outstanding Korean patriots. Robinson.

찰스 오리오단에 의한 일본에서 시행한 여운형의 친일 관계에 대한 조사 결과는 '아니오'였습니다. 한 조각의 증거도 없었습니다. 오리오단이 인터뷰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의문이 나온 점에 대해 놀라했습니다. 그들은 그(여운형)를 한국의 애국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 중 한 명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로빈슨(미군정 대령).#

그리고 1949년 반민특위 조사에서 친일 자본가 박흥식의 조사과정에서 '여운형이 각종친일단체에 가입했다'는 소리를 한 것을 근거로 일부에서는 '여운형이 친일파'근거로 주장하는데, 이는 명백한 헛소리다. 반민특위를 '망민법'이라고 까대다가 체포된 악질 친일파 이종형 조사 문서에는 '그는 ≪大東新聞≫ 사장으로 앉아 큰소리를 첬고 故 呂運亨 先生이 學兵 勸誘를 했다는 거짓말을 大書特筆하여 덤벼들었고'라는 문장이 있다. 실제 이종형은 해방 후 자신이 운영하던 '대동신문'에 여운형의 전향 문을 그대로 실었을 뿐만 아니라 이종형 자신이 친일 시 한편을 짓고, 그것이 여운형이 직접 지은 것이라고 소개까지 했다.#이종형에 대한 자세한 행적 그리고 오늘날 일부에서는 이걸 근거로 여운형이 친일파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들의 개념이 얼마나 병크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여기서 '학병권유 유세를 했다는 거짓말을 대서특필하여 덤벼들었고..'라는 문장은 1946년 2월 10일 대동신문 2면에 실린 동판 기사와 1946년 2월 17일,18일에 쓴 기사를 말한다. 여기에 1948년 김승학이 펴낸 '친일파 군상'에서도 '新聞記者(주로 京日) 會見 等에서 是非를 드러내지 않고 큰 支障이 없을 程度의 技術的 談話 發表를 한 것이 紙上에는 自己 意思와 다르게 發表되었으나 訂正을 要求할 수 없어서 그대로 放任한 者. 例) 呂運亨, 安在鴻 等.' 문장이 나와 있다. 즉 여운형은 친일행위자가 아님이 1947년 미군정 보고서 조사와 1949년 반민특위 조사로 통해 끝난 떡밥이었던 거다.

2009년 11월 , 조선일보동아일보 등 보수 우익세력에서 민족문제연구소에 여운형이 친일파 명단에 실리지 않았음을 '정치사상의 형평성' 문제를 근거로 항의하였다. 사실 이것도 헛소리다. 친일인명사전 내용을 보면 공산당 핵심 간부가운데 한명이었던 안준 이라던가 강영석(이쪽은 독립유공자까지 받았다),주련, 김한경등 수록되어있고, 북한에서 고위 장관을 역임한 총독부 중추원출신 장헌근, 북한에서 언론인으로 지낸 김정제, 박팔양, 북한에서 농림부 장관을 맡은 인정식 등등 여러 좌파계열 친일파들이 수록되었다.

보수 언론들은 "민간단체(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은 그렇다 치더라도 국가 기관(친일진상규명위를 말함)의 '친일파' 평가에 대해서 후손들은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한다. 또 공정하게 평가했다고 하더라도 여운형 등 좌익 사회주의계열은 어디에도 없다.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라고 친일진상규명위에 항의했다.

이에 친일진상규명위에서 여운형의 친일행위를 조사했었다. 친일진상규명위위원장은 "여운형의 친일 자료는 단 1건이 있었지만,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동맹(농민동맹과 건국동맹)을 만들어 활동을 했고, 이를 11명의 위원들이 논의해 (보고서에 명단을 넣지 않는) 결론을 내렸다."고 입장을 밝혔다. 참고로 친일 진상규명위는 우익계열의 학자들과 심지어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자세한 자료 그리고 친일인명사전에서는 '반일 후 친일은 기록하지만 친일 후 반일은 다른 문제다'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일부는 여운형이 총독부로부터 1910년대의 토지헌납을 하사받았다는 문서가지고 또 물고 늘어지기도 한다. 여운형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건 1910년대 중후반이고, 일제 합병 직전 까지만 하더라도 적지 않은 조선의 식자층이 일본을 모델로 삼고 있었으니 여운형의 경력과 연대기 내에서 생각하면 논리 자체가 안 맞는다. 토지 868평을 총독부에 헌납하고 목배(木杯)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은 그 앞에 오는 문장 다이쇼(大正)2년 5월 도로부지로서 토지를 기부하고 그 증표로 목배를 하사받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친일을 해서 토지를 기부한 것이 아니고, 당시 총독부의 도시계획에 따라 해당 땅을 징발하면서 기부형식으로 받고 그 형식적인 감사의 표시로 목배 같은 것을 주었던 것이지, 여운형이 무슨 친일을 해서 기부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여운형 집안 소유의 땅을 강제 징발한 것을 그렇게 표시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얘기다. 더구나 대정4년이면 1915년인데, 이때 여운형은 일생의 동지인 조동호와 중국 난징 금릉대학교에 유학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즉, 친일 측을 주장하는 쪽은 진위성도 불분명한 사료들만 제시한 것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한국논단 경우가 있다. 이쪽은 아예 지어내는 소리를 막 남발하고 있다. 또한, 그에 반박하는 쪽은 보수 쪽의 사학자들도 대거 포함하고 있으며 반박의 논점과 참고하는 사료 또한 폭넓다. 대표적인 인물이 국사편찬위원회에 몸담고 있는 정병준 교수와 이정식 교수, 이현희 교수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이정식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을 재평가해야한다'는 등 이승만을 열렬 찬양하는 대표적인 우파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심지어 조갑제조차도 '박정희가 여운형계열 건국동맹에서 활동했다!' 이런 글 쓴 게 엄청 많다. 이런데도, 수구진영에서 '여운형은 친일파'라느니 주장하는 이들의 개념은? 전문적으로 사료 들고 입씨름 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수사학적 측면에서만 봐도 친일 쪽의 주장은 그 반대에 비하면 미약하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가 있다.

