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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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의 최종 멤버
멤버앤디 벨리암 갤러거노엘 갤러거겜 아처
파트베이스메인보컬기타,보컬기타
Oasis Discography
Definitely Maybe(What's the story) Morning Glory?Be Here NowThe Masterplan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Heathen ChemistryDon't Believe the TruthDig Out Your Soul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밴드는 오아시스다."

- 데이브 그롤 #

질문: 당신들은 자신들을 90년대의 비틀즈라고 생각하고 있다는게 사실인가요?

리암: 아니, 우린 90년대의 오아시스다.

1 개요

90년대를 대표하는 잉글랜드 맨체스터 출신의 얼터너티브 록 또는 브릿팝 밴드.[1][2]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인 노엘 갤러거와 싱어이자 프론트맨인 리암 갤러거 형제가 주축이었다. 90년대에 비틀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앨범들로 역대급 성공을 거두었다. 섹스 피스톨즈, 더 스미스, 스톤 로지스 등의 음악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으며, 90년대 밴드 음악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블러, 펄프, 스웨이드 등과 함께 브릿팝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네이버 웹툰 '만화로 듣는 올댓록'에서 2편에 걸쳐 오아시스를 소개했다. 한번 읽어두면 오아시스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하는데 좋다.[3] 1편 2편그러나 해당 만화의 경우 사진 사용에 대한 잘못된 고증[4]이나 루머를 사실인 것처럼 적은 내용[5] 등이 포함되어 있다.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이미지와 배경지식을 잡는 데에만 참고하기를 권한다.

여담으로, oasis의 영어식 발음을 따르자면 오-에이-시스(əʊ|eɪsɪs)에 가깝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경우 '오아시스(オアシス)'라고 적지만 현지에서 혹은 외국인에게 "오아시스"라고 말하면 무슨 소린지 못 알아먹는 경우가 많다.

그래미 어워드에서 3번 후보에 오르고 상은 받은 적이 없지만 브릿 어워드에서는 17번 노미네이트, 6번 수상을 했고 이를 포함한 여러가지 크고 작은 시상식에서 92번 노미네이트, 37번 수상을 했다.

영국차트에서 8번의 앨범 1위, 8번의 싱글 1위를 했고 빌보드차트에선 3집이 앨범차트 2위, Wonderwall이 싱글차트 8위까지 올랐다.

현재까지 영국에서만 2000만장 이상, 전세계적으로는 7000만장이 넘는 90년대 이후의 밴드 중에서는 상당한 판매고를 기록했다.[6]

2 역사

2.1 데뷔 이전

1991년 리암 갤러거가 첫 밴드 프론트맨이 된 더 레인(The Rain)이라는 이름의 밴드로 보컬 인생을 시작했다. 더 레인에는 원래 본헤드와 귁시, 토니 맥캐롤, 그리고 크리스 휴턴(보컬리스트)이 있었다. 그러다가 본헤드가 보컬을 리암 갤러거로 교체하면서 리암의 제안으로 밴드의 이름을 오아시스로 바꾸게 되었고 그리고 역시 리암의 제안으로 노엘이 밴드의 모든 지휘권과 작곡을 넘겨 받는다는 조건으로[7] 기타리스트로 밴드에 가입하게 되면서 초기 오아시스 라인업이 완성 되었다.

밴드의 이름은 갤러거 형제의 침실에 붙어 있던 인디 록 밴드 인스파이럴 카페츠[8]의 투어 포스터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갤러거 형제의 우상 비틀즈가 맨체스터에서 처음으로 연주했던 클럽의 이름을 따왔다는 설이 있다.

1993년 어느 날,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2집 앨범 Loveless 발매 이후로 멸망 위기에 처해있던 인디 록 레이블 크리에이션 레코드의 사장 앨런 맥기는 클럽을 전전하며 공연하던 이들을 발굴하게 된다. 애초에 오아시스는 공연이 없었으나 노엘이 클럽에 앨런 맥기가 온다는 정보를 사전에 접하고는 공연 기획자에게 가서 "여기까지 왔는데 좀 공연 좀 할 수 없을까요."란 식으로 빌어서가 아니라 당시 그곳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던 시스터 러버스(Sister Lovers)가 '같이 따라온 초짜들이었던 오아시스도 같이 공연했으면 좋겠다'고 제의를 했고 결국 공연을 하게 된다. 이 곳에 앨런 맥기가 있었고, 그들은 앨런 맥기의 눈에 드는데 성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아시스가 그 공연장에 찾아가서 행패를 부린 끝에 공연을 따냈다던가, 사람들을 협박했다더라고 하는 그럴싸한 갤러거 형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들을 정설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무근이다. [9]아무튼, 이후 싱글과 정규 앨범 발매를 족족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어 레이블은 구원을 얻는다. 이후 밴드는 Big Brother라는 자체 레이블을 설립해 독립했고, 결국 크리에이션 레코드는 문을 닫는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10]

2.2 Definitely Maybe의 성공

3월 18일에 Live The Word라는 쇼에 출연해 곧 발매될 곡 Supersonic을 불렀다. TV에서는 이게 오아시스 최초의 데뷔.

그리고 4월 11일 첫 싱글 Supersonic을 발매한다. 이 싱글은 일주일 후의 차트에서 처음보는 락밴드의 싱글치고는 높은 순위인 31위에 오른다. Supersonic은 아직도 많은 평론가나 오아시스 팬들에게 오아시스의 명곡 중 하나로 뽑히며, 현재까지 영국에서만 25만장 이상이 팔렸다.

6월 13일 그 다음 싱글인 Shakermaker를 발매하고 싱글 차트에서 11위에 오르는데, 이 싱글은 코카콜라 광고곡을 표절한 곡이었고 이로인해 오아시스는 호주달러 50만 달러, 한화 약 5억을 물게된다.

6월 26일 1994 글라스톤베리 페스티벌에 참가해 약 40분 동안 공연을 한다. 이 때 이미 발매한 두 싱글과 Live Forever 등 아직 발매하지 않은 1집에 수록될 곡들도 불렀다.

8월에는 Live Forever는 영국차트에서 드디어 2주 연속으로 차트 TOP 10에 올라 상당한 인기를 얻는다. 이 곡은 노엘 갤러거가 롤링스톤즈의 Shine A Light에게 영향을 받은 곡이라고 했으며, 오아시스의 곡들중에서도 최고의 명곡으로 뽑히는 곡이다. 대중성이나 킬러트랙이라면 대부분 2집 시절의 Wonderwall이나 Don't Look Back In Anger을 뽑지만, 이 곡의 아름답고 낙관적인 가사와 멜로디 때문에 대부분의 잡지나 평론가들은 이 곡을 당연하다는 듯이 최고로 뽑는다.

8월 29일 드디어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을 발매 하게 된다. 이 앨범은 신드롬을 일으키며 단숨에 앨범 차트 1위를 찍었고, 일주일만에 8만 6000장이나 팔려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데뷔 앨범[11]이란 타이틀을 얻게 된다. 이 앨범은 초반엔 미국 빌보드 앨범차트인 빌보드 200에서 랭크조차 되지않았지만 1995년 낮은 순위에 랭크가 시작돼 58위까지 기록한 후 그 뒤에도 롱런해 미국에서 100만장 이상이 팔렸다. Definitely Maybe은 대부분의 잡지들에게 극찬이란 극찬은 다 받고 명반으로 불리게 된다. Live Forever와 2집 곡들의 관계랑 비슷하게 Definitely Maybe과 이듬해에 나온 오아시스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의 관계도 인기는 대중성있는 2집이 더 많았지만 평론 면에서는 현재까지 1집이 훨씬 더 높게 평가받는다. Definitely Maybe 항목에 설명된 것처럼 이 앨범은 역사상 최고의 데뷔앨범이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10월 발매한 네번째 싱글 Cigarettes & Alcohol은 7위에 오른다. 술과 담배를 권유하는 곡인데도 7위다(...). 이 곡은 티렉스의 기타 리프를 표절한 곡(...). 그런데도 노엘은 "우리가 티렉스를 유명하게 해줬잖아?"라며 신경쓰지 않았다(...).

12월 발매한 1집에 수록되지 않은 단독 싱글인 Whatever은 무려 3위에 오른다. 일본과 한국에서 상당히 인기있는 곡. 한국에서는 삼성생명의 CF곡으로 쓰여 더 유명해졌다.

Definitely Maybe는 1994년 영국 앨범차트 통산 판매량 순위에서 21위에 오른다.

오아시스는 이듬 해인 1995년 2월에 열린 1995브릿 어워드에서 '최고의 그룹상', '최고의 신인상', '최고의 앨범상', '최고의 싱글상[12]'에 후보 노미네이트 되어 '최고의 신인상'을 받는다.[13][14]

1집 앨범은 현재까지 영국에서 210만, 미국에선 100만, 전세계적으로 1500만장 이상이 팔렸다.

2.3 블러와의 브릿팝 전쟁(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의 대성공

오아시스는 1995년 발매한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의 첫 선공개 싱글 Some Might Say로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한다.

[15]

그런데 두 번째 싱글인 Roll With It은 발매 전부터 이른바 '브릿팝 전쟁'이라는 블러의 새 싱글 Country House가 발매를 2주 늦춰 Roll With It과 동시에, 8월 14일에 발매되어 두 싱글이 1, 2위를 다툴것을 영국 음악잡지 NME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보도한 사건으로 인해 관심을 모았고, 두 싱글이 발매되고 일주일 후 싱글차트에서는 Country House가 27만 4천장을 팔아 1위, Roll With It이 21만 6천장을 팔아 2위에 올랐다.

블러의 리더인 데이먼 알반은 10시 뉴스에서 인터뷰까지 했고, 뉴스에서 까지 이 사건을 보도했다.
결국 브릿팝 전쟁은 인디음악의 인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 지 증명했다고 할 수 있다.

싱글 싸움에서는 졌지만 한 달 뒤 발매된 블러의 4집 The Great Escape는 영국에서 2주 1위를 차지했는데 오아시스의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는 영국에서 무려 10주 1위를 차지했고,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의 일주일 판매량이 The Great Escape의 한 달 판매량보다 높았으며, 2006년까지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는 영국 내에서만 430만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해 역대 영국앨범 판매량 순위에서 3위에 오른다.[16] 결국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초반에는 80위에도 들지 못하다가 롱런해 1996년에 4위까지 오르며 미국 내에서만 4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2016년까지 전세계에서 22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다. 상업적 성과 뿐만 아니라 평론도 현재까지 브릿팝 최고의 명반중 하나로 평가받는 앨범. 갤러거 형제는 당시 노동 계급의 영웅(Working Class Hero) 라는 별명을 얻으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당시 '영국에서는 거지도 오아시스 노래는 부를 줄 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며, 이 앨범의 세 번째 싱글인 Wonderwall은 2위를 기록했는데도 2013년까지 싱글로만 무려 132만장이 팔리며 오아시스의 가장많이 팔린 싱글이 되고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으며 제 2의 영국 국가라는 별명을 얻게된다.

네 번째 싱글 Don't Look Back In Anger는 오아시스의 두번째 차트1위를 기록해주며 Wonderwall에 이어 오아시스의 두 번째로 많이팔린 싱글이 된다. 국내에서도 Whatever과 같이 가장 인기많은 곡.

오아시스는 이듬 해 1996년 열린 1996 브릿 어워드에서 '최고의 그룹상', '최고의 앨범상', '최고의 싱글상[17]', '최고의 비디오[18]'에 후보 노미네이트되어 '최고의 그룹상', '최고의 앨범상', '최고의 비디오상'을 받아 블러에게 밀려 1가지 상 밖에 받지 못한 1995 브릿 어워드와 달리 3관왕에 오른다. 그리고 수상 소감은 큰 논란이 되었다.

