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신수설

영어 : Divine right of kings/Divine right
프랑스어 : Droit divin
한자 : 王權神授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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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근대 이전 왕정체제의 근거. 사실 선사시대부터 신정설에 따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한 주장들이 있었으나, 17세기 영국 스튜어트 왕가 시절 청교도들과 왕권 갈등으로 많이 알려졌다. 제임스 1세가 친히 책을 편찬하여 주장 할 정도. 그러나 유럽의 왕가들은 17세기 뿐만 아니라, 왕권신수설을 근거로 빈회의의 정통복고주의의 근거로 삼았고, 1848 혁명을 제압했으며, 프랑스에선 혁명과 보나파르트 주의에 맞서 부르봉주의자(왕당파)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사실 20세기 빌헬름 2세니콜라이 2세 조차도 왕권신수설에 심취했었다.

2 역사적 전개

동양에서는 천자(天子)라는 용어부터 절대적 존재를 대신하여 지상에서 통치를 한다는 이념이며, 역성혁명[1] 조차도 천명사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왕조 등장에 정통성 근거가 되었다.

반면 서양은 조금 다른데 4세기경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으나, 곧 로마는 4세기 후반(395년) 동서로 분할 했고, 80여년후 (476년)서로마제국은 멸망했다. 사실 서로마가 멸망하기 이전부터 로마제국 국경선은 이미 숭숭 뚫려 있어서 잡다한 민족들[2]들이 로마제국내에 또아리를 틀고 왕국을 세웠는데 이들이 현재 완전 야만인이라는 주장은 깨졌지만 로마제국보다 수준이 낮은 윤리나 법체계라서 흥망성쇠 부침이 많았다. 왕이나 부족장들은 그중에서 좀 세력이 크거나 명망이 있는 추장들을 선호해서 뽑힌것이라 죽고나면 게르만족 관습에 따라 분할상속에 따라 무리들이 흩어지거나, 후계자가 별로라서 망하거나 다른 부족으로 흡수되거나 하는 식으로 진행된것. 이민족들이 로마 경내에 거주하면서 기존 로마화된 주민들과 이민족간의 교류는 시작되었는데 이민족들이 로마화된 문명을 받아들이며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하자 교회에선 답례로 정통성을 보완하는 대관식이나 도유식 의식이 치뤄진다. 예를 들어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는 개종하자마자 기름부음[3] 으로 교회에 정통성을 인정받았는데 이 같은 전통은 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프랑스 왕국의 후대왕들은 랭스에서 대주교에게 대관식을 받아야만 정통성을 인정받는 전통이 되었다.[4] 한편 독일에서는 새 왕이 등극하면 샤를마뉴의 도시 아헨에서 쾰른 대주교에게 이런 의식을 치르는 전통과 더불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교황이나 그의 대리인에게 대관을 받아야만[5] 정통성을 인정받은것이 그 예이다. 헝가리에서도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이슈트반왕을 유래로 헝가리 왕위는 '성 이슈트반의 왕관'이며 사도왕으로 불렸으며 프랑스의 경우 루이 9세가 시성되면서[6] 프랑스 왕위는 성 루이의 왕관이 되었다.

이처럼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세속적인 보호를 필요로하던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의 타협으로 교회와 종교의 권위를 빌려 왕권의 강화의 수단이 되었지만 서유럽이 안정되고 나선 조금 다른 양상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8세기 시절부터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 '가짜 이시도르 교령집(pseudo-Isidorian)'이 출현했는데 출현당시에 조차도 알수 없는 출처와 문헌학적으로 보기에도 수준이 낮았기에 전혀 인정받지 못했으나 세속권력에 공백이 생기고 교회권력 교황권의 전성시대가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교회학자들은 두문서를 근거로 비슷한 수준의 연구 업적(?)들을 내놓으며왕의 세속 지상권(至上權) 조차도 교회의 아래에 있다고 주장하자 세속군주들은 이 문서들이 조작임을 증명하고,[7] 더불어 왕권의 고유함을 주장할 이론적 근거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른바 왕권신수설이다.
세속군주들은 학자들을 동원하여 성서에서 비롯된 성직과 세속지위의 우선순위를 반박하는데 모세-아론[8]의 경우와 구약 이스라엘 왕국시절에도 왕이 제사장 보다 높았다며 교회의 이론을 반박했고, 교회에선 다윗왕이 잘못했을땐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을 보내서 책망한것처럼 왕이 잘못 하거나, 특별한일이 있으면 여전히 교회에서 왕권을 제한 할수 있다고 맞섰다.