아무튼 이 떡밥은 학계에서 끝난 지 오래된 떡밥이다. 여운형이 '친일파'라고 규정지으려면 적어도 2가지 자료가 제시되어야 한다. 하나는 1940 ~ 1945년 기간 동안 중국 난징에 가서 왕정위나 천공보, 저우포하이등의 난징괴뢰정부 고위인사들을 만나서 중일전쟁 화평공작을 했다는 자료와, 그 협력의 대가로 반대급부를 무엇을 얻었는지에 대한 자료, 이 두 가지를 말이다. 신한청년당 시절 여운형의 밑에 있던 이광수나 장덕수만 해도 일제는 이들을 극대화로 이용했다. 또한, 이들의 친일행적 역시 엄청나다. 여운형 밑에 일했던 이들이 이정도로 친일행적을 남겼는데, 신한청년당 당수였던 여운형이라면 이광수, 장덕수하고는 비교조차도 안 될 정도의 규모로 엄청나게 이용했을 거다. 그런데, 폄훼론자들이 제기하는 주장들은 거의 '무슨 학병 권유 문 썼다!'라거나 '무슨 어용단체에 가입했다!'라거나 이런 주장들이 전부다. 한마디로 웃긴 말이다. 일제말기 일제는 모든 분야에 발악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지사들 명의를 막 도용해서 각종 단체에 그냥 집어넣고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무렵 여운형은 1942년 ~ 1943년경부터 항일단체 결성에 준비하고 있었고, 1944년에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는 흔적이 굉장히 뚜렷하다. 뭘 더 설명이 필요한가?

5 지도자로서의 평가

"통일 임시정부의 수상 후보는 여운형이다." - 46년 3월 소련 정보보고서
"그는 당대 조선인들이 감당할 수 없었던 민주주의자였다." - 47년 주한미군총영사 윌리엄 랭던
"미 국무성은 여운형을 당시 해방 이후 조선에서 인기 있고 유능한 지도자로 봤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 리처드 로빈슨, 해방 후 조선에서 미군정관리로 근무

개요에서 말했듯 그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엇갈리지만, 양심적 지도자이면서도 당대 정치 선동가로 꼽히긴 했어도 당시 상황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한다. 여운형은 박헌영같이 체계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이승만 같이 한민당 같은 든든한 빽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방 직후 한국 정치 상황은 극단 세력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또한 무자비했기 때문에, 권모술수와 당략에 익숙해야 1인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그런 면에서 엄청난 재능과 무서운 추진력을 발휘했고, 당시 조선사람들도 이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당시 설문조사에 따라 가장 이상적인 내각을 구성한 것에 따르면, 대통령 이승만, 외무부장관 여운형, 내무부장관 김구, 노동부장관 박헌영, 군사부장관 김일성이었다. 목록을 보면 각 정치인들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39] 그런데 그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남들과 타협하여 남들 말에 따라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고 해서 자신의 성향을 확실히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지독히 냉정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고, 이상주의자였던 김구 등과는 극한 대립을 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의 이상은 그저 자기 말이 옳으니 모두가 따를 거라고 생각한 어린애 같은 생각이라고 일축하는 비판도 있다. 김구는 이상주의자였지만, 그 실현을 위해 무장투쟁을 한 반면, 그는 국내에서 언론 위주의 활동을 벌이며 일본 조선 모두에게 존중받은 독립 운동의 경험의 차이가 컸으리라.

실제로 김용기 장로[40]는 그에게 "믿음을 확실히 하고(여운형은 기독교인이다) 정치를 그만 두든지, 정치를 하려면 좌든 우든 명확히 하라"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는 그 말을 듣지 않아서 죽음을 맞았다고 말하였다. 사실 여운형도 좌우합작이 안 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 스스로도 정치에 손 떼고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는데, 그게 생각대로 안 된다고 강원룡 목사에게 털어놓은 적 있다. 게다가 여운형 성격이 애초에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적대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란씨는, 그의 태도나 능력으로 볼 때 그는 대통령도 아니고 사회주의 지도자도 아니요, 요즘과 같은 부자 세상에서 스테이크 썰고 외국인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는 것에 적합한 사람이므로 태평성대나 이보단 못해도 국내 활동을 할 거면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척되어 극심한 갈등이 어느 정도 해소된 사회에서 태어났어야할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단번에 파악하는데 뛰어난 센스를 지녔고 상대방에게 자신이 원하는 사항을 단 하나도 숨김없이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그들을 수긍시키는 데에 남다른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외교관이 적합한 것 같다고 했다. 여운형과 로마넨코의 회담록

비록 대통령감은 못되더라도, 그는 사상을 뛰어넘어 중도적 실용의 좋은 모델로 평가받아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참고로 현재 진보진영은 여운형 및 조봉암, 장건상과 더불어 진보진영의 기원을 찾으려 한다. 사회민주주의의 오래된 미래라고 평하며 그밖에 다재다능하며 소통을 중시하고 현실주의적 감각을 지닌 여운형이 위인이 될 것이라고 평가하는 중이다. 남한과 북한에서 동시에 존경받는 유일한 정치인이라는 말도 있는데, "남한에서는 색깔론, 북한에서는 자기 사상에 끼워 맞추는 괴이쩍은 평가 기준"이 있어서... 이건 비단 여운형만이 아니라 모든 정치인이 평가받을 때 겪을 수밖에 없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라 하겠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인민 본위의 정치를 옹호하였으나 권력을 잡지 못하였고, 좌우 양쪽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쑨원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중국어 논문 중에 여운형과 손중산을 비교 연구한 논문도 있다.