앨범상에서 리암이 먼저 올라가서 감사하다고 대충 말한 뒤 다음에 올라온 노엘과 노래를 부르는데 그게 블러의 Parklife의 한 부분.

All the people

So many people
And they all go hand in hand
Hand in hand through their Shitlife

Shitlife라고 바꿔서 불렀다...
이 사건은 Shitlife 사건이라 불리며 화제가 됐다...

오아시스 넵웨스 공연의 포스터.

오아시스 신드롬은 96년 중반에 절정에 이르렀다. 메인 로드 등의 대형 콘서트장을 매진시킨 밴드는 96년 8월 10일부터 11일까지 넵워스(Knebworth)에서 공연을 열고 양일간 12만 5천명씩 약 25만 관객을 끌어모았고, 이 공연은 영국 야외 단독 콘서트 사상 최대의 관객수를 기록한다. 이 공연을 보기위해 예매를 시도한 사람만 250만 명에 달했다.[19] 공연횟수를 늘렸으면 250만명을 부를 수 있었다는 것(...).

당시 관객 상황.(...)[20]

2집 앨범은 현재까지 영국에서만 460만, 미국에서 400만, 전세계적으로 2200만장이 팔렸다.

2.4 Be Here Now와 브릿팝의 멸망

1997년 3집의 리드싱글로 선공개된 D'You Know What I Mean?는 영국 1위를 차지한다. 일주일만에 무려 37만장이 팔린다. 이전까지의 오아시스답지않은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로 호불호가 갈렸지만 대중들은 3집에 대한 기대만 높아질 뿐이었다.

오아시스 신드롬은 같은 해인 1997년 3집 앨범 Be Here Now가 발매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3집 앨범은 영국에서 가장빨리 팔린[21]앨범이라는 타이틀을 얻게되고 영국에서 2주째는 100만장 돌파, 미국에선 첫주에 2위를 기록하며 15만장을 파는데 오아시스 자신들이 기대했던 40만장은 기록하지 못했고 현재까지 미국에서 100만장을 팔았다. 또, 영국에서 5주 1위를 차지하지만 평단과 대중의 차디찬 혹평을 듣게 되면서 망했어요, 오아시스 신드롬은 점차 하락세의 길을 걷는다. [22] 3집 앨범은 현재까지 영국에서 180만, 미국에서 100만, 전세계적으로 800만장이 팔렸다.

1998년 싱글들에 같이 팔리는 곡인 B 사이드들을 모은 The Masterplan이 발매됐다. 이 컴필레이션 앨범이 오히려 평론면에서 이전의 3집보다 훨씬 호평을 얻는다. 특히 2집 시절의 싱글 Wonderwall의 B 사이드곡이자 이 앨범의 타이틀곡 The Masterplan은 오아시스의 B 사이드 중에서만 명곡이라 뽑히는 것만아니라 오아시스의 모든 곡들 중에서도 최고의 명곡 중 하나로 뽑힌다. 이 앨범은 원래 싱글을 비싸게 사야지만 B 사이드를 살 수 있는 다른 나라에서 판매될 예정이었으나 영국에서도 팔게된다. 영국에서 60만장, 전세계에서 200만장이 팔린다.

2.5 밴드의 방황과 연달은 실패작

이후 2000년 발매한 4집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는 3집부터 이어져 온 싸이키델릭한 사운드를 보여줬고 역시 영국 1위를 차지했지만 빌보드에선 24위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으며 순식간에 차트에서 사라졌고, 현재까지 영국 60만, 전세계 300만장이 팔렸다.

같은 해 Familiar to Millions라는 영국의 웸블리 경기장에서의 라이브 앨범을 발매하고 영국 5위에 오른다. Familiar to Millions는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100만장 이상이 팔렸다.

2002년 발매한 5집 Heathen Chemistry도 영국 1위를 차지하고 빌보드 23위에 오른다. Stop Crying Your Heart Out등의 싱글은 호평을 받았지만 앨범은 계속 하향세를 보였다. 5집은 영국에서 100만장, 전세계 500만장이 팔렸다.

2.6 제 2의 전성기, 그러나 해체

2005년 발매한 6집 Don't Believe the Truth부터는 노엘의 슬럼프가 끝나고, 오랜 기간 끝에 밴드 멤버들의 음악이 마침내 조화를 이루게 되면서 1, 2집같은 로큰롤 트랙들이 수록되며 전작들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으며 영국에서 1위, 미국에서 12위에 오르고 영국에서 90만장을 기록하며 오아시스 후반앨범 치고는 상당히 높은 700만장을 기록한다.

2006년은 Stop The Clocks라는 베스트 앨범을 발매해 영국 150만, 전세계 300만장을 기록한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발매한 7집 Dig Out Your Soul에 이르러서는 전성기적 컨디션을 회복했다는 평과 함께 Be Here Now 이후로 오랜만에 미국 시장에서 5위라는 높은 순위를 기록하였고, 전세계적으로 16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한다. 4집이나 5집보다도 적지만 2000년대 후반 음반시장이 매우 작아졌기 때문에 상당한 판매량이다. 2009년 8월 23일 노엘 갤러거가 밴드를 탈퇴하게 된다. 이후 나머지 밴드 멤버는 비디 아이라는 이름의 새 밴드를 시작하고, 노엘은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 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솔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해체 이후 2010년 Time Flies... 1994-2009라는 또 따른 베스트 앨범을 발매한다.


2010년 브릿 어워드에서 오아시스는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로 지난 30년간 영국 최고의 앨범상을 받고 리암이 시상 소감을 했다.

본헤드는 2012년 Vinny Peculiar와 함께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 Parlour Flames를 시작하였다. 본헤드는 트위터 계정이나 사진 등을 통해 리암, 겜, 앤디 등과 활발한 교류를 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이후 2014년 Phoneys And The Freaks 등 개인적으로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해체 선언 이후로 영국 도박사들이 이들이 5년 이내로 재결합한다는 쪽에 서로 내기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재결합에 의견을 낸 도박사들은 망했다고 봐야한다

2014년 비디아이가 해체됐다.

2.7 정규 앨범 리마스터와 다큐멘터리

2014년에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가 20주년 기념으로 리마스터링 재발매되었다. 다양한 사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말 오랜만에 '오아시스'의 이름으로 발매되는 앨범이다. 그들의 마지막 정규 앨범이었던 Dig Out Your Soul 이후 6년만에 8집 앨범이 아닌 리마스터링 앨범으로 돌아왔기에 팬들에겐 즐거운 소식이 될 것이다. 참고로 그 후 MG도 리마스터링으로 재발매되었다. 다만 가격은 기대하지 말자. 테이프 하나에 1만 8천원 가까이 한다.

2016년 7월 23일, 3집 수록곡 "D'You Know What I Mean?"의 편곡버전이 올라왔다. 3집 리마스터 버전은 10월 7일에 발매될 예정

영화 '에이미'를 만든 측에서 10월 2일 영국에서 오아시스 다큐멘터리를 개봉한다.# 제목은 오아시스의 첫 싱글의 제목인 Supersonic. 한국에서는 11월 24일 개봉예정. 번역은 데드풀을 번역했던 황석희. 다음은 영화의 포스터와 트레일러.

3 멤버

데뷔 초의 오아시스
토니 맥캐롤폴 "본헤드" 아서스노엘 갤러거리암 갤러거폴 "귁시" 맥기건
드럼기타기타,보컬보컬베이스

2집부터 3집까지의 오아시스
폴 "본헤드" 아서스노엘 갤러거앨런 화이트리암 갤러거폴 "귁시" 맥기건
기타기타,보컬드럼보컬베이스

2000년부터 2004년까지의 오아시스
앤디 벨노엘 갤러거리암 갤러거앨런 화이트겜 아처
베이스기타,보컬보컬드럼기타

이전 멤버로는 앨런 화이트(드럼), 토니 맥캐롤(드럼), 폴 귁시 맥기건(베이스)과 폴 본헤드 아더스(기타)가 있었다. 귁시와 본헤드는 3집 이후 탈퇴[23]했다. 토니 맥캐롤은 1집에 드러머로 참여하였다가 해고되었다.[24] 이후 앨런 화이트가 정규 멤버로서 그 자리를 대신하다 2004년 탈퇴하면서 드럼 멤버는 공석이 되었다. 이후로는 링고 스타의 아들인 잭 스타키, 크리스 섀록 등이 객원 드럼 멤버로 참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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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4 음악

진성 영국 락빠 형제의 밴드다운 정통 브리티시 록

일반적으로 브릿팝은 어둡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것은 오해로서 사실 전혀 반대에 가깝다. 브릿팝의 전성기 시절, 그러니까 94-95년의 Blur, Pulp, Supergrass 등의 앨범을 들어보면 오히려 밝고 경쾌하다. 즉 브릿팝은 기타와 멜로디가 주가 된 90년대 영국모던 록이라고 할 수 있다. 오아시스는 브릿팝의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브릿팝 밴드들에 비해 훨씬 볼륨이 크고 강렬한 디스토션을 먹인 거친 기타 소리를 특징으로 한다.

전반적으로 기본에 충실하고 기본에서 크게 벗어나는 음악은 하지는 않는다.[26] 오아시스 노래를 보면 정말 기본적인 코드로만 구성되어있는 경우가 많고 복잡한 코드는 거의 사용하지도 않는다(기타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도 오아시스 노래는 쉽게 칠 수 있을 정도). 바레코드나 파워코드도 부득이한 경우에만 사용하지, 대부분 오픈코드로 잡는다.[27] 또한 코드 변환도 최소화하고 단순한 '3코드'로 구성되어있는 노래가 많다. 이러한 면에서는 펑크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28]
하지만 단순한 코드 구성과는 달리 그 위에 얹혀진 멜로디는 굉장히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오아시스의 음악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높게 평가받는 이유가 바로 이것. 쉽지만 동시에 단순하지만은 않은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노엘 갤러거도 오아시스의 음악이 대중적의 사랑을 받는 이유를 굉장히 쉬운 코드 진행에 얹혀진 아름다운 멜로디를 꼽았다.
다른 요소를 꼽자면 리암의 목소리를 들 수 있다. 조지 해리슨이 "노엘도 노래를 할 줄 아는 친구인데 망나니 리암을 왜 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발언한것 처럼 소수의 사람들이 리암의 존재를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렇게 보면 큰 오산이다. 같은 노래라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 음악의 방향이나 퀄리티가 크게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오아시스도 이에 속한다.[29] 노엘이 천재적인 송라이터이고 노래를 부를줄 아는 것도 맞으나 목소리의 참신함은 적은 편이다.[30] 노엘 버전과 리암 버전 둘 다 존재하는 노래(Live Forever, Slide Away, Lord Don't Slow Me Down 등등)를 들어보면 대부분 리암 버전이 훨씬 더 생기있고 에너지가 넘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리암 특유의 락보컬이 아니었다면 오아시스가 추구하는 정통록은 제대로 실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오아시스의 음악도 어느정도 익숙한 클리셰에 맞춰저 있는 경향이 있어서 음악에 참신함을 주기 위해 신선한 요소가 필요한데 리암의 개성있는 목소리가 그것을 정확하게 해결해 준다. 노래 자체가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노엘이 불렀어도 성공을 할 수 있었겠지만 리암이 없었다면 국민밴드급의 아티스트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라는게 대부분의 평이다. 리암의 목소리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를 위해서는 리암 갤러거 항목 참조.

앨범의 트랙간 퀄리티 밸런스가 굉장히 잘 맞춰져있는 밴드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밴드나 아티스트들도 싱글로 발매된 수록곡과 논싱글(non-single)트랙간의 퀄리티 차이가 큰 경우가 많은데 그것에 비하면 오아시스는 밸런스가 잘 맞춰져 있는 편이다.앨범 간의 퀄리티 밸런스는? 음...그건 말씀드리기 싫습니다.

