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 쇼크

Oil Crisis / Oil Shock[1]

1 개요

5일 쇼크가 아니다
유류 파동, 석유 파동이라고도 한다.

산유국들의 모임인 OPEC에서 석유가격을 왕창 올려서 전 세계 경제에 압박을 가한 사건. 말 그대로 잠가라 밸브 되시겠다.

2 1973년 1차 오일 쇼크

아라비아 황제가 송유관을 번쩍 들어 내려치니 파리가 죽네 - 크라잉 넛지독한 노래 중에서.

제4차 중동전쟁이 아랍권의 패배로 끝난 이후, OPEC의 아랍권 국가인 리비아, 이라크, 이란이집트, 시리아, 튀니지가 손 잡고 석유 수출을 줄이는 동시에 원유 가격을 인상했다. 그리고 친미 국가였던 베네수엘라와 인도네시아[2], 나이지리아와 비 OPEC 국가인 소련도 이틈을 타 석유가격을 대대적으로 인상하며 1배럴[3]당 2.9달러였던 원유가는 3개월 만에 11달러에 이르렀으며, 이는 현재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14.5달러에서 55달러로 폭등한 것이었다.[4] 당장 세계 경제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이걸 산유국이 돈 벌려고 전 세계를 물 먹인 사건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 기존의 비정상적으로 낮은 유가는 다국적기업들이 해당 국가에서 헐값에 석유 채굴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측면이 크다. 해당 국가 입장에서 보자면 자원강탈. 이런 상황에서 카다피가 다국적기업을 리비아에서 밀어내고 석유를 국유화한다. 그리고 이걸 주변 국가들이 뒤를 이은 결과가 유가 폭등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유가의 현실화라고 해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다고 봐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선두에 선 무아마르 알 카다피의 입지가 크게 상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중동국가 입장에서는 국가재정이 천지차이로 뒤집어진 계기이기 때문이고,[5] 반미나 반제국주의 입장에서는 미국주도 다국적기업의 수탈을 몰아내고 그 나라의 권리를 찾아온 모범적 사례라는 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연히 카다피의 막장적 행보는 이 시기 드러날 일이 없었고, 오히려 1980년대까지 제3세계의 주요 지도자로 평가받았기 때문에 반미주의 아이콘으로 부각된 것도 있다. 애초에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마오쩌둥68운동 당시 찬양받을 정도로 정보부재이던 시대였기도 했던데에다가 당시 아프리카에 각지에서 남아공 국민당 정권이나 우간다의 이디 아민같은 막장 정권들이 집권했던 덕에 카다피 정도면 그럭저럭 양호한 지도자로 평가받는 수준이었다.

중동 국가들이야 그렇거나 말거나 기존의 저유가가 상식이던 시대의 세계 경제가 거의 막장이 된 건 당연한 일[6]. 한국은 이 때 중화학 공업을 처음 육성하던 시기[7]였기에 큰 타격이 예상되었으나, 직접 중동권에 뛰어들어 돈을 벌어오고(이른바 '오일 달러') 중공업 육성 초기인 덕에 비교적 석유 의존도가 낮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경제를 유지하였다. 물론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는 얘기지 사실 당시 한국도 물가가 크게 오르고 난리났던건 마찬가지였긴 했었고, 그 여파로 1981년 상반기까지 월요일-토요일 아침방송이 전면 중단되었다.

한편으로는 한창 경제성장 일로에 있던 일본은 한 동안 헬게이트가 열렸다. 거리의 네온사인까지 꺼버릴 정도로 긴축에 들어갔는데, 당시 신인 만화가(!)였던 모토미야 히로시의 작품에서 '북내륙(호쿠리쿠) 석유 비축기지'가 소재로 쓰이는 등 당시로서는 꽤나 대사건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오일 쇼크 이후로도 일본 제품의 대서방 수출이 계속 쾌조를 보였기 때문에 사실상 지금에 와서는 그 존재감이 묻혔다. 버블시기와 그 이후 거품붕괴가 워낙 넘사벽급으로 각인되어 있는지라 특히 특촬팬과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 일을 상당히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 1차 오일쇼크로 인하여 당시 인기의 정점을 누리고 있었던 특촬이 제작비 인상으로 작업환경이 많이 악화되고, 그로 인해 당시 수많은 특촬작품의 제작 명맥이 끊어지고 제작회사들이 망하는 결과를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3 1978~79년 2차 오일 쇼크

호메이니팔레비 왕조를 전복시킨 뒤, 이란은 하루 6백만 배럴 분량이던 석유 생산량을 2백만 배럴까지 축소했고, 유가는 20달러까지 치솟았다. 이란-이라크 전쟁 때문에 30달러선이 깨지고, 사우디아라비아가 공개적으로 석유의 무기화를 천명한 뒤 39달러까지 찍었다.