6 주요 어록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권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는 것을 한국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국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세계는 약소민족해방, 부인해방, 노동자해방 등 세계 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도쿄 제국 호텔 연설 중에서).
원래 조선은 일본의 침략이 없으면[41] 하등 위협이 없다. 설혹 어떤 불행이 있다손 치더라도 국가의 실력은 족히 외타(外他)의 보호를 의뢰치 않고 자립하여 발전할 것이다. 열대의 초목을 한 대에 옮겨 유리창 수증기 속에서 억지로 그 생명을 유지한다고 하자. 그것은 벌써 생명의 가치와 의미를 잃은 것이다. 자연 공기 속에서 우로(雨露)의 혜택을 받을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없으니, 차라리 한풍냉설 속에 십사일생(十死一生)의 곤란을 받아가며 사는 것이, 타인의 보호를 받아 자기생존의 의의를 잃고 구차하게 기생적 생활을 하는 데 비하여 어느 것이 즐겁겠는가?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엄정중립을 지킨다. 우리가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미국도 소련도 방해를 하지 않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이지 어떤 이론이 아니다. 이념은 자주통일이 되고 난 뒤에 그때 가서 인민에게 물어서 택하면 된다.
우리가 미소공동위원회를 환영하는 것은 배외적 노예근성에서가 아니고 우리 문화민족이 연합국과 어깨를 같이 하려는 국제적 협조정신에서입니다. 우리가 덕수궁 석조전에 전하여 둘말은 우리의 옷은 우리 몸에 맞도록 하여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독립도 모든 생활상의 곤란도 우리 정부가 수립되는 데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독립을 완성하려면 땅의 남북과 사상의 좌우를 가릴 필요가 어디 있는가? 과거의 지하 운동 시대를 생각해 보자. 어두컴컴한 감방에서 더듬더듬 걷다가 탁 부딪힌 후에 "너는 누구냐?"고 묻고 보면 "나는 공산주의자다." "나는 민주주의자다." 말하며 껴안고 어쩔 줄을 모르던 혁명투사들 간에는 민주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현실에 맞지 않는 이상은 공상이 되고, 이상이 없는 현실은 사물에 불과한 것이다. 정치를 논하는 자는 반드시 실제적 세밀을 필요로 하는 것이요, 공상적 개괄을 허하지 않는다.
나는 연합군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즉 만났으니 "하우 두 유 두(How do you do)"라고 인사할 것이고, 둘째 번에는 "땡큐(Thank you)"라고 감사의 뜻을 표해야할 것이고, 셋째로는 "굿 바이(Good bye)"가 있을 뿐이다. 절대로 멀리서 온 연합군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또 잘 모르는 국내사정을 호소 의뢰해서도 안 된다.[42] 외래세력 의뢰심은 우리의 결점의 하나였다. 사대주의와 배외(拜外)사상은 절대로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분열해 있는 것은 소위 지도자뿐이요, 민중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주인은 민중인데 주인의 심부름꾼인 지도자들이 주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분열만 일삼으면 주인이 쫓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왕년에 필리핀에 갈 때 여객선 항해 실에 들어가서 나침반을 자세히 구경한 일이 있소. 파도가 심한 밤이었는데 나침반을 보니 북쪽을 가리키고 있어야 할 바늘이 쉴 새 없이 움직이더란 말이오. 그때 내가 크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소. 정작 움직인 것은 나침반이 아니라 파도에 흔들리는 배였소. 배가 전 후 좌우로 움직이니까 북쪽을 고수하기 위해 나침반이 쉴 새 없이 움직이더군.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더러 왜 변덕이 죽 끓듯 하는가하고 손가락질하는 모양이나, 만일 배가 요동하는데 나침반이 계속 한곳에 멈춰 있다면 그 바늘은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게 되고 마오. 지금 파도처럼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오히려 나는 내 노선을 일관되게 고수하기 위해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이오. 바로 이러한 이치로 내가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것이오.
참다운 민주주의란 근로대중의 복지실현에 있다. 민주주의 가면을 쓰고 민중을 우롱하는 파쇼권력은 그 위선과 가면을 폭로시켜야 한다.
벌거벗은 나사렛 예수의 골고다 희생정신을 부활시키지 않으면 조선 기독교의 존재는 사회에 해독만 줄 것이다.[43]
의리를 지키려면 불리할 때에 지키는 것이다. 유리할 때에는 의리를 말하고 불리할 때는 배반하는 것은 불가하다.
조선 사람을 죽일 수는 있지만 조선 민족은 없애지는 못한다. 조선 인민은 친일주구 몇 놈 때문에 일시적 치욕을 당하고 있으나 우리 인민은 영웅들을 무수히 낳고 우리 힘으로 치욕을 씻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진리다. 나의 목을 일초에 벨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천만 명의 혼까지도 죽일 수는 없을 것이고 나의 마음까지를 벨 수는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다른 길이 없다. 죽어도 이 길을 가야 한다.(5번째 테러를 당하고 나서)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평하든지 거기에 대해 기뻐하거나 노여워할 필요가 없다. 내가 정당한 사람이면 사람들이 나를 악평해도 내가 정당할 것이요, 내가 참으로 정당치 못한 사람이면 사람들이 나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찬양할지라도 사실은 내가 훌륭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내 사람 됨됨이에 대해 참으로 알고자 한다면 나를 평하는 그 사람의 사람됨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라. 나 자신의 정당성 여부가 문제이지 참새 떼들의 입방아는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조선민족 해방의 날은 왔다. 우리 민족해방의 첫 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에 아프고 쓰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하여 이 땅을 참으로 합리적인 이상적 낙원으로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1945년 8월 16일 휘문중학교, 여운형의 연설 중에서)
만일 자기의 주장만을 고집하여 독선배타적으로 임한다면 민족통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며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리 역사위에 천추의 한을 남기는 일이 된다. 재난이 참기 어려운 때는 그 끝장도 가깝다고 했다.
겁쟁이들이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말려들 수 있는 대담성이 있어야 통일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민족통일의 대도를 위해서라면 정치적으로 먹고 먹히는 것쯤은 별문제가 안 된다. 작은 이익을 버리고 큰 이익, 민족적 이익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미 늙었다. 그러니 나는 너희들에게 부탁한다. 이미 썩은 기둥을 너희들의 손으로 뽑아 버리고 조선의 소나무를 정성껏 다듬어 청년들이 바라는 새 조선의 집을 지어라. 모든 영예, 모든 직위가 청년들의 것이니 내 한 줌 거름이 되어 조선의 소나무를 살찌운들 무슨 한이 있으랴.
때려눕히는 자는 힘이 세지만 일어서는 자는 더 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억센 풀대는 거센 바람 앞에서 알아본다.
죽는 것이 무서워서야 어떻게 내가 반일(反日)을 하겠는가. 이 길에서 이미 많은 조선 사람들이 생명을 바쳤거늘, 앞으로도 독립이 이룩될 때까지 민족의 넋을 지켜 죽은 사람들이 끝없이 늘어갈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서 지도자라고 떠드는 사람들은 남더러 이리 가라 저리가라 손가락질만 하구 있어. 그나마 그릇된 방향으로 마치 수탉이 세차게 싸우노라 돌진해 나가다가 서로 방향감각을 잃고 저만치 빗나가버리는 것과 같거든. 몸소 사람들 선두에 서서 살 길을 찾아 내달리는 지도자, 바로 그런 지도자가 필요하단 말이오.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한없이 추운 겨울날 밤 싸늘한 독방에서 모진 잠이 깨어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근방에서 들려오는 몇 줄기 닭의 울음소리는 고적한 심정에 다시없는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어느 집 새벽닭이 울면 이웃 닭이 따라 우는 것은 닭 하나하나가 울 때를 기다렸다가 때가 되어서 우는 것이오. 남이 운다고 우는 것이 아니다. 때가 와서 생존권이 양심으로 발작(發作)된 것이 한국의 독립운동이요. 결코 민족자결주의에 도취한 것이 아니다(…) 담 너머로 은은히 흘러오는 그 계명(鷄鳴)은 우리 조선이 암흑에서 광명의 길을 맞이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예고로 들렸다. 그래서 닭 울음소리가 들리면 힘이 나곤 했다.
범은 산을 두려워하지 않고 물고기는 깊은 물을 무서워하지 않아. 머리를 짓눌리느니 차라리 다리를 꺾이는 편이 낫지.
나는 지식계급에 득죄할지언정 결단코 노동대중에게는 득죄하고 싶지 않습니다. (건준집행위원 격려연설에서)
이제 당장 해방의 날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고대하던 그 날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어, 불씨에서 산불이 난다는 말이 있지 않나. 우리는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지만 대하의 흐름에 합세해 나가세.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다면 빙산을 만나 조난당한 배가 구조를 호소하는 SOS의 소리와 같이 각자의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으리라. 어떤 사람들처럼 제 일신의 이익이나 한 가정의 안락만을 생각지 말고 우리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고 희망하는 바를 성실히 생각하며 실현할 의욕과 정열을 가져야 한다.
잘 싸워라, 싸워서 꼭 이겨라. 이 나라는 어두워도 가슴속에는 광명을 안아라. 역사는 공정하게 심판할 것이다.[44]