4집 이후부터는 멤버의 대부분이 교체되고 음악적 방향이 변화하는 등 밴드의 색깔이 크게 변하게 된다. 그나마 노엘의 개인적인 회고록 같은[31] 4집을 제외하면 언제나 한결같이 로큰롤을 지향하려 노력하였다. 오아시스의 음악은 변화하지도 않고 진보하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 때문이다. 오아시스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나 평론가들이 항상 라디오헤드와 비교하면서 단골로 하는 말이 바로 '진보'인데, 노엘 역시 라디오헤드와 본인들을 비교해가면서, "자신은 안전지대에 있는 것이 가장 좋은데 왜 다들 굳이 새로운 변화를 강요하느냐"는 식의 일장연설을 하는 인터뷰를 자주 해왔다. 다만 이렇게 혁신적이지 않은 음악관 때문에 일부 잡지나 평론가들(특히 미국 출신)이 밴드의 위상에 비해서 낮게 평가하기도 한다.[32]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반인 Definitely Maybe(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는 당연히 대부분의 잡지에서 역사에 남을만한 앨범이라는 평가를 듣지만 앨범의 퀄리티가 비교적 평범해진 Be Here Now,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 Heathen Chemistry가 과도하게 까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오아시스가 해체되고 나서 노엘과 비디 아이로 나뉜뒤에는 노엘이 상대적으로 훨씬 진보적인 사운드를 보여주었기 때문에[33] 오아시스의 음악적인 정체(停滯)가 노엘의 취향에서 말미암았다는 인식이 있다면 틀린 인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이 영향을 받은 밴드로는 역시 비틀즈가 가장 유명하나, 그 외 음악적으로 티렉스, 섹스 피스톨즈, 롤링 스톤즈, 더 스미스 그리고 스톤 로지스 등의 영향 아래에 있다. 그리고 멤버가 교체된 4집 이후부터는 앤디 벨의 라이드와 겜 아처의 헤비 스테레오의 색깔도 찾아볼 수 있다. Q Special Edition 2002년 7월호 인터뷰에서 노엘은 '자신은 가장 유명한 비틀즈 팬이지만 오아시스의 음악은 비틀즈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음악을 신나는 면에서 스투지스, 섹스 피스톨즈, 비틀즈, 롤링 스톤즈나 스톤 로지스와 같은 뮤지션들과 비유한다.

멤버 모두가 엄청난 비틀즈이다. 특히 리암 갤러거존 레논 코스프레도 몇 년간 하고 다녔고, 자신의 아들 이름도 레논[34]으로 지었다. 공연 중에는 비틀즈 9집 수록곡인 I am the Walrus를 부르기도 하고, Whatever 라이브를 연주할 때 종종 노래 끝부분에 비틀즈의 Octopus Garden을 넣는 등 짧게나마 비틀즈의 기타 리프를 빌려 넣기도 한다. 같은 예로 Don't Look Back In Anger의 인트로는 존 레논의 솔로곡 Imagine의 피아노 반주 일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며, 리듬 기타의 기타 리프는 Let It Be에서 빌려 왔다. She's Electric은 본인들 스스로 '대놓고 비틀즈인 척한 음악'이라고 했다. 'The Turning' 마지막 부분의 기타 리프는 Dear Prudence를 대놓고 연주한 것이며, 가사 안에 Yellow Submarine이나 Magical Mystery, Tomorrow Never Knows 같은 구절을 쓰는 등 곳곳에서 비틀즈 오마주가 넘쳐난다. 리암은 존 레논은 찬양하지만 폴 매카트니에 대해서는 비교적 약한 반응을 보이는 반면, 노엘은 매카트니를 좋아하며 개인적인 친분도 있다. 그 외에도 레드 제플린이나 롤링 스톤즈 등의 리프를 차용하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 오아시스의 사운드 그 자체는 참신함이 적은 편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밴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아시스만의 색깔이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배철수의 평을 들자면 "기라성같은 선배들의 멜로디에 강한 스파이크로 되받아치는 듯한" 노엘의 작곡 능력에, 그 목소리만으로도 곡에 강력한 기운을 불어넣는 리암의 보컬이 어우러진 결과라 할 수 있겠다.

4.1 다른 밴드와의 관계

  • 90년대에 리암이 어느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록 스타들을 깐 적이 있었다. 이 무렵 TV에서 오아시스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예정이었고, 이 다큐멘터리는 록 스타들이 오아시스에 대한 생각을 인터뷰하는 내용이었는데 인터뷰에 출연한 이들이 모두 오아시스에 대해서 부정적인 언급을 늘어놨고, 이 다큐멘터리는 사전에 검열한 갤러거 형제에 의해서 방송이 취소되었다. 이후 리암이 라디오에 술취한 채 출연하여 믹 재거를 엄청나게 깠는데, 믹 재거, 꼽냐? 꼬우면 내일 아침 몇시까지 우리집 앞에 와라. 우리집 주소가 OOO의 XXX니까 꼭 찾아와라 보행기는 놓고 오는 게 좋을 거다라고 선전포고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 믹 재거의 팬들 수십명이 믹 재거 가면을 쓰고 리엄의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었고, 결국 리엄은 경찰을 불러 그들을 해산시킬 수 밖에 없었다.
  • 데뷔 초기, 노엘이 폴 매카트니를 우연히 만나게 됐는데, 폴 매카트니가 자네들 전성기때 우리랑 비슷하더군, 아주 잘 하고 있어.라고 칭찬을 하자, 그럴라고 돈 많이 썼습니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인터뷰로 다른 뮤지션을 잘 깐다. 모 음악지는 핀란드인은 자기 전에 자일리톨 껌을 씹지만, 갤러거 형제는 자기 전에 요즘 잘 나가는 밴드를 몽땅 씹는다는 표현을 썼는데 갤러거 형제의 평소 행적을 아는 이라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대목. U2[35], 라디오헤드[36][37][38], 블러[39], 콜드플레이[40], 스타세일러[41], 펄 잼, 플라시보, 로비 윌리엄스[42] ,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슬립낫, 에미넴, sum41[43], 프란츠 퍼디난드[44], 카이저 칩스, 아델[45] 등등. 특히 프란츠 퍼디난드와 카이저 칩스, 라디오헤드는 단골로 까인다. 비틀즈도 까긴 까는데... 심지어 자기들도 깐다. [46]

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인터뷰에서 욕설이 난무한다. 애초에 데뷔하면서 'Supersonic' 싱글을 낸뒤의 잡지 인터뷰부터 범상치 않았다.("퇴물들은 젊은 밴드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주로 아이러니하게 비아냥거리는 쪽은 노엘이며, 리암은... Fxxk이 안 들어간 인터뷰를 찾는게 더 어렵다... 숨쉬는 것과 비슷한 빈도로 Fxxk을 애용한다.

정작 오아시스는, 정확하게는 리더인 노엘 갤러거가 많은 선후배 뮤지션들과 친분이 깊으며 무대에도 함께 선다. 대표적인 친구들을 꼽아보자면, 선배들 중엔 더 잼의 폴 웰러와 스톤 로지스의 이안 브라운과는 존경하는 선배이자 절친. 더 스미스조니 마와도 데뷔전부터 친분이 있었으며 노엘은 그의 기타연주에 대해서는 절대 칭찬만 하는 편. 모리세이와도 친하진 않은데 유머감각때문에 좋아한다고. 아이리쉬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만큼 U2와도 친분이 깊으며(2015년 내한 인터뷰에서 만일 노래방에 간다면 U2 노래를 부르겠다고 대답할 정도이다) 그런 만큼 솔직하게 독설을 날릴 수 있는 관계이다. 후배들 중엔 카사비안을 무척 편애하며, 콜드플레이의 크리스 마틴은 그냥 노엘빠. 트래비스는 스코틀랜드 지역 밴드 시절부터 노엘의 열렬한 애정을 받아 왔다. 마룬5 역시 오아시스를 굉장히 좋아한다. 마룬5의 경우, NME 2008년 8월호나 Q 매거진 2008년 10월호의 노엘 인터뷰를 보면...(...)[47]

4.2 블러와의 관계

더욱 자세한 내용은 브릿팝 전쟁을 참고하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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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오아시스 TOTP에 Whatever가 나오면서 데이먼 알반이 소개하는 부분(...) 블러의 다큐멘터리인 No Distance Left To Run에 삽입되었으며 해당부분을 캡처하여 자막을 입힌 것이다. 사진 전체.

오아시스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블러. 이 둘은 오랜 기간 동안 브릿팝계에서 대립 구도를 펼쳤다. 이른바 '브릿팝 전쟁'도 이 둘을 언론들이 이용한 결과다. 이때 언론들은 60년대 비틀즈와 롤링스톤즈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사실 1995년 싱글 동시 발매로 충돌하기 전까지는 그다지 나쁜 관계가 아니었다.[48] 문제는 그 이후로 영국 언론 특유의 포장하기와 몰아가기로 인해 그 둘을 마치 영국 음악의 최강자를 놓고 싸우는 라이벌로 포장하였으며 이는 훗날 브릿팝 전쟁으로 불리게 된다. 사실 이 싱글 발매 싸움은 블러 측이 먼저 도발한 측면이 있었고 (블러 측에서 먼저 일부러 발매 날짜를 2주 정도 늦췄다), 이에 오아시스 측에선 굉장히 어이없어하였다. 앨런 맥기가 노엘에게 "우리도 발매 날짜를 늦추자" 라고 했지만 노엘은 X까지 말라고 했다(...) 리암은 이후로 사적인 자리에서 그들을 만나면 으르렁거렸으며 훗날 블러의 베이시스트인 알렉스 제임스는 이 때의 일화를 두고 "전부 다 재밌었잖아 안그래?"라며 자조적인 모습을 취한다.

노엘은 블러의 리더인 데이먼 알반에게 "에이즈나 걸려 뒈져라!"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발언에 따른 엄청난 사회적 파장과 비난 속에 (심지어 이 시기에 노엘은 어머니인 페기에게 '난 네가 그런 말 하라고 가르친적 없다'는 소리까지 듣기도 한다.) 스스로도 괴로워하다 결국 사과했다. 는 주로 알려져 있는 루머이고 실제로는 이 발언을 한 뒤 바로 사과했다고 한다. 물론 블러말고 에이즈 환자들(...)

블러 같은 경우엔 브릿 어워즈에서 최고의 싱글로 파크라이프가 선정되자 데이먼 알반오아시스도 같이 탔으면 좋았을거에요라고 말했던 일을 자신들의 최악의 실수로 꼽았다.(...) 그래서 그 다음해 브릿 어워드에서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가 베스트 앨범을 수상하자 갤러거 형제는 Parklife를 Shitlife라고 놀렸다.

하지만 근래 들어선 양 쪽 다 감정이 많이 희석되었다. 리암의 경우 데이먼 알반과 싸운건 노엘이지 자신이 아니라며 블러의 멤버들과는 오가다 길에서 만나면 인사 정도는 한다고 한다. 2009년 인터뷰에서 노엘 역시 데이먼 알반에 대해 자신과는 다르지만 재능있는 사람이라 했고, 브릿팝 전쟁을 회상하면서 철없던 시절의 얘기라 하기도 했다. 사실 노엘은 블러의 기타리스트인 그레이엄 콕슨에 대해선 줄곧 높은 평가를 해왔다.