16세기 이후엔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교회권력은 재차 타격을 받게 된다. 이미 그 이전에 세속 왕국의 규모가 교회권력을 압도하자 교황청은 15세기 세속 스페인 왕국에 레콩키스타를 명분으로, 1516년 프랑스에 볼로냐 화약으로 세속권을 인정하며 더불어 교회 관리권과 주교 서임권과 과세권등을 거의 모두 양보하는데 종교개혁이 일어난 북유럽에선 루터주의의 영향으로 세속제후와 왕국들[9] 국가교회화 되어 세속군주가 교회의 보호자가 된것이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유럽의 가톨릭 국가도 아니요, 북유럽의 국가교회화도 아닌 다른 정체성을 가진 종교개혁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는 성공회가 그 결과인데 교리상으론 칼뱅주의의 영향을 깊게 받긴 했으나 기존 가톨릭 요소들이 전반적으로 뿌리깊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16세기부터 한세기 간 종교적 사상적 갈등이 생겨난것이다.
구체적으로 칼뱅주의의 본산 제네바는 공화국이었고[10] 칼뱅 사망후 가톨릭 교회와 세속 왕국의 종교탄압에 맞서서 이들의 정치관은 모든 권위는 성서에 두었기 때문에 주님의 법(성서)을 어긴왕은 폭군이며 왕이 폭군이면 하위통치자가 퇴출시켜야 한다로 변모했기 때문이다.[11] 이를 이어받은 장로회가 국교가된 스코틀랜드는 왕 1인 권력이 아니라 여러 유력 클랜들의 권력이 분산 되었고, 교회마저도 장로들이 주도하여 운영했기 때문에 비록 스코틀랜드 출신 제임스 1세였지만 잉글랜드 교회의 주교 계서제와 중앙집권적 조직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제임스 1세는 오히려 자신의 고향인 스코틀랜드까지 잉글랜드와 합쳐 중앙집권적 조직을 만들기 위해 약간 구닥다리 냄새나는 왕권신수설을 재주창 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칼뱅주의에 물든 잉글랜드 법학자들과 충돌을 일으킨다. 이들은 왕권은 주님의 법(성경) 아래 있다며 왕에 맞섰기 때문. 이에 대해 제임스 1세,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왕권은 주님이 하사하신것으로 세속 지상권은 국왕에게 있으며, 왕의 행동은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책임을 진다. 따라서 왕은 신민들에게 잘못을 범할수 없다. 라 주장했다. 이같은 논리는 이미 16세기부터 학식과 재력으로 성장한 젠트리 계층에게 큰 위협으로 여겨졌다. 법없이 자의적인 통치로 생명과 재산을 마음대로 쓰겠다는 왕의 선언에 스튜어트 왕조시절 극심한 충돌을 겪게 되었으며 결국 이들의 주장은 충돌을 빚게 되어 청교도 혁명으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다만 이와 상반되는 해석도 동시대에 공존하였다. 초대교회에서는 세속의 통치권에 대해 서로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었다. 신의 나라야말로 진정한 나라, 진정 옳은 권력이므로 세속의 모든 권력을 부정하는 입장. 로마 기록 중에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이 법정에서 이런 신념을 피력했다는 구절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세속권력이 근본적으로 악하지는 않다는 포용적 입장이다. 신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를 구분해서, 인간세계의 권력을 인정함이 신의 참된 주권을 침해하거나 부정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권세는 신이 어떤 식으로든 인정한 것이므로 역시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계속 박해받던 그리스도교가 반국가적인 종교로 낙인 찍히는 것을 막으려는 몸부림의 일환이다. 실제 초대교회 호교론의 상당수는 "우리는 종교적인 면에서만 로마 제국의 방침을 따르지 않을 뿐, 다른 점에서는 로마의 선량한 신민들로서 모범적으로 삽니다"라는 식이다.