이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물가는 상승하면서 실업 등의 문제는 오히려 심각해지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났으며, 미국에서는 급작스럽게 불어난 달러를 미국 은행으로 회수하기 위해 금리를 21%(!)까지 끌어당겼다. 이 결과 미국에 잔뜩 외채를 끌어다 국내의 산업화를 진행하고 있던 멕시코[8] 대한민국, 폴란드[9] 등은 졸지에 빚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상황을 맞았고 경제가 크게 휘청거리게 된다. 그리고 이 당시의 고 이율 정책은 오일쇼크가 끝난 뒤에도 지속되어서 1980년대 중남미와 동유럽 외채위기의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항목에 나와있는 "수입은 안하고 수출만 하는 정책"과 비슷한 경제정책이 동유럽과 중남미에서 널리 펼쳐졌을때가 바로 1980년대의 일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본적인 복지지출마저도 줄이면서 국민들의 삶이 막장화 된건 덤.

특히 이 시기 한국 경제는 1차 석유 파동 당시보다 석유 의존도가 높아진 상태였기 때문에 경제의 타격이 컸다. 이 때는 한국 경제가 경제 성장률 마이너스를 기록한 몇 안 되는 시기로, 그래프를 보면 이 정도로 급격한 하락은 1997년 외환 위기 당시에나 있었다. 이것이 을씨년스러운 정치 상황과 맞물려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불만도가 높아졌고, YH 사건 등 노동 시위가 잦아졌으며 이는 최규하 정권 시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정부는 이에 대응하는 의미에서 1980년부터 석유의 비축 조치를 시행하였다.

4 결과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계기로 OPEC 아래 뭉친 중동권은 국제 무대에서 어느 정도 발언권을 얻게 되었다. 물론 서방과의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더 이상 제국주의의 유산 아래 휘둘리지 않는다는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 없는 사건이었다. 특히 이스라엘중동전쟁에서는 승리했으나 석유파동으로 역관광을 타면서 운신이 굉장히 조심스러워졌다.

흔히 舊 7공주(Seven Sisters)라고 불리는 당시 앵글로 페르시안 석유,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 뉴욕 스탠더드 오일, 로열 더치 쉘, 셰브론, 걸프오일, 텍사코 등을 위시한 다국적 기업 (IOC: International Oil Companies)들이자 지금의 슈퍼메이저의 전신인 기업들은 전세계 석유고의 85%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오일쇼크 이후의 현재의 슈퍼메이저는 고작 5% 정도를 가지고 있으며 산출량은 10%에 불과하다. 이들에게서 국유기업으로 넘어간 석유고는 현재 전세계의 88%에 달하며, 그중 가장 큰 7개 회사인 新 7공주 (사우디 아람코, NIOC (National Iranian Oil Company), INOC (Iraq National Oil Company, PDVSA (Petroleos de Venezuela), 가즈프롬, CNPC (China National Petroleum Corp.), 페트로브라스 (브라질), 페트로나스 (말레이시아) 등 National Oil Companies (NOC))는 매장량의 40%, 생산량의 1/3를 쥐고 있다. 하지만 수직독점 체계를 완성한 슈퍼메이저들인지라 국영회사들은 이들에게 매출에서 발린다. 허나 석유고를 가짐으로 나오는 영향력은 이루 말 할 수 없다고 하겠다.

한편으로 석유파동은 복지국가의 원수이자 신자유주의의 구세주이기도 하다. 사실 이 시기에는 복지국가 자체의 문제도 지적 받고 있었지만[10] 석유파동으로 기존의 필립스 곡선[11]에 기반한 이론이 큰 타격을 받으면서 낙관적 세계관에 기반을 둔 복지 국가론도 흔들리게 되었다.