2011년 Shortlist에서의 노엘 인터뷰에 따르면 우연히 모 클럽에서 데이먼 알반과 마주치게 됐는데, 그 날 둘은 15년 전 브릿팝 전쟁 때의 일에 대해 회상하며 서로 맥주를 마시며 깔끔하게 화해를 했다고 전해진다. 원 디렉션이란 보이 밴드를 같이 깠다고 한다(...)

사실 두 쪽 모두가 언론의 꼭두각시이자 희생양이었을 뿐이었고, 먼 훗날 노엘 갤러거데이먼 알반은 서로 화해하였고, TCT 공연에서 노엘이 블러와 함께 그들의 노래인 'Tender'를 같이 연주하면서 브릿팝 전쟁의 앙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5 갤러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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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거지이다.
왼쪽부터 동생 리암 갤러거, 노엘 갤러거. 형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각 항목을 참고.

5.1 형제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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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끼리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어느 정도냐 하면 서로가 서로를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부른다.[49]

평소에도 그리 자주 교류하는 편은 아닌 듯 하며 밴드가 해체한 지금은 인터뷰로 소통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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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정신분열자 새끼와 이중인격 씨발년의 밴드

하지만 까는 사이사이 형제애를 슬쩍슬쩍 드러내곤 해 그 사이를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으며, 굳의 정의를 내리자면 애증 관계에 가까다고 볼 수 있다. 노엘은 둘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리암이 다굴 당하고 있다면, 난 리암을 같이 패기 위해 거기 뛰어들 것이다. 반대의 경우 리암도 그렇게 할 거다. 형제라는 건 원래 그런 거다.'라고 대답했다.

그들 형제와 관련된 많은 동인작품서술에서 리암은 노엘의 관심과 애정을 원하는 철없는 캐릭터로, 노엘은 그런 리암을 상당히 귀찮아하는 만화에나 나올 법한 캐릭터들로 그려지곤 한다.

서로 fxxk을 날리면서도 리암이 공연 때 노엘에게 부비적거린다던가, 관객이 후드를 던져 노엘의 머리를 맞추자 냉큼 달려와서 벗겨주고 그 관객을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던지, 형 인터뷰에 끼어들었다고 스타세일러 멤버의 목을 조르질 않나, 형이 섹스하고 싶은 사람 2위(1위는 존 레논)라고 하질 않나

데뷔 때부터 이들의 싸움은 그 특유의 캐릭터와 맞물려 언제나 언론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의 싸움에서 어느 정도 부풀리거나 부추겨진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원래부터 어느 정도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다. 흔히 형제자매 사이에서 보이곤 하는 경쟁심리와 서로를 견제하려는 태도가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사례라고 보면 되겠다. 5집 활동 시기에는 답지않게 형제애가 두터웠으나, 6집부터 다시 조짐이 보이더니 7집을 낸 이후부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다시 사이가 엄청나게 악화되었다. 월드투어 중에서도 하루에 한두마디하면 많이 할 정도. 심지어 비행기도 같은 비행기 타기 싫다고 다른 비행기를 타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 8월 28일, 노엘이 밴드의 탈퇴를 선언하고, 이후 리암이 해체를 선언하면서, 교류가 끊기고 만다...

그런데 2015년 1월 26일엔 밴드의 해체 직후 이래로 리암과 노엘이 서로 연락을 하고 지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 후 2015년 3월 14일 리암이 노엘의 'Keep it dangerous' 투어의 백스테이지 패스를 목에 걸고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면서 팬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했다. 그런데 이건 리암의 패스가 아닌 것이 밝혀지면서 팬들은 리암이 희망고문을 시전했다며 허탈해하고 있다. 2014년에도 OASIS를 30분 마다 한 글자 씩 올려서 전세계의 팬들이 엄청난 멘션을 쏟아내며 재결합의 희망을 품었다. OASIS까지 올라오고 s가 안 올라오자 S 자판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는 멘션이 있을 정도. OASIS LG가 완성되자 팬들이 얼마나 환호했는지 모른다.[50] 또다시 1년 만에 이런 식의 트위터를 올렸으니 팬들은 희망에 부풀었다가 할 말을 잃은 상태. 리암은 트위터 상에서 노엘의 인터뷰에 관련하여 일일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하고 있는데 밴드 해체 후에 형을 더 신경쓰는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5.2 해체 관련 일화

밴드가 해체까지 이어진 결정적인 계기로 2009년 V 페스티벌 공연 취소사태 이후, 8월 파리 공연 바로 전에 있었던, 언론이 '놀라운 싸움(Wonderbrawl)'[51]이라 조롱하며 이름붙인 싸움이 꼽히는데, 확신할 수 없는 영국 찌라시의 보도를 포함해 여러 매체에서 나온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리암이 노엘에게 자두를 던졌고 리암이 자기 기타를 노엘에게 휘둘렀다. 노엘이 리암의 기타를 발로 밟아 부수자 리암이 기타 진열대로 달려가 노엘의 기타들을 역시 부쉈고 노엘은 차를 타고 떠났다고 한다.

리암이 오아시스 해체 이후 이탈리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이야기가 맞다고 한다. 다른 내용의 이야기들은 모두 루머로 판명되었다. 리암이 말하길 "내 기타는 내 기타였어. 근데 형 기타는 오아시스 거였다고. 그 기타를 산 돈 일부는 내 돈이었던 거지. 그걸 부수면 안 되는 거였어!"

2011년 7월 6일 있었던 노엘 갤러거 솔로활동 발표 기자회견에서 노엘이 묘사한 그 날의 싸움을 요약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체 인터뷰 영상

"파리에서 있었던 그 날 밤 동안에는, 리암은 꽤나 난폭해져 있었어. 꼭 WWE 레슬링 경기 같은 분위기에, 본인은 마초맨 랜디 새비지라도 된 것 같은 모습이었지.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건, 이렇게 온통 야단법석을 떠는 동안에 앤디는 옆에서 자기 신발이 몇 개인지나 세고 있었다는 거야, 한 마디도 없이. 리암은, "좆까 씨발" 하면서 탈의실 바깥으로 뛰쳐나갔고. 그러다가, 자두를 하나 집어와서는 훅 하고 던졌는데 그게 탈의실을 가로질러서 벽으로 처박혔어. 내 입장에서는 그런 식으로 끝나지는 않길 바랬는데, 왜냐하면 그랬다간 'Plum Throws Plum[52]' 하는 식으로 훌륭한 헤드라인 하나가 뽑혀 나왔을 테니까."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가 방에서 나간 다음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는데, 자기 탈의실 쪽으로 들어갔다가 거기서 자기 기타를 하나 들고 돌아와서는, 도끼라도 되는 양 휘둘러 대는거야. 처음엔 별 일 아닌 줄 알았던게 내가 뭘 어쨌든 간에 그건 정말로 쓸데없이 폭력적인 행동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는) 그걸로 내 얼굴 가죽을 거의 벗길 뻔했어. (기타가) 마침내 바닥에 떨어진 다음에는 내가 그 비극을 끝내버렸지(기타를 발로 밟은 것을 말하는 듯함). 거기 있던 밴드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우리 모두가 거기에 관련되어 있었는데 그 어떤- 누구도 한 마디를 하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말했지, '됐지, 나 나간다...' 그대로 차에 타서 거기 5분 동안 앉아 있다가, '씨발 안해' 그랬던 거지."

싸우다가 오아시스를 떠나겠다고 말한게 한두번이 아닌지라 비교적 낙관적인 팬들도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확정되고 말았다. Liam Gallagher : the end of oasis

5.2.1 형제 싸움 시즌 2

해체 이후 파리에서 있었던 싸움과 관련해 많은 인터뷰가 진행되었는데, 문제는 마지막 공연의 진상과 그날의 싸움을 묘사하는 내용이 서로 미묘한 부분에서 어긋나는 바람에, 서로가 서로를 언론을 통해 거짓말쟁이로 불러가며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쓸데없는 부분까지 비틀즈를 닮을 필요는 없는데

노엘이 솔로활동 발표 기자회견 당시 밝혔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절대로 오아시스 활동이 질렸거나 솔로 욕심이 나서 탈퇴하게 된 것은 아니다.
  • 리암이 오아시스 투어 프로그램에 프리티 그린 광고를 넣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했고, 나는 반대했다. 그리고 그것이 관계 악화의 시발점이 됐다.
  • V 페스티벌 공연이 취소된 이유는 리암의 후두염 때문인데, 리암 본인은 후두염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숙취일 수도 있을 것. (나는 별로 믿지를 못하겠다는 식으로 시니컬한 농담을 던지듯 말했다.).

2011년 7월 11일 이디스 보먼(Edith Bowman)이 진행하는 BBC Radio 1 프로그램에 출연한 리암은 노엘의 서술을 전면 부인한다.

  • 노엘이 숙취라고 짐작하고 있는 것은 절대로 사실이 아니며, V 페스티벌에서 나는 분명히 의사에게 후두염을 진단 받았었고, 의사가 공연에 나가면 안된다고 말했다.
  • 노엘과 나 사이에서는 프리티 그린과 관련된 어떤 논쟁이나 토론도 없었으며,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2011년 8월 12일 Japan Times에서 진행한 비디 아이 인터뷰에서 앤디 벨이 밝힌 개인적인 견해를 부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본문에 따르면 이 인터뷰는 노엘의 기자회견이 있은지 이틀 뒤에 진행된 것이라고 한다. 관련 전체기사

"All that sh-t … there were three of us in that room, and I’m telling you it was nothing to do with Pretty Green. I’m not going to add more fuel to the fire."

위 인터뷰 본문에서 앤디는 노엘의 기자회견을 봤다고 밝혔지만, 위 인용된 구절 같이 파리에서의 싸움은 프리티 그린에 대한 것 때문이 아니라고, 노엘이 거짓말을 한 거라고 한 것을 보면 기자회견을 자세히 보지 않았거나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하다. 노엘은 리암과의 파리에서 싸움이 프리티 그린에 대한 것 때문이라고 한 적이 없다.

이후 2011년 8월 19일 BBC 뉴스 엔터테인먼트 부분에서 리암이 노엘을 명예훼손으로 너 고소 소송[53]을 제기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해당 기사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앞에서 서술한 리암의 주장 및 견해 차이와 같으며, 이미 변호사를 통해 공식 사과 요구 편지를 보냈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사실 BBC 뉴스 보도 이전에 이미 더 선이 발빠르게 단독 보도라며 기사를 올렸으나 기사 특유의 광역 어그로성 때문에 소설 취급을 받으며 가루가 되도록 까였었다. 당시 공개된 성명서에서 그는 "(노엘의 추측은) 이미 락앤롤 농담의 수준을 벗어났으며 내 프로 정신을 의심받게 만들었다"며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은 그저 사과일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었다.

이에 노엘은 8월 22일 있었던 팬들과의 라이브 웹챗 이벤트 중에서, 어떤 팬의 질문에 "분명히 말하자면 그가 후두염 진단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걸 증명할 진단서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하며, "만약 그가 내 말 때문에 화가 나거나 했다면 사과하겠다"고 짧게 언급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2011년 11월 12일의 NME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로는 리암이 노엘이 짤막하게 사과한 사실(위의 라이브 웹챗 이벤트)을 알게 되어 소송을 취하한 상태로, 상황 자체는 일단락된 것으로 전해진다.

2011년 11월 21일, 데일리 미러 지를 통해 노엘이 리암이 제기했던 소송에 대해서 법원에 제출한 변론서가 공개되었다. 해당 기사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노엘은 09년도에 서로 싸울 당시의 갈등 상황과 94년부터 05년도까지 리암이 술을 마시고 공연을 망쳤던 일들, 그리고 09년에 파리에서 리암과 충돌했던 사건 등을 열거하며 자신의 발언이 정당하였으며, 따라서 해당 발언에 대해서 명예훼손이라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뉴스가 가디언 지 등 다른 언론에 인용 및 과장보도되면서 노엘이 리암에게 맞소송을 제기했다는 식의 기사가 퍼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관련 인터뷰 (해당 질문과 답변은 2:05부터)

5.2.2 재결합 가능성?

