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

廉想涉
(1897년 8월 30일 ~ 1963년 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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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소설가. 엄성섭이랑은 관계 없다. 종교는 원래는 불교였으나 후에 천주교개종해서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는 횡보(橫步)인데 횡보란 호를 가지게 된 데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항상 술에 취해 횡으로 걸어다녔기 때문이고, 둘째는 괴이한 행동들을 많이 해서 횡보라는 호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당골초이기도 해서 하루에 담배를 피우는 데만 라이터 2개를 쓴 적도 있다고 한다......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성좌. 당대 시대 상을 이 작가만큼 세밀하게 다룬 작가는 드물다. 비견될 수 있는 사람은 박태원 정도. 염상섭이 이후에 황석영으로 이어질 리얼리즘 소설의 한 계열을 열어젖힌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심지어 지금도, 평단의 보수적 인사가 현실 천착 소설 부족을 평할 때 그렇지 않은 전범으로 염두에 두는 것이 대개 이 작가이다.

드물게도 서울 출신의 작가이기 때문에, 염상섭의 작품에는 당대의 표준어가 잘나타나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언어적 측면에서도 가치가 높다.

표본실의 청개구리라는 자연주의 작품으로 문단에 데뷔. 하지만 이 작품은 청개구리 해부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집필한 것이라 고증이 어긋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청개구리 해부는 서술자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한 장면이므로 크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그리고 정말 재미가 없다

이후에 현실을 상당히 잘 담아내는, 지나치게 어두운 작품들을 많이 썼다. 밝은 분위기의 작품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 그 작품들 중 '삼대'는 한국 현대 최초의 가정 소설이라는 데서 의의가 있다.[1]

또한, 해방 이후에는 해방의 기쁨과 감격을 그린 소설 해방의 아들을 발표하였으며 영어가 득세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양과자갑, 인공치하 서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취우 3편 연작이 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서민들에게서 일본의 존재를 대신한 미국을 나타낸 얼룩진 시대 풍경이라는 작품을 썼다.

사실 그의 작품들 전부가 한없이 어둡기만 한 이유에는 그가 특정한 독자층을 노리고 그런 소설을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아무튼 문학계에서는 여러 가지로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지나치게 어둡고 내용도 어렵다는 특징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독자들도 여럿 있다.

서라벌예술대학에서 한 자리를 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김동인의 단편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서 문란한 성생활 끝에 결혼을 했지만 아내가 불륜을 저질러 자식을 낳았다는 주인공의 모델이라는 추측이 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2 생애

서울의 개명한, 즉 신식 문물에 밝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엔 드물게도 조혼을 하지 않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결국 30대까지 총각이었다. 지금도 30대까지 결혼을 못하면 그리 좋은 눈으로는 안 보는데, 그 때 시각에서 보자면 천연기념물에 가깝다. 생가는 종로구 체부동 인근으로 추정된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수료한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제 2부속 중학교를 졸업하고 게이오기주쿠대학 문과에 입학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 게이오기주쿠대학이라면 와세다대학과 비슷할 정도로 엘리트 대학이었다. 하지만 1918년 병으로 자퇴한다.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 유학생 학우회가 주도한 도쿄 독립선언 사건이 있은 뒤, 염상섭 단독으로(...) 오사카 텐노지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계획적으로 진행 됐던 도쿄 독립선언서와는 달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발표한다.

결국 경찰에 잡히긴 하는데, 그때 당시엔 독립선언을 불법으로 할 법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체포 이유는 쓰레기(즉, 전단지)불법투기(...) 그래서 재판을 받았는데 판사가 염상섭을 꽤 귀여워했다고 한다. 덧붙여 간수도....... 출옥할 때 간수와 기념사진도 찍었다고 한다. 그 기록은 일본 오사카 아사히 신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후, 이런 일이 이슈가 되어 귀국 후 동아일보 1기 특채 정치부 기자로 일한다.