5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 아래 금본위제도의 붕괴와 석유파동으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회복하고 경제적인 성장을 맛보던 유럽 내 약 25년 간 '영광의 시대'는 무너지고,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왔고 후의 원자재값 하락과 고이율과 겹치면서 중남미와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와 동유럽 국가에도 신자유주의 정책이 시행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후 세계 경제는 유동적인 자본의 흐름에 크게 의존하는 '불안정의 시대'로 접어들어, 현재까지도 유동성 위기가 하나의 화두로 제시되고 있다. 한편 오일쇼크가 끝나가자 그 동안 호황을 누리던 상당수 산유국들은 경제가 망하고 격변기를 겪었다.

이 때의 사정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1980년대 초반 이후로 이란과 이라크가 전비충당을 위해 무한 펌프질을 하고 또한 고유가에 따라 기존에 채산성이 없어보일것으로 보였던 유전의 개발도 속속 진행되어 세계 각지에서 석유개발이 활발해지자 유가가 고점을 찍고 점차 하락세를 보이게 된다. 사우디는 유가를 끌여올리기 위해 무지막지하게 감산을 하였지만 비 OPEC 국가들이 석유생산량을 늘렸기 때문에 유가는 생각보다 오르지 못했고 30달러 선대를 유지시키는 선에 머물렀다. 물론 시장 점유율에서 손해를 보게된건 덤. 그러다가 1985년 9월에 북해유전으로 어느정도 석유자급을 이뤄내면서 자신감을 얻은 마가렛 대처가 OPEC을 견제할려고 석유가격 자유화 선언을 하고, 마찬가지로 자유시장론자라 OPEC이 고까웠던 레이건 대통령도 마가렛 대처를 내심 지원해줬다.

그러자 감산으로 손해를 보면서까지 유가를 떠받치던 사우디가 그럼 어디 진짜 시장경쟁의 맛을 보라며 석유생산량을 200만 배럴에서 1000만 배럴로 급속히 늘려버렸다. 당연히 타 산유국들도 눈뜨고 당할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석유생산량을 크게 늘릴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석유생산량이 급속히 늘어나자 자연히 석유값은 대폭락해버리고 말았다. 그 여파로 영국과 미국의 석유업체도 큰 피해를 입었는데 영국의 북해유전은 심해유전이라 채굴비가 비쌌기 때문에 무지막지한 증산에 버티지 못했고, 미국의 석유업체도 가격하락에 버티지 못하며 줄줄이 도산하였다. 당연히 영국과 미국입장에선 자국의 석유업체가 줄줄이 망해가는게 좋을 리가 전혀 없기 때문에[12] 치킨게임이 장기화 되자 조지 부시 부통령이 직접나서서 가격전쟁을 끝낼려고 했고, 결국 미국은 1986년 4월에 사우디와 협의를 벌여서 가격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하고 하반기에 OPEC국가들이 감산에 합의하고 석유값이 18달러 선으로 다시 오르면서 석유값은 다시 안정화 되었다. 이때의 석유전쟁을 3차 오일쇼크로 불리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석유값 하락으로 물가상승률이 떨어지면서 경제가 살아나는 효과[13][14]가 커서 묻혔다. 뭐, 세계 각국의 석유업체와 산유국들의 경제가 급속히 부실해졌지만...

하여간 그 후에 석유값이 다시 오르기는 했지만 1981년의 고점에 비해 절반에도 못미치는 수준이었고 그 결과 재정적으로 취약했던 알제리, 멕시코, 베네수엘라, 소련은 재정수입이 크게 줄어들며 줄줄이 경제적으로 파국을 맞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전쟁으로 전비지출액이 많았던 이라크에도 발등이 떨어진 건 마찬가지라서 결국 이란과 전쟁이 무승부로 끝나고 이라크는 이를 메꿀려고 쿠웨이트를 침략하지만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참패한 다음에 경제제재까지 받으면서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다만 모든 산유국이 망테크를 탄건 아니라서 오일쇼크가 끝난 뒤에도 그 동안 쌓아놓은 게 많았던 사우디 아라비아리비아, 아랍 에미리트, 쿠웨이트등은 여전히 부유한 국가로 남아있다. 물론 리비아는 나중에 다른 이유로 망한다

또한 한, 미, 일 등 주요 국가에 에너지 관련 부서가 생기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일본 - 자원에너지청. 1973.7, 미국 - 에너지부. 1977.10, 한국 - 동력자원부. 1977.12)