절대군주권의 지지자였던 토마스 홉스도 이 주장을 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홉스가 생각한 절대군주권의 근본은 신이 아니라 민중이였다. 뭔 말인고 하니 인간이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행위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전개하게 되면 도리어 자기 욕구를 더 보장받을 수 없기에 이를 조율하기 위한 기본 윤리와 실정법이 요구되며 이러한 법을 행사하고 수호하기위한 절대 권력, 즉 국가를 찾게 되고, 모여서 국가를 형성해서 그 국가를 다스릴 군주에게 자신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대가로 군주에게 복종하는 계약을 맺는다는 것. 그러므로 왕권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계약에 의해서 발생하는 권력이라는 것이며 군주가 인민을 보호하지 못할 경우 인민은 군주를 바꿔도 된다고 주장했다. 즉 홉스가 생각하는 군주권은 왕권신수설과 달리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더 간략하게 보여주는 존재로 홉스이 저서 리바이어던 표지에 홉스의 사상을 그림으로 묘사한 것이 있는데 엄청난 양의 사람들로 왕의 형상이 만들어 져 있다.]] 즉 왕과 나라를 성립시켜주는 근본 존재를 대다수 민중으로 본 것이다. 괜히 홉스의 주장이 로크[12]와 루소의 사회계약사상으로 발전한 게 아니다. 단 홉스 생전에는 이 왕권민수설은 씹히고 그저 왕권신수설로 취급받는다.

3 여담

왕권신수설의 영향은 왕실의 의식이나 예법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왕은 반대로 신민들에게 있어서 신과 같은 위엄과 자비를 보이는 것이 권장되기도 했다. 한편, 이를 강조하기 위해 왕실에서는 하층민들에게 왕이 병든 부랑자를 어루만지니 병이 나았다는 등의 설화를 은근슬쩍 퍼뜨리기도 했는데, 당대에는 비웃음을 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혁명 시기에 루이 16세가 처형될 때, 그의 '성혈'을 마시려고 빈민들이 기요틴 아래로 몰려들었다는 일화도 있다. (다만 이것은 꼭 왕권신수설과의 연관성말고 당시 시대의 상황일 수도 있다. 사형론에 대한 책을 대학교 도서관에서 읽은 한 위키러에 의견에 의하면 중세 당시에는 대중들 앞에서 사형을 집행할 시 망나니 칼에 목이 잘린 참수형자들의 목에서 나오는 피를 수건에 적셔 마시거나 하는 등의 행위들을 모인 군중들이 하고 그랬었는데 이는 병을 치료하거나 하는 주술적 의미를 당시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사형과 관련한 서적을 보면된다)마지막까지 병자를 치료하는 구세주 흉내를 냈던 것은 샤를 10세였다.

참고로 이와 비슷하게 신의 위엄을 빌리는 왕권강화 이론은 전세계에 흔히 보인다. 동양에서는 하늘의 아들인 '천자'나 '천황'으로 아예 신적인 위치에 올라있다. 한반도에서는 유교가 왕 중심의 이론으로 왕권을 뒷받침해 주었다.

바로 이걸 타파하면서 근대 대의민주주의 국가가 등장했고, 형법의 In Dubio Pro Reo라는 원칙이 생겨났다.