2011년 8월 17일 노엘 갤러거는 앱솔루트 라디오에서 진행한 Christian O’Connell의 아침 방송 인터뷰에서, 만약 자기 자신이 밴드를 탈퇴하지 않았다면,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발매 20주년이 되는 2015년에 오아시스는 MG 20주년 기념 투어를 돌았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이 다소 와전되어, 2015년에는 오아시스가 재결합을 할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인터뷰어: 해체한 지금 상황에 대해서 후회하는 건 없나요, 아니면 '이런, 우리가 이랬거나 저랬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거라도, 밴드가 그래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했을까요 아니면 어찌됐든 끝을 보았을 것 같나요?

 
NG: 뭐, 내가 그 때 그 차에 앉아서 성급한 결정을 내렸던 건 정말 후회스러워, 정말로,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 상황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본 다음 돌아가서, 공연을 끝내고, 그 다음 걸 끝내고, 그 투어에는 공연 두 개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건 내가 했던 (것들 중에서 가장) 경솔한 결정이었어, 그리고 우린 아마 모든 걸 마무리 지은 다음에 몇 년간은 다른 일들을 좀 했겠지, 2015년에는 뭘 할 생각이었냐면, Morning Glory의 20주년이 다가오는 해니까 그때쯤 아마도 우린 다시 돌아왔을거야. 새 앨범을 만들었을거고 그 앨범 수록곡을 전부 연주했을 거고 그리고 가장 위대한 공연으로 남게 되었을 테고, 당신은 거기 갔을지도 모르는거지. 관련 전체 방송 스크립트

그런데 2011년 10월 20일, 롤링 스톤 지에서 리암이 재결합 가능성을 시사하는 떡밥강화 발언을 해 많은 사람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해당 기사 그의 말에 따르면 "2015년에, 만약 우리가 서로 똥고집 부리는 걸 그만둘 수 있다면, 우린 20주년을 기념해서 투어도 다닐 거고 앨범 수록곡도 연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참고로 이 인터뷰는 스톤 로지즈의 15년만의 극적인 재결합 소식이 전해진 이후 나온 인터뷰이기에 더 뜻깊을 뻔... 했으나 사실 별 관련은 없다. 아래의 BBC 라디오 인터뷰에서도 강조하는 것이지만, 리암은 이번 일은 스톤 로지즈와는 별 관련이 없으며 여기서 재결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인들에게 달린 문제라고 말한다.

리암은 이 인터뷰에서, 노엘의 공식적인 발언(위의 앱솔루트 라디오 인터뷰)이 자신으로 하여금 MG 20주년 투어를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계속 그런 말을 꺼내고 있는건 그 인간 뿐이지." "난 그를 고통 속에서 꺼내주고 싶어. 그렇지만 내 생각에 그는 먼저 솔로 활동을 좀 해본 다음에 이제 아 내 동생 없이는 나는 잘 안 되겠구나 하는걸 깨달아야 할 것 같아. 알아서 스스로 깨닫겠지. 난 고려하고 있는 편이야 - 근데 난 그렇게까지 간절하지는 않아. 만약 (재결합이) 안 돼도, 신경 안써. 난 지금 비디 아이로도 충분히 행복하거든."

이후 하루 뒤인 21일 BBC Radio 4의 Profile에서도 MG 20주년 투어에 대한 리암의 긍정적인 답변이 이어졌다. 해당 인터뷰 그러나 인터뷰어가 재차 재결합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는 완전히 확정된 것은 아니며, 노엘이 원한다면 재결합할 생각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엘과는 애초에 이 문제를 상의해본 적이 없고, 심지어 그 몇년간 서로 이야기조차 해본 적 없다고. 이 날 빌보드 지와의 인터뷰에서 노엘은 재결합에 관련된 질문에 "올해는 아님." 이라고 짧게 일축한 바 있다.

2011년 10월 25일 노엘은 BBC Radio 1 Newsbeat와의 인터뷰에서 MG 20주년 투어와 재결합 가능성을 다시 한번 부인하는 떡밥회수 발언을 했다. 해당 기사 그의 말을 옮기자면, "나는 분명 이유가 있어서 밴드를 나온거고,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어." 라고.

2012년의 오아시스 재결합 관련질문좀 그만해 기자놈들아 노엘 인터뷰를 보아 노엘은 아직도 리암의 소송 건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듯. 링크 일단은 서로의 관계 개선이 더 중요해보인다.

2012년 9월 10일 노엘은 Nation radio의 Chris Blumer와 함께한 인터뷰에서 "설령 모든 세상의 굶주린 아이들이 이 일에 달려있다고 해도 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재결합 가능성에 못을 박았다. 그리고 일부 팬들에게도 못을 박았다. 해당 기사 우린 X나 예전에 끝났어. 더 이상 올라갈데가 없지. 그리고 리암은 노엘의 굶주린 애들 운운한 구절을 그대로 트위터에 올렸다. 그걸 굳이 일일히 받아 적을 정도로 형에게 집착하는 쪼잔한 동생

2013년 6월 26일 리암이 "뮤즈(음악의 신)가 원한다면 그렇게 되겠지"라고 글래스톤베리에서의 공연을 마친 후 인터뷰에서 그렇게 발언했다. 또한 리암은 자신을 제외한 비디아이(前 오아시스 멤버들)멤버들과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만 리암 본인과 노엘은 서로 연락을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Definitely Maybe 앨범의 20주년이 되는 2014년에 폴 웰러와 해피 먼데이즈를 게스트로 맞이하여 오아시스 재결성 공연을 열겠다는 계획이 나왔지만 노엘은 거부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340억원의 제의였지만 노엘 갤러거의 관계자에 따르면 오아시스 재결성은 완전히 가망이 없고, 노엘은 모든 제의를 거절하고 있다고 한다.

1월 25일, 노엘이 드디어 재결합 가능성을 예기하는 떡밥을 던졌다! 해당 기사

2015년 5월 12일(한국시간 기준), 리암 갤러거가 황색 찌라시언론 더 선이 보도한 "노엘 갤러거를 제외한, 원년 멤버인 본헤드, 귁시, 토니 맥캐롤과 재결합을 하겠다는 루머에 대해 부정하는 보도를 NME 매거진을 통해서 밝혔다. 오아시스 재결합이던 솔로 활동이던 리암을 무대에서 볼 일은 없을 듯 하다. 링크

2016년 7월초 리암 갤러거가 트위터링크에 짤막하게나마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내용에 따르면 자신은 오아시스의 결합을 바라고 있으니 노엘 갤러거측이 반대하는 상황 이라고. 노엘 갤러거 자신도 새 앨범을 거의 완성했다고 하는것을 보아 오아시스 재결합은 물건너 간걸로 보인다.

팬들은 15년쯤 있으면 할 거라고 본다. 돈 벌어야지
콘돔 5억개나 5억 파운드를 아침에 테이블 위에 올려놔두면 고려한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재결합에 관한 노엘과 리암의 입장을 정리해보자면, 리암은 노엘이 재결합 하자고 하면 지금 당장이든, 먼 미래이든 시기에 상관없이 언제나 같이 활동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한다. 다만 노엘이 하기 싫다는데 무릎꿇고 사정하면서까지 재결합을 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고 단지 노엘이 오아시스 활동을 하고 싶다면 자신은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입장이다. 반면 노엘은 재결합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꺼려하는 듯 하다. 그래도 오아시스로 다시 활동하는 것은 매우 멋진 일일 것이라고 하면서 재결합의 가능성을 아예 부정하지는 않았고 언젠가는 리암이랑 같이 활동할것 같다고 얘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고 만약 재결합을 한다고 하면 미래의 일일 것이고 현재는 아니라고 인터뷰마다 못 박고 있다.

5.3 축구 그리고 맨체스터 시티

훌리건 출신(...) 노엘과 리암은 모두 엄청난 축구광이며 어릴 때부터 맨체스터 시티의 열렬한 팬이다. 그렇기 때문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혐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보고있다.[54] 이들이 맨체스터 시티의 팬이 된 이유는 단순히 맨유 팬이 더 많았던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고...아버지가 응원하던 것을 그대로 따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노엘의 유별난 축덕질축구 사랑에 대해서는 이쪽으로.

갤러거 형제는 모두 뼛속까지 맨시티의 팬이기 때문에 아무리 바빠도 시즌 중에 자주 맨체스터 시티의 홈구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유일하게 갤러거 형제가 마주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큰 공간인데, 2012년 현재는 교묘하게 경기장에서 마주하는 걸 피하는 듯. 축구를 볼 때도 서로 멀찍이 떨어져서 따로 축구를 관람한다. 맨체스터 근처 호텔에 방을 잡아도, 같은 호텔에 있다고 하면 늦게 들어온 쪽이 알아서 호텔을 옮긴다는 듯. 노엘 갤러거는 '텔레비전에서만 종종 리암을 봤을 뿐 해체 이후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갤러거 형제는 맨체스터 시티에서 홍보 담당 보드진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진정으로 성공한 축덕. [55] 게다가 2005년 맨시티 홈구장인 이티하드 스타디움 에서 공연을 한 적도 있다.

내한공연 왔을때 어느 기자가 박지성에 대해서 아냐고 물었더니 자신들은 맨시티 팬이라 그런 선수 모른다고 했다...
참고로 박지성도 오아시스라는 밴드를 잘 몰랐던 듯하다. 그래서 박지성이 영국 모 토크쇼에서 비틀즈와 오아시스 중에 어느 쪽이 좋냐는 질문을 받자 오아시스가 어떤 밴드인지 되물어 사회자가 "오아시스는 맨체스터 출신 밴드고 비틀즈는 리버풀 출신 밴드"라는 말을 듣자 오아시스를 택한 적이 있었다. 질문자의 의도에 따라 박지성이 농락당한 듯(...)[56]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상승세를 이끌고 있는 리오넬 메시"오아시스의 재결합을 위해 월드컵을 우승하겠다"라는 말을 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리오넬 메시에게 오아시스의 음악을 추천한 사람은 다름아닌 노엘 갤러거가 신으로 모시고 있는 카를로스 테베즈. 2010년 영국 총선 때 노엘은 "난 투표용지에 Tevez is God(테베즈는 신이다)라고 쓰고 투표함에 던질거야. 난 테베즈를 뽑을거야."라고 말하면서, 자기 아들 이름을 테베즈로 짓겠다고 하는 개드립을 치기도 했다...물론 실제로 그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보다는 메시의 맨체스터 시티 이적이 오아시스 재결합을 위한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메시의 아르헨티나는 8강에서 잉글랜드의 숙적 독일에게 4:0으로 쳐발리며 광탈했기 때문. 이쯤되면 얻어맞지 않는게 다행 그리고 이 모든 해프닝의 원인이 된 메시의 발언이 실린 매체는 유명한 영국 찌라시 더 선. 진위 여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찌라시 인걸로 밝혀졌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오아시스의 열렬한 팬이다. 인터뷰에서 여러번 매우 좋아한다고 언급했지만 유나이티드의 선수라 갤러거즈는 별 반응이 없다...오아시스가 해체하기 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후 한 인터뷰에서는 맨체스터에서 살던 시절 길거리에서 몇번 오아시스 멤버들을 봤지만 말은 못걸었고 카카도 자기랑 취향이 비슷하니 카카와 함께 선수들을 설득해서 돈을 모으면 자기들만을 위한 오아시스 콘서트도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기도 했다.유나이티드가 아니라 시티로 갔어야지

6 국내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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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경향신문에 보도된 오아시스. 형제 구분 못하는 건 이 때도 마찬가지 당시의 브릿팝 열풍은 우리나라 또한 예외가 아니었고 주로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등 PC 통신의 락음악 동호회를 중심으로 오아시스는 큰 인기를 모으며 팬클럽이 결성되고 이들에 대한 활발한 정보가 오고 갔다. 록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음반 매장이 아닌, 서울의 웬만한 대형 레코드점에는 국내에 정규발매되지 않거나 정식 수입되지 않은 오아시스의 싱글은 물론, 부틀렉까지 구비해 놓았을 만큼 판매량도 인기도 보장된 밴드였다.그만큼 비쌌다 2집 히트곡 Don't Look Back In Anger는 당시 유행하던 팝음악 모음집 MAX 첫 번째 시리즈[57]에 수록되는 등 일반 팝음악 팬에게도 통할 수 있는 흔치 않은 밴드였다.

