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 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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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 베어스
OB Bears
창단년도1982년 1월 15일
명칭 변경년도1999년 1월 5일
OB 베어스두산 베어스
최종 우승[1]4회
(1982,1995,2001,2015)
연고지충청남도, 충청북도(1982~1984)[2]
서울특별시(1985~)[3]
홈구장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
청주종합운동장 야구장[4]
(1982~1984)
동대문야구장(1985)[5]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1986년~)[6]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프로야구 출범OB 베어스(1982)해태 타이거즈(1983)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LG 트윈스(1994)OB 베어스(1995)해태 타이거즈(1996)

2016년에 OB맥주가 프리미엄 맥주를 출시하며 내놓은 광고.

1 소개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원년 팀 중 하나로 두산 베어스의 전신이다. 1982년 1월 15일에 창단식을 가졌으며 공식 팀명은 두산 OB BEARS 프로 야구단이다.

2 창단 과정

당시에 창단 된 팀들은 팀명에 그룹명을 붙였으나, 유독 두산그룹은 자사 맥주 제품인 OB를 붙여 화제가 되었었다. 두산그룹의 프로야구단, OB BEARS 라는 이야기. 그리고 사실은 원래 그룹명이 오비그룹였다가 1978년에 두산그룹으로 바뀐 것이다. 당시를 볼 땐 오비가 두산보다 인지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7]

많은 사람들이 원년구단은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2개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OB/두산 베어스도 원년구단이다.[8][9]

KBO는 프로야구 창단에 앞서 각 기업의 기업주 연고에 따라 연고지를 배정하였으며 이에따라 종로에서 창업한 두산은 서울 연고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 당시 엘지의 전신 럭키금성의 기업주가 경남 진주가 연고라 부산 연고를 신청했으나 롯데에 밀려 탈락되었다. 하지만 후발 주자로 들어온 MBC가 단독 서울 아니면 야구단 창단하지 않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두산의 연고배정은 서울로 하되 3년 동안만 충청권 즉 대전에 있다가 서울로 복귀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실제로는 방송사인 MBC가 KBO 창설 이전에 MBC 자체적인 프로야구 구단 창단, 거기에서 더 나아가 당시 이진희 사장이 "MBC만 구단 창단을 할 것이 아니라 4개 구단이 참여하는 리그를 개최하라" 라는 지시를 내려 MBC TF팀에서 구상을 마친 다음 청와대에 초기 안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애초에 프로야구를 연출하고 기획한 것이 MBC라는 얘기인데, 자세한 것은 KBO 리그 항목에서 프로야구의 태동 항목 참조.[10] 이 과정에서 당시 5공정부의 압력이 작용했다고 한다. 일단 서울 연고를 차지한 MBC의 이진희 사장은 전두환 대통령의 측근이었고, 두산 박용곤 회장은 이 중재안에 대해 '5개구단 대표의 동의서 없이는 충청에 못 내려간다'고 버텼다. 거기다가 이진희 MBC 사장은 끝까지 두산의 서울 복귀 조건을 반대하여 동의서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5공 실세였던 이학봉의 호통 앞에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11] 그러므로 연고지 갖고 싸우는 두산 및 LG 팬들은 역사 공부부터 하자. 이게 다 군사독재로 점철된 굴곡 많은 당시 대한민국 현대사의 산물이다. 정작 OB와 MBC 올드팬들은 유치하게 연고지 갖고 싸우지 않는다. 같이 야구보던 친구가 쥐도새도 모르게 대공분실로 끌려가던 시절 아니던가 실제로 두산은 원년부터 신인 드래프트에서 서울 선수를 배정 받았다. 그러나 후발 주자라는 단점을 안고 시작한 것이었으므로 MBC는 김재박과 이해창 두명, OB는 박철순 한명을 지명하게 된 것이다.

3 유명 선수

김우열, 김유동, 박철순, 신경식, 윤동균, 이명수등이 이팀에 속했었으며, 김경문조범현도 이 팀의 포수로 활동했다. 포수가 넘쳤기 때문에 포수왕국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이처럼 포수왕국이다 보니 김영신이라는 포수가 경쟁에서 밀려나 실의에 빠져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 이후 그의 배번은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영구결번. 또한 포수가 많았던 탓에 OB 소속이었던 이도형, 진갑용, 최기문두산에서 오래있지 못하고 떠나버리는 경우가 있었다.[12]

4 시즌

4.1 1982년 ~ 1983년: OB 베어스에서 출발프로야구 원년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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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2월 초, 모기업인 두산은 팀 이름을 두산 OB 베어스로, 감독에는 재일 한국인 출신의 김영덕을 내정하고, 1981년 12월 29일, 사상 최초의 드래프트에서 두산은 박철순, 선우대영, 조범현, 박상열, 황태환, 계형철, 유지훤, 윤동균, 김우열등을 지명했다. 그리고 1982년 1월 15일,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 야구단으로 창단했다.