동아일보 기자와 작가 생활을 하다가 일제 말엽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붓을 꺾고 만주로 건너가 사업가로 성공한다.(....)

그런 이유로 친일 문학가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아무래도 찝찝한 것은 사실. 개연성 수준까지 가면 찜찜한 부분이 너무 많다. 일본이 만주 지역에서 대조선인용으로 찍어낸 기관지 만몽일보와 이후 만몽일보와 간도일보가 합쳐져서 발행된 신문 만선일보의 편집자 겸 주필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때 같이 이름을 올린 인물이 이 시기에는 이미 1급 친일파 소리를 듣고 있던 육당 최남선, KAPF 활동으로 유명한 홍양명, 1910년대에는 잡지 학지광을 통해서 총독부가 감찰을 하였으나 20년대에는 총독부가 끼니 걱정까지 해줄 정도로 변한 진학문 등이다. 이에 대해서는 만주에서 순한글로 문학 활동 한다는 점에서 망명문학 운운하는 이들까지 존재했지만, 그 실체는 만주국 설치 과정에서 만주지역 한인들을 대상으로 일본에서 자본금까지 출자한 명실상부한 어용지. 1920년대 이미 친일로 전향해서 일제 총독부에서 자금지원까지 받은 진학문이 최남선과 손잡으면서 창건한 잡지 동명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동명이나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총독부의 강요와 그로 인한 자금 압박으로 무너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편집부에 일본인들이나 확실한 친일파들이 참여하였고 진국문과 당시 총독부 사이에서 자금 지원이 오간 기록, 최남선이 사이토 총독 측근인 아베에게 보낸 편지 등이 남아있는 등 택도 없는 이야기이다. 역시 만선일보와 함께 명백한 친일의 증거는 아니지만 상당한 수준의 친일 개연성이기 때문에 여기 참여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모두 친일 의혹이 존재한다.

8.15 광복 후 만주의 재산을 정리해서 돌아온후 해방 정국에서 문학 단체에 일한 경력으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신세가 되고 이후 6.25 전쟁 당시에는 피난 생활을 하였다.[2]. 6.25 전쟁 당시에 소설가 이무영, 윤백남과 함께 해군 정훈장교로 복무하였다. 전후 1954년에는 예술원회원에 선임되고, 서라벌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여담인데 6.25 전쟁 이후 경제적으로 좀 어려운 면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전쟁 직후라 그런 점도 있지만 죽을때까지 월셋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천주교 묘지에 있다. 종로 교보문고 광화문점 앞에 그를 기념하는 등신대 동상이 있다. 본래 이 동상은 종묘 앞에 위치해 있었으나 종묘 성역화 사업으로 삼청공원에 이전하였다가, 2014년 4월 1일에 다시 이전하였다.

3 대표작

4 작품

  1. 고전소설로 가면 삼대 구성의 가정 소설이 차고도 넘침을 알 수 있다. 완월회맹연이라거나 명주보월빙이라거나. 문제는 이 소설들이 지금으로 치면 저녁드라마(막장 드라마...)라는 것이 문제이지만.
  2. 한국전쟁을 다룬 작품이 취우. 말 그대로 전쟁도 한때의 소나기라는 이야기인데. 전쟁 자체의 묘사보다는 점령지에서의 일상 생활을 밀도 있게 그렸다
  3. 1947년에야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4. 1924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5. 1924년 출간된 <견우화>라는 단편집에 수록되어 있다. 단편집을 구성하는 세 작품 <암야>, <표본실의 청개구리>, <제야>는 삼부작으로 엮여서 평가받는다.
  6. 삼대, 무화과를 잇는 3부작의 마지막 작품. 염상섭의 세계관을 완성시켰다는 평을 받는 3부작이지만 삼대에 가려져 무화과와 함께 아는 사람이 적다. 당장 이 문서에서도 두 작품은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7. 의외로 저연령층을 상대로 한 소설이다. 6.25 전쟁으로 인해 연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