이후 유가는 1991년 걸프전때 잠깐 석유값이 급등했지만 걸프전이 끝난 이후로는 다시 석유값은 배럴당 10달러대에 머물렀으며 1998년 외환위기로 석유값이 배럴당 9달러 선까지 떨어졌다가 1999년부터 석유값 하락에 다른 경제난에 지친 산유국들이 감산에 나서면서 다시 오르기 시작했고, 이라크 전쟁과 중국과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 인구대국들의 경제성장으로 인한 에너지 소비 급증으로 인해 석유값이 배럴당 100달러를 훨씬 넘어 140달러에 가까워지는 일이 있었었고 2008년 말-2009년을 제외하면 2014년 중반기까지 100달러의 고유가를 유지했지만 석유비축이라던가, 셰일오일, 대체에너지의 개발로 그 충격이 적었기 때문에 3차 오일쇼크라고 불리지는 않는다.[15]

6 2014년 이후의 역오일쇼크

2014년 후반기 이후 석유값이 급속도로 떨어지면서 산유국들을 중심으로 비상이 걸렸다. 셰일 가스를 본격적으로 채굴하면서 미국의 석유 공급이 급속도로 증가하였고, 여기에 석유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유지하려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지역 산유국들도 석유 공급을 늘리는 치킨 게임을 벌여서 유가가 급속도로 떨어졌다. 예전과 다른 건 미국이 이번엔 치킨게임에 밀리지 않았다는 것. 생산량이 딸려 유가를 맞출 수 없던 업체들은 생산 중지를 외쳤으나, 전반적으로는 엄청난 채굴 효율 증가로 인해[16] 미국도 밀리지 않고 생산량을 늘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OEPC 국가들 중 생산성이 떨어지는 국가들이 직격탄을 맞았는데, 석유 수출에 경제를 의존하던 베네수엘라, 알제리 등 개발도상 산유국들은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한 때 신흥 경제 강국을 뜻하는 '브릭스'의 축이었던 브라질과 러시아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때문에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간신히 회복세를 보이던 세계 경제는 이런 경제 위기의 연쇄 효과로 심각한 불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중동 지역의 OPEC 국가들은 꾸준히 감산을 주장해 왔고, 이로 인해 2016년 초에 들어서야 간신히 석유 생산량 동결을 위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등의 중동 지역 OPEC 가입국들은 입장을 번복하며 합의를 이행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1. 전자인 Oil Crisis, 그러니까 석유 파동이 정식 명칭이다. 영문 위키피디아의 표제어 역시 전자로 되어있다.
  2.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도 오일쇼크로 나름대로 쏠쏠하게 이득을 본 나라다. 물론 오일쇼크로 이득을 봤다 해도 여전히 개도국인건 마찬가지였지만 오일쇼크가 터지기 전에 1인당 GDP가 100달러에도 못 미쳤을 정도였는데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1981년에 600달러 선을 찍는다. 그렇지만 그전에 인도네시아가 위낙 가난한 국가였던데다가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소련도 인구는 세계 3위권이었지만 적어도 중간 이상은 갔다) 예나 지금이나 엄청난 돈지랄을 자랑하는 걸프만의 부유국들이나 이 시기에 위스키도 국가보조금으로 수입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중산층들은 여름때마다 미국으로 휴양을 갔다는 베네수엘라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 사실 이 점에 있어서는 나이지리아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3. 배럴은 야드파운드법에 의한 부피의 단위로, 한국 현실에서는 석유 단위에서나 주로 들을 만한 단위이다. 그래서 배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데, 1배럴은 158.987294928리터이다. 즉 거의 160리터가 1배럴. 정유회사들, 특히 세븐 시스터즈가 괜히 초대형 기업이 아니다.
  4. 2016년 4월 현재 기준,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의 가격은 1배럴 당 40달러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5. 카다피가 독재자로 여겨지긴 하지만 생각보다 그 당시에는 정치를 꽤나 잘했다. 윗동네 김씨왕조와 비교하면 모욕일 정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가 나빠지면서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진리만 확인 했을 뿐