당초 모기업이 서울 종로에서 시작한 터라 충청도에 연고가 없었던 두산은 당초 현대그룹이 프로야구에 참여했을 때 맡기로 했던 인천/경기지역[13]이 현대의 참가 거부로 공석이 되자 그쪽으로 연고지를 변경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런 OB쪽의 요구는 방송국인 MBC 팀이 서울에 있었으면 하는 전두환의 의견 때문에 즉각적으로 수용되지는 못했고, 결국 전 구단의 합의에 따라 서울 연고를 배정받고, 잠정적으로 3년 기간동안만 한정적으로 충청권으로 갔다가 서울로 연고복귀를 하는 것으로 합의되었고, (합의 과정은 위의 구단 소개 항목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결국 서울선수들의 33%를 배정받고[14], 동대문 야구장에서 삼미, 삼성, 롯데, 해태 등과 홈경기도 진행하였다. 그렇게 OB는 충청남도 대전에서 1985년서울동대문운동장으로 올라오게 된다. 그리고 1985년 서울로 연고지를 옮긴 이후 충청도 연고지를 이듬해 창단되는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 이글스)에게 넘겨주게 된다.

OB 베어스의 첫 경기는 MBC 청룡과의 경기로 박철순의 4안타 2실점(1자책점) 완투승으로 승리했다. 이후 4월 중순부터 분위기가 반전되어 5월 2일 홈경기에서는 10승 5패로 단독 선두에 나섰다. 이후 9연승 등으로 시즌 4경기를 남겨두고 28승 8패로 전기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박철순이 시즌 24승을 거두면서 이후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우승을 한다. 김유동이 한국 시리즈 6차전 9회 만루홈런을 쳐내면서 MVP에 선정.

그러나 1983년 시즌에는 박종훈, 한대화, 장호연, 정선두만을 신인[15]으로 확보했고, 박철순, 선우대영, 강철원 등의 주력 투수와 구천서 등의 야수진도 부상을 당하면서, 결국 전기리그 6위, 후기리그 5위를 기록 순위가 5위로 하락했다. 그해 10월 14일, 김영덕 감독이 팀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만다. 한편 이때 당시 투수코치였던 김성근이 김영덕과 일언반구 상의없이 바로 감독직을 승계하고, 김영덕은 삼성의 감독이 되어서 두 사람은 앙숙이 된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면 착각이다 이 앙숙지간은 1984년의 져주기 게임을 야기했다.

4.2 1984년 ~ 1988년: 5할 승률 유지

1984년, 새 감독으로 투수 코치였던 김성근이 취임했고, 코치진도 보강되었다. 선수도 재일교포 최일언, 홍신차등을 비롯해 신인 윤석환, 김진욱, 김광림 등을 확보했다. 그리고 계형철이 14승, 박상열 12승, 장호연이 평균자책점 1위의 성적을 거두었고, 야수진에서도 부상 공백이 메워지며 9연승으로 치고 나갔다. 그러나 이후 6연패에 빠지며 삼성에게 전기리그를 내주었고, 후기리그에서도 초반에는 선두로 질주했지만, 8월 15일 부터 선두 자리를 내주었다. 마지막 두 경기에서 OB는 해태와, 롯데는 삼성과 맞붙었는데, 삼성은 롯데에게 일부러 패하면서 OB는 후기리그도 2위에 머물렀다[16] 공교롭게도 당시 삼성 감독은 김영덕. 물론 그 김영덕 감독의 져주기가 있었다지만 84년의 OB는 역대 가장 운이 없는 팀이었다. 전ㆍ후기 통합 승률 1위를 달성하고도 포스트시즌에 나서지 못했던 것.