너무 엄친아 포스가 넘쳐흐른다...

7 관련 서적

《여운형 평전1 - 중국, 일본에서 펼친 독립운동》(강덕상 지음/김광열 옮김, 역사비평사 출간)

중국, 일본에서 펼친 독립운동 부분이 두꺼운 책 한 권이다. 여운형의 삶을 유례없이 치밀한 사료 조사(옛날 신문에 여운형 이름 나온 기사는 죄다 긁어모은 듯하다. 정확히 말하면 신문만...)를 통해 추적한 점에서 후덜덜한 책. 서술 태도도 다른 여운형 관련 서적에 비해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어 연구용으로 적합하다는 평가가 있다.
저자가 재일 동포이며, 전 3권 기획에 현재(2009년 11월) 2권까지 일본에서 출판 되었으나 한국에서는 무소식이다. 출판사 측 말로는 일본에서 완결이 되는 즉시 번역, 판매할 계획이라고 한다.

《몽양여운형전집 1,2,3》(몽양여운형전집발간위원회 지음, 한울아카데미 출간)

서간문, 기고문, 선전문, 연설문, 정치 강령, 판결문, 기사, 장례식추도문, 여운형에 대해 연구 논문 등 여운형과 관련된 글을 죄다 실은 책. 여운형 성격이 김구같이 꼼꼼한 학자풍이 아니어서 일기 같이 혼자서 글을 따로 써둔 게 거의 없기 때문에 기초 사료의 성격으로 볼 때 이 책이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자료도 사실 부족한 게, 여운형이 일본 등지에서 연설하고 모임 다니던 것을 생각하면 사진이라거나 영상 자료, 글 자료가 턱없이 모자란 편이라고 한다. 원문을 그대로 싣다보니 한자가 너무 많고 옛날 말이 많아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이 단점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은 절판되었다는 것이다. 도서관 열람을 권한다. 단 1권 부분의 연설문, 기고문은 범우 출판사에서 나온 《조선독립의 당위성(외)》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었다. 어려운 한자 투 말들을 알기 쉽게 한글로 바꿔놓았다.

《몽양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지음, 서울대출판부 출간)

두께가 사람을 압도하는 책이라, 방대한 양만큼 내용이 많지만 저자가 여운형에 대한 빠심으로 여운형을 밀어붙인 나머지 객관성이 떨어져서 곳곳에서 까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디씨에서도 애널서킹(…)이라고 까인 적이 있고 일부 블로그에서도 진시황 후손 운운하는 판타지스러운 찬양을 한다고 까였다. 역시 빠가 까를 만든다. 자료도 객관적인 자료보다는 개인적으로 흥미를 가지고 본 자료를 발췌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란(독립유공자)씨와 인터뷰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책은 이 책이 유일하다. 여운형의 현대적 의미를 성찰하는 부분도 독특한 부분이다.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상당히 엇갈리는 책으로 볼 수 있는데, 객관적인 측면을 더 중시하는 사람은 이 책을 보고 연구를 빙자해 빠심을 발산한다고 비판할 수 있고 주관적인 측면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다.