  6. 물론 그와 상관없이 다국적 석유기업들이나 미국내에서도 석유생산으로 먹고살았던 지역은 나름대로 짭잘하게 이득을 보기는 했다. 잘만 생각해봐도 석유값이 올랐으니 이들업계나 지역이 그 만큼의 수익을 보는건 당연한 일이다. 그 이상으로 서구권 경제가 악화되어서 그렇지...
  7. 인터넷상에 보이는 혹자의 논지에 따르면 1차 오일쇼크로 인해 선진국의 산업구조 개편(탈중화학공업)이 추진되었으며 이를 위해 선진국과 IMF의 주도로 개발도상국의 중화학공업이 계획적으로 육성되었고 당시 박정희 정권은 그 프로그램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중화학공업 육성책도 그에 대한 연장선상에 나온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나 1차 오일쇼크는 1973년 10월에 터진 것이고 박정희정권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이 공식발표된 것은 1973년 1월이다. 실제 검토시기까지 따지면 훨씬 이른 시기부터 준비되었을 것이다. 또한 1973년 초만하더라도 당시에는 유가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중동변수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시간의 선후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 주장.
  8. 그러나 사실 멕시코는 석유가 많이 나던 국가였기 때문에 당시까지만 해도 빚이 늘어나는 상황이긴했지만 석유값이 계속 올라가다보니까 경제는 계속 성장해서 1980년대 초반에 1인당 GDP 3000달러선을 찍기도 했다. 그러나 석유값이 하락하기 시작하고, 수출이 별로 늘어나지 않으면서 빚을 도저히 갚아낼수 없는 상태가 되자 자연히 경제가 파탄났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상태가 되었다. 물론 그 대가가 어마어마해서 노동자들의 임금은 크게 깎이고 복지제도도 무력화 되었으며 빈부격차가 어마어마하게 커졌고, 투자자유화에 따라서 외부의 충격에 취약해지면서 경제위기도 주기적으로 터져나왔으며 현재까지도 빈부격차 문제나 저임금 노동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9. 잘 알려지지않았지만 공산권 붕괴에도 오일쇼크가 알게모르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60년대 동독,체코슬로바키아를 제외한 동유럽 국가에서는 경제성장률 둔화현상 극복과 수출증대를 위한 투자를 늘리기 위해 서구권으로부터 많은 빚을 끌어모았는데, 당장은 경제적으로 크게 윤택해졌지만, 문제는 갑작스럽게 오일쇼크가 터지며 수출액이 줄어듬에 따라 세수가 줄어들고 갚아야할 부채가 급증하면서 재정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긴축재정을 시행하는 상황이 왔다는 것이다. 인민들 입장에서 서구권에 비해서 자유를 누리지 못한 차에 그나마 누려왔던 복지가 축소되었는데 선거로 정권을 심판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자연스레 불만이 쌍이고 쌓이게 되면서 공산정권을 지탱하던 토대가 취약해졌고, 그나마 버텨주던 소련이 석유값 하락과 체르노빌 사태, 군비증가로 재정이 크게 줄어드는 바람에, 동구권 국가들은 물론이고 자국민들조차 먹여살리기 힘들어지게 되면서 결국 80년대 말에 공산권 자체가 붕괴되는 원인이 되었다. 다만 오일쇼크때 폴란드나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의 경제성장이 꺾이기는 했어도 소련은 오일쇼크때는 호황을 누렸기는 했다. # 아래에서도 나오겠지만 소련의 경제가 나락에 빠지기 시작했을때는 80년대 중반부터의 일이다.
  10. 복지국가의 한창 시기이던 1960년대 영국의 비틀즈는 'Taxman'에서 "나 세금 걷는 사람인데 95% 퍼가요 ~"라고 깠다. 물론 세계 정상급 밴드의 세금 체감을 일반화할 수는 없고 비틀즈가 세금 전문가도 아니지만 저런 세율이 말로라도 나온다면 대강 어떤 상황인지 짐작은 되지 않는가?
  11. 물가 상승과 실업률의 연관 관계를 설명하는 그래프. 분수함수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두 변수 모두가 값이 커지는 경우는 발생할 수 없다.
  12. 미국도 오일쇼크로 큰 피해를 봐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래스카텍사스처럼 석유로 먹고사는 지역이 꽤 있다.
  13. 1980년대 후반의 3저 호황도 플라자 합의와 함께 이때의 석유값 하락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벌어진 일이다.
  14. 다만 중남미나 동유럽의 경제를 살리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미 외채 액수가 어마어마했기때문에...
  15. 물론 공급충격이 아닌 수요충격에 의해서인 것도 있다.
  16. 채굴기당 일일 생산량이 2010년에는 70배럴이었으나, 2015년 기준으로 794배럴에 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