1985년, OB는 연고지를 대전에서 서울 동대문 야구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해, 전기리그는 2위를 기록했으나 후기리그는 5위로 마무리했다. 이듬해 1986년, 플레이오프 진출권이 달린 롯데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김형석의 동점 홈런(일명 '운명의 한 방')과 신경식의 끝내기 안타로 4-3으로 승리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게 2승 3패로 패하고 1987년 전기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지만 해태에 2승 3패로 탈락한다. 1988년 롯데와의 개막전에서 장호연은 무탈삼진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다. 이후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5위를 기록한다. 시즌 후에 두산 그룹은 우승을 못한 김성근 감독과 재계약을 하지 않으려 했고, 김성근 감독도 사임하여 신용균 코치, 최주억 코치, 박상열 투수가 태평양으로 이적하게 된다. 이 당시 김성근은 2군 시스템의 운영과 투수분업화 시도를 하기도 했다[17]. OB시절에는 종신감독까지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구단주와 사이가 돈독했다는 평도 있었으나, 결국은 단장 이하 프런트와 큰 갈등을 겪었고, 이 갈등은 이광환 2군감독과의 알력으로 이어져 결국 팀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김성근 감독이 2군 선수를 콜업했더니 2군에서 이광환 2군 감독이 우리도 경기하느라 바쁘다고 콜업을 거부하는 황당한 일까지 생기고... 결국 태평양의 부름을 받고 팀을 옮긴다.

직후 이광환 감독 부임으로 OB는 엄청난 침체를 겪게 되는데...

4.3 1989년 ~ 1994년: OB의 암흑기

1989년 이광환 감독이 취임. 그는 당시 한국야구의 대세였던 일본식의 관리야구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면서 선수들 개개인에 개성과 책임감을 믿고 맡기는 '자율 야구'의 기치를 들었다. 첫 시즌이었던 89년에는 막판까지 4위권을 들락날락하면서 최종순위 5위로 그럭저럭 선전했으나 90년 시즌이 시작되면서 기존 투수력과 타선의 노쇠화가 한꺼번에 찾아보면서 팀 전력이 급격하게 붕괴. 5월부터 10연패와 11연패를 연달아 기록하면서 그 해 6월 19일 시즌 중 교체 되었다. 제4대 감독으로는 재미교포 출신으로 타격 인스트럭터를 맡고 있던 이재우가 취임했다. 그는 1990년 감독 대행으로 기용되어 1991년 정식으로 감독에 취임했다. 하지만 91 시즌에도 시즌 도중 12연패에 빠지는 등 안습한 성적으로 그 해 9월 9일 시즌 중에 교체되었다.거기다 모기업도 이시기에 페놀을 낙동강에 풀어넣은탓에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제5대 감독은 최초의 프로선수 출신 감독으로 윤동균이 내정되었고, 그는 감독 대행을 맡은 91시즌의 남은 경기를 5할의 승률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1992년, 본격적인 첫 시즌에 그는 김민호, 장원진, 안경현등의 신예들을 대거 발탁하고 김형석, 임형석, 강영수, 김상호로 이어지는 공격적인 타선을 완성하면서 그 해 5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1993년에는 초반에는 5위에 머무르다가 9월부터 강력한 선발투수진과 특급 신인 마무리투수 김경원을 앞세우면서[18] 연승을 시작해 마지막 경기에서 LG에게 승리하며 3위로 6년만에 팀을 포스트 시즌 진출로 이끈다. 그러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오히려 4위 LG에게 1승 2패로 탈락한다.

1994년에는 우승후보라는 예상과 달리 초반부터 고전하면서 하위권을 맴돌았았다. 결국 시즌이 얼마 남지 않은 9월 4일, 전북 군산시 쌍방울 전에서 1-2로 패배하자 윤동균 감독은 '몽둥이를 들겠다'고 했고 선수들은 이를 거부하자 윤동균 감독이 '맞기 싫은 선수들은 다 짐싸서 서울로 올라가라'라고 하였고 박철순 외 16명의 선수들은 이탈해 서울로 올라갔다. 선수들 중 최고 연장자인 박철순은 '윤 감독과 같이 옷을 벗겠다'라고 사태를 무마시키려 했다. 결국 9월 14일, 윤동균 감독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고, [19] 남은 시즌은 최주억 코치가 감독직을 대행했다. 이 사건이 바로 OB 베어스 항명파동으로 구단의 어두운 흑역사로 기록 되어 있다.