《혈농어수(血濃於水) 상,중,하》(강준식 지음, 아름다운책 출간)

90년도에 한길사에서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적과 동지》라는 소설을 여운형 사망 60주기를 앞두고 여운형이 고마신사 방명록에 남긴 친필 혈농어수(피는 물보다 진하다)를 제목으로 삼아 3권으로 묶어 출간한 정치소설이다. 분량을 보니 묶는 과정에서 많은 내용을 잘라냈다. 하지만 그동안 새로 발굴된 사료에 근거해 내용을 추가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고마신사 방명록의 "혈농어수" 부분이라거나 성깔있는 진옥출에게 낚이는 과정(...)은 적과 동지에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혈농어수 필체가 발견된 건 2004년이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을 중심인물로 설정해두고 일제말기부터 여운형 암살 직후까지 당시 상황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여운형의 삶을 조명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권력을 둘러싼 암투, 비운의 민족 역사를 다루는 것이 주요 테마이다. 하지만 소설이라는 점에서 강단 사학자에서는 참고 자료로 취급된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암울한 편이고 애국적 민족주의 성격이 강해서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분위기가 난다. 특히 일본과 미군정에 대한 음모론적 요소가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애초에 출판사가 처음으로 상업성을 노리고 출간한 책이었기 때문에 목차의 제목들이 상당히 도발적이고, 내용도 좀 심각하게 거시기하다. 야한 장면이 심심할 무렵에 나타난다. 상권 초반부터 일경이 조선여자를 성고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생각보다 빨리 자백해서(...) 흥미가 적다는 평도 있다. 야한 장면에는 대부분은 작중 가상 인물인 홍사공과 엮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박인 부분은 유부남 여운형이 여대생 진옥출에게 낚여서 그녀가 딸을 낳을 때까지 열애하게 되는 부분인데, 역설적이게도 다른 야한 장면은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인물 주도로 이루어져서 다 뻥이지만 이 부분만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몰라 뭐야 이거 무서워

그런데 이런 자극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생각만큼 안 팔리자 몇 달 안 되어 깔끔하게 관광타고 절판 크리 먹었고 얼마 전에 다시 내놓았다. 역사왜곡 소설이라고 재미도 없고 감흥도 없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정국이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성격을 요약하자면 삼국지 (feat. 한반도)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근데 이 책도 남다른 가치가 있는 게, 작가의 주관이 일정부분 개입되어있고 떡밥성이 있어서 욕을 먹긴 하지만 자료조사 측면에서는 감히 이 작가의 덕력을 따라갈 수가 없다. 소설을 쓰기 위해 몇 년간 여운형의 행로를 추적하여 일본도 가고 중국도 가서 갖가지 조사를 하고 지인들 말도 수집하고 다녔다고 한다. 작가의 엄청난 덕력과 개근성에 경의를 표하자. 심지어 여운형을 연구하는 공식 학계에마저 영향을 미칠 수준의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기까지 했다. 흠좀무.

단 아쉬운 점이라면 여운형이 태어난 뒤부터 조선 광복 이전 기간, 즉 여운형이 독립운동가로 한창 잘 활약하던 기간에 대한 서술이 미약하고 엄청 대충대충 넘어 간다는 것. 그래서 내용은 해방 직전부터 여운형이 암살당할 때까지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여운형이 어떻게 좌우 틈바구니 사이에서 처참하게 몰락해 가는지 처절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여러모로 현시창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취향에 따라서 분노가 치밀어오를 수도 있는 편향적인 묘사도 포함되어있다. 아무래도 여운형이 중심인물이다 보니 주인공 보정으로 인해 극좌나 극우 세력에 대해 대체로 좋게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그래도 여운형의 한계를 지적하는 등 나름대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편이다. 김구에 대해서는 애매한 입장을 보이지만 송진우에 대해서는 로대로 긍정적으로 묘사한 편이고, 박헌영이 밉상으로(라고 쓰고 얀데레같이) 나온다. 박헌영 측근인 이승엽이 여운형을 음해하는 데에 앞장서는 걸로 부각시켰고, 이승만이야 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다만, 이 소설에서도 은근히 이승만이 여운형 암살을 종용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은 드라마 서울1945 와 비슷하다. 그리고 고하 송진우 암살범인 한현우가 친일파와 내통했다는 식으로 나온 걸 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진옥출이 무정의 연안 독립동맹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와세다 대학 출신인 재일 유학생 허갑과 만나 결혼했으나 허갑이 일본에서 보낸 밀정이라고 총 쏴서 SALHAE하는 참극이 일어났다는 내용도 여기서 나왔다. 이 소식을 듣고 이만규가 성질 있는 여자라면서 은근히 여운형을 놀리는 대목도 나온다.(...)

참고로, 저자 강준식은 현재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이다.

《(산하어린이155) 나뉘면 넘어지고 합하면 반드시 일어난다 - 몽양 여운형》(전상봉 글. 이상권 그림, 도서출판 산하 출간)

어린이 위인전. 2009년 11월 16일에 초판을 발행했다. 기념사업회 추천 도서라는데 단순한 어린이 위인전을 초월해서 여운형 위인전 중에서 실증적인 고증에 가장 충실하며 삽화 또한 질이 좋고 고증도 훌륭하다(대표적으로 여운형이 암살당한 부분 삽화). 구성도 특이한데, 서두에는 해방의 그 날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그 다음에는 여운형의 생애를 순차적으로 서술한뒤 결말에서 딸 여연구가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러 온 이야기가 나온다. 부록으로 기념사업회에서 제공한 사진 자료도 실려 있다. 여운형을 알고 싶은데 두꺼운 평전이 부담스럽다면 입문 격으로 읽어볼만한 책이다.