당시 한국 팝 시장은 빌보드 미국 차트에 굉장히 의존적이라(음악 잡지나 프로그램들도 유럽 차트는 소개 안해도 빌보드 싱글 차트와 앨범 차트는 100위, 200위까지 전부 수록했다) 영국, 유럽 쪽 아티스트와 브리티시 락 밴드의 인기는 매니아 층에 비해 대중적인 폭을 가지지 못했는데 오아시스는 2집이 빌보드 4위, 3집이 빌보드 앨범 차트 2위(당시 1위가 I'll Be missing you로 신드롬을 만들던 퍼프 대디)에 랭킹되면서 범 대중적인 인기를 끌 수 있는 요인이 되엇다.

오아시스가 세계적인 스타로 우뚝 선 3집부터는 한국 소니 뮤직에서 싱글이 정식 발매되어 5천원이라는 착한 가격에 구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금방 물량이 떨어져서 매장마다 가격을 올려 받거나, 개별적으로 영국에서 수입해와서 비싼 가격으로 싱글을 구해야 했다. 인기에 비해서 내한 공연이 무척 늦게 성사된 편이지만, 이렇게 꾸준히 유지해온 팬덤의 에너지가 극대화되는 계기가 되었고 내한 공연의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국내 음악 시장에서 오아시스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해체 이후에도 인기가 지속되고 있다.

최근 노엘 갤러거의 성공적인 솔로 활동과 내한 공연 덕분에 10대의 젊은 팬층이 유입되는 유일한 90년대 락 밴드. 락음악 팬들도 노엘 갤러거가 어린 나이의 신규팬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점을 굉장히 중시 여기고 있다.

6.1 내한 관련

2006년 내한공연 - 1994년 오아시스의 성공적 데뷔로부터 10여년 간 오아시스를 짝사랑 해오던 한국의 팬들은 드디어 올림픽홀로 이들을 맞아 들이기에 이른다. 예매 3주만에 5500여 석이 매진되고 기획사 측에서 특별히 100석을 추가시켰다. 관중의 호응이 대단했으며, 타국에선 찾아볼 수 없는 넥타이 부대(퇴근 직후 공연장을 찾은 중년 남성)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유명한 일화로 그 넥타이부대원 중 한 명이 대형 스피커 위에 올라가 괴이한 춤을 추며 열광했는데 리암이 공연 도중 관계자에게 '저 남자좀 내려가게 해! 웃겨서 노래를 못 하겠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으며, 공연 도중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끝난 후 무대 뒤에서 노엘은 '내가 해왔던 공연 중 거의 최고 수준'이라고, 리암은 '관객들이 정말 무섭더라'고 떠들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이후 싱가폴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리암은 '관객이 미친 듯이 광분한 최고의 공연 중 하나였다'고 평했다. 이웃나라 일본에 비해 적은 음반판매량을 비롯, 락음악이 기를 펴지 못하는 작은 음악시장으로 오아시스에겐 거의 인식 밖의 나라였을 한국은 이 공연을 통해 그 존재감을 밴드에 알렸으며, 이후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의 전화 인터뷰, 2009년 두 차례의 내한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에게 보낸 한국의 오랜 짝사랑이 작은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2009년 4월 1일, 오아시스는 'Dig Out Your Soul' 세계투어의 일환으로 이전보다 큰 올림픽 공원 체조공연장에서 두 번째 내한공연을 치렀다. 이 때는 10,000명 이상의 관객이 모였다. 오아시스는 투어 초기에 짜여진 셋리스트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 투어에서는 오아시스와 그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곡 'Live Forever'가 빠져있어 팬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한국 공연관계자가 팬들이 이 곡을 듣길 원한다는 간곡한 바람을 전했던 일, 공연에 앞서 호텔 앞에서 팬이 이 노랠 불러달라 직접 청했던 일을 기억한 노엘이 특별히 어쿠스틱 연주와 함께 Live Forever를 불러 세계의 오아시스 팬들을 놀라게 했다. 공연 중간중간 팬들이 합심하여 노래를 따라불렀던 영향 또한 크다. 이는 2015년 현재까지도 한국 팬들간에 회자되는 기억이다.

이 때 오아시스는 대기실에 그들이 가져온 맨체스터 시티 깃발을 한쪽 벽면에 걸어줄 것을 요청했다.역시 축덕 기획사는 무대연출팀까지 동원해서 성공적으로 깃발을 걸었다고.

끝난 후 열렬한 반응에 신이 난 그들은 7집 투어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노엘이 포함된) 술파티를 벌였다. 시설 이용 시간이 끝나가는데도 일어설 생각을 않는 그들에게 쩔쩔매던 관계자들이 대기실을 치워야 하니 비켜달라고 말하자, 밴드는 '이 의자테이블만 빼고 마음대로 치워도 돼'라며 주변에서 무슨 소란이 일어나건 아랑곳 않은 채 날이 바뀌도록 술을 마셔댔다고. 특히 노엘은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취했는데, 09년 투어 중 노엘이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술파티는 새벽 세시가 되어서야 끝났다고. 경비원 아저씨는 그 때까지 퇴근을 못하셨다.

2009년 내한 전후는 노엘과 리암이 각각 블로깅트윗을 하고 있던데다, 국내 오아시스 팬덤이 온라인상에서 극도로 활성화되어 있던 시기라 많은 일화들이 전해진다. 시간순으로 정렬하면 이렇다.

  • 리암, 공연 전날 도착 직후 트위터에서 '한국, 우리가 왔다...'
  • 호텔로 이동해 갈비를 평균 1인당 6인분씩 먹어치움.
  • 리암, 트위터에서 '나 한국에서 설사터졌어!' 이후 NME에서 리암 최고의 트윗으로 뽑았다(...).
  • 호텔에서 매너있게 팬들과 인사를 나누던 리암이 아주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곧바로 악수를 해보니 손에 물기가 전혀 없고 따뜻하더라는 이야기. 흠좀무. 그래도 따뜻한 물이 묻어있는 것보단 낫잖아
  • 7집 활동개시 직전 토론토 공연에서 노엘이 당했던 테러무슨테러를 당한거지[58] 테러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공연 보안이 강화된 후로 단 한 차례도 무대아래로 내려오지 않던 리암이, 모든 곡을 끝내고 밴드가 긴 후주를 연주할 때 무대 아래로 뛰어내려와 탬버린을 팬에게 직접 건네고 퇴장. 이후 공연에서는 재미라도 들렸는지 시도때도 없이 뛰어내렸지만, 한참 옛 인터뷰에서 노엘은 '리암이 객석으로 뛰어내리는 건 누군갈 때릴 때 뿐이다'라 말한 바 있었다. 늘 그렇듯 과장과 농이 섞인 거지만.[59]
  • 리암, 트위터에서 '어제 한국 서울 공연에서의 모두에게 그저 감사를 전하고 싶어. 90년대를 떠올리게 했어, 7월에 꼭 다시 만나자...(원문: I just wanna thank everybody that was at last nights gig in Seoul Korea. It reminded me of the 90's, we must do it all again in July... LG)' 리암에게서 이런 식의 공연후기는 확실히 이례적이다. 리암이 말하는 90년대란 오아시스 최고의 전성기를 가리킨다.
  • 노엘, 블로그에서 '그(한국) 공연은 그저 놀라웠다. 근래의 공연 중 가장 뛰어난 공연이었다. 누가 이럴 줄 예상이나 했겠는가? 적어도 내겐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한국 애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한국 관객들을 '애들(kids)' 등으로 칭하는 점, 공연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얼굴로 객석을 보는 표정 등 한국 관객을 꽤 귀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실제로 관객 연령층이 비교적 낮기도 하고.
  • 약 1개월 후, 기타리스트 겜 아처는 남미에서 가진 공연 전 TV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연이 뭐였냐는 질문에 '내 전 생애 최고의 공연이었다'는 언급을 덧붙여 서울에서의 09년 공연을 꼽았다.
  • 약 3개월 후 영국 리코 아레나에서 공연하던 오아시스는 한국의 한 소녀팬이 태극기와 내한당시 제작했던 수건(그들의 앨범 제목이자 투어 제목인 Dig Out Your Soul을 패러디한 Dig Out Your Seoul니 서울을 파내버려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을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노엘은 '너 공연 보러 한국에서 이 먼 데까지 온 거야? 좋은 일이야' 하고 말을 건네는 등 반가움을 표시했다. 리암은 '우리 다음주에 한국 간당!' 하고 방정을 떨기도. 물론 모두 마이크에 대고. 실제로 그 당시에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을 앞두고 있었는데 1주일 뒤가 아니라 2주일 뒤로 예정되어 있었다. 리암이 날짜를 착각해서 1주일 뒤라고 얘기한 듯 하다.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고 해당 링크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3분 38초부터 들어보자.

2009년 영국 코벤트리 리코 아레나 공연 : The Masterplan

노엘 - "You come all the way from Korea! Good For you.(한국에서 먼길 왔구나?!! 좋은 일이야)"

리암 - "We're going there next week.....We're going there next week.(우리는 한국에 다음 주에 가..x2)"

2009년 서울 올림픽공원 공연 : Live Forever
2009년 서울 올림픽공원 공연 : Don't Look Back in Anger

2008~9년 투어를 함께 뛰는 드러머 크리스 섀록[60]의 드럼 테크닉도 끝내줬다는 후문1
스탠딩 관람석의 점핑을 견뎌내지 못하고 여러명이 실려 나갔다는 후문2
[2]