4.4 1995년~1998년: 거포군단으로의 변신, 13년만의 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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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사건으로 권위적이고 급한 성격의 윤동균 감독 대신 인화를 중시하는 김인식 감독이 부임하면서 심기일전. 시즌 초반 전문가들의 예상은 잘 해야 5~6위권 전력이라는 평가였으나 예상을 깨고 13년만의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올렸다. 투수쪽에서는 에이스 김상진3경기 연속 완봉승을 포함해 17승을 올렸고, 이어 권명철이 15승, 그리고 신인 이용호, 진필중은 김경원의 빈자리를 메워주었다. 타선에서는 25홈런 101타점으로 최초의 잠실 홈런왕을 차지한 김상호의 활약과 1번 타자이자 유격수인 연습생 출신 김민호의 화려한 주루플레이, 하위타선에 붙박이로 배치된 고졸 신인 심정수의 21홈런, 그 외에도 14홈런을 친 공격형 신인포수 이도형이나 베테랑 김형석, 이명수 등이 강타선을 구축했다. 시즌 구도는 서울 라이벌인 LG와 OB의 선두 다툼으로 흘러갔는데, 5월까지는 OB의 독주구도였으나 강병규,장호연등이 부진으로 선발투수진에서 이탈하고 고질적인 좌완투수 부재[20]로 좌타자 중심인 LG와의 맞대결에서 연전연패. 결국 LG가 8월 중순에 6경기차로 간격을 벌리면서 앞서나갔다.

그러나 김인식 감독의 발빠른 대처로 불펜에서는 이용호가 부진한 김경원을 대체하면서 뒷문을 잠그고 선발진에서는 진필중과 강길룡,송재용 등으로 장호연과 강병규의 빈자리를 메꾸면서 7월부터 재반격을 시작. 이후 LG가 주춤하는 사이에 OB는 6연승, 4연승을 거두고 9월 10일에는 다시 선두를 탈환한다. 그리고 마지막 27경기에서 OB는 20승 7패를 기록하면서 LG에 반 경기차로 정규 시즌에서 우승한다. 롯데와의 한국 시리즈에서는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7차전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롯데에게 4-2로 승리하며 사상 두번째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때 정수근심정수, 진필중, 이도형 등 재능있는 신인들을 발굴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최하위, 1997년에는 5위를 기록했는데,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전년도 디펜딩 챔피언이 꼴찌로 추락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21] 1998년, 이 해에는 10년 이상 중심 타선을 지켜오던 김상호, 김형석이 빠지자 8월 말까지 꼴지를 기록했으나 외국인 타자 타이론 우즈, 김동주, 심정수의 활약에 힘입은 시즌 막판 연승으로 1경기차 4위에 오른다.[22] 그러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잠실 라이벌 LG에 2연패로 탈락하게 된다. 이는 OB 베어스라는 이름으로는 마지막이 되었으니...

1999년 1월 5일, 구단 명칭을 현재의 두산 베어스로 바꾼다. 이후의 시즌은 두산 베어스 항목 참조.

5 유니폼 및 마스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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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프로 원년부터 구단명을 두산 베어스로 바꾸기 전인 1998년까지 무려 17년간 장수한 유니폼이다. 2014년 현재까지도 한국 프로스포츠에서 가장 오랫동안 채택됐던 디자인이기도 하다. 원년에 가슴 부분의 패치가 OB라고 크게 박은 유니폼이 별도로 있던 것만 빼고는 버튼형 셔츠에서 박스형 셔츠로 바꿀지언정 한번도 디자인을 바꾼 적이 없다. 색깔도 베어스 특유의 흰색-남색-빨간색을 써 곰의 이미지인 힘과 우직함을 잘 상징했다. 또한 별개로 모자 디자인은 나름 유니크하면서도 예쁜지라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베어스 특유의 팀 컬러를 잘 반영하고, 요즘에도 결코 촌스럽지 않은 디자인이라 OB CI에서 두산 CI로 바꾼 것 빼고는 올드 유니폼 이벤트 때도 입고 나온다. 이 디자인으로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팬들도 많다.