《나의 아버지 여운형》(여연구 지음, 신준영 편집, 김영사 출간)
여운형의 차녀이자 북한고위급 정치인인 여연구가 저술한 아버지 일대기. 주요 특징이라면 공인이 아닌 개인, 아버지로서의 여운형을 조명한다는 점이 있다. 이 때문에 재미있는 일화들도 간간이 섞여있다. 철봉운동을 하다가 떨어져서 다리를 삐었는데 밤새도록 얼음찜질을 해주었다거나, 언니의 코트를 물려 입는 게 못마땅하여 코트를 안 입고 학교에 갔더니 아버지가 그날 코트를 사준다고 귓속말을 해주고서 그 다음날에 언니 것보다 더 예쁜 코트를 사주셨고, 그걸 안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바가지를 긁었다는 등의 일화가 있다. 딸을 지극히 아끼는 대목들을 보면 딸내미바보 속성이 있었는지도(…) 한편 여연구 여사의 공적 지위나 성장환경 상 자신을 키워준 김일성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곤란하게 만들고 김일성 라이벌이었던 박헌영, 미국, 이승만은 그야말로 가루가 되도록 까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김구도 제법 까인다. 이거만 보면 김구가 듣보잡 일 거 같은 비중이긴 한데. 무려 이 책은 여운형이 쇼와 천황과 만나서 조선독립에 대해서 설파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45] 흠좀무

《여운형 투쟁사》(이만규 지음)
여운형의 평생 동료인 이만규가 지은 책으로, 여운형 환갑잔치 때 여운형에게 원고를 헌정하기도 하였다. 1946년에 총문각에서 출간되었고, 1947년에 민주문화사에서 《여운형선생투쟁사》라는 이름으로 재발간 되었다. 객관성은 의심되나 지인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여운형 평전》(이기형 지음, 실천문학사 출간)
원로시인인 이기형 시인이 저술한 평전. 사실 평전이라기보다는 인물 사나 회고록 성격이 강하다. 여운형 생애에 대한 웬만한 자료는 다 있다.

《여운형을 말한다》(이정식·최상용·조영건 외 지음, 이규현 펴냄, 아름다운책 출간)
몽양학술심포지엄 논문자료집.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가 지난 2007년 7월 19일 몽양 선생 사망 60주기를 기념하여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가진 몽양추모학술심포지엄의 결과물을 수록한 것이다. 논문 뒤에 몽양 여운형의 생각과 행적을 보여주는 글과 자료들을 연도별로 실어 연구자들의 참고자료가 되도록 했다.

《여운형 평전》(김삼웅지음, 채륜 출간)
전 독립기념관장과 김대중, 노무현, 함석헌, 이승만, 조봉암,김원봉 등의 평전을 쓴 김삼웅씨가 쓴 책이다. 2015년 7월20일에 나온 평전으로써 굉장히 최근에 나온 책이고 기존에 나온 여운형 관련 책들의 핵심적인 부분을 잘 인용했고 요약했다.

8 드라마에서의 등장

드라마 새벽, 여명의 그날 제1공화국, 야인시대, 서울 1945에서 등장한다.
KBS에서 주로 박병호[46]가 여운형 전문배우였다. 머리 벗겨진것도 그렇고 의외로 비슷하게 생겼다.

SBS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김윤형[47]이 맡았다. 건준에서의 활동과 좌우합작 운동 등이 그대로 나오나 이로 인해 김두한의 테러의 표적이 되고 마는 비운을 겪는다. 그러나 김두한의 소행임을 확신한 워태커 소령이 사진을 들고 와서 증언을 얻어내려 하였음에도 민족의 지도자라는 내가 철없는 젊은이들을 고발하겠느냐며 일부러 모르겠다고 증언하는 대인배스러운 모습도 보인다.

서울 1945에서는 신구[48]가 역할을 맡았다.