'7월에 또 보자'는 리암의 약속은 2009년 7월 옐로우나인이 준비하는 20,000명 이상의 관객이 모이는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에 오아시스가 헤드라이너로 발탁되는 것으로 지켜졌다. 이들은 페스티벌 3일째에 출연[61]했고, 열성적인 팬들 대부분은 페스티벌 1일째부터 이미 지산에서 3박 4일의 여정을 시작하고 있었기에 불행히도 공연 전후의 뒷이야기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 리암, 트위터에서 '일본이랑 한국아, 이번주에 너흴 만날 일을 목을 빼고 기대하고 있어!!'
  • 리암, 도착 직후 트위터에서 '한국아, 우리가 왔다...' 복붙
  • 노엘, 공연 직전 인터뷰 중 한국 관객이 어떻냐는 말에 매우 짜증을 내며 '일본이랑 너네나란 자꾸 왜 그런거 물어봄? 어느 나라건 오아시스 팬들은 똑같아 그딴거 자꾸 물어보지 마' 인터뷰어와 기고만장했던 한국팬들을 쫄아들게 만든 살떨리는 반응이었다.
  • 지산 측은 오아시스 공연에 앞서 무대 앞에 아티스트에게 보이게끔 'Thank you = Kam Sa Ham Ni Da'라고 써붙여 두었다. 리암은 등장하자마자 그것을 서툰 발음으로 따라했으며 후에도 몇 차례고 '캄싸함니다'를 연발했다. 이 또한 이례적인 일. 프랑스 토크쇼에선 프랑스어 하나 해보란 거듭된 부탁에 '난 영어도 겨우 하는데'라며 거절했던 사람이다.
  • 페스티벌 시즌 정규 리스트에 포함된 'Live Forever'(이번엔 노엘 솔로가 아닌 리암이 보컬을 하는 풀밴드 버전)를 부르며, 리암은 스스로 부르지 않고 관객들의 선창을 유도하기도 했다. 4월의 떼창이 마음에 든 듯. 다소 뜬금없어서 원활하게 성사되진 못했다.
  • 직전 일본 공연에서 노엘은 'Whatever'를 불렀고, 한국 팬들은 이를 불러줄 것을 엄청나게 어필했으나 가볍게 씹혔다. 왓에버는 일본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며, 더불어 노엘과 오아시스 멤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곡이다.
  •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은 09년에 1회째 열린 것으로 사고를 우려해 무대와 객석간에 이동이 불가능하도록 해 두었었다. 리암은 공연 막판에 그에 불만을 표하며 가까스로 객석에 내려와 자신의 브랜드 '프리티 그린'의 모자, 탬버린을 팬에게 전했다.
  • 리암, 무대에서 내려간 지 7분 만에 트위터에서 '대한민국, 그냥 너네가 존나 씨발 끝내준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대한민국 정말 사랑하고, 내 취향의 사람들인거 같아...영원히 살기를, 리암 갤러거'(원문: 'Korea, just wanna say you were absolutely fuckin amazing, I love your country, my kinda people... Live forever LG'. 리암은 한국의 팬들을 진짜 사랑하는 게 맞다. 끝의 Live forever는 이 당시 리암이 곧잘 붙이던 인사말.)
  • 노엘, 블로그에 '공연(한국 공연)은 굉장했다. 걔넨 박자에 딱딱 맞춰 박수 따윌 치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장관이더군.'

6.2 Butterfly 표절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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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물론 합성이다. 노엘이 GD를 알리가

2009년 8월경 빅뱅의 멤버 G.DRAGON과의 표절시비가 붙었다. G.Dragon이 공개한 30초짜리 티저곡 3곡중 'Butterfly'라는 곡이 'She's Eletric'과 매우 흡사하였기 때문이다.번안곡 수준

그들 스스로가 표절시비에 휘말린 적 있을 때[62] '그래 우리 베꼈다 어쩔래' 신공으로 상황을 타파한 전력이 있으며, 완전히 새로운 창작은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옛 곡의 오마주를 긍정하는 밴드이다. 또한 노엘은 오히려 '누군가 우리 곡을 베껴도 아무 상관 없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6.3 짤방

국내에서는 하단의 짤방으로도 유명하다. 인터뷰 DVD Lock The Box의 캡쳐이다.

파일:Attachment/오아시스(밴드)/lock the box.jpg

사실 이 짤방의 정체는 웃긴 인터뷰를 그대로 모아놓은 것을 붙여놓은 것이었으나, 이 짤의 경우에는 너무 절묘하여 그대로 퍼졌다.

파일:Attachment/5 8.jpg
사실은 이런 내용이다. 인터뷰 끝자락인 35분 18초경에 나온다.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마지막 짤방의 원문은 "You bunch of cunts. So buy fucking T-shirt and poster on the way out you fucker." 영국 영어를 좀 아는 사람이면 알겠지만 저 짤방의 욕설 번역은 매우 적절(...)한 편. 웃길려고 욕 집어넣은 게 아니다!

이외 자세한 정보는 오아시스(밴드)/짤방을 참조.

이후 '엿같은 티셔츠'는 '동그란 시디'와 함께 노엘 갤러거의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노엘의 솔로 밴드인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의 2015년 내한공연 때, 매점에서 티셔츠의 품목 이름이 '뭐 같은 티셔츠'였다(...) 그리고 시디 품목 이름은 '동그란 시디'

7 Discography

7.1 정규

이상의 정규 앨범 7장 모두 UK 앨범 차트 1위 기록.

7.2 비정규

7.2.1 라이브 DVD

  • Live By The Sea
  • ...There And Then[67]
  • Familiar To Millions[68]
  • Lord Don't Slow Me Down[69]

7.3 싱글

7.3.1 UK 차트 1위

  • Some Might Say(1995)
  • Don't Look Back In Anger(1996) - 빌보드 55위
  • D'you Know What I Mean?(1997) [70]
  • All Around The World(1998)
  • Go Let It Out(2000)
  • The Hindu Times(2002)
  • Lyla(2005)
  • The Importance Of Being Idle(2005)

7.3.2 UK 차트 2위

  • Roll With It(1995)
  • Wonderwall (1995) - 빌보드 8위
  • Stand By Me (1997)
  • Stop Crying Your Heart Out(2002)
  • Little By Little/She Is Love(2002)
  • Let There Be Love(2005)

7.3.3 UK 차트 3~10위

  • Live Forever(1994) - 10위
  • Cigarettes & Alcohol(1994) - 7위
  • Whatever(1994) - 3위
  • Who Feels Love?(2000) - 4위
  • Sunday Morning Call(2000) -4위
  • Songbird(2002) -3위
  • Lord Don't Slow Me Down(2007)[71] - 10위
  • The Shock Of The Lightning(2008) - 3위(빌보드 93위)
  • Falling Down(2009) - 10위

7.3.4 UK 차트 11~40위

7.3.5 그 외

  • Morning Glory(1995)(호주에서만 발매된 싱글) - 호주 25위
  • Champagne Supernova(1996)(미국 등 몇몇 국가에서만 발매된 싱글) - 빌보드 얼터너티브락 차트 1위
  • Don't Go Away(1998)(일본에서만 발매된 싱글) - 일본 49위
  • Where Did All Go Wrong?(2000)(라디오 프로모션용 싱글)
  • Emiya Mulzomdao