6 기타

  • 응원곡인 승리의 OB[24]LG 트윈스의 나가자! LG와 마찬가지로 유명하며, 마스코트인 곰돌이의 경우 삼성 라이온즈의 마스코트인 사자와 마찬가지로 유명하다.
  • 1998년 두산이 OB맥주를 벨기에의 주류 기업인 인터브루[25]에 지분을 50.9%를 매각하여 공동소유가 되었고, 이후 주류 업체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모기업인 두산그룹의 이름을 따서 1999년 두산 베어스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후에 45%의 지분을 넘겨 현재는 5%만 가지고 있다.)[26]
  • 불암콩콩코믹스의 작가인 최의민이 좋아하는 팀이라 작가의 오너캐가 OB모자를 쓰고 나온다.
  • 유재석은 두산 베어스 팬인데, 특히 그 중에서도 OB 베어스 원년팬이라고 한다.
  • 2015시즌을 마지막으로 진갑용, 박명환, 이혜천이 모두 은퇴하면서 OB 유니폼을 입어봤던 KBO현역선수는 전부 사라졌다. 단 현역선수로 범위를 넓히면 이혜천은 호주리그 애들레이드 바이트에서 뛰기로 했다.
  1. 우승 엠블렘은 두산 베어스항목을 참조바람.
  2. 리그 출범 당시 광역 연고제 였고, 충청권 전역이 연고지였다. 대전은 1982년 당시 충청남도 대전시, 1989년 직할시 승격, 1995년 대전광역시로 명칭이 개칭된다.
  3. 이후 두산 베어스로 역사가 이어진다.
  4. 제2 구장
  5. 아마 야구계의 반발로 잠실로 이주
  6. 이후 두산 베어스로 역사가 이어진다.
  7. 당시 프로야구팀을 창단할 때는 홍보효과를 누리기 위해서 소비재 기업을 전면에 내세웠었다. 한화그룹(당시 한국화약그룹)도 빙과류와 유제품을 주력으로 파는 계열사 빙그레를 팀명에 붙여서 빙그레 이글스를 창단했다. 이후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그런 소비재들이 그 그룹의 주력분야에서 멀어짐으로써 그룹명으로 바뀌게 된 것. 롯데도 한동안 제과업체인 롯데제과가 프로야구단을 관리했다.
  8. 그러나 연고이전과 팀명 변경을 하지 않은 원년구단으로 줄이자면 삼성과 롯데 단 둘뿐이다.
  9. 롯데, 삼성팬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원년구단+연고이전, 팀명변경이 없는 구단이기 때문에 OB는 여기에 해당이 안된다.
  10. 즉 MBC가 후발 주자라는 이야기는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애초에 KBO 리그의 틀을 잡은 것이 MBC 측이다.
  11. 5공정부의 부당한 명령에 저항한 국제그룹이 어떻게 해체되었는지를 생각하면 5공 초기였던 당시에는 정말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2. 최기문은 홍성흔 입단 전 차명주 상대 롯데로 트레이드
  13. 두산 그룹의 박승직 창업주가 경기도 광주 출신이라고 연고로 붙일 수 있기에 그렇다. 또한 두산그룹의 창업지가 서울이었기 때문.관련 자료
  14. 8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부터 서울팜에 지명권을 행사하였다.
  15. 박종훈은 최초 신인왕을 수상
  16. 다만 불과 이틀사이에 OB도 해태와 함께 김일권의 도루왕 타이틀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승부조작을 한 바 있다(...)
  17.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2군 체제가 제대로 짜여진 팀은 OB가 유일했다
  18. 그러나 공격력은 별로 강하지 않았다. 팀 타율은 2위였지만 홈런 수에서 LG에 뒤졌다.
  19. 박철순, 김상호, 김형석, 장호연, 강영수 등의 다섯 고참 선수들은 계약을 해지하기로 하였으나, 강영수만이 방출후 태평양 돌핀스로 입단 하게 되면서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20. 1995년 OB의 74승 가운데 좌완투수가 올린 승리는 하나도 없었다.
  21. 결과적으로 삼성에게 죽쒀서 개준 꼴이 되었지만 이게 진갑용을 지명하기 위해 일부러 꼴찌를 했다는 설도 있다. 그 당시에는 진갑용이 홍성흔에게 밀려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22. 단 한번이라도 지면 끝인 시즌 막판 8경기를 전부 이긴다.
  23. 주사위 던지기에 져 1993년 드래프트 1차 지명의 이상훈을 못 뽑는 다든지...
  24. 1999년 두산 베어스로 팀명이 바뀐 뒤에는 우리 두산 멋진 두산으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25. 2004년브라질 기업 암베브와 합병해서 인베브로 바뀌었다.
  26. 두산그룹은 주류, 식품 등 소비재 위주 기업이었으나 IMF 직전이었던 1990년대 중반부터 소비재 업체들을 매각하고 대신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등을 인수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현재는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를 중심으로 한 중공업이 주력인 기업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