9 관련 인물

  • 이승만 : 해방 후에 라이벌이 되지만, 여운형과 이승만은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같이 활동한적 있었다. 심지어 이승만과 찬송가를 합창한 모습까지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성격차이, 활동무대 차이로 인해 친해질 수가 없었다. 특히 이승만과 안창호는 다툼이 심하였을 때 여운형은 안창호를 따랐고, 이승만은 자기 비서가 여운형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비서에게 안창호 똘마니와 어울려 다니지 말라는 식으로 꾸중했다고 한다.
  • 안창호 : 여운형은 청년 시절에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비록 출신지역이 달랐지만,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 여운형은 안창호를 따랐으며 도산이 국내에 압송된 뒤 옥바라지를 하였고 가출옥되자 마중을 나가고 도산이 죽을 때 까지 함께했다.
  • 조만식 : 여운형과 함께 안창호를 옥바라지 하였고,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했다.
  • 김규식 : 상해시절에 여운형과 만나고 형님 아우님 하는 절친한 사이였으며,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된 만큼 빠져서는 곤란하다. 여운형처럼 개조파 입장에 섰다가 임정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다만 여운형은 야구경기 구경하다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된 후 국내 활동을 하였고, 김규식은 체포되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다시 들어와 활동했다는 점에서 갈리게 되었다. 해방 후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하였고, 여운형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한다.
  • 장건상 :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으나 귀국 후, 임정을 탈퇴하고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가담한 이래 여운형과 정치활동을 같이 했다. 사로당 창당과 근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근로인민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여운형 사후 근민당 총수가 됐다. 남북협상 때는 김구, 김규식에게 수반급이니 북행은 위험하다며 만류하기도 했다. 남북협상 중 우리가 근로인민당 활동을 하는 것은 다 같이 행복하게 잘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폭력노선을 추종하려는 게 아니라며 항의했다가 연금되기도 했다. 김두봉, 박헌영, 홍명희와의 인연으로 겨우 풀려나 귀환했다.
  • 조동호, 이만규 : 여운형과 조동호는 중국으로 유학가기 전에 개성에 있는 이만규의 집에 머물렀는데 이 때 셋은 서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였고 평생 친구가 되었다. 이만규는 국어 학자이자 교육자로 여운형, 조동호와의 만남을 도원3결에 빗대었으며 <<여운형 선생 투쟁사>>를 저술하기도 했고, 국내에서 국어와 고전역사 부분 연구 활동을 주로 하였고 해방 후 근로인민당 조직위원장이 되기도 했다. 한편 조동호는 여운형과 평생을 가까이 한 동지로 금릉대학(다만 영문학과가 아닌 중문학과), 상해 임시정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민주주의 민족전선, 근로인민당의 루트를 거쳤다. 여운형 암살 이후로 이만규는 북으로 건너가 1급 사회과학 고전 연구사가 되었고, 조동호는 정계를 은퇴하고 낙향하였다.
  • 조봉암 : 여운형이 상해 협화서국에서 일할 적에 그의 집에 찾아가서 조선공산당이 제 3 인터내셔널의 승인을 얻어야하니 모스크바로 가는 여권을 교부해 달라 부탁했던 적 있고, 이것이 1차 조선공산당 사건과 맞물려 물의를 일으켜 여운형이 국내에 압송된 계기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가 출소 했을 때 여운형은 서대문 형무소로 마중 나갔고, 조봉암은 남로당,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 활동하고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는 등 여운형과 밀접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박헌영 비판 서한이 우익 측의 선전용으로 사용되자 우익으로 전향하여 남한 단독선거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실상 여운형의 정치적 후계자인데, 좋은 평을 받느냐 하면 그건 좀 아니다.
  • 박헌영 : 여운형과 더불어 고려공산당 멤버였고, 국내 공산주의 활동을 하면서 여운형 집에 들러 여운형이 준 은수저를 받아가는 등 여운형과 친분이 있었으나 여운형이 공산당활동을 민족해방의 수단으로 받아들였다면 박헌영은 철저한 공산주의 이론가로, 해방 후에도 공산혁명을 고집하면서 여운형과 노선을 달리하여 좌우합작에 반대하고 라이벌이 되었다. 강준식의 소설에서는 좌우합작 운동을 하는 여운형을 납치해 좌우합작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나 여운형이 말을 듣지 않고 서로 대판 싸우고, 부하들을 시켜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버리는 장면도 나온다. 이러니 숙청당하지
  • 고경흠 : 조선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였고 여운형이 40년도에 일본을 방문했을 적에 비서역할을 했다. 해방 후 박헌영 중심의 3당 합당 개편과 남로당을 비판하고 근로인민당에 참여하였으며 여운형의 경호원, 최측근역할을 하였다. 여운형이 한지근에게 암살당했을 때 바로 옆에 타고 있었다. 월북하여 고위정치인이 되었으나 종파사건 때 숙청되었다.
  • 이기형 : 해방 후 여운형을 찾아가 그와 가까이 지냈다. 타칭 여운형의 비서. 하지만 시인은 비서가 아니라 그저 좋아서 따라다녔을 뿐이라고 말씀하신다. 여운형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여운형 평전을 저술하였고, 여운형 생가 터 비문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92세인 2005년 열 번째 시집인 '절정의 노래'를 썼으며, 2013년 6월 13일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이란 : 여운형의 제자라고 하는데, 맞긴 맞는데 정확하게는 아버지 이임수씨가 여운형과 친분이 있었다. 이임수는 관동의원을 개업하는 한편, 텅스텐 광산을 운영하면서 여운형과 여운형을 따르는 재일 조선인유학생들을 금전적으로 지원해줬다고 한다. 여운형은 관동의원 2층에서 이란의 동창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강연을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란은 동창생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서 3년간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 손치웅 : 학생시절에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청취하여 일본의 패전 상황을 여운형에게 보고하였고, 여운형의 밀서를 들고 평양에 가서 조만식에게 전달해주기도 하였다. 이만규의 《여운형투쟁사》에서 손웅이라고 표기되어있다. 자세한 인터뷰 내용
  • 여운홍 : 여운형의 친동생으로 미국유학 후 김규식을 따라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했으나 실패,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임정에 참여한다. 그뒤 형이 체포되어 송환되자 귀국, 장사와 식당 지배인 등으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는다.

그뒤 건국동맹, 건준에 참여하고 미군정 진주 때는 건준과 여운형의 대리인으로 하지 사령관을 면담, 거절당했다. 그 뒤 조봉암이 조선공산당을 탈당하여 박헌영의 영향에 치명타를 줄때, 그는 근로인민당을 탈당하여 여운형의 영향력에 타격을 주기도 했다. 후에 자유당에 입당했다가 민주공화당으로 이동했다.