8 관련항목

  1. '얼터너티브'라는 음악의 범위를 어느 정도로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이견이 생길 수 있다. 만약 좁은 의미로 사용한다면 오아시스는 얼터너티브가 아닌 모던 록, 특히 흔히 브릿팝이라고 부르는 '브리티시 모던 록'에 속한다.
  2. 90년대에 가장 중요한 밴드를 언급할때 너바나, 라디오헤드 등등과 함께 빠지지 않는편이다. 단, 평론가들과 음덕들 등의 평가 면에서는 두 밴드에 비해 낮게 평가되며애초에 90년대 이후 밴드중에서 너바나랑 라디오헤드보다 높게 평가되는 밴드가 얼마나 있겠냐만 같은 틀에 묶이는 블러나 펄프에 비해서도 높지 않다.(평론가들이나 하드한 음덕들은 혁명적이고 실험적인 음악과 다양한 시도를 하는 아티스트를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오아시스는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내는 것과는 거리가 먼 밴드이다. 오히려 그들의 음악은 상당히 보수적이며 언제나 기본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존에 만들어져있던 것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해석한 음악을 내놓는 스타일. 이러한 요인들 때문인지 여러 장르의 음악을 실험한 블러의 후기 앨범이 침체기에 있던 오아시스의 앨범보다 높게 평가되고 오아시스는 급진적인 평론가들에게 진부하고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며 까이기도 한다.) 그런데도 가장 중요한 밴드 중 하나로 꼽힌다는 것은 오아시스가 갖는 상징성, 인기와 브릿팝 무브먼트의 임팩트를 반증하는 것.
  3. 만화로 듣는 올댓록은 주로 락 역사의 흐름을 따라 중요한 뮤지션들을 소개하는 만화인데 오아시스는 이전 연재분과 아무런 연결고리없이 정말 뜬금없이 등장했다. 이는 일부 개념없는 오아시스 빠돌이들이 이전 내용들은 상관없이 오아시스나 그려달라고 진상을 부려댔기때문에 작가가 어쩔수없이 오아시스를 그린것.먹고 떨어져라 따라서 당연히 퀄리티가 다른 뮤지션들에 비해 높을리가 없다.
  4. 더 레인(The Rain)을 소개하는데 비디 아이의 사진을 사용했다.
  5. 대표적으로 밴드 전권을 잡는다는 조건으로 노엘 갤러거가 밴드에 가입했다는 이야기. 해당 위키문서에 루머에 대한 설명이 있다.
  6. 콜드플레이, 린킨 파크, 그린 데이 등과 함께 90년대 이후로는 최대 수준.
  7. 사실 이건 잘못 알려진 소문이라고 한다. 2009년 5월 Q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노엘은 "그건 잘못 알려진 소문이다. 물론 초창기에는 내가 일부러 그런 식으로 인터뷰하기는 했었다" 라고 말했다.
  8. 유명한 매드체스터 밴드로 노엘이 로디(락밴드의 지방공연 매니저)로 일했던 밴드라고 한다. 포스터에는 개최지 중 하나였던 스윈든의 오아시스 레저 센터가 기재되어 있었다.
  9. 크리에이션 레코드 소속 밴드인 18 wheeler의 앨런 호크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
  10. 처음 계약 당시 노엘은 써놓은 곡이 무척 많은 척을 했고, 회사 측은 돈이 무척 많은 척을 했다. 노엘은 계약을 하고 난 뒤 기차를 타면서 "지금부터 미친듯이 곡을 써야겠다."라 생각했다고 한다.
  11. 이 기록은 2006년 악틱 몽키스의 1집에 의해 깨진다.
  12. Live Forever.
  13. 4개나 노미네이트 됐는데 1개만 받은 이유는 당시 브릿팝최고의 명반으로 평가받는 Parklife를 발매한 블러가 나머지 3개의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14. 블러는 최고의 뮤직비디오상까지 받아 4관왕을 차지한다. 또, 블러의 리더인 데이먼 알반이 '최고의 그룹상' 수상 소감을 말할 때 같은 후보였던 오아시스와 같이 받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언급한다.
  15. Supersonic의 미국버전 뮤비와 Cigarettes & Alcohol의 뮤비를 짜집기한 영상이다.
  16. 현재는 ABBA의 Gold와 Adele의 21에 밀려 5위. 당시 1, 2위는 Greatest Hits, 비틀즈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
  17. Wonderwall
  18. Wonderwall
  19. 당시 영국 인구의 5%라고 한다.
  20. 첫 번째의 넵웨스 공연의 사진은 오아시스의 두번째 베스트 앨범 Time Flies에 쓰였다.
  21. 하루에 42만, 일주일 동안 76만. 현재는 Adele의 25의 80만에 의해 깨졌다. 다만 아델도 하루 42만의 기록은 깨지 못했다.
  22. 이 때문인지, 아니면 과거 마약에 찌들어 성공에 거만해하던 흑역사를 생각나게 하는지(...)는 몰라도 노엘 본인도 Be Here Now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 리암은 Be Here Now를 옹호하며 앨범에 대해 혹평하는 노엘을 이해할 수 없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23. 정확히 말하자면 본헤드는 4집 제작 시기에 노엘이 내린 금주령을 어긴 것이 계기가 되었고, 귁시는 신경쇠약을 이유로 스스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하지만 결국 본헤드가 나갈 무렵에 같이 나갔다.
  24. 이후 토니는 2010년 10월에 자신의 오아시스 시절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Oasis: The Truth라는 자서전이라고 쓰고 본격 노엘 갤러거 까는 책을 낸다.하지만 오아시스 앨범 Don't Believe the Truth와 대조|
  25. 제이 달링턴은 본래 쿨라 셰이커의 멤버. 라이브 공연시 뒤쪽에 있는 예수 닮은 사람이 달링턴이다.
  26. 메인 송라이터인 노엘 갤러거 뿐만 아니라 보컬 리암 갤러거도 이러하다.
  27. 다만 초기에 폴 '본헤드' 아서스는 노엘에게 바레코드만 치라고 명령받았다고 하며, 실제로 오아시스에 본헤드와 귁시가 있었을 시절에 본헤드가 기타를 치는것을 보면 전부 바레코드로 연주한다. 물론 이것은 본헤드의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기타 실력을 고려한 결정이었고(노엘이 기타 솔로를 혼자 다 해야하기 때문) 나중에 겜 아처가 오아시스에 들어오고 나서는 연주 방식이 달라졌다.
  28. 크리에이션 레코드의 사장인 앨런 맥기는 Definitely Maybe를 펑크락 앨범으로 분류했다.
  29. 노엘의 솔로 음악들이 오아시스의 음악과 다르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덕분에 노엘 솔로 음악중에서 팬들이 리암이 불렀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노래들이 많다.그러니까 재결합좀...
  30. 사실 오아시스 초창기 시절의 라이브를 보면 노엘은 노래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노엘은 데뷔 후 10년정도 흘러서야 노래를 잘 부르게 되었다.
  31. 노엘이 마약을 끊은 직후의 앨범인데, 아무래도 그는 청년 시절의 대부분을 마약과 함께 보냈기에 그 후유증이 엄청났을 것이다. 그는 한 때 마약을 끊은 이후로 우울증과 공황 장애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4집 세션의 곡들 대부분은 그의 어두운 내면과 혼란스러움 등을 담고 있다. 대표적으로 Gas Panic!, Where did it all go wrong?, Roll it over 등. 참고로 훗날 6집의 싱글이 되는 Let there be love는 사실 4집 세션 때의 곡이다.
  32. 평론가들은 일반 대중과는 다른 시선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33. 물론 기본적으로 듣기 편한 기타 팝 락이 기본이지만 틀 내에서는 더욱 깔끔한 사운드를 지향하고 여러 영향을 받아들였다. 비디 아이는 사실상 몇십년 전의 음악을 했기 때문에 차이가 나는 부분.
  34. 풀네임은 레논 프란시스 갤러거. 이름 한번 엄청나다.
  35. 물론 U2의 음악에 대해선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입장이며, 노엘과 보노는 꽤 가깝게 지내는 사이다. 심지어 2015년 우리나라에서 피키캐스트가 주관한 인터뷰에서 에릭남이 노래방 가면 누구노래 부를꺼냐고 묻자 U2 노래 부르겠다고 대답했으니, 말 다했다. 단지, 보노의 왕성한 사회활동이 꽤나 못마땅한듯. 그러니까 암환자니 아프리카같은 소리 그만해라 아들내미가 U2빠돌이
  36. KID A 전까지는 칭찬했으나 그 이후로 지나치게 자신들만의 세계로 들어간다면서 본격적으로 까기 시작했다.
  37. 노엘 한정으로, KID A 이후의 음반을 딱히 미워하는 것만은 아닌듯 하다. Q Magazine 2002년 5월호에는 Amnesiac에 대해, 그리고 Q magazine Exclusive! Noel Plans Solo Album 인터뷰에서 톰 요크 싱글에 대한 호의적인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 욕이 들어갈 때도 있지만 꾸준히 라디오헤드 음악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항상 지적이 나오는 건 앨범이 나올때마다 예측할 수 없는 진취성과 전쟁과 환경과 관련된 어두운 정치색에 대한 반감이다. 노엘의 성격상 "즐거운 음악을 해봐라"는 애증에 가까운 불평에 가까운 듯. #와 CROSSBEAT 지 2009년 10월 인터뷰를 보면 연주와 공연에 관해서는 호의적인 면도 보인다.
  38. 리암의 경우에는 다소 의미가 없는 것이 2011년OK Computer를 한 번도 듣지 않았다는 인터뷰를 했기 때문. OKC마저도 안 들었는데 더욱 내면으로 침잠하고 대중적인 사운드를 자른 뒷 앨범들을 유심히 들었을 가능성은 그다지 없고... 그냥 맘에 안 드나보다(...)
  39. 블러와의 관계 참조.
  40. 노엘 갤러거와는 사적으로 친하다고 한다. 같이 노래 부른 적도 있지만, 리암은 싫어한다. "크리스 마틴은 꼭 무슨 지리 선생같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사실 크리스마틴은 런던대학교 역사학과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리스어나 라틴어 등으로 된 고전에 대해 연구하는 과를 나왔다.) 또, 노엘의 현재 부인인 사라가 한 시상식에서 당신들 노래가 좋다고 하자 콜드플레이의 멤버들이 사라를 스파이로 생각한 적이 있다고.
  41. 스타세일러 쪽에서도 싫어한다....만 Cast No Shadow는 공연에서 자주 커버곡으로 연주했다. 노엘이 스타세일러를 싫어하는 이유를 굳이 꼽자면 그들의 곡인 'Alcoholic'을 깐 전적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노엘은 'Alcoholic'에 대해 자기는 "아버지에게 맞더라도 'Live Forever'를 부르는데 왜 이것들은 징징대냐(...)"라는 식으로 인터뷰 한 적이 있다.
  42. 노엘은 쭉 로비를 온갖 말로 욕해왔고, 리암의 경우 로비 쪽에서 로큰롤한다면서 리암한테 붙어다닐 때도 있었으나 로비 윌리엄스가 솔로 앨범으로 크게 성공하고 오아시스가 추락하면서 서로 설전을 벌이다가 사이가 안좋아졌다.
  43. 노엘 曰 "세상에서 제일 X같은 밴드의 음악을 들을만큼 내가 충분히 오래 살아서 기쁘다".하지만 이분의 노래를 듣고 난다면 생각이 바뀔걸? 그런데 sum41의 보컬인 데릭은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를 방송에서 어쿠스틱 버전으로 부른 적이 있다.
  44. 노엘, 리암 둘 다 깐다.
  45. 오아시스라기 보다는 노엘 갤러거 개인적으로 깠다. 2015년에 공개되었던 Hello를 겨냥하였는데 너무 올드한 스타일 덕분에 "할머니나 듣는 노래" 같다라며 이 노래에 열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가 주요 골자이다.
  46. [1]
  47. 마룬 5의 베이시스트 마이클 매든이 노엘을 만났을 때 "당신 때문에 기타를 처음 배우게 되었다"라고 말하니까 노엘은 "어느 밴드에서 베이스를 치는데? (A: 마룬 5요) 뭐? Rock 'n' Roll Star를 듣고서 그딴 노래를 만들었다고?" 라고 말했다.(...) 물론 농담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후에 "마룬 5 나올 때 화장실 다녀오세요"라고 드립을 친 걸 보면 딱히 마룬 5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2008년 8월 노엘 인터뷰 참고로 그 날 새벽에 으리으리한 집에 가서 스톤 로지스의 노래를 들으면서 놀다가 또 매든을 만났는데, 매든이 "여기가 내 집인데요" 한마디에 "집 열라 좋네, 친구."라고 한 마디했다.
  48. Roll With It과 Country House로 시작된 브릿팝 전쟁 이전에는 서로 미국에서 라디오에도 같이 출연하기도 했다. 오히려 당시의 영국 언론들은 스웨이드의 프론트맨 브렛 앤더슨과 블러의 프론트맨 데이먼 알반, 엘라스티카의 프론트우먼 저스틴 프리쉬먼의 삼각관계를 이용하여 스웨이드와 블러를 라이벌로 몰아가려 했었는데..
  49. "물론 난 리암을 좋아한다. 컵라면만큼은 아니지만." - 노엘 갤러거
  50. 그 직후 갤러거즈 바라기 NME에 의해 내한 당시의 '한국에서 설사 터졌어!' 와 함께 리암의 트위터를 사랑하는 이유 11개중 하나로 뽑혔다(...). 팬들이 얼마니 관심을 가졌는지 알수있는 부분.
  51. 오아시스의 대표곡인 Wonderwall을 패러디한 것이다.
  52. Plum에는 자두라는 뜻 외에도, 모든 사람이 동경하는 직업이나 지위, 역할 등을 뜻하기도 한다.
  53. Accusation이 흔히 고소로 번역되기에 이번에도 고소를 했다는 식으로 알려졌으나, 이 사건은 형사가 아닌 민사 사건에 해당되기 때문에 정확히는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한 것이 맞다.
  54. 굳이 갤러거 형제가 아니더라도 맨유와 맨시티 팬들은 대개 서로를 싫어한다. 맨체스터 시티 항목 참조
  55. 맨시티가 굉장히 암울한 성적을 내던 시절, 경기가 끝나고 경기장을 나가는 노엘에게 맨시티 팬들이 "노엘, 어떻게 좀 해줘."라 했다. 이에 대한 노엘의 답은 "난 200파운드밖에 없는데."
  56. 당시 박지성은 맨유소속이였고, 설명했다시피 오아시스는 맨시티의 빠이며, 맨유 까다.
  57. MAX, NOW 등은 음반 차트 1위를 독식하고 넘버링이 두 자리수에 달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 수록되느냐가 해당 가수의 한국 음반 판매량을 좌우했으니
  58. 기타를 치던중 괴한에 의해 밀쳐졌다.
  59. 탬버린은 데뷔초부터 리암이 연주하던 악기로 공연 끝에 곧잘 팬들에게 던지거나 선물한다. 한국에서만의 이벤트라는 건 와전된 것이다.
  60. 노엘이 가장 존경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이라는 리 메이버스가 주축이 된 초기 브릿팝 밴드 The La's의 전 드러머 출신.
  61. 이 출연 뒤 단 두 공연 후 오아시스는 해체한다.
  62. 1집 시절 코카콜라의 CM송과 수록곡 Shakermaker 간의 4초 표절시비가 걸린 적 있었는데, 그 때문에 호주달러로 50만을 지불하게 된 노엘이 "자, 이제 펩시를 마시자."라고 말했다. 참고로 호주달러로 50만 달러한화로 약 5억...
  63. 노엘이 더럽게 싫어하는 앨범. 그래도 노엘이 1번 트랙보고 좋다고는 했다(하지만 동시에 너무 길다는 것을 지적했다.). 리암은 3집 수록곡인 Don't Go Away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리고 형에게 Be here now(앨범과 제목이 같은 곡) 류의 곡을 더 써줬으면 좋겠다고 한적도 있다.
  64. 앨범 부클릿을 보면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에 들어있는 콜라주 화보와 같은 발상이다.
  65. 노엘이 더럽게 싫어하는 앨범 2. 참고로 평단도 싫어한다. 문법적으로 오류가 있긴 한데 앨범 이름 맞다. 원문은 아이작 뉴턴의 유명한 말인데, 노엘이 술에 취해서 잘못 옮겨쓴 것을 그대로 앨범 제목으로 썼다고 한다. Shoulder는 특정한 하나의 어깨를 가리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복수로 쓰이기 때문에 오류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발'을 말할 때는 Shoes라고 하고, 특별히 '신발 한 짝'을 지칭할 때만 Shoe라고 하는 것처럼.
  66. 인터넷에서 훌륭한 짤방 소스로 쓰이는 인터뷰 DVD Lock The Box가 수록되어 있다.
  67. 1996년 메인로드 스타디움(맨시티 전 홈구장) 공연을 담은 실황.
  68. 2000년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을 담은 실황.
  69. 2005년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맨시티 홈구장) 공연을 담은 실황.
  70. 첫 주에 무려 37만장이 팔렸다.
  71. 디지털 싱글과 DVD 한정으로 발매되었다.
  72. 해당 문서와 관련 문서에 적혀 있는 대부분의 해설들은 해외 포럼, 팬 뉴스 소식과 더불어 이 카페 내의 아카이브를 참고로 작성되었음을 밝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