동아시아에서도 비슷한 개념은 있었다. 애초에 천자, 천조라는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왕권이 어느정도 종교적으로 정당화가 되어있다. 오히려 너무나 당연한 사상이기에 '왕권신수설'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일 필요도 못 느꼈을 정도이다. 맹자가 왕의 권한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는 주장을 했기에 어떻게 보면 왕권신수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으나, 맹자가 말하는 하늘(天)은 곧 백성(民)이다. 애초에 서양의 인격신 개념과 동양의 천(天)개념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무리가 있다. 즉 서양의 왕권신수설이 군주의 권한은 신으로 부여받고, 따라서 인민은 그에 대해 절대복종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였다면, 맹자의 사상은 왕의 권한은 하늘, 곧 백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백성은 인민의 저항을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앞서 말했듯이 맹자의 사상에 따르면 '천심'은 곧 '민심'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지지하지 않는 왕=하늘이 버린 왕=왕이 아니다'라는 등식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맹자에 의하면, 왕의 권한은 백성이 주는 것이기에 왕이 삽질하면 왕을 갈아치울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맹자의 사상을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이 <양혜왕 하편> 제8장이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며, 잔적지인(殘賊之人)을 단지 "그놈!"이라고들 하니, 저는 "무왕께서 그 '주'라는 놈을 처형하셨다"라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하였다"라는 말은 들어 본 바 없습니다."

이처럼 맹자의 민본사상은 왕권신수설보다는 오히려 근대 사회계약론과 유사한 측면이 있고, 또한 역성혁명은 로크의 저항권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문제는 맹자의 사상이 생각보다 동아시아에서 마이너했다는 것이다. 훗날 주희에 의해서 맹자가 다시 주목받기는 했으나, 재해석이 너무 심해서 맹자의 본래 주장과는 좀 멀어졌다. 그래도 맹자가 주장하는 민본(民本)은 유학자들에게 중요한 지침 중 하나였다. 물론 그것이 현실 정치에서 이루어졌는가는 다른 문제겠지만.

비슷한 것으로 교권은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기 때문에(예:"신성한 교실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야!") 학생은 교사에게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교권신수설이 있다(…). (by 학교대사전)
  1. 혁명 어원 자체가 가죽띠에 천명을 밝혀
  2. 당시 게르만이라 한것은 잡다한 민족들을 지칭한것이지 현재 독일이나 게르만민족 타령과는 노상관이다. 고트족 , 수에비족, 반달족, 랑고바르드족, 프랑크족 등등
  3. 구약시대 선지자, 사사(판관), 왕에게 하나님이 선택한 자임을 알리기위해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
  4. 잔다르크가 랭스 대관식을 못치러서 왕으로 인정 못받는 샤를 7세를 위해 싸운게 유명
  5. 15세기 막시밀리안 1세 이후 교황 대관은 불필요 해졌다. 교황동의 없이 선출된 로마 황제로 칭함
  6. 그다지 성인이 될 급은 아닌데 교황청에서 막나가는 필리프 4세를 달래려고 조상을 시성했다. 하지만 필리프 4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 드 노가레를 파견하여 교황청에 처들어가 교황 보나파시우스 8세를 납치 폭행하고 끌고가려다 여론에 막혀 포기한다
  7. 두 조작문서들은 14세기 인문주의 학자들에게 더 이상 거론 가치가 없는 조작으로 밝혀진지 오래였으나 교황청에서 마지못해 조작인걸 인정한것은 수백년 후 이다.
  8.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대제사장 아론의 동생이나 아론이 동생에 대들자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동생에게 사죄한다
  9. 신성로마제국 내 신교도 제후 지역과, 북유럽 국가들. 덴마크와 스웨덴은 각각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와 핀란드 에스토니아 쿠를란트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이지역 모두 루터주의로 개종한다
  10. 스위스 제네바 지역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 내 제국도시들 거의 대부분이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세속군주가 아니라 일정 학식 재산 경력을 갖춘 원로들이 시 참사회를 기반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시기 대부분 신교로 전향한다
  11. 칼뱅은 세속권력이 핍박할 경우 "우리가 칼을 휘둘러 복음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우리가 피를 흘리고 말자" 며 세속권력에 복종할것을 주장했으나 칼뱅사후 위그노들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이후 폭군 퇴출론으로 훗대 칼뱅주의자들은 입장을 바꾼다
  12. 홉스는 목사의 아들이었으나 기독교에 회의적인 반면 로크는 청교도 가문에서 청교도식 교육을 받아 독실한 개신교 신앙인이었다