  1. 여운형은 2005년에 대통령장을, 2008년에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
  2. 기독교적 휴머니즘에 기반을 둔 중도 좌익적 성향의 여운형의 사상을 잘 드러내는 말이라 볼 수 있다.
  3. 한지근이라는 19세 소년에게 죽기 직전 단말마처럼 내뱉은 최후의 유언
  4. 실제로 중앙선 신원역 근처에 몽양선생의 생가가 있으며 향하는 길에 있는 굴다리엔 몽양선생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5. 원래는 친했으나 후에 알력이 생김.
  6. 일종의 산림지주.
  7. 이는 송시열이 주장한 소중화 사상과 태평천국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8. 사실 여운형은 어머니를 더 닮았다.
  9. 7촌 숙부로 혁신 유학, 양명학 신봉자.
  10. 현재로 치면 통신기술자 정도.
  11. 이후로 그는 평생 술 담배를 멀리하였다.
  12. 조선인 신도 수 100만을 유치할 목적으로 개최된 행사
  13. 그 중에는 이승만도 있었다.
  14. 영화 YMCA 야구단의 그 야구단 맞다.
  15. 105인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
  16. 철기 이범석 장군도 한강에서 여운형을 만난 덕에 중국으로 유학갈 수 있었다.
  17. 당시 월급 70원은 요즘으로 치면 약 300만원 정도.
  18. 이는 열차에서 여운형을 인터뷰한 김을한의 수기에 나와 있다.
  19. 현재의 중앙일보와는 관련 없는 신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항목 2. 참조.
  20. 사실 이런 경우는 약산 김원봉도 해당됐는데 약산의 경우 잡히지 않은 것뿐이다.
  21. 당시의 영향력과는 무관했다고 하며, 그저 관대한 처분을 해줄 상대를 고른 것이다. 그리고 위의 이력에서 보다시피, 여운형은 당시 지도자 중에서 일본인과도 대화를 하는 축에 속했다.
  22. 금성 출판사판 근현대사 교과서 표지에서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은 여운형에 의해 석방된 서대문형무소의 정치범(독립운동가)들이다.
  23. 그럴 돈이 어디서 났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몽양 평전에서는 사실 옷을 살 돈이 없었는데 양장점 하는 친구가 돈 안 받고 그냥 대줬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비판자들에게는 믿거나 말거나 수준.
  24. 출처는 《한국 현대사의 라이벌》 중 "여운형과 이승만" 부분
  25. 그런데 홈페이지에 올려진 그의 프로필을 보면 1914년 경남 금릉대에서 중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난징(南京)의 오류.
  26. 제목은 夫婦座談會:二十年만에 新婚 氣分나신다는 呂運亨氏 夫妻. 물론 예나지금이나 기사제목은 낚시를 위한 떡밥이다.
  27. 상하이 시절 그의 몸무게가 80kg이었다.
  28. 옹호하는 측에서는 기생이라는 설을 들고, 우파 측이나 일본 측 자료에서는 미인계 차원에서 일본에서 보낸 밀정이라는 설도 나오곤 한다.
  29. 이것도 패륜적이라고 대차게 까였다.
  30. 이승만도 임영신 전 중앙대 총장과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긴 하다. 독신이던 이승만이 유학생 임영신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하고 이후 프란체스카와 결혼했다는 썰, 둘이 모종의 관계였으나 결혼까진 가지 못했다는 썰,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이후에 임영신이 고백했으나 이승만이 거절했다는 썰 등등 자료에 따라서 이야기가 다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이승만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만한 이유는 없다. 그냥 잘안풀린 남녀관계 정도. 반면에 여운형은 누가 봐도 여자관계는 막장이라서.(..)
  31. 이미 박헌영에 의해 좌경화되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32. 미군정은 영어를 잘하는 이들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 군정장관 하지 중장 이하 군정청 간부의 상당수는 아시아 특히 한반도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야전군인들이었다. 애초에 2차대전 때부터 미국 정부의 최대 관심사는 전후 일본의 처리였고, 한반도에 대해선 아무것도 준비해둔게 없었다. 따라서 미 국무부나 미군 내에 조선어를 할 수 있는 지역전문가들이 거의 없었고, 소련과 38선을 기준으로한 분할점령이 급하게 결정되자, 가장 가까운 야전부대가 서울에 입성해서 미군정청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원활한 통치를 위해서 영어가 되는 엘리트 들을 급하게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김규식, 여운형, 이승만, 서재필 등이 미군정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때문에 이들 운동가들은 영어 실력으로 최대한 미군정에 어필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알다시피 최후의 승자는 이승만이다. 그외에 김구가 처음부터 미군정과 삐걱된 것도 언어 문제가 영향이 있다.
  33. 군정청 간부들은 단순한 영어구사 능력뿐 아니라 가급적이면 자신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미국 유학 경력의 개신교 신자들을 뚜렷하게 선호하였다. 이러면서 그전까지 무명이었던 인사들이 미국 유학 경력을 내세워서 통역, 고문 등의 직함을 달고 미군정청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기도 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하 적산물자 불하 과정등에 개입하면서 큰 재산을 축재하기도 했다. 해방공간과 1950년대를 거치면서 개신교가 급성장한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34. 갈비뼈 골절로 몇달 간 요양. 야인시대에서는 이 사건이 김두한과 백의사의 행위로 나온다.
  35. 정부 수립이전이었고, 미군정이 국장을 치러 줄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인민 장'으로 불리는 것이며, 정부 수립 이후로는 이 용어를 쓸 일이 없다. 본래는 '국민장'이며 김구 사후에는 국민장이란 명칭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36. 만약 여운형을 죽인 쪽이 이승만 세력이었다면 민중들은 4.19혁명으로 원수를 갚아버린 셈이 된다. 이를 의식한 것인지 4.19혁명 끝난 뒤 치러진 여운형 선생 추모 봉도가의 가사는 '원수를 갚으오리다'에서 '뜻을 이루오리다'로 바뀌었다. 그런데 여운형 암살은 백의사의 소행으로, 훗날 장덕수 암살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가까스로 풀려난 신일준은 한지근의 변호료를 대주는 등 여운형 암살에도 많이 관련되었다.
  37. 일제강점기 시대 좌익계열의 대표인사이면 박헌영이지만, 박헌영은 월북후 북한 정권에 참여해서 6.25 남침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그외에도 한국전쟁 시기에 북한정권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일체 제외되었다. 반면에 1930년대부터 소련에서만 머물렀던 박헌영의 첫번째 부인 주세죽은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38. 그러나 이후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에서도 사회주의/좌익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복권과 훈포장은 알음알음 진행되고 있다.
  39. 단, 당시 설문조사 대상은 38도선이남 한정.
  40. 그는 여운형이 설립한 광동학교 학생이었고, 후에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하여 농업 사회 발전에 공헌을 하여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
  41. 그는 소련, 중국, 미국 등에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다만 다들 알다시피 이들 국가들도 조선의 식민지화에 관심이 있었거나 방관한 것을 감안하면...
  42. 그러나 여운형을 포함해서 이 말을 지킨 국내 운동가는 하나도 없다고 봐도 된다. 최종적인 승리자인 김일성과 이승만도 결국 이들의 협조 내지는 방관 하에서 자리를 굳혔다.
  43. 기독교에서 터지는 부패사건 관련 기사에 요즘도 가끔씩 댓글로 달리는 말이기도 한다.
  44. 조선체육회 회장으로서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환송파티를 열어주었을때, 선수들의 등을 두드려주며 한 말.
  45. 뿐만 아니라 김일성이 축지법그몸으로?을 쓴다는 내용도 나와서 읽는 이에게 충격과 공포를 심어주기도 한다!!!
  46. 떼루아의 강회장이자 태현실씨 전남편 야구선수로 알면 심히 골룸하다
  47. 같은 작가가 쓴 드라마 태조왕건에서는 신라 말의 반란군 우두머리였던 기훤 역으로 나왔다.
  48. 나름 멋있고 닮게 나왔다. 극중에서도 엄친아 포스가 넘쳐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